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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순 시집 해설
생명의 나무
1.
사무실 컴퓨터 프린터기 앞에 백 여 페이지에 달하는 시가 출력되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나의 작품이라고 한마디씩 한다. 내가 보니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그렇고 그런 소녀 취향의 작품들이었다. 누군가가 출력 해놓고 찾아가지 않은 모양이다.
한 밤 중 누군가 그립다 생각하면/나도 잠 못 들고/하늘도 잠 못 들고/내 그리움 또한 잠 못 들어/돌아눕는다/
괜히 화가 났다. 사람들은 시의 모습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토막낸 글이라면 모두 시라고 한다. 시는 예술작품이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예술다운 품격이 있어야 한다.
쉬클로프스키의 예술정의인 <낯설게 하기>는 대상을 새로운 의미론적 계열 속에 놓는 일이다. 대상을 그 이름으로부터 해방시켜, 순수한 자체의 경험적 차원에서 묘사한다. 그것은 비일상적인 시각을 제시하며 대상과 주체의 거리를 극대화하여 바라본다. 또는 현미경으로 바라본다. 매우 완만한 행위의 체계로 바라본다. 한 대상을 매우 낯설은 대상과 병치함으로써 주의하지 못했던 대상의 특성을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낯설게 하기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만든다. 시란 낯선 체험을 공유하는 것으로 공감대를 확산해 나가는 예술이다.
시라고 말할 수 없는 위의 글에는 시적 표현도 삶의 향기도 없다. 내용도 누군가가 그리워 잠 못 들어하는 것이 전부다. 이런 류의 작품을 쓰는 시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단한 시인으로 세상이 다 아는 류 모씨나 정 모씨의 작품들도 그런 유행가 가사의 내용과 같은 1차적인 정감으로 온통 치장하고 있다. 외로움, 고독, 그리움, 슬픔, 노여움과 같은 정서는 승화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들이기에 예술로 승화될 수가 없다. 10대 여학생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얄팍한 상업주의에 편승한 그런 작품들은 시장의 이윤추구 상품으로 거래되는 한낱 책으로 포장된 물건일 뿐이다. 그것들은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서를 유포시키는 환상의 찌꺼기에 불과하며 삶의 어려움과 어둠을 헤쳐나가는 수단이 사랑뿐이라는 의미를 유포시키면서 현실을 왜곡하고 몽롱한 환상 속에서 순간의 위안을 느끼도록 현실감각을 마비시킨다. 그것은 각박하고 황폐한 우리 삶에서 그것들을 치유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지 못하고 단지 시문학이 자위 수단이 될 위험과 함께 자극과 배설의 출구로밖에 될 수 없는 얄팍한 물질주의 예술관이 낳은 퇴폐에 불과하다.
2.
내가 아는 김미순 시인은 장애자 학교에 오래 동안 근무해 오면서 평생을 봉사하는 아름다운 생활을 한다. 그러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실천하는 무언의 실천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사는 시인에게는 그 삶이 바로 시이며, 생활이 곧 시적 삶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김미순 시인을 알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오래 전에 부산시인협회와 일본국 후꾸오카시인협회가 자매 결연을 맺고 세미나를 가졌을 때 함께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일본의 풍물을 접해 볼 수 있었는데 시인은 언제나 조용한 어조로 묻고 대답하곤 했다. 김 시인은 톡톡 튀지 않고 오랜 세월 곰삭은 장아찌처럼, 한국의 옛 여인처럼 세상의 법리에 순응하는 태도였다. 어쩌면 달관의 경지에 오른 현모양처의 모습을 가졌다고나 할까. 무엇이 시인을 그렇게 유순한 생활 태도를 갖게 했을까. 시인이 장애자와 함께 생활하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지닌 장애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 장애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아픈 현실이기에 시적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 그들을 위한 배려라 여겨진다. 그들의 아픔을 홀로 삭히면서 그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아픈 현실에 처한 사물들이며 갑남을녀들이 보통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이다. 어쩌면 약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시들은 현실 속에서 어떤 변혁을 꿈꾸지 않고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가끔은
다 드러낸 네가 좋다
온돌을 지피는 따뜻한 횟집 식탁에선 싱싱한 바다 내음이 벗겨져 내리고 찰랑이는 은빛을 사랑하던 소라들이 소금불 위에서 탁탁 튀며 몸을 익힐 때 더 출렁이는 바다, 그래서 더 추운 방파제의 바람―네가 좋다.
