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한국뿌리문화연구소
 
 
 
카페 게시글
역사탐방 스크랩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서안(西安), 신(新) 실크로드 중심지로 도약하는 `섬서성 서안`
성헌 추천 0 조회 46 13.06.22 06: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 서안(西安)

 

           신 실크로드 중심지로 도약하는 '섬서성 서안'

 

                              서안=지해범 중국전문기자/ 고유민 중국여행전문가

 

 

               

                                 혜초가 수행하던 천복사내의 소안탑.

 

 

중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똑같은 것'만 보고 온다. 만리장성, 자금성, 병마용, 황산, 장가계, 구채구… 등. 앞사람이 본 것을 똑같이 보고, 똑같은 사진을 찍고, 똑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런 '붕어빵 관광'은 깊이있고 전문적인 여행으로 바뀔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 선조들의 1000년 발자취가 숨쉬는 '西安'

중국 내 한민족사의 흔적은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중국땅에서 고뇌하며 살다 간 선조들의 '성공'과 '실패' '지혜'와 '경험'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자산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자기 뿌리에 대한 관심이며, 또한 미래에 대한 관심이다. 역사인식이 뒷받침되지 않는 미래전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앞으로 국가의 자존을 지키고 중국과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중국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양국 교류사에 대한 관심은 그 출발점이다. 이제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을 떠나보자.

 
             서안시 북쪽에 조성 중인 대명궁 공원의 정문 건물 / 서안= 지해범 기자

 

 

◆1000년 전 신라 바둑고수 '박구'를 만나다

한국의 바둑천재 이창호 9단보다 1000년 이상 앞서 중국에서 이름을 떨친 신라인 바둑 고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구(朴球). 신라 말기에 당으로 유학 간 그는 바둑 실력이 뛰어나 당 희종(僖宗·재위 862~888)의 '기대조(棋待詔)', 요즘 말로 '바둑비서'가 되었다. 황제가 원할 때 바둑 상대가 되어주는 '국수'였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가 신라로 돌아갈 때 장교(張喬)라는 문인이 지은 송별시가 '전당시(全唐詩)'에 전한다.

'신라에선 누가 적수가 되리오(海東誰敵手), 돌아가는 길도 외로울 테지(歸去道應孤)/ 장안의 궁궐에선 기예를 전수하고(闕下傳新勢), 귀국선에선 옛 기보를 복기하겠지(船中覆舊圖)/…고국과 이별한 지 몇 해이런가(故國多年別), 상전이 벽해될 만큼 달라졌으리(桑田復在無)'('고대한중교유시', 이충양, 참조)

박구가 활약했던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이다. 당시 장안에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외교사절의 역할을 한 숙위(宿衛)를 비롯해, 유학생, 유학승, 상인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발자취는 한국인의 무관심과 1300여년의 세월의 무게로 지워지고 있다.


 

◆황궁 친위대 사령관 된 신라인 '김인문'

서안시 제2순환도로 북쪽 구간(北2環) 태화로(太華路) 입체교차로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엄청난 규모의 대명궁(大明宮) 공원을 발견하게 된다. 낡은 주택을 헐고 중국돈 120억위안(한화 약 2조원)을 쏟아부어 조성하는 이 공원의 규모는 길이 약 4㎞에 폭 1㎞로, 뉴욕 센트럴파크를 흉내냈다. 대명궁은 당 고종이 이전에 거주하던 태극궁이 지대가 낮고 습하여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장안성 북쪽에 새로 조성한 궁전이다. 그 옛날 대명궁 성벽 바깥에는 '금원(禁苑)'이라 불리는 황제 친위부대 주둔지가 있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626년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권을 빼앗는 '현무문의 변'을 일으킬 때 이 부대의 도움을 받았다. 651년 '숙위'의 자격으로 장안에 머물게 된 김인문(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은 '좌령군위장군'에 임명된 뒤 '우무위위대장군'(679년)으로 승진했다. 이 명칭에 등장하는 '~위장군' '~위대장군'은 도성 방어부대 사령관을 뜻한다. 김인문이 당 황제의 친위부대를 직접 지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선지' 집터, 공원으로 변해

