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보감 11.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 / 대각 회연선사
◈ 인천보감 11.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 / 대각 회연 (大覺 懷璉) 선사
원통사 (圓通寺) 의 거눌 (居訥:1010∼1071, 운문종) 선사는
신주 ( 州)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
엄격하고 대중에게는 법도있게 대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선정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 (仁宗) 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 (淨因寺) 에 주지하도록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연 (懷璉:1009∼1090, 운문종) 선사를 추천하였다.
인종이 회연스님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 (大覺禪師) 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영종 (英宗) 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연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소동파 (蘇東坡) 가 신규각 (宸奎閣) 의 비문을 짓게 되어
회연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신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으나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요 (參寥:?∼1106, 운문종) 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실 때 왕 〔英宗〕 께서
전국 어느 절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직접 내리셨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다면 전문 (全文) 을 써 보내주십시오.
비문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다."
회연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입적하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
소동파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직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님께서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제도했으나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다.
황제가 용뇌목 (龍腦木) 으로 만든 발우를 하사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사자 앞에서 태워버리고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먹물옷 입고 질그릇 발우로
밥을 먹게 되어 있으니, 이 발우는 법답지 않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황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스님께서는 집과 옷과 그 밖의 물건들로 보물방을
차릴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 밖 서쪽에 백 명쯤 살 수 있는
작은 절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참나를 찾아서 참되게 살아가라.
나무아미타불()()()***
***화엄동산에서 보현행 합장***
화엄동산 원오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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