명(明) 건국 <주원장> 금오산 숭산 고려출신.
명(明)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1368년~1398년 제위)은
고려 숭산(崇山) 출생이고 그 황후(皇后) 한씨는 고려인 '한영정(韓永정)'의 딸이다.
한 황후는 명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이다.
또한 한 황후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제5대 선덕제의 황후가 되었으니
'한확(세조 때 문신)'은 두명의 누이동생이 명나라 황후가 된 샘이다.
주원장이 고려사람이라는 사실은 또 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미 고려 여인 석비(碩妃)가 있었는데
명 태조가 된 후에 석비는 명나라 함산공주(含山公主)의 어머니가 된다.
<주원장 출생 설화에 대하여>
경상도 금오산 숭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설화(說話)에 의하면,
"금오산(金烏山)은 금가마귀 삼족오(參足烏)가 살고 있는 태양산으로서
고려대는 대본산(大本山) 이라 불렀었다.
산의 남쪽 인동방향 산세가 정자관을 쓴 형상이라 관봉(冠峯)이라 부르는데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이곳은 '동방의 길지(東邦吉地)' 이니 앞으로 3명의 의인이 태어난다.
의인 중 한사람이 명나라를 건국한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고,
주원장은 금오산 숭산마을의 가난한 주씨(朱氏)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5살에 스님을 따라 청송 주왕산 어느 절로 가서 탁발승이 되었고,
어려서 부터 민첩하고 영특한 주원장은 15살에 속세로 나왔고 전국을 방황하다가
17세에 산적에게 잡혀 노예로 원나라에 팔려갔다.
원나라에 팔려간 주원장은 홍건적의 졸개가 되었고,
함께 노예로 끌려간 고려 동무들과 목숨을 걸고 용맹하게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주원장은 홍건적 두목의 사위가 되었다.
그 후 주원장은 반란군의 제 2인자가 되었고,
드디어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워 명태조가 되었다."
이상은 경상도 금오산 숭산 마을 촌노(村老)들에게서 전해오는 전래설화이다.
지금도 이곳 촌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 숭산 금오산 자락에는
고려왕자 대각국사 의천이 기거하던 선봉사와 고려귀족마을이 있던 동방길지로서,
금오산 남쪽자락에서 출생할 3명의 의인은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을 첫번쩨 의인으로 알고,
한국의 5,000년 가난을 물리쳐 부국으로 만든 박정희 대통령이 두번쩨 의인으로 알며,
앞으로 3번쩨 의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제위1368~1398) 영정.
얼마 전 한,중 사학자들 사이에 '주원장의 출생'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상당수의 한,중학자들이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의 역사학자 '백린'은 [조선기문]에 기록된 설화를 근거로 들었다.
[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이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 민간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역사학자 '오함'이 쓴 주원장의 전기 [주원장전]을 들어
주원장의 고려인설은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주원장전]에서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봉양현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에서 탁발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설화를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오함의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에 만들어 젔기 때문이다.
이 두 책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은,
주원장의 출생과 매우 가난한 어린시절,
주원장이 5살에 절에 들어갔다는 점,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떠돌아다닌 시기가 15세~17세가 거이 일치한다.
주원장이 명태조가 된 그 후까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다.
주원장의 여인들은 물론 환궁의 환관들과 궁여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려인으로 체워졌다.
그의 심복인 '추유'까지도 고려인으로서 각별히 신임했다.
그 때문에 주원장은 한족(漢族)의 미움을 삿고
주원장은 한족대신들을 거의 다 죽이고 정치, 군사, 경제를 친정하기도 했다.
또한 주원장의 아들 제3대 명황제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 한(韓) 여비(麗妃)로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러한 주원장의 부인들에 대해서 중국의 사학자들은
고려의 공녀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나라 건국이 1368년이니 3대 명황제 영락제(永樂帝;1360년생)는
이미 명나라가 개국되기 8년 전에 태어났으며,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 토벌에 2천여 고려군(이성계의 려,원 연합군)을 파병한 상황,
어떻게 반란 홍건적 두목인 주원장에게 고려여인을 공녀를 보냈겠는가?
더구나 영락제가 출생한 1360년은
장사성(張士誠), 진우양(陳友諒)의 황건적 거대세력이 있었는 때다.
당시 주원장은 별로 드러 나지도 않던 조그만 무리가
고려조정이 공녀를 조공 받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락제는 후에 티벳과 베트남과 남만주 등,
명나라 최대의 영토를 넓히고,
환관 정화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아프리카 까지 정복하여
중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이기도 하다.
명나라 개국시기 주원장은 한족환관들을 믿지 않었다.
주변에 많은 고려인들을 측근으로 두는 바람에
한족들이 조롱과 비웃음을 보내자,
한족 대신들과 수많은 한족을 학살하였다.
그래서 주원장을 역대 황제들 중에 가장 포악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고려를 뒤집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에게
많은 환관들을 보낼 것을 요청해서 명나라 궁궐을 조선인들로 채웠다.
[참고] 명(明) (1368건국-1644멸망)
제1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1368-1398)
제2대 건문제 주윤문 (1398-1402)
제3대 성조 영락제 주체 (1402-1424)
제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 (1424-1425)
제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 (1425-1435)
제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 (1435-1449)
제7대 경태제 주기옥 (1449-1456)
제8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 (1457-1464)
제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1464-1487)
제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1487-1505)
제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1505-1521)
제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1521-1566)
제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1566-1572)
제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1572-1620)
제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1620)
제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1620-1627)
제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1627-1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