당대 장안성은 황제가 머물던 태극궁을 중심으로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도로가 나 있었다. 이렇게 나뉘어진 구역을 방(坊)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방이 11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출신으로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선지(高仙芝·?~755)는 장안성의 영안방(永安坊)과 선양방(宣陽坊)에 두 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고사계에 이어 20살 때 군인이 된 그는 지금의 신강위구르지역인 안서도호부에 종군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워 총사령관에까지 올랐다. 그는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가는 동서교통로(비단길)를 평정함으로써 당의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파미르 원정로를 답사한 영국인 스타인(Stein)은 "고선지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나폴레옹보다 뛰어나며, 유럽의 어떤 지휘관보다도 낫다"고 극찬했다. 당의 시성 두보(杜甫)는 고선지의 애마에 대해 '장안의 키 크고 힘센 젊은이들도 감히 올라탈 엄두를 내지 못하며/ 번개가 내리치듯 달리는 기세는 온 장안이 알고 있다'고 읊었다.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패배한 그는 하서절도사로 있다가 안록산의 난 때 모함을 받아 장안 동쪽의 동관(潼關)에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천복사의 전통음악연주.
                                        서안 외곽 홍교사에 있는 원측 사리탑.

 

 

◆원측·혜초 등 신라승들의 대활약

군인과 정치인의 발자취가 역사서에만 남아있는 것과 달리, 신라 출신 승려들의 활약상은 여러 사찰에 유적으로 남아있다. 서안시 중심지에서 남쪽 종남산 방향으로 30여분을 달리면, 인진(引鎭)이란 지역에서 흥교사(興敎寺)를 만난다. 이 사찰에는 유식(唯識)불교로 유명한 신라 출신 원측(圓測·613~696)의 탑이 남아있다. 경주 모량리에서 태어난 원측은 15세 때 당으로 유학을 가서 원법사에서 유식학을 배웠다. 그는 외국에 유학하지 않았는데도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반야심경찬' '인왕경소' '해심밀경소' 등 수많은 저서를 번역·집필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실력이 뛰어나면 현지인의 시기를 받기 마련이다. 원측이 '서유기'에까지 등장하는 당대 최고승 현장법사가 번역한 '반야심경'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자, 현장의 제자인 규기(窺基) 일파가 강하게 반발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원측은 종남산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칩거했다. 그가 입적한 후에도 제자들은 규기 일파가 해코지할 것을 우려해 종남산 풍덕사에 사리탑을 세워 분골과 사리를 안치했다. 이것이 다시 지금의 흥교사로 옮겨진 것은 송(宋)대의 일이다. 지난 19일 이곳을 찾았을 때 현장-원측-규기 등 3인의 사리탑은 2008년 사천성 대지진으로 입은 피해를 보수 중이었다. 탑 맨 아래에는 송대에 만들어졌다는 원측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흥교사의 승려는 "보수공사는 내년에나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서안시 남2환 부근의 천복사(薦福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慧超·704~787)가 활동했던 곳이다. 16세 때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그곳에서 인도의 고승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인도유학을 권유받고, 723년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해 중앙아시아를 두루 여행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혜초는 천복사에서 불경을 번역하며 초기 인도밀교(密敎)를 공부하고 포교하는 데 힘썼다. 천복사 내에는 684년에 세워진 14층 소안탑(小雁塔)이 있는데, 좁은 계단을 밟아 꼭대기까지 오르다 보면, 그 옛날 구도의 일념으로 이곳을 올랐을 혜초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774년 당 황제 대종(代宗)은 가뭄이 이어지자 고승들 가운데 혜초에게 기우제를 지내는 데 필요한 글을 쓰게 했는데, 혜초가 선유사 옥녀담에서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를 올리자 하늘에서 비단 같은 보슬비가 흡족히 내렸다고 한다.

 


◆고구려 유민촌, 고력거촌

서안 초당진(草堂鎭)에는 고구려 유민 집단 거주지로 추정되는 '고력거촌(高力渠村)'이 있다. 당대 고구려유민의 집단거주지를 '고려곡'이라고 불렀는데, 일부 학자들은 '고력거'를 그것으로 추정한다.

옛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던 서안은 현재 인구 800만명(유동인구 포함 1000만)에 서북부의 중심지로 도약하고 있다. 전태동 서안총영사는 "중국 중서부개발의 거점도시인 서안은 관광산업 외에도 항공우주·IT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며 한국기업들이 '신(新)실크로드'의 중심도시에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출처> 조선일보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