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5. 4. 최덕원 조사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해평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래 보성군 도천면에 있던 해창리․노계리․기남리를 병합할 때 해창의 ‘해’와 넓은 들의 뜻인 ‘평’이 합쳐져 붙여진 이름이다. 기남마을은 해평 2리이며, 조양마을은 해평 3리, 금능마을은 해평 4리, 구룡마을은 해평 5리이다. 기남마을은 먹뱅이 북쪽에 있는 마을로 귀남촌 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옛날 이태조가 살았다는 칼바위가 있는데 그 길이 험해서 쉽게 올라 갈 수 없다 한다. 칼바위로 올라가는 골짜기에 기남마을의 ‘갈고지’라는 마을이 있다.
조양마을은 본래 해창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무렵 나라의 세금을 이곳에서 모아 배에 실어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떨어져 현재의 마을명은 근래에 생긴 명칭이다.
조앙마을 서북쪽에 두 개의 돌장승이 있는데, 이는 본래 절골에 있던 것을 마을 어귀 길가 양쪽으로 옮겨 세워 놓은 것이다. 돌장승을 각각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 밑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 놓았다. 또한 마을의 서편과 동편에는 당산나무가 있어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교통편으로는 보성에서 2시간마다 오가는 완행버스가 있다. 주민들은 버스를 이용하거나 오봉리까지 기차를 이용하기도 한다.
금능마을은 신촌으로서 주택들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약 50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교회가 세 군데 있다. 버스가 하루에 세 차례 오는데 이 마을이 종점이다. 금능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기잡이 발을 바다에 쳐서 돈을 얻는다 하여 전금이라고 하였다.
구룡마을은 발끄미 서남쪽의 구룡산 밑에 있는 마을로 큰 곶처럼 생겼다. 여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툰다는 구룡쟁주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주업은 농업이지만 바닷가에 위치하여 바지락 밑 피조개 양식에 종사하고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동․금평․역전․초암마을】
순천에서 버스를 40여분을 타고 가면 예당이란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40여 분 정도 기찻길을 따라 걸어가면 오봉리의 강동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오봉산이 있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서 약 800여 년에서 1,000년전 사이에 생긴 마을이다.
원래의 토박이는 안씨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의 주요 생활수단은 농업인데 영세농이 많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동백나무가 많음을 알 수 있는데, 환경조성의 의미도 있지만 마을이 바다에 인접되어 있어 방패막이로써 동백나무를 많이 심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강동마을에는 민속자료로 보존된 가옥 4채가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보성 이용욱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 159호,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이 가옥은 조선 헌종때에 이진만(怡齋 李鎭晩)이 지었다고 전한다. 안채와 사당은 퇴락되어 손자인 원암(元庵) 이방회가 외가로 개축하였고, 솟을대문 등 9칸이었던 것을 1940년 운암의 손자인 연암 이진래 (蓮庵 李進來)가 5칸으로 개축하였다 한다.
안채, 사랑채, 곡간채, 행랑채, 중문간채, 사당과 연못을 갖추고 있어 이 지방만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건축 연대는 19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
이영옥씨는 이 집을 지은 이후 8대째 살아오고 있으며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암의 시문집 3권과 그의 부친 연정(蓮亭)의 시문집 2권을 보전하고 있다.
□ 보성 이금재(李錦載)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 157호,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이 집의 안채는 1900년을 전후해서, 맞은 편 광채는 이보다 앞선 19세기에 건축되었다고 추정되며 나머지 건물도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안채는 ㄷ자 모양인데 일반적인 형태와는 달리 날개가 위로 덧붙여졌다. 평면 구성은 남도방식을 택하여 작은방을 사랑방의 용도로 이용해 측면에서 출입토록 했다. 이는 삼남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공간이용 관행이다. 안마당의 정원은 전통적인 맛을 잃었지만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특히 맞은 편 광채의 지붕 너머로 있어 오봉산의 자태를 가깝게 느낄 수 있어 조상들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느끼게 해 준다.
