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언저리 기행-덕봉마을과 운수암
1.비구름이 밀려온 때의 행동방식
토요일 비전성당 아이들의 섶길답사 두 번째 프로그램이 있었다. 본래의 계획은 현덕면 비단길을 답사하기로 했는데 일기예보에서 폭우가 쏟아진다고 했다. 급히 수정하여 강의로 대체하였다.
토요일 아침 서둘러 강의준비를 하였다. 어제 가족모임에서 마신 술기운은 아침까지 몸과 정신을 괴롭힌다. 아침 10시 넘어 장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직접 모시러 온다고 했다. ‘모신다’는 말이 생소하고 어색했지만 ‘강사’를 잘 모시겠다는 뜻으로 여겨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전성당 지하 강의실에 모인 아이들은 저번과 많이 달랐다. 상당수를 차지하였던 초등학생들은 대부분 빠져나갔고, 저번에 생태체험활동을 나갔던 아이들 중에 버스에 자리가 없어 밀려난 아이들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국장은 오늘 현장답사는 취소되었다고 하였다. 언제 어느 구석에서 소나기가 쏟아질지 모르는 마당에 답사를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강의는 평택지역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섶길에 관한 것으로 준비하였다. 나름 열심히 이야기를 하였지만, 관심 없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가 얼마나 힘든지 새삼 느끼겠다.
2.양성이 ‘문화 선진지역’이라고?
강의를 끝내고 조개터에서 메밀 소바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상을 물린 뒤 이상권 선생님이 안성답사를 제안하였다. 양성면 덕봉마을을 거쳐 운수암을 다녀오자는 제안이었다. 문화선진지역을 답사해야 우리지역이 객관적으로 보인다는 주장에 우리는 선뜻 동의하였다.
사무실 일 때문에 마음이 바빴던 장국장만 떼어 놓고 이상권선생님, 조정묵 대표와 함께 길을 나섰다. 차에 탑승할 때부터 한 무더기 밀려오던 먹구름은 소사벌레포츠공원을 지날 때쯤 굵은 빗방울을 떨어뜨리더니 급기야 평택안성IC를 지날 때부터는 폭우로 돌변한다.
덕봉마을은 해주 오씨 정무공파 의 6백 년 동족마을이다. 그래서 마을 안에는 덕봉서원, 오정방 고택, 경앙사, 해주 오씨 재실, 해주 오씨 묘역과 같은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다. 해주 오씨의 상징적 인물은 숙종 때 인물 오두인과 철종, 고종 때의 학자였던 오희주다. 오두인은 노론의 학맥으로 벼슬이 판서에 올랐지만 장희빈 사사문제를 반대하다가 유배 도중 사망하였다. 마을 입구 서원말의 덕봉서원은 오두인을 모신 서원이다. 오희주는 조선말의 대학자였던 간재 전우의 스승으로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뤘다. 사후 경앙사에 위패가 모셔졌지만 학문적 조명은 크게 받지 못해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2010년에 완공한 해주 오씨 재실은 규모 면에서 상당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재실도 규모가 있었지만, 사무실로 사용하는 숭문각과 덕파루, 부속식당의 규모도 여느 재실과는 격이 달랐다. 문중 총무님 말로는 건축을 할 때도 전국의 유명한 대목들의 브리핑과 자문을 구했으며, 기둥이나 보,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골이 살아 있는 기와지붕과 30도로 각을 이루고 올라간 추녀, 적당한 곡선의 처마가 요즘 건축되는 한옥과는 차원이 다른 기품을 보여주고 있었다.
총무님의 권유로 덕파루에 올라 커피를 대접받았다. 덕뫼의 3부 능선쯤에 자리한 덕파루는 마을의 경관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였다. 조선시대라면 해주 오씨와 교유하는 선비들이 올라 시문을 읆고 차와 술잔을 나눴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재능이 없었다.
근래에는 자본의 논리에 밀려 많은 전통마을이 전통을 상실하고 있다. 하지만 덕봉마을에는 어지간해서는 쉬 변하지 않을 견고한 장치들이 있었다. 견고한 장치 가운데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문중재산이었다. 현재까지도 덕봉마을과 인근의 야산 대부분은 문중재산이다. 해주 오씨 문중인들은 가문을 지키고 마을을 전통을 보전하기 위해 사사로운 목적으로는 매각하지 않기로 하는 문중규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국가적 사업으로 부득이하게 매각되는 재산을 제외하고는 재산매각이 불허되고 있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마을이 훼손될 우려가 없다고 했다.
3.대원군의 자취가 서린 운수암
한순간 내리 부어대던 폭우가 번쩍 개였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운수암에 올랐다. 운수암 아래 성하마을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외지인들의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나는 20여 년 전의 운수암을 사랑했다. 칠곡리 독정저수지 근처에서 고성산을 오르면 맨 처음 무한성이 맞아주었고, 성벽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운수암이 나왔다. 당시 운수암은 맑고 시원한 샘물과 전국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화장실로 각광을 받았다. 화장실 입구 느티나무에 앉아 내려다보는 풍광은 얼마나 시원했던지.
운수암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요사를 지나 비로전에 올랐다. 사실 수 십 번에 걸쳐 운수암에을 찾았지만 주불전인 대웅전을 기웃거려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동행한 이상권 선생님도 마찬가지여서 비로전 앞에서만 연신 기웃거렸다. 운수암 비로전의 ‘비로자나불 좌상’은 심복사의 것과 무척 닮았다. 비로자나불이 유행하던 신라 하대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한 시대를 풍미할 대표적 작품을 추종하는 세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으로 대웅전 본존을 견식하였다.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었고 좌우에는 천수관음과 보현보살을 모셨다. 자비의 상징인 관음은 민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살인데, 민중의 소망을 이뤄주는 천수관음으로 조성했으니 다양한 소원을 갖고 절을 찾은 중생들이 무척 좋아하겠다.
대웅전 아래에서 같은 동네 사는 찬이 엄마를 만났다. 찬이 엄마는 운수암 신도라고 했다. 덕분에 요사 앞에서 또 다시 커피를 대접받았다. 커피를 마시며 일행은 요사 앞에 걸려 있는 현판을 자세히 관찰했다. 필체로 봐서는 추사에게 글씨를 배웠다는 대원군의 것이 분명한데 저간의 사정으로 볼 때는 관련성이 납득이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현판의 낙관은 대원군의 것이 분명했다.
운수암을 답사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전통은 어떻게 계승되고 변용해야 하는지, 물신주의로 기우는 현대 불교신앙의 문제점도 아울러 걱정했다. 아, 우리는 언제쯤 종교를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종교의 위로를 받고 살아갈까! (2012.8.25)
첫댓글 이날 했던 답사 사진과 오전의 비전성당 학생동아리 교육 사진두 올려주시요
주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