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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는 우울한 현대의 모습]
작성자 : 김종신 선교사
신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hl'WbG 게부라, ‘경계선’, ‘지역’ 지경, 경계, 장소)를 정하셨도다(bc;n" 나짜브(기본어근; ‘자리잡다’, 다양하게 적용되어 설립하다, 세우다, 놓다, 배치하다, 공고히 하다).” In the Most High causing nations to inherit, In His separating sons of Adam -- He setteth up the borders of the peoples By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o`roqesi,a 호로데시아(‘제한된 곳’, ‘경계선’, 경계)를 한하셨으니(prota, ssw 프로탓소, ‘사전에 조정하다’, 즉 ‘미리 규정하다)” “He made also of one blood every nation of men, to dwell upon all the face of the earth having ordained times before appointed, and the bounds of their dwellings.”
욥 14:5,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qx 호크(‘재정’ 따라서 ‘지정’(시간, 공간, 양, 노동), 제정한, 한계, 몫, 정해진)을 정하여 넘어가지(rb;[ 아바르(기본어근, ‘건너가다’ 넘겨주다, ~을 넘어가다, ~을 건너다, ~을 통과하다, 간섭하다) 못하게(al 로(신 3:11), ‘아닌’ ‘아니다’ …도 아닌, 결코…아닌) 하셨사온즉”, If determined are his days, The number of his months [are] with Thee, His limit Thou hast made, And he pass not over;
우리 기독인들은 현실을 어떻게 규명 할 것인가?
여기에 따라 미래와 연결 될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선택도 바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 하면서 지혜라는 미명아래 다르게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감추고서 저질러지는 타락의 뿌리입니다.
현실적으로 실존의 욕망이 강한 인간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성향이 강합니다.
저는 목사로써 선지자적 자세를 가져야 함을 명심하여 성경으로 말하고자 해서
성경에 의존해서 사실적인 측면을 바로 밝히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지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얼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얼굴에서 드러나는 만상(萬狀)에 대해서 말입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입을 열어야 겠다는 굳은 절개의 심정으로 입을 열어 봅니다.
그것은 “왜, 현대인들이 웃는데 우울한가?”의 문제에 대한 화두입니다.
특히 우리 기독인들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본인은 다음 성경구절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먼저, 제시하는 성경구절의 내용들은 성경 전체 여섯 곳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와 연결해서 말해지는 내용들은 좀 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현대인들의 ‘웃는 상이 오히려 우울하다는 것’이며
그 근원이 왜, 이 성경 구절들에게 있다는 것입니까?
본 성경구절들은 ‘세상과 그 안에 실존하는 모든 의미들이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지속되어가는가’에 대한 해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대한 정도(正道)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역행하고자 하는 힘이 오늘시대 속에서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이점이 바로 오늘 ‘현대인들이 웃지만 우울증의 증세’에 빠지게 하는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유의하면서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예로 제시해 드린 성경구절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혈통"이란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억지해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합니다.
요즘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인류의 대표자를 여럿 만드셨다고 해석하는 부류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무튼 현대는 다양성이 시대적으로 주도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은 인간 이성에다 권위를 부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영향들은 성경 해석도 자기들 마음대로,
혹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자신의 내면에 정제되어 있는 정서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한 혈통"이란,
인간이 동물이나 그 어떠한 물질과 결합이 되었거나
미생물 형태의 존재나 중간형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오늘 인류의 모습임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시공간의 길이와 변화도 포함됩니다.
연대를 정하시고, 경계를 정해놓으셨고,
그리고 그러한 법칙을 넘지 말도록 해놓으셨다는 ‘하나님의 규정’입니다.
저는 여기에 역점을 두고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와 인류 사회가 바르게 지속되고
문제가 없어지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자 최소한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부정하고 인간이 제멋대로 재설정하거나 파괴하고,
다르게 건설하고, 이론을 세우는 것 등의 이유들에 의해서
인류와 인간 사회가 복잡해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연대 문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 현대인들이 웃는데 우울한가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밝히고자 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지적해 놓은 ‘경계의 문제’로 풀어 보겠습니다.
