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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오형민
진짜 부자란 바로 유일한 선생같은 분이다.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회공동체의 소유로 생각하고
인간사랑.사회공동체우선지향.국가사랑의 마음과 사고를 그대로
전 생애에 투여한 유일한 선생은 기업인.부자.애국자의 표범이다.
진짜 부자들은 티를 내지 않고 보이지 않게
사회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사용한다.
유일한 분들같은 부자들과 기업인들만 많으면
부유세같은 것이 굳이 필요하겠는가?
사회공동체 지향의 사고와 마음보다는
소수부유층과 기업인들의 이기적인 소유욕.독점욕이
현재의 한국를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돈에 환장한 부자들아!"
"그 돈 죽으면 못 가져간다!"
"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살아 있을때 사회공동체를 위해 살아 보아야 한다!"
"그래야 죽어서라도 당신의 이름과 돈이 빛이 발하는 것이다!"
[약력과 상훈]
1895년 1월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
1904년 대한제국의 순회 공사인 박장연을 따라 도미
1919년 미국 미시간대학교 상과 졸업
1922년 라초이 식품회사 설립
1925년 중국계 소아과 의사 호미리(胡美利) 여사와 결혼
1926년 12월10일 귀국하여 유한양행 창설
1936년 법인체 주식회사로 변경
1941년 미국 남가주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
1942년 미국에서 항일 무장 독립군 맹호군 창설 주역으로 활동
1945년 미국OSS지하 항일계획인 냅코작전 특수 공작원으로 활동
1946년 귀국하여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
194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국제법 수학(박사과정)
1962년 유한양행 주식 상장
1963년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공익포장 수여
1964년 국무총리로부터 우량상공인 표창
[생애]
유일한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나 9살
어린 몸으로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켜 성공하였습니다.
유 박사는 당시 일본의 압제하에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 1926년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립하였습니다.
1936년에는 부천시 심곡동 일대에
국내최초의 근대적 제약공장을 준공하여 제약입국의 의지를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박사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맹호군 창설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나라의 근대화에 필수적인 기술 인력의 양성을 위해
사재를 헌납하여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 우수한 인재를 배출시키고
오늘의 유한대학으로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초석을 놓았습니다.
박사는 1971년 76세를 일기로 영면하면서 그의 재산 전부를 공익법인에
기증하는 등 평생을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정신을 몸소 실천한 참 기업인이었습니다.
[정신]
유일한 박사는 금세기를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상(紳商)으로 존경받았고,
지금도 추앙받고 있는 애국적 민족기업인이었습니다. 유 박사는 어린 몸으로 혼자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까지 나왔고,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켜 성공적으로 이를 이끌어왔으며,
선배들을 도와 독립운동에도 가담한 굳은 의지의 청년이었습니다.
유 박사는 31세 되던 해 고국에 돌아와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일본인들이 득세하고 있던 제약업계에서 그들과 대항하면서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는 근면ㆍ성실,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평생을 일에만 몰두했고, 서거시에는 그의 기업ㆍ사재까지도 사회에 환원하고 간 현대 자본주의의 참정신을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로 신상이었습니다.
유 박사의 기업이념은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ㆍ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ㆍ배출하며, 기업이익은 첫째는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그리고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는 것입니다.
[국가관 ]
1930년대 조회 때마다 전 사원에게 강조된 유한양행의 기업정신이며,
실질적으로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모체가 된 '유한양행의 정신'을 보면
1. 항상 국민보건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2.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보다 못하지 않다.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3. 유한은 결코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해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기반이 된 사상이고,
유 박사 기업이념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관]
유 박사의 사회관을 그의 어록을 통해 살펴보면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이다."
"양질 × 염가의 제품 생산, 이것은 기업성취의 ABC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위의 유 박사의 말들에서 그가 생각했던 기업과 사회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기업의 소유주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며 개인은 그것을 단지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그의 생각은, 그의 사회관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단면일 것입니다.
사유재산제도 아래 유 박사는, 일제시대에
이미 개인 소유 회사에서 주식회사로 개편함으로써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자신의 이념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936년 유한양행은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였는데, 주식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공로주로 당시 액면가의 10% 정도 가격으로 분배하였습니다.
