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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미와 민배기와 벌말 유감(有感)
도로의 직선화 덕에 조금 살아남은 효행길을 따르다가 떡집에서
산 떡 먹을 궁리를 했으나 마뜩찮아 참고 걸었다.
모락산(慕洛) 자락, 즐비한 아파트 가운데로 난 오르막 대로변에
(1번국도) 약수터가 있지 않은가.(LG아파트약수터?)
단연 오늘의 오아시스다.
모락산 들-날머리 답게 오르내리는 등산객, 약수 떠가려 차 몰고
온 이들에 늙은 길손까지 합해져 제법 붐볐지만.
걸으면서 시원한 약수에 시루떡과 송편을 번갈아 몇 조각 먹었다.
만사 형통할 듯 한 기분으로 떡고개사거리, 옛 갈미(葛山店 지역)
땅에 도착했다.
알맞은 높이의 모락산(385m)이 의왕인의 산소탱크이긴 하나 등.
하산때마다 목도해야 하는 의왕구치소가 눈엣 가시 같겠다.
어쩌다 그리 됐겠지만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도 그럴 것이고.
음험하기 짝이 없는 저 건물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아예 철거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까.
모락산(위 사진1)과 의왕구치소(위 사진2)
갈미는 길이 갈라지는(分岐)지점이라는 뜻이라는데 여기가 바로
삼남대로 분기점이었다.(果川 - 安養間)
갈산(葛山)은 갈미의 변음인 갈뫼의 취음(取音)일 뿐이란다.
주막과 원이 있어 북적대던 갈미는 동쪽은 의왕시 내손동(內蓀)
갈미로, 서쪽은 안양시 평촌동(坪村) 갈미로 두 조각났다.
서울에서 과천, 남양으로 가는 도로(47번국도:흥안로)가 개설된
1936년부터.
의왕시는 '갈미'를 되찾았다는데 안양시는 여전히 '갈산'이다.
평촌동은 벌말이다.
이름처럼 허허벌판으로 주목하는 이 없는 촌 동네였으나 지금은
대형, 고층건물은 물론 로데오거리까지 등장한 안양의 각광받는
노른자(신downtown)가 되었다.
4호선 지하철역이 생기고 이름도 벌말역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촌역으로 둔갑했다.
평촌은 우리 고유 이름의 한자화를 강제했던 일제의 작품이라는
주장의 진위는 차치하고 벌말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은가.
삼남대로 주변 외진 곳에 서민행객들을 위한 민박촌이 있었다니
민박집의 탄생사가 최소한 이조시대로 소급되겠다.
갈미와 벌말 사이쯤이었다는 이 민배기마을(民伯洞)도 현재에는
민배기사거리, 민배기길 등의 표지판으로만 확인되고 있다.
이 역시 평촌동에 먹혀버렸단다.
인덕원 노내시(老內侍)의 추억
공룡이 돼버린 평촌동을 벗어나기도 전에 관악산이 손에 잡힐 듯
지호지간으로 다가왔다.
어느 새 옛 내시(內侍)마을이었던 인덕(仁德) 앞이다.
덕을 베풀며 어질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단다.
거세(去勢)는 되었을 망정 왕의 최측근임을 기화로 갖은 영화를
누리고 때론 권력자로 자임하기도 한 환관(宦官)들의 집단 거주
지역은 종로구 봉익동(鳳翼)이었다.
봉황의 날개에 붙어서 자기 뜻을 이룬다는'발봉익'(發鳳翼)에서
유래되었다니까 그들의 처지를 함축하고 있다.
궁궐을 하직한 환관들이 봉익동 아닌 관악산자락에 거주하게 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원이 들어섬으로서 인덕원이 된 것.
흥안로(47번국도) 평촌에서 바라본 관악산
삼남대로 원(院)이 있었던 옛적이나 의왕(東), 안양(西), 군포(南),
과천(北)등 사통팔달의 지금이나 교통 요지답다.
현기증이 날 지경으로 차량의 홍수다.