그럼 세 구절들을 좀 구체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신명기(32:8)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관계해서 민족별로 경계를 정해놓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민족별 경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민족별 경계란 12지파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구분은 영원한 갈림이나 국가적 경계를 의미하는 구분이 아닙니다.
즉, 오늘 날처럼 세계화적 문화 컨셉과 같은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라는 이름아래 전 세계의 지역 경계가 없어지고
문화경계로 세계를 통폐합하는 것은 오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문화정책이란 개념이 약 100년 전부터 등장하였고,
그 동안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에 역행하는 인간의 교만성입니다.
이스라엘과 관계해서 주어진 경계의 문제는,
한 구조(부족, 나라와 같은 구조)안의 서로 존중성이 깔린 형제,
혹은 지파별 경계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지파별 경계에 의해서 국가 내의 지역들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이 지파별 경계에 의해서 사회구조가 형성되고 관계가 설정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국가나 사회형태의 기본이 바로 이 지파별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모든 나라마다
사회의 기본 경계가 있고,
그 기본 경계에 의해서 그 사회는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그 사회가 약화되어 가다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과도기이고
그래서 국민들의 얼굴에서 웃지만 우울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며,
저는 이것을 홍콩에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홍콩은 영국이 150년 동안을 조차하여 다스리면서 외형적으로 잘 발전 된 도시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의 통치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다보니 생긴 지배력의 기술입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 본래의 원주민들이 가장자리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집들은 7평, 9평, 11평, 13평 등 좁은 공간에서
1대, 2대, 3대가 함께 지내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 한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이들은 홍콩 지역이 좁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하고 반문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사는 집의 구조들은 대궐 같이 지었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월 동안에 홍콩 본토인들의 행복은 사라져 갔고,
그 증거가 얼굴들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들도 처음 한 때는 웃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과정이 웃지만 우울한 표정의 과정이었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에 대한 앞서간 지역들의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던 변화가
우리를 일깨우는 교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얼굴이 웃는데 우울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본이나 전통이 사라지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원사회에 충실하게 임했던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에서 나타나게 되는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회의 속성이 악한 쪽으로 강해져가는 속성(屬性)말입니다.
다음은 사도행전(17:26)에서 말하고 있는 경계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o`roqesi,a 호로데시아(‘제한된 곳’, ‘경계선’, 경계(여성명사. boundary, limit)를 한하셨으니(prota, ssw 프로탓소(‘사전에 조정하다’, 즉 ‘미리 규정하다)” 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류를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고 명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문화적 명령’과 관계해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현대적 해석으로 맞습니다.
현대 인류의 문명적 관점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으로 볼 때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참 된 방향에서 바라 본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씀이 제시하는 배경으로 중요한 것은 인류 역사의 발전상의 기반입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는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땅을 딛고서 인류가 발전 할 수밖에 없는 육체적 기반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육체적으로 발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류는 이 지구상에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배경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대 인류는 자신들이 잘 나서 오늘의 발전의 시대를 이룩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마음대로 유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어떤 특정한 세력들이 함부로 아무렇게나
자신들의 일방적이고 결정적 의지로 땅을 분할 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하신 말씀입니다.
"경계"는 ‘제한 된 곳’을 의미하는 것이고 “한하셨다”는 것은 사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 지구 안에 흩어져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적당한 장소에서 군집을 이루며 살는 것을 허용 하셨습니다.
