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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의·식·주생활
○ 제1절 의생활
○ 제2절 식생활
○ 제3절 주생활
○ 제4절 취락구조: 삼포의 마을생활과 그 구조를 중심으로
▣ 제1절 의생활(衣生活)
○ 1. 머리말
○ 2. 연구지역 및 제보자분석
○ 3. 의생활
○ 4. 과천 막계동 출토 16세기 유의
○ 5. 맺는말
▣ 1. 머리말
본 연구는 현재 행정구역상 과천시로 되어 있는 지역의 의생활(衣生活) 분야에 대한 것으로 이 글의 자료는 1993년 4∼5월에 걸쳐 민속학적 조사방법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조사 대상자는 현재 과천에 살고 있는 고령층의 토박이 여자 노인들이며, 이들은 주로 같은 생활권내인 과천 근교에서 출생하고 성장하거나 비슷한 연고가 있는 22명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되도록이면 본 지역의 특색을 찾아내고자 거주지를 옮기지 않은 토박이들의 자연마을 거주자를 중심으로 조사대상으로 하려고 노력하였다.
본 연구의 시대적 배경은 자료제보자들이 어렸을 때에 목격했던 어른들의 생활상 및 그들에게서 전해듣고 익힌 것들과 출가 후에 자신이 생활한 경험담을 토대로 한 것으로써 주로 1900년대부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쳐 1950년대까지의 의생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매우 혼란하고 복잡한 때로 국내의 정세 및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우리의 고유 전통 생활풍속과 의식이 말살되어 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시기는 의생활에서 고유의 한복(韓服) 생활 영역이 점차 쇠퇴하는 시기였으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는 신식 학교교육과 기계화한 의료(衣料) 생산의 발달에 의해 급속한 변화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변화의 양상은 노년층과 젊은층, 도시와 농촌에서 다르게 나타나며 특히 관직생활자라든가 남보다 앞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종교인이나 학생 등에서 일상생활복과 외출복 또는 의례복이 이중화(二重化)하였고, 서양형태와 고유전통복 형태가 공존(共存)하는 복잡한 성격이 나타난다.
본 의생활 형태의 조사범위는 의생활면에서도 가장 그 특징을 두드러지게 관찰할 수 있는 의례(儀禮) 치레 부분인 출생과 혼례·수의(壽衣)·상복(喪服)을 다루었고, 일상생활복으로는 아이들과 젊은이, 성인 및 노인들의 일반복식을 다루었다. 그 외에 농사짓는 농부들의 차림인 노동복과, 옷을 제작 관리하는 길쌈·세탁·바느질·염색 분야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본 연구에 임함에 있어 참조할 만한 문헌자료가 없고 실물자료도 구할 수가 없어서 노인들의 구전(口傳) 외에 약간의 사진자료만을 참조로 하였다.
또한 본 연구내용은 제보자 22명으로부터 수집되어진 순수한 과천 토박이의 구전자료와 사진자료에서 공통 요소를 추출해 내고, 특히 특수한 상황이나 개별적으로 행한 일인 경우에는 제보자의 이름과 함께 나이와 출신지명을 밝혔으며, 그들이 말하고 사용한 고유 언어를 되도록 살려 기술하였다.
▣ 2. 연구지역 및 제보자분석
자료제보자 22명의 현재 거주지역은 갈현동 7명, 문원동 6명, 주암동 5명, 과천동 4명이다.
【도표】제보자 인적사항
이들은 모두 자급자족 형태의 1차 생업수단인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살았으며 지금도 종사하는 이가 있다.
제보자의 연령층(아래의 표 참조)은 출생연대로는 1900∼1910년대가 가장 많고, 현재 연령은 70∼80대가 가장 많다. 혼인연령은 15∼18세 사이에 고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혼인연대는 1920∼30년대가 가장 많다.
【도표】자료 제보자 22명의 연령층
통혼범위는 과천관내가 8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내가 5명, 서울권이 6명, 인천권이 2명, 충주권이 1명이다. 경기나 서울·인천 지역도 모두 과천 인근지역들로 당일 도보거리이며, 충주출신 1명은 어려서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현지로 혼인하여 왔다.
당시 과천에서는 농사짓는 일 외에도 농한기에는 나무나 산나물 그리고 채소장사로 흑석동이나 용산 및 문안(남대문을 말함)·마포까지 걸어 다녔으며, 양잿물을 사러 용산까지 자배기를 이고 다녔다. 또 인분을 퇴비로 쓰기 위하여 달구지로 문안까지 가서 수거해 오기도 하였다.
▣ 3. 의생활(衣生活)
○ 1) 의례치레
○ 2) 아이들 차림
○ 3) 젊은이 차림
○ 4) 어른 및 노인 차림
○ 5) 농부노동복
○ 6) 기타
▣ (1) 출생의례
① 출생직후
아기들은 ‘태(胎)’처리를 마치면 대부분은 목욕시키지 않은 채 싸 두었다. 싸는 포대기는 새 것을 따로 마련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헌 옷으로 싸는데 주로 아버지의 바지 안감을 뜯어 이용하였으며, 그 외에도 아버지의 저고리 안감이나 치마로도 쌌다.
② 출생 후 3일과 배냇저고리
출생후 3일이 되면 흰밥과 미역국을 끓여 삼신상을 차리고, 아기는 첫 목욕을 시킨 다음 처음으로 옷을 입혔는데, 이를 ‘배냇저고리’라고 한다. 배냇저고리는 일반 어른들의 저고리와 같은 것이지만 깃과 섶은 달지않으며 바느질도 성글게 처리한 것으로 반드시 명이 길라고 실로 옷고름을 단다.
옷감은 대부분 흰색 ‘융’을 쓰는데 겨울에는 겹으로 하고 여름이면 홑으로 하며 2벌 정도 만든다. 드물게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입던 것으로 만들어 입히면 명이 길다고 해서 배내옷이나 기저귀를 어른들이 입던 옷의 천으로 마련하기도 하며(홍순이, 77세), 너무 가난해서‘외포’로 겨우 하나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박을희, 79세).
첫아이 때는 대개는 아기 출생전에 미리 친정이나 시댁 어른이나 또는 아기 어머니가 만들어 두기도 하며, 아래 아기들은 필요에 따라 만들었다. 대개 첫아이 때는 친정에서 여유가 있으면 배내옷과 ‘두렝이(두렁이)’ 또는 애기 ‘포대기’(‘처네’라고도 함)를 만들어 오기도 한다.
배냇저고리는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여유있는 집에서는 딸과 아들이 입는 것을 구분하였다. 처음에 아들을 낳은 경우는 아들이 입었던 것을 남녀 구별없이 동생들에게 내리 물려 입히지만, 특히 위로 딸을 많이 낳은 다음 아들을 낳는 경우라든가, 귀하게 본 아들인 경우에는 여자아기가 입던 것을 피하고 새것으로 해 입힌다. 여자가 입던 것을 입으면 “다음에 큰걸음(출세)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오순선, 75세).
다음에 배냇저고리를 입을 아이가 없을 경우에는 주로 ‘행주’로 쓴다. 행주는 깨끗하게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빨래할 때에도 방망이질을 하면 아기가 놀라서 경기(驚氣)를 하기 때문에 손으로 주물러 빤다. 또 배냇저고리를 보관하였다가 시험보러 갈 때 합격하라고 윗옷 등판 안에 꿰매기도 한다. 이런 일은 나중에 나온 이야기로 별로 하지 않았다고 하나, 문기수(64세)씨는 현재 45세 된 아들이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갈 때 아들이 입었던 것을 잘 보관하였다가 몰래 꿰매 주었는데 합격했다고 한다.
③ 백일
흰밥이나 미역국을 끓이고 수수팥떡에 흰무리를 하면 잘 차리는 것이었다. ‘수수팥떡’은 부정을 씻고 ‘흰무리’는 100살까지 살라는 의미로 하는데, 이경분(75세)씨는 수명이 길다고 자녀들이 10살이 될 때까지 해 줬다고 한다.
흰무리까지 하는 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이었다고 하며, 더구나 옷을 새로 장만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입던 것을 깨끗이 빨아 입히는 정도였다. 백일쯤이 되면 배냇저고리 대신에 깃과 섶, 옷고름을 갖춘 완전한 저고리 형태의 옷을 입힌다. 친정에서 첫아이일 때는 아기의 위·아래옷과 처네를 보내 왔지만(김간난,85세)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음식대접을 받거나 한 사람들은 아기 명이 길라고 ‘실’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사진】백일(남아): 목에 실을 감고 있음 1963년 갈현동 가일
④ 돌치레
돌 때는 백일 때보다는 잘 차려 주는데 형편에 맞게 아기 입을 거리를 장만하는 경우가 많았고, 음식은 수수팥떡이나 흰무리를 만들고 이웃을 초대하거나 음식을 나눠먹기도 한다. 돌 전까지는 남녀아를 가리지 않고 저고리나 ‘배두렝이’ 정도를 해서 입히지만 돌 때가 되면 걸어다니고 대소변을 가리게 되므로 남녀아의 옷을 다르게 마련해 준다.