추운 뿌리들의 창문에 불을 밝히고 습기를 제거한 언어들이 그대로 흔들리며 잠을 청할 때 더 가릴 것이 없이 맨살로 떨고있는 겨울바다, 그래서 더 추워지는 네가 좋다.
한 계절씩 흔들고 있는 저 바람 한 올 안으로 파닥이는 숨 하나 확인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조용히 엎디어 큰 숨쉬고 있는 작은 마을 청사포, 그래서 외로운 겨울바람―가끔은 네가 좋다.
<청사포의 계절> 전문
추위까지도 사랑하는 따뜻한 심성이 배어나는 작품이다. 이렇듯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공감의 시를 김 시인은 갖고 있다. 뜨거운 가슴이 아닌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심성으로 경험한 세계를 재구성하여 일상 삶의 체계에 세우고자 한다. 그러므로 소재로 삼는 것들도 바로 시인이 살아가는 생활현장이다. <人+間>이라는 광주 비엔날레의 주제라든가. <냉장고와 어머니>, <지금 남대천은>, <자유시인에 가면>, <과학연수>, <송정 가는 길>, <문화회관 앞뜰에 서면>, <화장터에서>, <때로는 광안리에서> 등 삶의 현장들 아니면 삶의 한 부분을 기록해 나간다. 딸을 수학여행 보낸 어머니로써 갖는 걱정 등 아주 소심한 부분에까지 생각은 닿아 있고 <도시의 시월> 연작에서는 학교 작업실 이 주사나 어느 버스 기사의 삶에 대한 내용을 소재로 하는 등 평범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김 시인의 시를 이루는 주 정서라 볼 수 있다.
어김없는 저녁나절 전기코드가 꼽히고 「참숯 불갈비의 네온사인」은 벌겋게 타기 시작했다 나의 이름은 참숯 그래 불붙여다오 어쩌면 추웠던 가슴이 따뜻해져 좋은 지도 몰라. 산 산골 하늘자락만 감고 살던 살갗의 세포 사이사이 찬란한 불빛으로 혼미해지는 기억이 눕고, 툭. 떨어져 삭아져 가는 핏줄 속으로 새롭게 잠드는 오기의 독백「나의 살 태우는 너의 성대한 만찬을 위해 이 저녁 내 몸 뜨겁게 달구어 주리.」풀풀 일어서는 연기로 눈물 흘리는 네 속눈썹 끝에 간신히 흔들려 보이는 차가운 이슬.
<숯의 독백> 전문
타는 것은 참숯이지만 뜨거움은 시적 화자가 느낀다. 참숯=시적 화자가 되어 세상을 향해 존재를 알린다. 내가 탐으로서 화사한 만찬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나는 더 활활 타오를 용의가 있다는 자기 희생의 의미를 담는다. 매운 연기가 날리는 네 눈썹 끝에 차가운 이슬로 잠깐 흔들려 보이더라도 그럴 것이다. 참숯은 오랜 세월 숲의 나무로 서있었고 하늘자락만 감고 살아왔던 세포들까지 태워 갈 때 소외되었던 존재의 오기를 다시 스스로 잠재우면서 불타오름을 다짐한다. 네온사인의 불붙음과 참숯의 불붙음을 서로 연결 짓고 있는 이 작품에서 시인이 가고자하는 봉사와 희생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는 한없이 작아지는 생의 의미를 들추어낸다.
김 시인의 시에서 발견하는 형식상의 모습은 일상성에 있다. 추상적이지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은 그의 시는 소박한 모습으로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 이런 관점과 연결시킬 때 김 시인의 작품은 낯설게 하기의 기법보다는 일상성 속에서 건져내는 가벼운 감성의 발견에 있다. 어떤 큰 메시지도 없이 삶이 갖는, 또는 삶에 놓여져 있는, 삶에 숨겨져 있는 생명의 의미들을 찾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3.