삼남대로를 걷는 그 동안 차들에 시달림이 적었던 까닭이겠는데
대미를 바르게 하려면 바야흐로 정신 다잡아야 할 것 같았다.
인덕원 추억이 고개를 들었다.
60년대 초의 일이다.
아직 20대인 나는 영등포구(당시 한강 이남은 모두 영등포구)와
시흥군 안양읍, 과천면을 각 들머리로 한 관악산 등산을 삼각산,
도봉산과 더불어 무수히 반복했다.
지금의 서울대학교 일대를 점유한 관악산컨트리클럽(골프)측의
제동으로 안양과 과천이 주 입산지점이 됐다.
남태령 높은 재와 비포장 먼지길인데다 어쩌다가 있는 시외버스
보다는 열차편이 편해서 안양을 더욱 선호했다.
하산해서는 닥치는 대로 hitch-hike를 했는데 주로 트럭 짐칸에
타기 때문에 먼지를 뒤집어 써야 했다.
당시에는 등산로 또한 지금처럼 잘 다듬어진 사방팔방이 아니고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안양역에서 서울대학교 실습림을 거쳐 정상으로 오르려 했으나
억수같은 소나기에 흠뻑 젖은 몸으로 인덕원 마을로 내려왔다.
불성사(佛性寺)에서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많지 않은 집이 띄엄띄엄 있는 마을이었다.
나홀로에 두 불식(不息, 不食)의 산행 습관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아 몹시 지쳐 있었다.
비가 잠시 멎은 틈을 타 마실에서 돌아오는 듯한, 편편한 인상의
촌로가 후줄근한 나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극진하게 돌봤다.
다음 날 출근하여 그 곳이 내시들의 마을임을 알게 되었다.
그 노인은 정녕 내시였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때는 그 마을에 내시가 아직 생존해 있을 때였으니까.
인사를 차월피월 미루다가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일부러 찾아갔을 때는 이미 개발에 밀려 예전
마을은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게 변했다.
그 노인도 아직껏 생존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거니와 생존해 있다
해도 찾을 길이 없지 않은가.
이면 도로에 인덕원터, 인덕원 옛길 표석을 세운 안양시도 확신
없기는 나와 다르지 않으니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정조는 나를 계속해서 감동케 한다
갈고개-갈오개-가로개 -가루개 등 구전과정에서 변했다는 갈현
(葛峴) 고개마루에 올라섰다.
한양이 관악산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인 지점이다.
천릿길 삼남대로가 마침내 The end is near다.
줄곧, 나를 격려해온 내 삼남대로Song,'My Way'도 끝절(終節)이
다가오고 있나 보다.
여기는 한양 무섭다고 예서부터 기었다는 과천(果川)땅.
양반들의 세도가 얼마나 심했기에 그런 말까지 나왔을까.
실은 이 말의 연원을 들어보면 고소불금이다.
과천군이었던 때, 과천현감이 한양의 남쪽관문인 이 곳을 지나는
나그네에게 높은 남태령을 탈 없이 넘도록 보호해 준다는 명목을
걸고 돈을 내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하삼도(下三道:충청, 전라, 경상) 길손에게는 과천현감이
두려운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단다.
별 힘도 없으면서 아니꼽게 좌지우지하는 사람을 빈정대는 말로
"자기가 과천현감이라도 되나?" 도 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렇다고 무조건 통과세를 받기는 거북했던가.
관(官)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다느니 하마(下馬)하지 않고
갔다느니 등등 갖가지 구실을 붙여 길손들을 동헌 앞까지 데려와
귀찮도록 들볶아서 돈을 내게 했다나.
황당한 횡포였다.
아전들은 한 술 더 떠 가죽신 신은 것까지 트집잡아 뜯어냈다니
민초들만 서러웁던 때다.
그런데 우물만도 못한 민초들인가.
여기에도 당상관 우물이 있으니.
얼마 내려가지 않아 '찬우물길' 표지가 나타났다.
관악산 앞자락 끝의 찬우물(冷井)마을이다.