위에는 저고리를 입히고 아래는 남아는 밑가랑이가 트인 터진바지를 입히고 여아는 치마를 입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남녀아 모두 바지나 두렁이를 입힌다. 잘 차려 입는 집에서는 여아는 밑이 터졌지만 앞쪽이 막히고 뒤가 트이면서 무를 단 ‘풍채바지(풍차바지: 어린 아이의 바지)’를 입히기도 한다.
누비옷은 별로 만들어 입지 않았으며, 주로 누비버선이나 만들어 신게할 정도였다. 누비는 이유는 아기옷을 자주 빨아야 하므로 세탁하고 만지기에 좋으라고 하는 것이었으나, 대개는 겹이나 홑으로 해 주었을 뿐이다. 홍순이씨는 옥색물을 드려 누빈 누비바지를 아들에게 해 입혀 보았다고 한다.
옷감은 자주 빨아 입혀야 하므로 ‘외포(광목)’로 하다가 옥양목과 인조가 흔해지면서 옥양목이나 인조로도 하였다. 색깔은 흰색으로 하고 색옷으로는 주로 회색바지에 분홍저고리·빨강치마를 만들어 입혔다. 아이들 옷은 자주 빨아 입혀야 하기 때문에 물색옷은 물이 잘 빠지고 물감이 귀해서 흰색으로 주로 입혔다.
아기들 저고리에는 옷고름을 ‘돌려’라 하여 허리를 한바퀴 돌려 맬 수 있게 겉고름을 길게 하였다. 김점순씨는 돌 때는 분홍색으로 달아 주었다고 하며, 색동저고리나 마고자를 만들거나 사다 입히기도 하였으나 매우 귀한 경우였다.
박이채(85세)씨는 위로 딸 둘을 낳자 남자옷[男服]을 입히면 남자동생을 본다 하여 남복을 입혔다고 한다.
【사진】돌(여아): 1966년, 갈현동 가일
▣ (2) 혼례치레
제보자 전원이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차림이고, 신부는 치마 저고리에 족두리를 쓴 전통혼례를 치루었다. 교통편은 먼거리일 때는 기차나 차를 타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이 신랑은 가마나 말을 타고, 신부는 ‘사린교’나 ‘가마’를 탔다. 가정형편에 따라 달랐으나 대부분은 신부집에서 초례를 치르고 당일로 신랑집으로 온다. 시집온 후에는 반년이나 일년 쯤 지나고 가을농사를 거두거나 한 후에 처음으로 친정을 가는데 이를 ‘첫근친 간다’또는 ‘첫푸레기’라고 한다.
【사진】혼례복: 1960년, 갈현동 가일(초례청: 인천)
① 신랑차림
속에는 한복의 기본인 바지·저고리와 속옷으로 고의(또는 잠방이)에 속적삼을 내복으로 입는다. 위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겉에는 사모관복 차림으로, 관복을 입고 허리에 ‘각띠’를 띠며 머리에는 ‘사모(紗帽)’를 쓰고 발에는 ‘목화(木靴)’를 신었고 손에는 손이 보이지 않도록 흰색의 “한삼(汗衫)”을 낀다.
안에 입는 옷들의 색깔은 주로 흰색이고, 옷감은 외포나 명주 나단(羅緞)으로 하였으며 세루두루마기는 매우 귀한 것으로 여겼다. ‘세루두루마기’는 주로 밤색이나 짙은 남색이었다. 여자집에서 여유가 있을 경우는 ‘관리벗김’이다, ‘신랑겉불 벗긴다’하여 두루마기나 또는 바지 저고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손아지(86세)씨는 어렸을 때 주암동에서 이웃에 사는 총각이 12살 때 장가를 갔는데 ‘초립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서 장가를 가기 때문에 사모관대를 하지 않고 두루마기 위에 ‘전복(戰服)’을 입고 ‘복건(幅巾)’을 쓰고 위에 ‘초립(草笠)’을 썼으므로 초립댕이[草笠童]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② 신부차림
<얼굴 가꾸기>
혼인날 2∼3일 전에 얼굴의 털을 뽑는다. 본인이 하거나 복(福) 좋다는 손위 여자 어른이 해주기도 하는데, 실을 꼬아서 잔털을 뽑고, 눈썹이나 이마의 머리털은 족집게로 뽑았다. 이마 양쪽은 털을 뽑아서 각이 나게 반듯하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혼례날 아침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수모를 사서 신부얼굴과 머리만지기, 옷입히기 등 신부치레를 하기도 하였으며, 대개는 집안이나 이웃에서 복덕이 있는 손위 여자가 하기도 한다. 또는 하님이 성적(成赤)시켜 줬다(박이채, 85세)고 한다.
얼굴에 화장을 한다고 해도 특별한 것이 없고 ‘장분’을 바르고 ‘연지’·‘곤지’를 찍는 것이 전부였다. 장분은 딱딱한 고형분으로 물에 개어서 발랐으며 크림이라든가 기타 화장품을 구입하여 사용한 경우는 드물었다. 털을 뽑긴 했지만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로 분을 발랐기 때문에 얼굴에 분이 먹지 않아서 얼굴이 쩍쩍 갈라졌다(김간난,85세)고 한다.
이마와 양쪽볼에 곤지 연지를 빨간색의 물감으로 동그랗게 찍어 바르는데 2∼3일까지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머리는 ‘큰낭자머리’를 하고 ‘큰비녀’를 꽂고 ‘댕기’를 들이고 ‘족두리’를 얹었다. 손에는 손을 가리기 위해 명주나 인조를 긴 수건처럼 만들어서 드리웠다.
<옷차림>
옷은 위에는 속적삼에다 저고리를 입었다. 아래는 제일 속에는 속속곳을 입고 차례로 바지와 단속곳 그리고 치마를 입었다. 일반적인 혼례복의 정장인 ‘원삼(圓衫)’은 있는 사람들이나 입었다고 하며 제보자 가운데서 입었던 사람은 2명 뿐인데(문기수 63세, 이규희 55세), 이들은 옷감이 흔해진 1950∼60년대에 혼인한 사람이었다. 원삼은 남자의 사모관대와 함께 마을에서 공동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빌려 입는 것이다.
속적삼은 주로 고령층에서는 외포로 만들었고 70대 연령층에서는 인조로 만들어 입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는 옥양목으로 차츰 변하였다고 한다. 특히 속적삼은 ‘모시’로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시집살이에 속이 시원하라는 뜻’으로 입는 것(문요진,82세), 그 외에도 속살이 닿는 것은 시집살이에 속이 시원하라고 입는 것이다(박이채, 85세)라고 한다 이덕순(75세)씨는 본인도 입었으며 현재 55세가 된 딸을 시집 보낼 때도 신식으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는데도 모시속적삼을 입혔더니 추운 겨울에 왜 모시적삼을 입어야 하느냐고 흉거리였다고 한다.
모시적삼을 속적삼으로 입는 일은 곁에 입기도 힘든 일이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입었다고 하며, 모시적삼을 입은 경우는 과천 토박이보다는 화성(박이채)이나 서울(이덕순) 사람들이 더 갖추어 입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저고리는 속적삼 위에 하나밖에 안 입었다. 노랑색 길에 자주나 빨강을 댄 ‘반회장저고리’였다. 저고리 두 벌을 입은 사람은 두사람(박이채, 이덕순) 뿐이며, 이들은 모시적삼 위에 분홍저고리를 입고 다시 노랑반회장저고리를 입었다. 이덕순씨는 집안이 가난해서 남자집에서 초례를 치를 정도였으나 서울 내수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비교적 과천 토박이보다는 서울 서민층의 풍습대로 하였으며 저고리도 ‘삼작(三作)’을 입는다든가 속옷으로 모시를 물들여 삼층으로 만든 분홍색 “무지기”를 입는다는 등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또 혼인 때 저고리는 솜저고리를 입고 겹저고리는 안 입는다. 삼복더위 여름에 하는 혼인이라 해도 솜저고리를 입는 법인데 만일 솜저고리를 할 수 없을 때는 저고리 깃고대 뒤쪽에다 조금이라도 솜을 넣었다. 김점순(75세)씨는 음력 4월에 초례를 치렀는데 덥기 때문에 솜저고리를 입을 수가 없으므로 저고리 깃에 솜을 조금 넣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저고리감은 명주나 삼팔·갑사·숙고사·진루사·법단·양나사 등으로 많이 만들었는데, 제보자의 어머니 세대나 90세 이상의 세대 때는 ‘재병’이나 ‘오복수’라는 옷감이 고급으로 쓰였다. 재병은 대접만큼 큰 둥그런 무늬가 있는 것이었으며, 오복수는 재병보다는 작은 무늬가 있는 것이라 하며 치마감으로도 썼다고 한다. 저고리 길이는 제보자의 어머니 세대 것은 길이가 매우 짧고 통도 좁으며 깃은‘당코깃’이라 하여 뾰족한 모양이었으나, 70∼80대 나이 때는 긴 편이었다고 한다.