우리 삶의 변화는 누가 예측하기도 전에 이미 낯선 곳에 가 있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고 사람들의 생각 또한 그 변화 속도에 어울리게 단순화되었다고 본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장시나 행이 많은 시들은 점차 퇴조하고 짧은 시, 단순한 생각을 표출하는 단시들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한 양상으로 보여진다.
우리 시단에 이처럼 기계적이고 감각적인 모습의 시가 유행하고 있는 가운데 김 시인이 보여주는 일상성과 더불어 또 다른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흙 냄새이다.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흙은 우리에게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 터전을 주며 만물을 키우는 어머니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작품은 단순하게 농촌생활이나 전원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흙이 가진 모성적인 내용, 생명을 키우고 그것을 간직할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의 의미를 찾아간다. 흙의 원형에 접근하는 김 시인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은 바로 생명을 향한 외경심을 근간으로 한다.
나는 요즈음,
잘 울고 다닙니다
조용한 시내버스 안에서
복잡한 시장 골목에서
등나무 아래에 앉아 하늘을 보며
가을을 넘겨보는 해바라기 키를 재며
울고 또 웁니다
조금은 여유로운 쇼핑을 즐기고
막 나선 대형백화점 앞
수재민 돕기 자선 콘서트가 열리는
그 간이무대 가득
신나는 음악에 흔들리는 뜨거운 살 내음에
그만 또 울컥 울고 맙니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임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모두가
그토록 아름답고 소중해 보입니다
뚝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민망스러워
빨리 올려다 본 하늘엔
못 다 한, 글썽글썽한 동생의 숨 빛을 안은
빨간 노을만이
그리움처럼 타고 있습니다.
<눈물의 의미> 전문
그의 흙은 사람이 만든 인공적인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것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명의 활기를 찾아내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가 가고자하는 것은 자연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흙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모두가/그토록 아름답고 소중해 보입니다>며 생명에 대한 태도를 간직한다.
눈물은 인간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의사표현이다. 태어날 때 맨 처음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가 울음이다. 그래서 울음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시적 화자가 울고 다니는 이유를 살펴보아도 인간성에 반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찾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다. 복잡한 시장골목에서나 시내버스 안에서 하늘을 보고 해바라기 키를 재는 행위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며 대형백화점 앞에서 수재민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의 신나는 음악에 도리어 눈물이 난다는 것은 소외된 인간들을 위한 시적 화자의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다.
문명은 사람의 생활을 편하게 하는 것이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는 못한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시인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흙을 꿈꾼다. 흙은 농업, 농촌, 향토가 아니라 고향처럼 따뜻함을 주는 어머니의 품속이며 생명을 키워 주는 원형으로서의 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서 읽어 낼 수 있는 눈물에는 원시적인 힘이 있고 흙이 가진 모성애적 사랑이 숨겨져 있다. 김 시인 작품에 도처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뜨거운 감자껍질을 벗기는/까매진 손을 부러워하며>
<일제히 두 손을 흔들며 쏟아지는 삶의 움직임>
<…피부에/촉촉한 윤기를 선사할>
<입맥을 덥혀 주던 생솔과 지푸라기 냄새>
<세월의 생명을 아프게 눈 틔우는 남대천 물살 위로>
<살아 있음의 작은 희열/메밀꽃 필 무렵>
<햇빛 끝에 매달아 싱싱하게 살 채우는/진한 초록으로 서있고 싶다>
<희열의 삶>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교황의 미소가/마로니에 나무의 그늘처럼/파리 곳곳에 걸려 있다>
<진한 숨소리가 있어>
<봇도랑에 엎디어 자세히 자세히/작은 풀꽃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이파리들은 한 목숨에 대한/또 하나의 그리움을 쌓듯>
이처럼 터질 듯한 생명에의 탐구는 이 책의 어디를 펼치더라도 쉽게 발견해 낼 수 있는 정서이다. 시인의 생명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탐구는 기계문명과 정보화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강렬한 욕구의 현현이라 생각된다. 일상으로부터 생명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절실한 욕구를 지닐 수 있음은 그가 바로 곁에 두고 안타까워하는 장애자들의 삶 때문이리라. 그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결실이 바로 생명에 대한 외경심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곧 피워 올릴
고운 색깔을 생각합니다
예쁜 모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통한 씨앗을 생각합니다
꽃 한 송이의 의미와
그 생명을 생각합니다
<꽃의 본적 11> 뒷부분
꽃 한 송이가 지닌 고운 색깔이나 예쁜 모양이나 통통한 씨앗들은 바로 꽃이 가진 생명이며 존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긍정적이고 삶에의 희열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시편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 또한 생명의 존귀성이며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흙 내음을 섞어서 그가 구워낸 감자는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양식으로서 생명에 대한 시인이 갈망하는 세계다. 비록 TV를 통해 바라보는 어쩌면 문명의 이기를 통해 자신이 도달하고자하는 구원의 세계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김 시인의 시에는 문명으로부터 흙을 발견하고 생명의 힘을 느끼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놓여 있는 빈터를 발견하고 그 빈터에 돋아나는 강아지풀, 개망초, 약쑥, 쇠뜨기, 키 작은 잔디까지 한 덩어리로 어울려 누워도 보는 푸른 자유를 발견하는 시인은 그저 그것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 존재확인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이 땅의 여기에서 시인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웃들의 작은 몸짓들이 있기에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이는 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나 도시 생활에서는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의미에 속한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들에게 시인의 눈은 다가서 있고 그것들을 노래함으로써 평안과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생명을 찾는다.