능행길에 몹시 갈증이 났던 정조는 신하가 떠준 우물물을 마셨다.
왕을 흡족하게 한 물맛의 우물은 곧 당상에 가자(加資堂上)됐다.
최소한 정3품의 관직에 오르게 된 '가자우물'의 내력이다.
이 후로 이 마을 이름 또한 찬우물마을이 되었단다.
당상관 加資우물
수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조의 사부곡에 좀 물렸다고 하면
몰인정한 표현일까.
그럼에도 정조는 나를 계속해서(현재진행형으로) 감동케 한다.
찬우물마을은 청풍(淸豊) 김씨의 집성촌이라고 한 중년이 귀띔해
주며 고관대작을 지낸 삼형제중(取魯-判書, 若魯-左議政, 相魯-
領議政)중 능을 방불케 하는 김약로의 묘도 있다고 했다.
정조가 능행로를 바꾸게 한 무덤이다.
사도세자 사건에 당자는 무관하지만 주동한 자(상로)의 형이라는
이유 만으로 능행로를 바꿔버림으로서 사무친 한과 울분을 삭인
정조다. (남태령 높은 고개와 험로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추측일 뿐, 근거가 없다)
생모 윤씨의 폐비와 사사(賜死)에 연루된 자들은 지위 고하, 친소,
친인척을 막론하고 능지처참(凌遲處斬), 부관참시(剖棺斬屍) 등
온갖 참혹한 형벌을 내린 왕(연산군) 이상으로 사부(思父)의 정이
절절했던 정조다.
그러함에도, 무소불위인 지엄한 왕권의 부정적 행사를 지양하고
사부의 정을 화성(華城)으로 현화(現化.incarnate)시킨 왕이다.
이것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싸움(내적 투쟁inner struggle)
에서 승리한 결과다.
위대한 자기 극복이다.
그래서 이 늙은 길손은 그의 능행길을 따르는 마지막까지 감동을
먹고 있는 것이다.
너무 잦은 능행의 부작용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처럼 그 벼슬자리 얻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아홉번"이라는
한 능참봉(陵參奉)의 익살이 나왔을 정도로 정조는 배능(拜陵)을
자주 했으니까.
특히 한강의 도강문제는 더욱 심각한 현안(懸案)이었다.
그래서 폐해를 최소화하려고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했다.
그리고 민초들의 원성(怨聲)을 격쟁(擊錚)을 통해서 진정시키려는
긍정적 노력도 했다.
격쟁은 태종(太宗)때에 시작했다가 연산군에 의해 중지된 신문고
(申聞鼓)의 후속으로 등장했다.
왕이 민초들의 원정(寃情)을 듣는 방법이다.
왕의 행차 노변에 대기했다가 징 혹은 괭과리를 쳐서 왕의 관심을
갖게 한 후 왕의 하문(下問)에 따라 원정을 호소하는 제도다.
정조는'위외격쟁추문'(衛外擊錚推問)의 법을 제정해 잦은 행차를
존엄한 왕정에서도 민중에게로 다가가는 기회로 삼았다.
그의 진정성이 민초들의 불만을 잠재웠을 것이다.
남태령 이야기
뿌연 먼지 뒤덮이던 옛길 찾는 것만 빼면 장중(掌中)의 과천이다.
시흥군 과천면 때부터 생활의 일등 청정도시라는 작금까지 여러
이유로 걸어서, 혹은 차량으로 숱하게 드나든 지역이니까.
과천향교 앞에 서면 연주대에 오르는 일 말고 뭐가 있던가.
온온사(穩穩舍)는 고요하고 편하다는 뜻으로 정조가 명명(命名)
하고 친히 현판까지 썼으며 정조의 행궁역할도 했단다.
복원은 되었지만 위치도, 양식도 불분명한 이 객사(客舍)가 관악
산 만큼 인력(引力)을 발휘하는가.
관악산 들머리 과천향교
관문(官門)삼거리(지금은 사거리)의 내가 자주 드나들던 고기집
들은 다 어디로 가서 뿌리내렸는지.