치마는 ‘초마’라고 하고 있다. 치마는 빨강이나 분홍색으로 만들었으며, 옷감은 저고리와 비슷하나 조금 고급으로 하였다. 70대 이후부터는 치마감으로는 유똥(뉴똥: 명주실로 짠 옷감의 종류)과 하브다이(하부다에: 일본산의 평직 견직물)나 인조(인조견)가 유행하였다. 혼례 때 치마는 겉에는 홍치마를 입고 안에는 청치마를 입어 두 벌을 입는 것이지만, 이 곳에서는 겉에 빨강색 한 가지만 입었다.
속옷으로는 속속곳과 바지, 단속곳을 입었는데, 속옷감으로는 흰색으로 외포를 많이 썼으며, 옥양목(생목보다 발이 고운 무명 피륙)·인조견·서양목(생목)이 후대로 오면서 차츰 이용되었다. 속옷도 현재 60대 연령층에서는 속속곳 대신 ‘사르마다’를 만들어 간단하게 입었다고 한다. 발에는 솜버선을 신고 마른신이나 징신을 신었으며, 60대 나이에서는 흰고무신을 신었다(문기수 63세).
저고리 중에서도 고령층에서는 본인들은 입어 본 경험이 없으나 ‘당코깃저고리’를 본 적은 있다고 한다. ‘당코깃저고리’라고 하면 ‘삼회장저고리’라고도 한다. 당코깃저고리는 저고리길이가 짧고 깃넓이도 좁으며 몸에 꼭끼고 매우 작은 것으로, 연두색 길에 자주나 빨강색으로 옷고름과 깃·끝동·곁막이를 단 것이다.
박이채(85세)씨는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하며, 김점순(75세)씨는 시집와서 동서 할머니가 입은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또 당코깃저고리를 ‘말명(무당의 열두거리 굿중의 셋째 거리)저고리’로 만들어 둔 것을 보았는데, 시댁 어른 중에서 시집와 젊어서 죽은 여자가 있는데 그 귀신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잘 모셨다고 한다. 선반 위에 잘 얹어 두었다가 집안에 나쁜 일이 생겨 굿을 할 때면 그 옷을 내려 놓고 굿을 하곤 하였는데, 보통 3∼4대를 위하여 하는 것이지만 얼마 전부터 젊은이들이 이젠 하지 않을 테니 그만 두라고 하면서 태워버렸다고 한다.
③ 함
혼례날 신랑이 신부집에 오면서 혼서지(婚書紙)와 함께 신부의 채단(采緞)을 담은 함이 온다.
함 속에 담은 신부의 예단을 ‘채단’이라고 하는데 채단은 치마 두감으로 청홍색을 넣는다(김간난 85세, 박이채 85세)든가, 채단 두 끝만 보낸다. 즉, 빨강 파랑 치마 두 채만 넣는 것(이경분, 75세)이라든지, 치마 저고리감을 각 두 벌씩 넣었다든가(오순선, 75세), 치마 저고리감 각 한가지씩 넣는것(손아지, 86세)이라는 등 함 속에 넣는 채단의 예는 다양했다.
오순선씨는 함 속에 채단을 많이 넣는 일은 상사람[常人]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이 함 속에 여러가지 옷감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김점순씨는 옛날에는 함이 지금의 농 한 짝 만큼 했다고 한다. 함 속에 진세루치마·세루저고리·모시치마·모시적삼·모시고쟁이·광당포고쟁이를 받았는데 당시 시누이들이 서울에 살아서 눈이 높아서 최고급으로 받았다고 한다.
가난한 이는 친정에서 혼례 때 입을 치마를 미리 마련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함을 받은 후에 함 속에 든 홍색치마감을 꺼내서 허리를 달고 입기도 했다고 한다. 형편에 따라서 다르지만 신랑집에서 패물도 받는데 은비녀·은귀이개·은고리잠·은가락지·은뒤꽂이 등이다.
김점순씨는 은비녀인데 파란색을 놓은 것(은파란비녀)이었다고 하며, 이덕순씨도 은비녀·은가락지 밖에 못 받았지만 잘 하는 집에서는 패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
【사진】함: 1923년, 과천시 주암동 돌무께
④ 혼수품
대부분이 혼수품은 마련하였는데 양측 상황에 따라 달랐다. 가난해서 특별히 민며느리처럼 미리 시댁에 몸만 와서 살다가 초례를 올린 경우와, 초례를 시댁에서 올린 사람은 시댁에서 옷을 마련하고 색시를 싸오다시피 하여서 친정에서는 아무 것도 마련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혼수품은 친정과 시댁의 경제적 조건 등의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준비되는 것이므로 혼수품에 시집살이는 크게 좌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불 등 침구류를 남자집에서 준비한다든가, 아니면 남자집에서 하는 일이라는 경우와, 여자집에서 마련해가야 하는 것이라는 경우도 있다. 혼수품 준비에서 연령층에 따라 수량과 종류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고령층에서는 옷을 담을 장농 속에 본인이 입을 옷과 소량의 침구류를 마련하였는가 하면, 차츰 후대에 오면서 품목이 다양해졌다. 금남봉(53세, 1961년도 혼인)씨 경우는 많은 살림살이 외에도 침구류만 해도 솜이불 2채, 누비이불, 홑이불, 베개 긴것·작은것, 수놓은 퇴침, 양복덮개, 경대덮개, 방석까지 했으며, 이덕순씨도 딸을 시집보낼 때는 이불만도 3가지 종류나 했고 시댁어른 침구까지 마련해 줬다고 한다.
고령층에서 잘 했다는 경우를 오순선(75세)씨는 장농(이층장으로 ‘동리장’이라고 하고 있다)과 이부자리는 이불과 요 각 하나씩과 긴 베개 하나 채갱(경대) 하나와 반짓그릇 속에 각종 재봉재료와 장농 속에는 본인이 계절 맞춰 입을 옷을 넣어 왔다고 한다. 김간난(85세)씨도 장농·경대·이불·요와 베개 긴것·작은것 하나씩을 가져 왔으며 장농속에다 치마·저고리·적삼과 버선 ‘한죽’을 담아 왔는데 당시로서는 이런 혼수준비는 매우 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경분(75세)씨는 삼층장·경대·손전등·놋으로 만든 밥그릇·수저·요강·대야와 사철 본인이 입을 옷과 이불, 그리고 베개를 해 왔다고 했다. 혼수품 마련에서 반드시 빼 놓을 수 없는 의복으로는 ‘행주치마’(행기초마라고 하고 있다)와 특히 ‘서답’이 있다.
행주치마는 부엌일 할 때는 물론 겨울에 물을 길러 다닐 때나 빨래하러 다닐 때 손이 시렵기 때문에 허리춤에 손을 넣어 보온하는 주머니 구실도 했으며, 일하다 손을 닦는 것으로 치마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는 이상으로 필수품이었다.
김점순씨는 ‘서답은 아주머니네의 큰 문서다’, ‘문서보따리’라고 하며, 제보자 모두가 “다른 것은 못해줘도 딸 시집 보낼 때 친정에서는 꼭 마련해 줘야 하며, 마련하여 주는 것이다”라고 한다. 한 사람만이 너무 가난하여 치마 저고리도 시집에서 만들어와서 입었으니 서답은 생각지도 못할 지경이었으며 시집간 후에야 친정에서 겉에는 삼베로 하고 속에는 헌벙텡이(흰옷감)로 누벼서 보냈더라고도 한다.
서답은 짝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여 3∼5개로 홀수로 하며, 한 개의 길이가 3자 정도되고 반드시 삼베로 만든다. 삼베로 해야 피때도 잘 빠지고 빨리 마르며 산후(産後)에 사용해도 덧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산 후에는 반드시 삼베를 밑에 깔고 앉아야 후탈이 없다고 한다.
【사진】장농(동리장): 1923년, 과천시 주암동 돌무께
⑤ 중둥풀이
‘중둥풀이’란 시집온 다음에 친정에 첫 나들이를 갔다가 시댁으로 돌아올 때 준비해 오는 물건 중에서 시어머니에게 드리는 예물을 말한다.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하나, 제보자의 반 이상이 마련하였다.
박이채(85세)씨는 중둥풀이는 중인(中人)들이나 하는 것이지 반(班)명하는 이는 안 하는 것으로 시댁 어른들의 버선이나 음식을 준비해 오는 것이라고 한다. 여자가 시집간 뒤 첫 친정나들이 하는 것을 ‘첫푸레기’·‘신행’·‘첫풀이’·‘근친(覲親)’이라고 하고 있다. 주로 “첫푸레기”라고 한다.
첫푸레기는 반년이나 일년쯤 지나서 농사일을 마치고 가게 되는데, 이 때는 시집에서 마련하여 준 “엿”과 “떡” 등 음식을 가지고 간다. 친정에서 열흘이나 스무날 정도 머물게 되며 시댁으로 돌아올 때는 친정으로 보낸 것보다 더 잘 해오게 된다. 이 때도 엿이나 떡 등 음식물 외에 시어머니에게 드릴 중둥풀이와 시댁 어른들께는 버선을 준비한다. 특히 엿을 하는 이유는 엿먹고 입다물라는 뜻에서라고 한다.