허지만 인류가 사회를 이루는 그 지역마다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미리 규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에 의해서 세상이 운용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난 과거 시대는 아무리 전쟁으로 이 법칙을 깨고자 했어도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까지 인류의 세계가 지속되어 온 진정한 노선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에 이르러 이 근본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는 것은 인류가 발전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심판하실 그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가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마지막 때의 성향이 무지와 교만으로 나아가는 것 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현대인들의 “얼굴이 웃지만 우울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경계를 정해 놓으시고 서로 넘지 못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욥기(14:5)에서 밝히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 제한(qx 호크(‘재정’ 따라서 ‘지정’(시간, 공간, 양, 노동), 제정한, 한계, 몫, 정해진)을 정하여 넘어가지(rb;[ 아바르(기본어근, ‘건너가다’ 넘겨주다, ~을 넘어가다, 경과하다, ~을 건너다, ~을 통과하다, 간섭하다, 분할하다, 할당해주다, 넘겨 보내다, 분립시키다, 쫓아내다) 못하게(al 로(신 3:11), ‘아닌’, …도 아닌, 결코…아닌, …아니다) 하셨사온즉”
즉,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 규정들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경계를 서로 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각 나라의 영토권과 모든 국민의 인격성과
그 나라의 역사성을 포함하는 울타리, 즉 경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당대의 인간세계가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서로 존중하지 않고 경계를 무너트리는 행위를 할 때,
그 인류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혼돈으로 빠질 것을 예시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웃지만 우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현대의 세계화는 정말 성경에 반대되는 제도라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목사로써 이렇게 주장합니다.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에 도달한 인류가 교만함과 무지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립하는 역행의 제도로 말입니다.
노아 홍수 직후에 인류가 교만함에 빠져서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과 대립하고자 했던
그 행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한 기류의 추종자들이 준동(蠢動)하여 드러나는 파괴의 성질이 극대화 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아놀드 토인비'는 자신의 저서 “역사적 연구”에서 ‘창조적 소수자’들로 명명해 놓았습니다.
즉, 이 현대적 현실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는
진정한 영적 지도자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망하는 길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부류들과 악의 성질이 오늘의 현대를 주도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차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일반은총의 법칙에서도 지역나라들의 파괴와
경계의 무너짐을 추구하는 구조가 점차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얼굴이 웃는 우울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들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기독인들 중에서도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잘못 가르침에 의해서 따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유력한 대상자들로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현재는 각 나라, 각 지역에 통제의 장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동조하는 세력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할이 끝나면 그 때부터 제거의 대상의 위치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각 나라나 각 지역의 항거자들을 잠재우기 위한 도구들로써
필요에 의해서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끝나면 바로 제거 대상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밀 유지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본격적인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이상 필요로 하는 현실적 이유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이나 보수층이라는 지대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수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민족을 억압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본 경계를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보수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세력들의 힘을 잘 수용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보수 그룹의 역할들이 외부에서 들어 온 잘못 된 움직임들을
이용하고자 함이라면 좋습니다.
그런데 이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잠시 동안의 자리 보전을 위해서 선택하는 어리석음이며
이미 그러한 사고에 포로가 되어있다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목사지만 보수적 기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앙을 비롯해서 모든 것의 전통성을 지키고 중요시 하고자 하는 기질말입니다.
저는 PD 수첩이 옳았다고 봅니다.
정말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20-30년 후에 각 지역의 인간들을
어떠한 뇌가 되게 할 지 모릅니다.
왜, 선진국을 중심으로하는 나라들이 신약 개발을 하는 것입니까?
왜, 연구소에서 인간 두뇌에 관한 연구들이 진행되는 것입니까?
이것들이 과연 선하게 사용 되리라 보십니까?
성경은 인간들을 향해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외부의 힘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구조가 되었을 때,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미래역사학자들이 지적한대로 인간의 뇌를 조절하는 신약들이
음성적으로 투입되는 때가 있을 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같은 악을 저지르는대도 아무도 막을 힘이 없는 구조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국민들이 어떠한 현실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이유가 오늘 우리의 얼굴을 웃지만 우울하게 하는 이유가 아닙니까?
그래서 PD 수첩과 같은 내부 고발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설령 PD 수첩에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방송을 내 보낸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우리 사회를 지키고자 했던 내부 고발을 담당한 매체의 역할이었습니다.
그 부분은 우리가 안아야 할 부분입니다.
외부의 작용은 우리 사회 안에 들어와 온갖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중심 기반들을 무너트리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교육과 법, 그리고 종교가 집중적으로 건드러지고 있습니다.