과천시가 복원해 놓은 덕에 잠시나마 옛길 따라 남태령(南泰嶺)
고개마루 망루에 앉았다.
비록 짧은 구간이나마 흙의 촉감이 어찌나 부드러웠는지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여우가 득실거려 여우고개(狐峴)였단다.
고려때, 강감찬(姜邯贊)장군의 호통으로 여우떼가 사라졌단다.
강감찬은 여우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까지 있는 고개다.
그런데 이 여우고개가 남태령으로 바뀌었다.
정조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상까지 받게 되었다는 촌로의 기지가
엿보이는 사연이 있다.
남태령고개(위 사진2는 남태령옛길 입구 / 손이 떨렸던가)
현융원으로 행차중인 정조가 고개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정조는 고개에 대해 익히 알면서도 한 촌로에게 넌지시 물었다.
성이 변씨(邊)인 촌로의 남태령이라는 대답에 노(怒)한 정조가
거짓 고한 촌로를 꾸짖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한 연유를 물었다.
여우고개라는 상스러운 이름보다는 한양에서 남행중 맨 처음에
있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그리 말했다고 노인이 답했다.
정조의 노여움이 풀린 것은 물론 되려 촌로를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으며 남태령으로 개명토록 명했다는 것.
그러나 시기가 광해군(光海君)때로 알려진 춘향전의 "이동령이
남태령을 넘었다"는 구절을 들어 정조 이전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구전(口傳)소설인데다 이본(異本)이 많으므로 '여우고개'
를 정조 이후에 '남태령'으로 개사(改詞)했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옛 여우고개에는 '쉬네미고개'라는 이름도 있었단다.
여우떼 등살에 단출하게는 넘을 수 없고 사댕이(사당동)와 하리
(과천동) 양쪽에서 각기 쉰명이 모이면 단체로 넘곤 했다니까.
남태령도 옆으로는 많이 퍼지고 키는 많이 낮아졌다.
힘깨나 쓰도록 높고, 맞교행하기 어렵도록 좁았던 고개였는데.
다이너마이트(dynamite) 터지는 소리에 귀가 멍멍하기도 했고
그 때마다 통행이 억제되곤 하던 고개.
돌가루, 흙먼지로 이즈음의 황사현상처럼 온 종일 뿌옇던 고개.
이 고개가 지금은 말쑥한 신사로 업그레이드 되어 있다.
삼남대로 이야기를 미리 접는 이유
사당역 입체교차로까지 내려왔다.
승방평(僧房坪)이 있던 승방뜰 초입이다.
승방평은 도성(都城)에서 삼남대로(現 동작대로) 남태령을 넘는
승려들의 임시 거처였단다.
이즈음에는 국가, 사회단체는 물론 기업, 종교, 기타 각종 단체가
수련원, 휴양관, 합숙소, 그 밖의 명목으로 구성원들의 후생 복지
등 편의시설 확보에 경쟁적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면 승방평은 불교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특별한 시설이다.
10리 어간에 원(院) 혹은 점(店), 30리 내외에 역(驛)이라는 국영
시설이 있을 뿐이었던 때니까.
승방뜰(도구머리都口頭, 方背洞) 일대는 고층아파트들을 비롯해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섰다.
승방평이나 승방뜰이나 같은 이름인데 왜 구분했을까.
아마 옥호(屋號)나 건물명으로 지명을 따기는 예나 이제나 다를
게 없었던가 보다.
이후의 삼남대로는 동작대로로 변신, 제 멋과 맛을 다 잃었다.
한수 도강을 앞둔 이수나루터에서 잠시 반세기 이전으로 갔다.
이수(梨水)는 배나무골과 물골(갯말)의 개천이 합쳐지는 곳이다.
나는 여름방학때면 이수나루에서 배타고 서릿개(蟠浦)와 사평리,
새말로 가서 아르바이트(arbeit)를 했다.
'서릿개'는 개울들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는데 한자 蟠浦가 어쩌다가 盤浦로 둔갑되었으며 사평리는
지금의 잠원, 신사동 일대를 말한다.