중둥풀이는 주머니와 허리띠(허리빠라고 하고 있다)를 말한다. 주머니와 허리빠는 빨강색으로 하는데 주머니는 수를 놓고 ‘귀주머니’로 하는데 잘 하는 경우는 둥근형의 ‘염낭’도 같이 한다. 귀주머니에는 모란꽃을 수놓고 염낭에는 벚꽃을 수놓는다. 주머니에는 작은 장식들을 곁들여 매다는데 괴불 주머니(네모진 헝겊을 접어서 속에 솜을 넣어 통통하게 만들고 가에 수를 놓아만듬)·고추 등을 작게 만들고 수놓아 오색봉(五色鳳) 술 끈을 맨다. 빨간 허리빠를 허리에 묶고 주머니를 차는 것이다.
중둥풀이 주머니는 솜씨있는 사람은 자신이 수를 놓아 만들지만 시일도 짧고 해서 주로 시장에서 샀다. 이경분(75세)씨는 며느리(이규희, 55세)에게 첫푸레기 때 받은 중둥풀이가 지금도 있는데 빨간 귀주머니에 허리빠는 녹색이다.
【사진】중둥풀이(귀주머니와 허리빠): 1960년 갈현동 가일
▣ (3) 수의
수의(壽衣)는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과 염습(殮襲)하는 것들을 포함시켜 말하는 것이다. 제보자 가운데 수의옷을 마련한 사람은 3인(박을희 76세, 김부전 89세, 문요진 82세)이며, 맡긴 사람 1인(김능지 92세), 옷감만 준비해 둔 사람 3인(손아지 86세, 박이채 85세, 김삼녀 86세)이다.
준비를 안한 이유로는 쉽게 구할 수 있고, 마음에 꺼려서 싫기 때문이다. 죽으면 돈만 주면 당장 만들어다 줄 것인데 뭐하러 흉한 것을 집에다 준비하여 둘 것이냐는 것이다. 또한 수의옷은 당일치기로 하루에 해지기 전에 완성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많이 필요한데 할 줄 아는 이가 얼마나 되며,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집도 좁고 소란스러운데 누가 그 치닥거리를 하며 해 줄 사람들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박이채(85세)씨는 베는 사 두었지만 안한 이유는 두 가지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는 친정 형님이 자신의 수의옷을 하려고 삼베를 빨아서 발다름이까지 해뒀더니 며느리가 죽어서 며느리 수의를 해 주고, 또 한 경우는 시집간 넷째딸이 시부모님 수의를 마련하여 놓았더니 사위가 죽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모두 미리 마련하여 두면, 본인은 죽지 않고 엉뚱한 사람이 죽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여 두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옷감은 제보자 전원이 삼베로 한다고 하였다. ‘송중’에는 썩을 때 같이 썩어야 하는 것이므로 삼베가 제일 좋다고 한다. 제보자의 부모대에는 잘 하는 사람들은 명주로 했고 또 명주가 고급이라고는 하면서도 지금은 모두 삼베로 하고 있다. 삼베를 살 닿는 곳 즉, 안에다 대고 겉은 명주로 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잘 사는 이들은 명주로 하는 것을 치사로 알았다고 한다.
만드는 시기는 살았을 때 만드는 것을 윤년 윤달에 하며 당일에 옷짓는 것을 다 마쳐야 한다. 금년 봄에 윤달이 껴서 많이 한다고 하지만 별로 만들어 둘 생각이 없고 옛말이라고 한다. 수의옷은 제보자 대부분이 시집 장가 갈 때 입는 것과 꼭 같이 차리고 호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자는 원삼도 만들고 치마·저고리·속옷까지 모두 명주로 갖추고 얼굴도 화장하고 연지·곤지로 바르며, 입는 것 외에 얼굴싸고 머리에 쓰는 것과, 손 싸는 것, 배 싸는 것, 버선, 오낭(五襄) 외에 시체 싸는 이불, 까는 요, 덮는 이불, 묶는 장베와 맬베도 모두 마련하였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이덕순(75세)씨는 시부와 시조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와 같이 이불도 겹으로 하고 이불 폭도 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아홉 폭으로 하여 겉과 안을 4폭반으로 접어 ‘겹이불’로 하였다고 한다.
남자들도 바지·저고리·고이·적삼 위에 두루마기와 도포를 마련하였으나 지금은 남자나 여자나 기본 옷 위에 두루마기만 하며, 혼례 때처럼 색색으로 색깔을 맞춰 하지 않고 삼베로만 하므로 아무런 색깔도 안쓴다고 한다. 더구나 장의사에서 해오는 일이라 돈 값에 맞게 해 오므로 삼베도 진짜인지 나이론이 섞인 것인지 알 수 없고 또 그런 격식을 아는 자손들도 없고 하니 속 편하게 죽은 다음에 자손에게 맡기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 (4) 상복(喪服)
사자(死者)를 위해 자식이나 친척들이 입는 옷을 말한다. 상주가 입는 옷은 ‘거상(居喪)요’이라 하여(‘거성’이라 하고 있다) 3년간 입는 것을 말하며, 그 외는 ‘복쟁이’라고 하여 일반복을 입을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남자 상주들은 삼베로 만든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입는다. 결혼 안한 아들일 경우는 머리에 건을 쓰지 못하므로 ‘테두레’와 ‘베보자기’를 같이 쓴다고 하며(김적순, 75세), ‘박다리’(박다레 또는 테두레라고 함)를 쓴다고도 한다.
사위나 손자는 일년복을 입는 복쟁이라 하여 복두루마기에 건을 쓰고 행전을 찬다. 잘 해 주는 집에서는 복두루마기 대신에 ‘중단(中單)’을 하기도 한다. 요즘은 장가 안간 총각들은 박다리 대신 두껑을 꿰메지 않은 건을 쓰기도 한다. 가난한 이들은 삼베로 건을 만들 수 없어 창호지로도 하였다.
박이채(85세)씨는 19년 전 남편이 죽었을 때 상주는 모두 굴건제복에 중단 도포까지 하고, 사위도 중단을 하고, 사촌 시동생과 조카들 몫으로 복두루마기를 20벌이나 만들고 조카 며느리까지 복치마를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나라에서 금한다 하고 세상이 각박한 인심이 되어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옷감은 남자 상주들은 삼베로 하고 삼베옷을 입은 사람을 상주들이라고 하고 있을 정도였으며 상복하면 삼베옷이였다. 복쟁이들도 여유 있는 집에서는 모두 삼베로 하는 것이 원칙으로 ‘喪’하면 ‘삼베옷’과 관련지어 말할 정도였으나 20여 년 전부터는 상주들도 베옷 입은 것을 볼 수가 없고 두건은 비록 삼베로 하나 모두가 깃광목(누이지 않은 생광목)으로 대치되었다. 따라서 깃광목으로 입으면서부터는 ‘상복’이란 말이 ‘복옷’으로 명칭이 낮추어지고 있다.
여자 상주들은 딸이나 며느리 모두 ‘깃거성’을 입는다. 깃거성은 빨지 않은 광목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여자 상주가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은 경우는 제보자 중에는 한 명도 없었으며, 제보자의 부모대에서는 여자도 삼베로 치마 저고리 위에 중단을 입었다고 한다. 삼베는 귀하고 비싸며 광목이 차츰 구하기 쉽고 흔해지면서 광목으로 입게 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여자 상주들이 입는 상복을 ‘거성’이라고 하고 있으며 거성은 친정에서 준비하여 오는 것이다. 거성은 ‘겹거성’과 ‘홑거성’이 있는데 겹거성은 겹으로 만든 것을 말하며 여유있는 집에서나 했다. 삼복더위에도 겹거성을 입으며 홑거성보다는 격이 높은 것이고 잘 갖추는 일이다.
친정에서는 사돈댁의 부고를 받으면 딸몫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입고 신는 것과 속옷까지 만들고 사돈댁 부조로는 지(紙)와 초[燭]를 가지고 온다. 거성풍습은 지금도 있으며 요즘은 깃광목 대신에 흰 옥양목이나 더 좋은 흰색 옷감으로 하기도 한다.
거성으로 치마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박다리를 쓰고 허리에는 삼띠나 짚새끼띠를 맨다. 박다리는 삼을 꼬은 것으로 사이사이에 삼베 헝겊을 끼워 늘어뜨리기도 하고 허리에 대는 띠도 삼으로 꼬아 만든 것이다. 신발은 남녀 모두 짚신을 신었다.
여자의 머리에는 양반집에서는 며느리는 ‘흰족두리’를 쓰고 딸은 ‘검은족두리’를 쓰는 것을 보았으며(김점순, 75세), 김간난(85세)씨의 따님(55세, 63년도 출가, 인천 황희정승 후손댁 며느리로 감)은 시집간 다음해에 시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창호지로 흰족두리를 만들어 쓰고 박다리 얹고, 여자도 절을 4배하며, 제사 때는 옥색옷을 입었다고 한다. 친정에서 옥색옷을 해주지 않았으므로 시댁에서 해줘서 입었는데, 친청에서는 족두리도 안쓰고 제사도 참석 못하고 제사 때 입는 옷도 없더니 시댁 가니까 모두 갖추었는데 양반댁이라 그런다고 하더라고 한다.