이 아침,
당신의 푸른 숨소리와
당신이 전해주는 수액으로만
존재하는
당신의 나무에 매달린
아름다운
생명이게 하소서.
<꽃의 본적 12> 전문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존재는 내 스스로 어쩌지를 못한다. 생명을 잇게 하는 숨소리와 수액도 절대자가 나에게 전해주기에 내 존재는 절대자에게 의탁되어진 생명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거대한 생명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신탁에서 생겨난다고 시인은 믿는다.
브레히트의 경우 <중요한 것은 사물과 인간적인 진실의 분별이라고 했다. 자연과 인공적 산물 혹은 사회제도의 분별이 아니라 오히려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 변화 없고 영원하고 역사가 없는 것과 시간적으로 변하고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것 사이의 분별이다>고 했다. 김 시인이 갖는 사물에 대한 분별은 바로 생명력이다. 그의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은 그의 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가장 큰 나무줄기이다.
4.
지구 종말론으로 들뜨던 세기말이 지나고 새로운 세기의 첫해도 벌써 저물어 간다. 새로운 세기가 되었다고 그렇게 부산을 떨던 인간들도 조용해질 무렵 어느 날 초저녁 산등성이에 초생달이 떴다. 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빛이 어둠을 잠식하며 하늘을 차갑게 만든다. 달을 바라보는 마음이 차갑기 때문에 달빛이 차갑다고 느껴진다. 대상은 늘 거기에 있지만 마음에 그려지는 상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바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심상을 글로 그려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출된 심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주관적인 의미가 독자에게 전달되었을 때 얼마만큼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시적 성취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오랜만에
전화로 그대의 근황을 듣는다
청도 어디쯤
약간의 대추나무와 복숭아, 배나무가 있는
작은 당을 마련하고
감나무 묘목을 심으려 한다는
드문드문 일어서는 그리움의 키를 자르듯
식목일을 기해 가지치기를 했다는
가끔 가슴 열어 먼지 털어 낼
그 파란 하늘빛도
울타리가 불룩하게 채워 두었다는
<봄이 오는 소리> 앞부분
시인이 시를 쓰고 그것을 발표라고 하였을 때는 다수의 독자들 앞에 하나의 세계를 드러내 놓고 그 공감의 폭을 기대하는 것이다. 한 권의 시집, 나아가서 한 편의 시에도 그런 의미를 붙일 수 있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이 만난 하나의 세계를 보여 준다. 그것은 완성이며 가능한 한 완벽한 세계를 보여 주어야 한다. 시집은 사물들의 집이며 심상의 집이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의 집합체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 줄 때 시문학이라고 부르며 예술의 범주에 넣을 수가 있으며 독자들이 공감을 느낀다.
두서없이 살펴 본 김미순 시인의 작품을 읽을 때 남는 마음의 앙금은 김 시인이 추구하는 생명의 나무가 차별성을 획득하고 독자들에게 낯선 체험을 줄 때 그의 시적 영토는 확장되리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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