새말은 대홍수 이후 승방뜰 입구에 새로 생겼다는 마을이다.
사다리 타고 깊은 탱크속에 내려가면 사다리는 제거되고 위에서
던져주는 무를 소금과 쌀겨를 뿌려가며 차곡차곡 쌓는다.
그러기를 종일 하면, 해질 녘에는 저절로 지상에 올라서게 된다.
이 일대는 광대한 무, 배추밭으로 단무지생산 농장섬이었다.
1950년대 중반, 동란의 참화속에서 대학생활을 계속하려면 이런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만 했다.
이같은 원시적 1차산업이 3D 기피시대에 살아남아 있을 리 없다.
다만, 이수와 반포, 잠원 일대를 지나칠 때마다 아주 특별한 추억
으로 새록새록한다.
더구나 일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의 한 사건이 더욱 그런다.
너무 많이 태운 꼬마 배가 한 쪽으로 쏠리니까 배 안의 사람들이
우르르 반대쪽으로 몰리기를 반복하다가 배가 뒤집혔다.
다행히 나루에 거의 접근한데다 수심이 깊지 않은 지점이라 익사
사고는 없었지만 수영을 못하는 내게는 끔찍한 일일 뻔 했다.
동재기나루터(銅雀津址/위 사진1)와
동작대교 photo island(위 사진2)
4호선 지하철 동작역 일대가 옛 동재기나루(銅雀津)다.
삼남대로는 강 건너편, 마주하고 있는 서빙고나루(西氷庫津)와
도선(渡船)으로 한양에 연결되었다.(여기는 과천땅이었으니까)
서빙고는 어주(御廚)와 백관(百官),전(殿)과 궁(宮)에 공상(供上)
하기 위해 겨울에 채빙(採氷)한 얼음을 보관하는 냉동창고였다.
(동빙고에는 各 祭亨에 쓰이는 얼음이 보관되었다)
숭례문에 이르는 길은 도강나루(渡江津)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화마로 사라진 숭례문(崇禮門) 앞에서 걷기를 마쳤다.
그러나 16일 동안 어렵사리 걸어온 삼남대로 이야기는 도강전인
동작나루에서 접는다.
삼남대로뿐 아니라 계속될 다른 대로의 경우도 한수 이남은 한수
에서, 한수 이북은 한양의 경계에서 그리 하려 한다.
평생 살아온 서울 이야기를 하면 장황한 얘기꾼이 되고 마니까.
대로와 관련되는 다른 기회마다 언급하기로 하고.
산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축복이고
길을 걷는 것은 철학이다
나는 선인들의 애환을 느껴 보고파서 옛 길 걷기를 시도했다.
그 애환과 갖가지 사연들이 아직도 길바닥 발자국들에 한우쿰씩
묻혀 있으려니...했다.
그래서 현대화라는 주술에 걸린 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희생
되어 흔적마저 없이 묻혀버리기 전에 다만 얼마라도 더듬어보겠
노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랬기에 앉은뱅이 신세를 겨우 면했을 때, 안팎 여러 분의 갖은
만류를 뿌리치고 옛 길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어렵사리 걸어온 한수(漢江) 이남의 삼남대로와
영남대로, 북의 봉화대로와 평해대로 삼천오백여리 길에서 전혀
기우였음을 확인했다.
그 자국은 현상적(現象)인 것이 아니고 관념(觀念)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공의 제약에서 자유로움도.
그리고 수 많은 만남을 통해 그것은 과거완료형이 아니고 현재
진행형임도.
그러니까 특수한 경우 외에는 사라진 길에 대해서가 아니라 남
겨진 길을 위해 울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반세기 이상 산과 더불어 살아온 늙은 山나그네가 길손이 되어,
산에서 내려다만 보던 그 길에서 그 산을 올려다 보고 걸으며,
새로운 메시지를 받고 있다.
<산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축복이고 길을 걷는 것은 철학이다>
<삼남대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