3년 동안 남자 상주들은 외출할 때는 ‘베중단’을 입고 ‘방갓’을 쓰고 다녔으나, 제보자 세대는 한 사람도 한 이가 없었다. 제보자들도 시부모상 때는 3년간 ‘흰댕기’를 드리고 나무비녀(앵두나 버드나무)를 꽂고, 흰댕기는 3년간 모았다가 대상이 끝나면 태우는데 흰댕기 모은 것이 식(食)되로 한 되가 되면(또는 태운 재가 한 되가 되면) 죽은 이의 저승길이 밝다 하여 열심히 많이 들였다. 흰댕기는 삼베나 깃광목으로 했는데, 없으면 창호지를 접어서라도 썼다.
집안에서 가까운 복쟁이들은 복옷을 해 주지만 먼 친척일 경우는 건이나 해주었고, 여자들에게는 ‘복행기치마’라하여 깃광목으로 해 준다. 단 부엌에서 수고한 사람이나 사제[使者]밥 해 준 사람에게도 해 준다. 김간난(85세)씨는 시할머니가 돌아가자 친정에서 거성을 옥양목으로 해와서 복옷을 1년간 입고 검정댕기를 들였다. 시부모 때는 상주이므로 깃거성을 해오고 3년간 입고 흰댕기를 들였다고 한다.
<제사옷(祭祀)>
제사 때는 대부분 흰옷을 입는데 여자들은 제사일에 참여 안하고 음식준비나 한다. 박이채(85세)씨는 시집올 때 자신이 직접 짠 명주에 옥색물을 들인 옥색치마 저고리를 제사 때 입으려고 준비해 와서 입었으며, 옥색 옷을 입고 제사를 차리는 것은 격식을 차릴 줄 아는 집에서나 한 일이라고 한다.
이경분(75세)씨는 친정에서 시집올 때, 제사 때 입으라고 흰색 치마 저고리를 만들어줘서 입었다고 한다.
▣ 2) 아이들 차림
돌이 지나서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고 자립하여 걸어다닐 수 있을 때부터 10세 전후 나이까지의 차림이다. 제보자들이 어렸을 때의 기억과 자신의 아이를 키울 때 겪은 두 가지 경우이다.
제보자의 세대는 남녀가 모두 머리를 땋아 댕기를 들였다. 어려서 머리가 덜 자랐을 때는 여아(女兒)들은 앞가리마를 타고 ‘종종머리’에 ‘귀밑머리’를 땋았다. 댕기는 여아들은 빨간댕기로 끝을 뽀죽하게 낸 ‘제비초리댕기’를 하였고 명절이나 이름있는 경축일에는 고급천으로 곱게 땋았으나 평소에는 무명에다 빨간물을 들여서 쓴 정도였다.
남아(男兒)들은 귀밑머리나 땋고 뒷댕기는 검정색으로 했다. 옷은 남녀아 모두 어려서는 저고리길이를 길게 하고 옷고름을 길게 하여 허리를 한바퀴 돌려서 매는 ‘돌띠’를 달았으나 4∼5세가 지나면 일반 어른과 같이 짧은 고름을 단다.
바지는 남녀아 모두 입히는데, 남아는 가랑이가 터진 것을 하고, 여아는 앞쪽은 막히고 뒤는 트이면서 무가 달린 “풍채바지”를 입히거나 대개는 앞을 가리는 “두렝이”(두렁치마, 두룽치마라고도 하고 있다)를 입히고, 여름에는 대부분 위통은 벗었다.
가난한 아이나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은 옷 장만이 어려워서 겨울에도 겨우 살을 감출 정도로 맞지도 않은 옷을 꾸려 입히거나 여름에는 발가벗은 상태였고 발은 거의 맨발이었다. 좀더 자라면서 남아는 밑이 막힌 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여아는 저고리와 밑이 트인 바지를 입고 위에 치마를 입는다. 옷감은 사철 모두 무명이었으며 아이들은 겨울에도 솜옷 입기가 쉽지 않았다.
제보자의 자녀들은 1930년대 이후에 광목으로 해입히기 시작했다. 주로 흰것이었으나 파는 옷감이 많아지면서 검정이나 빨강·분홍·노랑물을 들여 입혔다. 여유있고 바느질을 잘한 경우는 색동옷이나 누비버선도 만들어 주었으며 1940년대 이후부터는 서양식 옷 모양을 짐작삼아 재단하여 바지나 셔츠 등을 해입혔고 속옷도 가랑이가 터진 바지 대신 사리마다에 여아들은 통치마를 만들어 입혔다. 아이들은 짚신을 신었으며 아버지나 집안 남자 어른들이 솜씨가 있거나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볏짚꼭대기를 따서 곱게 물을 들여 만든 ‘꽂짚신’(물깍신이라고도 하고 있다)을 신기도 하였다. 1940년대 쯤 되면서 아이들도 검정고무신을 신기 시작하였다.
▣ 3) 젊은이 차림
결혼하기 전 연령층으로 제보자들 세대 때 자신이 경험한 일들이다. 대부분이 총각들은 댕기머리에 바지 저고리를 입었으나 1930년대 이후는 거의 다 머리를 깎았다. 신식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바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기도 하고 학교 나갈 때는 서양식 교복을 입었으나 집에 와서는 바지 저고리를 입는 이중복식구조(二重服飾構造)였다.
처녀들은 모두 귀밑머리를 땋고 뒷댕기를 드렸다. 댕기는 끝이 뾰족한 제비추리댕기를 했는데 보통 때는 광목에다 빨간물을 들인 것을 쓰고 명일이나 경사스러운 날이면 빨간물을 들인 댕기를 사거나 댕기감을 사다가 만들었다. 명주댕기를 쓰다가 차츰 갑사댕기·인조댕기가 나왔으며 특히 ‘금댕기’라 하여 갑사에다 금박(金箔)을 한 ‘갑사금박댕기’는 최근의 것이었다.
옷은 치마 저고리에 속에는 바지를 입었다. 버선은 명절이나 겨울 또는 나들이 갈 때나 신었으며 신발은 짚신을 신었다. 집안 남자 어른들이 손재주가 있어 짚신을 잘 만들거나 여유있는 집에서나 곱게 물들여 만든 짚신이나 미투리(삼으로 만든 신)를 신지만 드물었다. 부잣집이나 설빔으로 징을 박은 ‘징신’을 신으며 아주 고급이었다.
옷감은 주로 광목이었으며 명주옷은 겨울 설날이나 되면 겨우 입어 볼 정도였고, 명주 속옷을 입은 일은 거의 없었다. 저고리는 주로 흰색으로 입었으며 명절에는 노랑이나 분홍·연두색 옷을 입기도 하고, 치마는 빨강이나 분홍·검정색이었다. 치마는 ‘자락치마’를 입었으며 왼쪽으로 여몄다.
치마 속에는 가랑이가 터진 바지(‘고장바지’ 또는 ‘가랑바지’라고 하고 있다)를 입었는데 앉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바지 밑은 달았지만 터졌기 때문에 속살이 보였다. 특별히 외출할 때나 잘 갖추어 입어야 할 때 또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집에서나 바지 위에 단속곳을 입었다.
속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 조점순(72세)씨는 “위에는 저고리 하나 뿐이지, 속적삼이 다 뭐여. 시집이나 가야 속적삼도 얻어 입지, 가랑바지 위에 치마 하나 입고 저고리 하나 입으면 그만이였다”고 한다.
50∼60대 제보자들은(문기수 64세, 이규희 55세, 금남섭 53세) 남색이나 검정통치마(‘깡둥치마’라고 하고 있다)에 흰저고리를 입고 결혼할 쯤에 ‘파마머리’도 했으며 신발도 ‘게다’나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금남섭씨는 시집올 무렵에 파마를 했는데 당시 인천 자기네 마을에선 늦게 파마를 한 것이라고 하며 시집오니까 시조부께서 ‘왜 쪽지고 오지 파마했느냐’고 하시면서 언잖아 하셨다고 한다. 처녀 때는 검정물들인 치마 위에 반팔 블라우스를 입고 속에도 가랑바지 대신 ‘사리마다’를 만들어 입었다.
1950년대는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학생들의 옷도 한복과 양복이 혼용되었고, 중학교에 가서는 교복이 있어서 양복을 입게 되었다.
【사진】졸업기념: 1951년 8월 과천공립국민학교,1952년 3월 과천국민학교
▣ 4) 어른 및 노인 차림
(1) 남자
남자 어른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바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정장 외출복차림이다. 제보자 세대에는 도포는 입지 않았으며 특별히 문중제사나 큰 의례 때만 갖추었을 정도로 매우 귀한 것이었다.
제보자의 부모세대는 상투를 짜르지 않은 경우는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고 집안에서는 ‘탕건’이나 ‘관’을 쓰고 있다가 외출 때는 반드시 ‘갓’을 썼다. 단발령(1895년) 이후 대부분이 머리카락을 잘랐으나 평소 집안에 있을 때는 모자를 쓰지 않다가도 고령층에서는 외출시 갓을 쓰고 중년층에서는 ‘나까오리 모자’를 썼다. 겨울철에 추운날 나들이 갈 때는 호사하는 여유있는 집 어른들은 ‘남바위’나 ‘휘항(휘양)’을 쓰고 위에다 갓을 썼으며, ‘마고자’나 ‘조끼’도 입기 시작하였다. 없는 이들은 겨울 나들이 할 때는 검은색 광목에다 솜을 넣어 만든 ‘모켕이’라는 모자를 머리에 쓰고 끈을 달아 앞으로 매서 추위를 피했다 한다.