□ 보성 열화정
(중요민속자료 제 162호,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조선 현종 11년(1845) 이재 이진만(怡齋 李鎭晩) 선생이 후진 양성을 원해 이 정자를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이재의 손자인 원암 이방회(元庵 李昉會)가 당대(當代)의 석학(碩學) 영재 이건창(寧재 李建昌) 등과 학문을 논(論)하는 등 많은 선비들이 수학(修學)하였다고 한다.
열화정은 이 지방 선비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는데, 구한말 때 일제에 항거해 싸웠던 이관회(李貫會), 이양래(李陽來), 이웅래(李雄來) 등 기개 높은 의인(義人) 열사(烈士)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소박한 구조의 건물은 주변의 정원시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자와 함께 마을 앞 안산(案山)에 만휴정(晩休亭)을 지어 전원의 정취를 즐겼다 하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 보성 이식래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 160호,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이 집은 성량문에 따르면 1891년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오갑주(五甲周) 신묘년(新卯年)에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안채의 동쪽 아랫방은 그 뒤에 증축한 것으로서 아마도 20세기 초에 개축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안채는 부엌․큰방․대청․작은방이 일자로 배치되는 전형적인 남도의 4칸 집이었는데 아래쪽에 한 칸을 덧달아서 5칸 집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안채 서쪽에 담장을 쌓아서 뒤안의 휴식공간을 보호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공간 구성 방법의 오래된 기법이다.
사랑채 역시 4칸 집으로서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식 평면구성을 갖는다. 광채는 우진각 골기와 지붕집이며 안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봉 3리라고도 하는 금평마을은 강동마을에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이 마을은 강동마을과는 그 생활의 수준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 마을은 원래의 토박이들이 살아온 마을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봉리 6리인 역전마을은 면소재지이며 득량역이 있는 곳이라 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로 뒤에는 오봉사이 이있고 앞에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오봉 8리인 초암마을은 와우(臥牛) 형국으로 소가 누워 있는 것같이 보이는 명지라 한다. 이 마을은 나무가 무성하고 바위가 동네 어귀에 있기 때문에 이름을 초암이라 붙였다 한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신전․성재마을】
신전마을과 성재마을은 삼정리 2구와 3구로서 같은 이(里)에 속한다.
득량면 소재지에서 버스로 10~15분, 도보로 30분 남짓 소요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전마을은 죽산(竹山)안씨, 진주정씨, 죽산최씨가 많이 살고 있다. 주된 생업은 농업과 마포(麻布) 농사이며, 주민의 생활정도는 넉넉지 못한 편이다. 옛날에는 섭(수목)이 울창하였다 하여 섭발이라는 데서 섭바물이라 불렀으며, 현재는 신전(薪田)이라 부르고 있다.
성재마을은 득량면 소재지에서 삼정으로 가는 버스로 10분 남짓의 거리에 있는 마을로, 쌀․보리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생활정도는 보통이며 김해김씨와 여러 성씨받이가 거주하고 있다.
성재마을에는 전라남도 동부여섯 군 및 경상남도 하동, 남해 등지에 전력을 공급하는 보성강 수력발전소가 있다. 이 발전소는 1,700여 정의 예당 간척지에 물을 대기 위하여 겸백면 용산리에 보성강 댐을 막아 만들어졌는데, 거기에서 3천kw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
뒤에는 큰 산이 둘러 있고 앞에는 득량만이 펼쳐져 있다. 80여 호가 거주하고 있는 이 마을에서는 논이 전답이라 밭농사를 짓고 있으며, 너른 갯벌을 이용하여 양식업을 하고 있으나 득량만의 수질이 오염되어 큰 재미를 못 보고 있다 한다.
주된 교통편은 보성에서 2시간마다 오가는 완행버스가 았다. 가까이에는 옛날의 선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