법조계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양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군 구조나 교육 등 모두가 우리 순수한 사회기반의 기둥들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종교 기능이 더욱 중요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법조계가 우리의 순수한 경계를 지키려고 하다
곤경에 빠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법조계가 무너지면 정말 우리는 철저히 우리 사회를 무너트리는
숙주의 두뇌 활동의 지렛대로 전락하는 법이 될 것입니다.
이미 경제구조는 끝났습니다.
군구조도, 교육계도 이미 위험 수위에 들어가 있습니다.
경찰에는 오래 전에 외부 세력들을 경계하는 특수 기관이
오히려 우리 내부를 지향하는 활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대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 어떠한 악을 덥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과거 일본 압제시대의 통제 그룹은 우리 사회의 내부고발자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를 감시하고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내부 고발자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과도기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미국의 식물 연구소에서 우리 한국 전 지역의 식물들을 채취하여 연구를 하는지?
우리는 '궁금해 하며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는 낙천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시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냉철하게 보고, 실용적으로 대처하며, 안으로 고도의 전략으로 뭉쳐야 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신 선물들,
우리의 후손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 등의 이유들을 지키기 위해서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전국가적으로 지혜를 모아 조금씩 진실이 알려지도록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만의 사회 구조라면 때론 진실들이 가려지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웃을 수 있고,
그것이 자연적인 행복이 되며,
바른 삶과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울하지 않는 참 된 웃음이 우리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지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옥으로 떨어질 바에야 차라리 그들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에게 잠시 쓰임 받기 때문에 웃지만 진정한 웃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큰 근심이 항상 자신을 누르게 됩니다.
지옥가는 문제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성립됩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에
결코 타협이나 거짓,
혹은 잘못 된 세력을 수용하지 않는 바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현대인들이 우울한 것입니까?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까?
왜, 우리나라나 세계에 유명한 인사들이 어느 날 자살하거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들이 빈번해진 시대가 되었습니까?
저는 지면을 통해서 이 이유들에 대해서 말씀을 예로 들어서
줄기차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 현실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지구의 '땅의 경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즉, 각 나라만의 고유한 권한이 강한 자들의 억지,
혹은 인위적으로 해체를 당하기 때문에 그 여파로,
여진에 의해서 국민들이 현실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웃지만 우울한 이유입니다.
신앙도, 나라도 잃어버리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사회는 상호 연관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외면하고 그 사회에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사회가 악의 힘이 주도하는 구조로 전락해 가는데
교회가 독립적으로 신앙 내용들을 성경대로 따를 수 있는 현실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묘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나라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방향으로 설교를 해야 하고,
교육을 해야하는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혜롭게 말을 잘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웃지만 우울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증거는 바른 행동과 선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코 눈속임이나 지혜라는 명분으로 거짓되게,
혹은 방임적 태도로 적을 수용하는 현실에 의거하여 수심이 가득한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주의나 작은 정부론의 원리는
‘스팬서(개인주의와 사회 진화론 주창을 하였음)’나,
‘아담 스미스(국부론의 저자로 자유방임주의의 주창을 하였음)’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창조의 규정'인
'각 국가 경계'를 전면적으로 무너트리는 역할의 이론가들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육계의 ‘이반 일리취도’ 탈 사회나 탈 공교육 이론가로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들 이론가들에 의해서 세계는 농락을 당하며
그 사회들이 혼란의 공간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류가 바로 그 사회의 자연적 행복을 차단하고
전통적 신앙을 무너지게 하는 현실적 힘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를 이간하여 근본적인 갭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세계화라는 힘으로 등장한 현대적 파멸의 근원입니다.
교활하고 지저분한 사탄의 정책으로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에서 드러나는 교란(攪亂)술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올무에 빠져 허덕이지 마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존하시는 생애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들은 이러한 사탄의 전략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는 그 어떠한 그릇 된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신앙도, 나라도 지키시는 참 된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영원한 문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환난을 당할지라도 강하고 담대하십시요.
강하고 담대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면전의식"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여러분들의 복을 구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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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회복 하셔서 주님의 명령을 실행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