옷감은 광목이 주였으며 여름에도 삼베와 모시는 귀한 것으로 특히 모시는 나들이용으로나 쓰였으며 겨울에는 명주옷이 제일 호사였다. 옷감이 귀해서 살기가 어려운 때라 옷을 제대로 갖추기가 어려웠다. 김점순씨(75세)씨는 여름이면 남자들이 속옷을 갖추어 입지 못했기 때문에 삼베나 얇은 것으로 고의 적삼만 입었을 때는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여서 매우 민망스러운 때가 많았으며 그래서 남자들 있는 곳에는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1940년대 이후 ‘세루’가 많이 보급되면서 겨울용으로는 ‘세루두루마기’가 최고가 되었다.
신발은 남녀 모두 짚신을 신었으며 미투리와 징신은 고급이었고, 일제 때는 게다를 신기도 하였다. 비 올 때는 나막신을 신었다. 고무신은 1940년대 이후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나 검정색이었고 귀한 것이었다.
속옷 갖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하여 손목에 ‘토시’를 꼈다. 솜을 넣어서 ‘솜토수’ 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귀한 것이었다.
【사진】환갑잔치에 모인 남자 성인의 옷차림: 1941년, 갈현동 가일
【사진】환갑잔치에 모인 여자 성인의 옷차림: 1943년, 갈현동 가일
【사진】환갑기념: 1966년, 주암동 돌무께
(2) 여자
치마 저고리 위에 나들이 할 때는 겨울에는 두루마기를 입기도 했으나 아주 큰 호사였다. 후대에 와서는 차츰 안에다 털을 댄 소매없는 ‘털배자’가 나와서 입기도 하였다.
김성순씨는 벗고 갈아 입을 것도 없어서 하나를 입으면 잘 때도 그냥 입고 잘 정도였다. 이불도 외포(광목) 두폭 반짜리로 했으나 작아서 식구 5∼6명이 한 이불 속에 누워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다 보면 날이 샜다. 그러니 옷이라도 입고 자야 할게 아니냐면서 낮에 입던 것을 밤에 입고 잘 정도로 단벌로 살았다고 한다.
속에는 평소에는 처녀들처럼 치마 속에 가랑바지를 입고, 나들이 갈 때나 단속곳을 입었다. 겨울에도 노인네나 호사해야 솜을 넣은 가랑바지를 입었다. 가랑바지는 밑이 앞 뒤 모두 트인 것인데 차츰 앞은 막고 뒤만 터지게 하여 입기 시작하였으며 김부전(89세)씨는 바느질을 잘하고 솜씨가 있으니까 본인 것은 밑을 트지 않고 뒤와 옆의 중간쪽을 터서 입었다고 한다.
옷감은 일상용으로는 광목이 주였으며 명주나 모시는 귀한 것으로 모시가 있어도 만져 입고 나설 만한 일도 없고 또 만지기가 힘들어서 있어도 못입을 정도였으며 모시옷을 입어 본 일이 없는 이가 훨씬 많았다. 차츰 세루옷감이 나와서 ‘세루치마’를 입으면 대단한 호사였고 겨울엔 제일 따습고 좋았다. 차츰 인조나 옥양목을 사용하였다.
외출 때는 부모님 세대는 얼굴을 가리고 나가는 것을 보았으나 본인들은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덕순(75세)씨는 양반 부인들은 ‘쓰개치마’를 쓰고, 중인은 ‘장옷’을 썼으며, 겨울에는 솜을 넣은 ‘처네’를 썼다. 손목에는 솜을 넣은 ‘솜토수’를 하였고, 부자집에서는 조바위나 남바위를 쓰고 두루마기도 입었으나 가난한 이들은 치마에 솜저고리 정도를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썼는데 수건과 비슷하나 좁게 솜을 넣어 만든 ‘두리개’라는 것을 썼다고 한다.
신발은 주로 짚신을 신었으며, 미투리나 고무신은 귀한 것이어서 나들이 때나 신었고, 비 올 때는 나막신을 신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의 신인 ‘게다’도 신었다. 새색시나 부자집 아이들은 ‘딴총벡이’라고 물들여 만든 고운 짚신을 신기도 하였다.
【사진】봄 나들이: 1960년, 갈현동
머리는 모두 ‘쪽찐머리’를 하였는데 지금까지 쪽을 찐 이는 한 분뿐이었다(오순선, 75세). 지금은 모두 짧게 컷트하거나 파마를 하는데 대개 2∼3년 전부터 하였다. 지금 60대인 세대는 일제 때에 젊은 새댁이었을 때 ‘까미머니’라고 하여 뒷통수 밑쪽으로 머리심을 넣어 말아 붙이기도 하고 그 후에 파마를 하였다.
머리 쪽 가운데서도 ‘등자쪽’이 있는데 이는 쪽을 느슨하고 길게 뒤통수에다 내여서 비녀를 꽂은 것을 말한다. 주로 화류계 사람들이 하였다. 문요진(82세)씨는 등자쪽을 하거나 옆가리마를 하거나 하면 당장 이혼감이었으며 모두들 반듯한 앞가리마를 하고 비녀도 바싹 틀어 올려 꽂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에 오면서 가리마는 옆으로 하는 것이 신식 유행이 되었다.
5월 단오 때는 전날 창포를 잘게 짤라 밤에 이슬을 맞히고 아침에 삶아서 그 물로 머리를 감고, 뿌리는 잘 깎아서 빨강물이나 파랑물을 들여 처녀들은 귀밑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어른들은 낭자쪽에 꽂았으며, 또 새댁이나 호사하는 이들은 머리장식으로 귀이개는 쪽 위에 꽂고 연뽕은 아래로 꽂고 은비녀나 비취비녀 고리잠을 꽂았다.
치마를 노인들은 ‘초마’라고 하고 있으며 왼쪽으로 여며 입어야 양반이라해서 모두 왼쪽으로 입었다. 이덕분(75세)씨는 치마는 보통 집에서 입는 것은 8∼9치 길이로 하고 나들이 때는 9치 길이로 만들었다고 한다. 새댁 때는 치마길이를 길게 하여 걷어 입는데 ‘거둠치마‘라고 한다. 앞으로 넓게 주름을 잡아 올려 허리 끈을 매었다.
‘몸빼’가 일제말엽인 1940년대에 나왔다. 공동훈련이나 공동작업 동원 때는 몸빼를 입도록 하였는데 어른들 앞에서 가랑이가 있는 속옷을 입은 기분 같아서 처음에는 매우 쑥스러웠으나 늙어가면서는 편리해서 입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미군담요로 만들어 입었는데 따뜻하고 빨아서 말리기만 하면 입을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였기 때문에 그후로는 몸빼를 즐겨 입게 되었다고 한다(이덕순, 75세).
특히 먼 거리를 갈 때, 기차를 탈 때는 몸빼를 입도록 했고(박이채,85세), 문요진(82세)씨는 강원도에서 부친 사망 기별을 받고 역에 갔더니 일본말을 못하고 몸빼 입지 않았다고 기차표를 팔지 않아서 애먹었다고 한다.
버선은 평소에는 신지 않았다. 의례 때나 겨울에 신었고 버선이 빨리 헤어져서 버선볼을 기워 신기도 어려웠다. 특히 짚신이 날카로워서 짚신발에 버선을 신고서 먼길이나 갔다 오면 몇 번 못신고 볼이 다 떨어졌다. “버선 기운 것 한 말이면 규모 무섭다”는 말이 있을 만큼 버선볼은 부지런하고 솜씨가 있어야 한다.
행주치마는 여자와 집안일에서는 필수적이었다고 한다. 노인들은 ‘행기치마’라고 부르고 있다. 광목으로 만들었는데 시집올 때 혼수품목 중에서도 필수품이었다. 여름에는 삼베가 좋지만 삼베는 귀한 것이어서 계절에 따라 바꾸지 못했다. 행주치마는 손을 닦는 일,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는 일, 거추장스런 치마를 추슬러 주는 일 외에도 추운 겨울에 손을 허리춤끈에 집어 넣어서 시린 손을 녹여 주기도 하는 것으로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고 한다.
▣ 5) 농부노동복
겨울에는 바지 저고리에, 여름에는 ‘잠방이’에 ‘등걸이’ 적삼을 입었는데 옷감은 광목으로 하였다. 삼베는 여름에 가장 좋은 노동복이었지만 귀해서 계절을 구분하지 않고 광목으로 만들어 입었다.
비올 때는 우장을 걸쳐 입었다. 우장을 ‘도랭이’라고 하는데 엉덩이보다 조금 길고 집에서 보릿짚이나 밀짚으로 엮어 만들었다. 머리에는 밀짚모자나 보릿짚모자 혹은 맥고모자를 썼다. 있는 이들은 시장에서 파는 ‘접사리’(좁세기라고도 하고있다)를 사서 입었는데 길이도 길고 비에 맞아도 속이 젖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귀한 것이라 모든 집에서 갖추고 있지는 못하였다.
