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은 해서 즉 황해도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온 해서탈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탈놀이다.
봉산탈춤은 약 200년전에 이 고장의 이속들에 의해 놀아왔으며 여기에 나오는 재담은 어느 탈놀이보다 한시의 인용과 풍자적인 시문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세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놀이는 황해도 지방의 큰 명절인 단오에 놀았으며, 장소는 원래 옛 봉산읍 경수대였던 것이 1915년 경에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기면서 그곳의 경암산 아래에서 하였다. 옛 봉산읍의 경수대는 강변의 평평한 터로 석벽 밑에 겨우 무릎이 닿을 높이의 돌축대를 쌓은 것 뿐인데 이와 같은 축대 위나 평지에서 노는 것이 황해도 탈춤의 공통된 탈판으로서 이러한 야외무대는 '경도잡지'의 이른바 야희의 전통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탈판은 낮에는 단오놀이의 씨름과 여자들의 그네뛰기에 사용되다가 밤에는 장작불을 피워 놓고 밤새도록 탈놀이를 하였다 한다. 봉산탈춤은 크게 7과장으로 나뉘는데 처음에 길놀이와 고사가 있고 끝에 지노귀굿을 한다.
제1과장은 사상좌춤으로 시작되고, 제2과장은 팔목중춤으로 건무가 있고, 제3과장 사당춤 에서는 사당과 거사의 춤과 노래가 이어진다. 제4과장 노장춤에서 제1경 노장춤은 노장과 소무놀이에 이어 제2경 신장수, 제3경 취발이 춤놀이가 있으며, 제5과장은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에는 양반들이 말뚝이에게 여지없이 조롱당한다.
제7과장 미얄춤의 미얄과 영감, 덜머리집과의 일부처첩의 싸움은 미얄의 죽음으로 끝나고 지노귀굿을 한다.
이 놀이의 마지막 절차로 놀이에 쓰였던 탈을 불에 태운다. 이 놀이 역시 산대도감계통극의 공통 주제(벽사의 의식무,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남녀의 대립과 갈등, 서민생활의 실상)를 담고 있다.
목중들의 의상은 화려한 더거리에 붉은 띠를 매며 소매에는 흰 한삼을 달았고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웃대님을 맨다. 목중춤은 한삼소매를 경쾌하게 잡아 돌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동작의 이른바 '깨끼춤'이 기본이 되는 건무이다.
여기에 나오는 배역은 모두 34인이나 탈은 겸용되기도 하여 실제 26개의 가면이 사용된다.
상좌(4개), 목중(8개), 거사(6개), 소무, 노장, 신장수, 원숭이, 취발이, 맏양반, 둘째양반, 도령, 말뚝이, 영감, 미얄, 덜머리집 남강노인, 무당, 사자 등이다.
황해도 탈춤은 그 탈, 의상, 춤, 재담의 유형으로 보아 기린, 봉산, 황주 등지의 평야지역을 대표하는 봉산탈춤형과 오진, 강령 및 해주 등지의 해안지대를 대표하는 해주탈춤형으로 나뉘는데, 현재 강령탈춤은 봉산탈춤과 함께 해서탈춤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봉산탈춤의 예능 보유자 양소운(1924년생, 상좌, 목중), 김기수(1936년생, 노장, 목중, 가면제작), 김애선(1937년생, 소무, 상좌, 목중)이 전승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