[기업관]
유 박사의 기업관을 한마디로 한다면, 그의 어록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그 구성원의 <공동운명체>라는 것입니다.
즉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라는
상호유기적 결합체로서의 기업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가지면 성실, 건강한 이윤관,
기업은 사회의 소유라는 의식, 경영자와 종업원에 대한 각별한 의식들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나라,
특히 한국에서 기업은 거의 소유주 개인이 소유권을 행사하고
이를 자기 후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 박사는 그의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에서 그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1971년 3월11일 서거한 이후 다음 달인 4월8일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자신의 손녀를 위한 학자금으로 자기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당시 환율로 3백만원에 해당하는
1만달러를 마련하고, 딸에게는 유한중 × 공고 내의 묘소 및 주면 대지 5천평을 상속하되 '유한동산'으로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게 해 줄 것과, 자신의 소유 주식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록]
국가
국가(國家), 교육(敎育), 기업(企業), 가정(家庭)
이 모든 것은 순위를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명제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바로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위가 된다.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나라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
인간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이상적인 인간형성을 위해 근면, 성실, 책임감은 바람직한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급하지 않은 성격까지를 구비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나의 인간은 체구를 가지게 되며 그 몸에는 귀, 눈, 코, 입 등의 여러 기관이 부수되어 있다.
그 중 하나의 기관만 없어도 완전한 인간일 수는 없다. 사회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러 사람이 각기 사회를 위해서 유익한 기관의 구실을 다할 때 비로소 그 사회는 완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색하고 관찰하는 습관은 인간의 지적 성장을 위한 촉진제이다.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기업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연마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되는 것이다.
기업의 제 1목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한 기업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 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
[저서]
관련 서적
저서 ; 한국에서의 나의 소년시절(When I was boy in Korea, 1928년), 한국과 태평양 전쟁(1948년)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 - 유일한 ; 1995년 1월15일 발행, 유일한 전기 편집위원회, 발행처 유한양행, 인쇄처 동아출판사
유일한 연구 ; 1994년 12월30일 발행, 유일한 연구 편집위원회, 발행처 경영사학회, 인쇄처 신원인쇄사
유일한의 독립운동연구 ; 1995년 4월20일 발행, 저자 이현희, 발행소 동방도서
청지기 유일한의 삶의 좌표 - 버드나무길 ; 1992년 7월5일 발행, 저자 이종한, 펴낸곳 도서출판 태성
빈손으로 떠난 위대한 기업가 - 유일한 이야기 ; 1992년 11월10일 발행, 저자 조영권, 웅진 어린이 책마을, 웅진출판
정직과 신용의 기업인 - 유일한 ; 1996년 8월15일 발행,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 中 19권, 웅진출판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 - 유일한 ; 1998년 5월2일 발행,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 한국편 中 63권, 대산출판사
[유한재단 설립배경]
설립배경
설립자 유일한 박사는 평생을 바쳐온 교육장학사업 및 사회원조사업을 보다 항구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되겠다는 결심하에 1970년 개인주식 8만3천여주를 기탁하여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발족시켰으며, 이듬해 사후 유언장 공개를 통해 전재산을 이 기금에 출연하였습니다.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은 1977년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규정에 따라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소유주식 일부를 유한학원과 분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일제치하에서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창립하여 제약산업을 통한 '건강입국'의 의지를 다졌으며, '건전한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기업이윤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되돌려야 한다'는 기업이념으로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선도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설립자는 이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육, 장학사업에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였으며, 이에 개인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에게 수시로 장학금을 주었던 것은 물론, 해외유학생에게 여비를 부담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설립자의 정신은 대를 이어, 지난 1991년 유일한 박사의 외동딸 유재라 여사도 생전에 틈틈이 모은 전재산(시가 200억원 상당)을 한톨도 남김없이 유한재단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인 유재라 여사도 자본주의 윤리에 철저했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 평생 온힘을 쏟았으며, 세상을 떠나며 완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