‘삿갓’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래지 않으며 귀한 것이어서 쓰는 이나 썼으며, 이덕순(75세)씨는 삿갓은 충청도쪽에 갔더니 모두 쓰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없었다고 한다. 삿갓은 중간에 나온 것이며 쓰는 이나 썼고 김점순(75세)씨는 특히 상제들이나 외출할 때 쓰는 것이라고 한다.
▣ 6) 기타
(1) 길쌈
길쌈한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직접 명주를 짠 이는 이덕순(75세)·박이채(85세) 두 분 뿐이며, 무명은 이덕순·박이채·김부전(89세)씨 뿐이다. 어렸을 때 친정에서 부모님들이 하시는 것을 보았고 잔일들을 거들기도 했으며, 결혼 후에도 누에치기나 목화를 따서 솜을 만든 경험들은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누에고치와 목화를 공출하기 위해서 한 적이 있다.
길쌈을 한 경우도 시장에 내다 판매하는 상업목적으로 한 경우는 없었고 집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조금씩 길쌈을 한 경우였으며, 그나마 한국전쟁 이후로는 길쌈을 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고 한다.
이덕순씨는 서울 내수동에서 현재 문원 2동 윗배랭이로 시집왔는데, 친정에서는 해 본 적이 없으나 와서 보니 쓰던 베틀이 있고 또 친정어머니가 할 줄 알아서 아기들 기저귀감이나 마련하려고 무명을 짜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집에서 목화를 심고 따서 씨아에 넣어 씨를 빼고 활로 타서 펴고 고치를 비벼 만들고 실을 자아서 짰다. 자은 실이 동이로 하나면 40자가 나왔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아기 기저귀를 만들 목적으로 짰다. 굵기는 대개 닷새나 엿새 정도였고 등걸이나 잠방이도 만들었다. 명주도 짰는데 아기 표대기나 처네도 만들었다.
박이채씨는 처녀 때 친정인 화성에서 명주를 짜서 옥색 물들인 치마 저고리를 제사 때 입을 제사옷으로 만들어 왔으며, 막계리로 시집왔는데 거기서는 ‘미영’(무명의 경기지역 방언)을 짰다. 시어머니는 실을 잣고 본인은 미영을 짰는데 이불거죽감으로 쓰고 큰딸 시집 갈때도 해줬다. 목화 두 푸대를 따면 미영 80자가 나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김부전(89세)씨이다. 말죽거리 부근에서 자랐는데 친정에서는 어리다고 길쌈을 하지 않다가 주암동 삼부골로 시집와서 이웃에서 쓰던 베틀을 가져와 무명을 짰다. 삼부골에서도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짜지 않고 본인만 짰다. 이불감·남자옷감·두루마기감도 썼고 1년에 200자씩 짰다. 곱게 8∼9새까지도 짰다. 처음 짰을 때는 서툴러서 “소말뚝 말말뚝 다 해 놓고 짰구나”하면서 놀림을 받았다 한다.
박을희(79세)씨는 비산동 친정동네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갈현동 가루개의 시집동네에서는 부잣집 두 집에서 누에치고 목화따는 일을 해서 그 집 일을 도와주고 밥도 얻어 먹었다고 한다. 누에치기는 1년에 2번 했는데 이웃마을 가일동네에서 명주짜는 이가 있어서 그집에 가서 명주를 짜다가 반씩 나눠 가지는 것을 보았다 한다.
(2) 옷감
제보자들의 혼례를 전후하여 많이 쓰인 옷감과 혼례 때 쓰인 것들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쓰인 것이 광목이며 광목을 노년층에서는 ‘외포’라고 하고 있다. 이는 재래식으로 집에서 베틀로 짠 것은 미영이라고 하여 폭이 좁은데 비해, 일제강점기에 와서 기계로 짜서 폭이 넓고 발이 가는 것들이 나오자 외포라고 하기 시작했으며 차츰 광 즉, 폭이 넓다 하여 광목이라고 했다.
광목은 다른 옷감에 비해 가장 실용적이고 값이 쌌기 때문에 많이 사용된 것이다. 특히 길쌈을 안했기 때문에 명주나 무명·삼베·모시는 귀한 것이어서 여름에도 삼베보다는 광목을 주로 입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평상복으로 사용되던 삼베나 모시·명주가 과천에서는 귀한 것이었다.
주로 신부옷감이나 함에 넣는 채단은 1900년대는 삼탈·명주·오복수·재병·숙고사·갑사가 고급이었으며, 차차 재병이나 오복수가 없어지면서 1930년대는 모본단·법단·양단이 나왔고, 다음으로 1940년대는 뉴똥·하브다이·세루·인조견·옥양목으로 변하였다. 흔하게는 안썼으나 불란사·해동자·광당포·광해인조·나단·개량포도 있었다.
70세의 한 아주머니는 현재 55세된 시누이가 18세 때 시집갈 때 함속에 채단 중에 하비단과 유똥만 넣은 것을 보고 ‘비로도치마’ 한 감도 없다고 호통쳤다고 한다. 1950년대는 세루가 들어가고 비로도가 최고품으로 유행하였다.
(3) 염색
집에서 전통 자연염료를 만들어 쓴 일은 한 사람도 없었다. 주로 ‘어리장사’가 와서 파는 물감을 사서 쓰거나 시장에서 구입하여 쓰거나 물들인 옷감을 썼다. 색은 아이들이나 혼사 때 쓸 물건 등 용도에 맞게 썼는데, 주로 검정·남색·빨강·분홍·노랑·초록색이었다.
(4) 비누와 세탁
이 시대의 비누는 ‘잿물’과 ‘잿물비누’(또는 겨비누)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비누도 있었으나 매우 귀한 것들이어서 쓸 수 없었고 잿물이나 잿물비누도 귀한 것들이었다. 어렸을 때는 잿물을 내려서 쓰다가 일제 때 양잿물이 나와서 잿물비누를 만들어 썼다.
잿물은 콩깍지나 메밀 또는 조짚을 태운 재를 모아서 시루에 담고 위로 물을 부어서 갈아 앉힌 물을 말한다. 누런색이 되며 빨래 삶을 때 쓰는데 그 중에서도 콩깍지 잿물이 제일 독한 것이었다. 그러나 잿물은 약해서 무명옷의 줄 때는 지지 않았다. 일제 때 양잿물이 나왔는데 뽀얀색이고 매우 독했다. 용산에 가서 사서 한 자배기씩 머리에 이고 와서 사용하였다. 양잿물에 외포를 삶으면 하얗게 잘 표백이 된다. 물론 양잿물에 삶은 다음에 몇 번씩 햇볕에 말리면 하얗게 바랬다. 오래 쓰려고 등겨에다 잿물을 섞어 비누를 만드는데, 양잿물을 팔팔 끓이다가 등겨를 넣고 굳힌 다음 적당한 크기로 짤라 두었다가 쓴다. 시커멓게 누런색의 비누라 ‘꺼먹비누’·‘개비누’·‘잿물비누’라 하였다.
잿물비누 빨래를 하고 나면 독해서 손이 터지고 쓰리고 습진이 생겨서 피고름이 나기도 했다. 양잿물 빨래를 한 날에는 손이 쓰려서 잠을 못잤다고 한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잿물비누를 만들어 썼으며(금남섭 57세), 처녀 때 과천 읍내에서 살 때는 잿물을 내려서 빨래한 적이 없었는데 18세 때 윗배랭이골으로 시집와서는 약 10여 년이 넘도록까지 겨비누를 만들어 썼다(문기수 63세).
풀은 주로 쌀풀을 썼다. 쌀을 풀에 담갔다가 ‘풀멧돌’에 곱게 갈아서 앙금을 앉힌 다음 풀을 쒀서 적당한 크기로 떠서 물에 담갔다가 쓴다. 쌀이 귀할 때는 ‘밀풀’도 썼는데 밀풀은 밀찌꺼기를 담갔다가 썩혀서 윗물을 자주 따라내고 앙금으로 풀을 쑨다.
밀풀은 끈기가 없고 약하기 때문에 자주 빨아 입는 여름 옷이나 삼베옷에 썼다. 풀한 옷은 다름이질을 하고 고급 것은 다시 ‘홍두께’에 올려서 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5) 바느질
바느질은 손재간이 있고 여유있는 부인네가 하였다. 바느질 재간이 있으면 힘든 농사일이나 집안 뒷치닥거리 일을 하지 않았으며 험한 고생은 덜 하였다.
김부전(89세)씨는 젊어서는 손바느질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재봉틀을 사서 작년까지 옷을 만들었으며 솜씨도 좋고해서 험한 일을 겪지 않았다고 하며 색시옷을 가장 많이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일상복으로는 광목이나 베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는데, 물겹저고리·물겹바지·백이겹저고리·백이겹바지·적삼·고이·잠방이·두루마기를 주로 만들었다. 적삼 한 벌 공전이 10원이고 하루 일 품삯도 10원이므로 적삼 하나 만들어 주고 집에 와서 일품을 탄 사람이 많았다 한다. 손으로 바느질 할 때는 적삼이나 백이옷 하기가 힘이 들었는데, 재봉틀로 하니까 매우 빠르고 쉬웠다.
동정달기는 곱게 입을 옷에는 속에 창호지심을 넣어 달고, 막빨아 입을 백이옥이나 적삼에는 재봉틀도 그냥 박아 붙였다. 김부전씨가 사는 주암동 삼부골마을에는 40여 가구 중에서 재봉틀이 4대가 있었다. 재봉틀이 없는 사람은 모두 손바느질을 하고 좋은 옷들은 바느질집에 맡겨 했으나 차츰 시장에서 팔 물건이 흔해지고 일이 바빠지자 구입해서 입기 시작하였다.
수(繡)를 놓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가끔 솜씨있는 이나 아기들 ‘타래버선’에 수를 놓는 정도였으며 시집오기 전 혼수품으로 베갯모나 퇴침·수저집을 놓은 정도 뿐이고 중둥풀이 수도 놓은 이가 없었다. 금남섭(53세)씨는 1961년 시집을 때 퇴침·인두판·양복덮개·방석에 직접 수를 놓고 가져 왔는데 방석과 양복덮개는 광목에다 십자수를 놓았다.
▣ 4. 과천(果川) 막계동(莫溪洞) 출토 16세기 유의(遺衣)
과천 막계리 궁말 학봉 북쪽에 리잡고 있던 광주 이씨(廣州 李氏) 묘들을 과천 서울대공원공사 관계로 이장하던 중에 시신과 함께 묻혔던 유의들이 나왔다. 주인공은 광주이씨 언웅(彦雄: 사용원봉사: 종8품)과 그의 며느리 청주 한씨(淸州 韓氏)이다.
두 분 모두 생몰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년대 후기 인물들로 추정된다. 청주 한씨는 중종의 2년 의혜공주(懿惠公主)의 손녀이며 결혼후 곧 죽었고, 남편 집일(執一)도 40세(1574∼1613)에 죽었다.
본 출토 유물들은 16세기경 조선초기 우리나라 복식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광주 이씨 종중의 기증에 의해 단국대학교 부속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80년 11월 29일 중요민속자료 제 114호로 지정되었다.
출토 후 복잡한 경로를 거쳐서 단국대학교로 전달되었는데 심한 악취와 많은 오물이 붙어 있고 파손으로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종중의 말에 의하면 시신이 입고 있던 것들은 시신과 함께 이장을 하였다 하니 지금 남아 있는 유물들은 생전에 입었던 옷들이거나 주위 사람들 것을 보공으로 넣었던 것으로 본다.
출토 후에 수습될 때 남자 것(시아버지 彦雄)과 여자 것(청주 한씨)이 섞여 있어서 남·녀별 구별이 어려웠다. 보수·정리된 것은 약 50여 점으로 형태 파악이 완전한 것들로는 포도동자문단직금대란(葡萄童子紋緞織金大?) 치마 1점·소저적삼(素紵赤衫) 2점·청세면누비직령겹액주음포(靑細綿納衣直領?腋注音袍) 1점·겹유(?횼) 저고리 4점·겹유 직령포(直領袍) 2점·청액주음포(靑腋注音袍) 1점·직금삼회장(織金三回裝) 저고리 1점·명주목단문삼회장겹저고리 1점·겹유적건(?횼赤巾) 1점·목겹버선 1점·악수(幄手) 1점·명목 2점·습리(襲履) 1점·널이불 1점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파손된 옷 부분들이 많다.
옷감은 화려한 비단류가 많은데 비단에는 각종의 무늬와 직금(織金)된 것, 금박(金箔)된 것이 있었다. 금박은 보수과정에서 완전히 없어졌으나 직접 짠 직금은 남아 있다. 모두 빛이 바래서 희미하지만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색깔도 모두 상색(챑色: 누런 단풍물든 색)으로 변하여 원래 색상을 알아 보기가 힘들다. 색상이 구별되는 것은 모시와 솜·무영이 원래색으로 바탕색(素色)을 유지하고 있으며, 색깔이 있는 염색된 것으로는 남색(쪽빛)만은 비교적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출토 유의(遺衣) 중에서 단령(團領)은 조선말까지 관리들이 입었던 관복(冠服)인데 파손이 심하여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둥근형의 좁은 깃과 길이도 길고 소매가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액주음포(液注音袍)는 겨드랑이 밑 허리선 쪽에 잔주름을 잡은 것으로 무명과 모시로 된 것 3점이 있다. 이 옷은 조선 전기 임진란 때까지만 보이는 옷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저고리도 매우 크고 넉넉하고 깃은 목판깃이며 겨드랑이 밑에 삼각무를 단 것과 저고리 위에 덧입는 것으로 겨드랑이 밑이 트인 저고리 보다 큰 옷이 있다. 저고리는 조선 중기로 내려오면 깃모양도 바뀌고 치수도 차츰 작아지게 된다.
치마 여섯점 중에서 치마의 중간과 아랫쪽에 직접 금실을 넣어서 짠 직금(織金)치마가 있는데 문양은 동자(童子)와 포도문이다. 이 치마는 예복치마로 입었던 것으로 길이가 130㎝ 정도나 되고 폭은 파손되어 4폭만 남아 있으나 적어도 8∼9폭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길이가 길기 때문에 앞 중심쪽으로 꿰매서 걸을 때 밟히지 않도록 하였다. 이런 동자포도문양이 있고 길고 큰 치마는 조선 초기 것으로는 경기도 양주에서 출토된 원주 원씨(原州元氏) 것이 있을 뿐 매우 귀한 자료이다.
【사진】동자 포도문 대란치마, 동자 포도 문양(치마에 직금)
치마는 이 외에도 평소에 입던 것들로 보이는 화려한 무늬가 있는 솜치마가 많은데 폭이 8∼12폭이다. 치마 너비만도 450㎝ 이상이나 된다. 여자 속옷도 현재 60∼70세 노인들도 입어왔던 것과 같은 속곳과 바지가 있어 속옷은 오랜 세월 동안 모양에 변함 없이 입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유품이 많고 더욱이 화려한 것들이 많은 점은 비록 광주 이씨의 벼슬은 높지 않았지만, 청주 한씨가 공주의 손녀로서 당시 왕족가문의 후광을 받아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 유물이 출토되고 보수 정리됨으로 해서 1600년대의 의생활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 광주이씨 묘소 출토 유의(遺衣)
【사진】삼회장저고리(좌), 삼회장저고리(우)
【사진】겹저고리(좌), 삼회장저고리(우)
【사진】솜저고리(옆트임)(좌), 솜치마(우)
【사진】직령포(좌), 액주음포(腋注音袍)(우)
【사진】첩리(帖裏)
【사진】속곳(좌), 밑트인 속 너른바지(우)
【사진】겹버선(좌), 습신(우)
【사진】악수(좌), 명목(우)
【사진】대렴포(좌), 묶음베(우)
【사진】칠보운문양(七寶雲紋樣)
▣ 5. 맺는말
이 곳의 생활기반은 식량의 자급자족생산 형태로 빈부의 차는 심하지 않고 계층의 차이도 없으나 빈촌이다. 식량은 그런대로 충분치는 않으나 조달할 수 있었다 하며, 겨울철이면 나무를 해서 팔고 산나물과 채소를 해서 팔았다. 서울이 가깝기 때문에 나무나 나물을 팔아서 필요한 일용품을 마련하고 일찍이 화폐경제생활을 하였으며 심한 보릿고개의 고충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은 서울 인근에 있으면서도 상류계층, 즉 왕족이나 양반가라든가 신흥종교나 신흥경제세력에 크게 좌우됨이 없이 평범한 농사꾼 민촌(民村)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의생활은 의료(衣料)를 서울이나 안양 등지에서 구입하여 썼으며, 모시나 삼베·명주·무명생산이 근대까지 계속되었던 다른 지역에 비해 의료가 풍부하지 못하였다.
광목을 가장 많이 이용하여 의생활은 사계절 모두 매우 단조롭게 나타나고 있으며 빈부 계층 차이가 없으므로 매우 일률적이고 서민적으로 나타났다. 남녀노소없이 여름에는 홑옷으로, 겨울에는 겹이나 솜옷으로 생활하였다.
의례복에서도 색시혼례복으로는 원삼과 족두리 차림이 혼례복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원삼을 입지 못하였다는 점도 이 지역이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시집에서 받는 채단 가운데는 반드시 ‘관계백금’이라 하여 홍치마에 연두색 삼회장저고리가 필수품인데도 이 곳에서는 전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다.
1900년대 전후 대한제국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과천지방의 의생활은 조선시대 왕도(王都)의 외곽 지역으로 반나절 도보거리에 있기 때문에 모든 풍습이 매우 빨리 흡수 전파가 될 것임에도 전혀 서울의 상층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반촌(班村)이라든가 대농(大農), 부농(富農)이 아닌 일반 민촌(民村)이 갖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과천 지역 의생활이 갖는 특징이면서 한국이 전형적인 민촌이 갖는 고유문화적 배경이기도 하다.
【집필자】 高富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