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深)은 충렬왕(忠烈王) 조정(朝廷)에 독노화(禿魯花)로 원(元)나라에 갔다가 뒤에 낭장(郎將)이 되었고 또 궁전(弓箭)으로 모시고 원(元)나라에 갔다가 여러번 옮겨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아버지 만호직(萬戶職)을 이었고 곧 동지(同知)를 더했고 일찍 표(表)를 받들고 원(元)나라에 가서 청(請)하여 충선왕(忠宣王)을 나라에 돌아오게하니 충선왕(忠宣王)은 특별(特別)히 참리(參理)를 제수(除授)하고 하교(下敎)하되 재상(宰相) 홍자번(洪子藩)과 최유엄(崔有엄)과 유청신(柳淸臣)과 김심(金深)과 김이용(金利用) 등(等)은 사직안보(社稷安保)할일을 도모(圖謀)하려고 의리(義理)를 중(重)하게 여기고 몸을 가볍게 여겨 원(元)나라 조정(朝廷)에 와서 이해(利害)를 말하여 나를 위(爲)해 돌려보내기를 청(請)했으니 그 공(功)이 특수(特殊)한지라 마땅히 차례로 등용(登用)하리라 하고 찬성사(贊成事)로 승급(昇級)했으며 원(元)나라에서는 고려원수(高麗元帥)로 제수(除授)했다.
그의 딸 달마실리(達麻實里)가 황제(皇帝)에게 고임을 얻었으므로 이러한 벼슬을 주었고 뒤에 딸이 황후(皇后)가 되니 심(深)은 총부(摠部)에 들어가 개선(開宣)했고 행성(行省)있는곳 국왕(國王)과 우승상(右承相) 수정(水精) 철월(鐵鉞) 등(等)이 의장(儀杖)을 말 앞에 베풀고 개선(開宣)을 마치고 삼관(三官)과 오군(五軍)이 뜰에 들어와 절하니 아는자는 참예(僭禮)라 하더라 조금있다가 밀직사(密直使)에 옮기고 화평군(化平君)으로 봉(封)하였다.
왕(王)은 원(元)나라에 있었는데 심(深)은 밀직사(密直使) 이사온(李思溫)과 의논(議論)하되 황제(皇帝)와 황후(皇后)는 여러번 왕(王)의 나라에 조서(詔書)를 보내나 왕(王)은 본국행령(本國行令)에 뜻이 없으며 해마다 베 십만필(十萬匹)과 쌀 사백곡(四百斛)과 다른 물건(物件)은 가(可)히 헤아리지 못하니 나라 백성(百姓)은 운반(運搬)하는 폐단(弊端)이 더 심(甚)하고 모든 신하(臣下)들도 다 객지(客地)라서 돌아가기를 생각하나 권한공(權漢功)과 최성지(崔誠之)는 같이 법(法)을 맡아 그 뇌물(賂物)로 이익(利益)을 삼고 박경량(朴景亮)은 왕(王)에 심복(心服)으로 여러번 상(賞)을 받아 산업(産業)을 경영(經營)하니 왕(王)이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실(實)로 삼인(三人)때문이니 어찌 제거(除去)하고 임금을 모시고 돌아가지 아니하리요 하고 이에 태후(太后)가 사랑하는 환관(宦官) 매철(買撤)로 인(因)하여 휘정원사(徽政院使) 실열문(失列門)에게 허락(許諾)하는지라 이에 심(深) 등(等)은 삼인(三人)의 죄상(罪狀)을 갖추어 대호군(大護軍) 김언(金彦)과 김상(金賞)과 최지보(崔之甫)와 신언경(申彦卿)등(等) 수백인(數百人)이 서명(署名)하여 휘정원(徽政院)에 올리니 실열문(失列門)이 태후(太后)의 교지(敎旨)를 만들어 한공(漢功)등(等) 삼인(三人)을 옥(獄)에 가두었는데 왕(王)이 성내니 태후(太后)에 시비(侍婢) 때문이었다.
이사반(里思班)이 태후(太后)께 아뢰되 따라온 신하(臣下) 나를 사랑하는 자(者)가 삼인(三人) 같은이 없는데 심(深) 등(等)은 나에게 고(告)하지도 않고 문득 휘정원(徽政院)에 호소(呼訴)함은 그 뜻이 삼인(三人)에게만 그치지 아니하리니 오직 폐하(陛夏)는 살피소서하고 한공(漢功) 등(等)도 뇌물(賂物)로써 면(免)하기를 구(求)하니 태후(太后)는 곧 명령(命令)하여 삼인(三人)을 놓아주고 심(深)과 사온(思溫)을 태장(笞杖)으로 벌(罰)주고 임조(臨조=삼수변에 兆한 字)에 유배(流配)하니 나라사람이 듣고 분(憤)하게 여기지 않은이 없었다.
규(揆)와 언(彦)과 상(賞)과 지보(之輔)와 언경(彦卿)은 도망(逃亡)해 숨으니 왕(王)은 언경(彦卿)에 아비 양규(良揆)와 외조(外祖) 김정우(金貞于)를 순군(巡軍)에 가두라 명(命)하고 다 그 집을 적몰(籍沒)하였다가 황제(皇帝)는 곧 심(深)을 불러왔다.
처음 심(深)이 원(元)나라에 갈적에 인후(印侯)가 전송(錢送)하며 말하되 이제 국왕(國王)은 경사(京師)에 있든데 자네는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가려하니 어찌 뜻이 없으랴 대저(大抵) 말을 잘하여 상국(上國)을 즐겁게 하려면 자네가 누구로 더부러할고 인후(印侯)는 부자라서 돈으로 뇌물(賂物)을 쓰니 권세(權勢)있는 귀가자제(貴家子弟)가 후(侯)와같이 했으므로 후(侯)가 일찌기 국가(國家)에 죄(罪)를 얻었는데 겨우 죽음을 면(免)하고 돌아왔으니 자네는 조심(操心)하라 하는데 심(深)은 그 말을 쓰지 않았다.
충숙왕(忠肅王)때에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으로 여절보안공신호(礪節保安功臣號)를 주었고 얼마 아니되어 수성수의충량공신(輸誠守義忠亮功臣)과 화평군(化平君)으로 고치고 또 도첨의(都僉議)로 고치고 협보공신 섭행정동성사(協輔功臣 攝行征東省事)를 더 주었는데 장백상(蔣伯祥)은 직권(職權)을 남용(濫用)하니 나라사람이 원망(怨望)함으로 원(元)나라는 객성태사 도적래(客省太史 都赤來)를 보내어 백상(伯祥)과 심(深)과 만호 홍수권(萬戶 洪綏權)을 가두었는데 성사(省事)가 졸(卒)하니 시(諡)는 충숙(忠肅)이다.
* 충숙공(忠肅公):휘(諱)=심(深)의 개략(槪略)
공(公)의 자(字)는 연수(淵수)이고 휘(諱)는 심(深)이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공(公)이 1262년(고려 원종3년 壬戌)에 출생하고 1338년(충숙왕7년 戊寅)10월 23일에 졸(卒)하니 수(壽)는 77 세 였다.
아버지는 문숙공(文肅公:휘=周鼎)이고, 어머니는 상질현 대부인(尙質縣 大夫人) 장씨(張氏)로 증 판서(贈 判書) 득구(得球)의 따님 이다.공(公)이 충렬왕 때에 볼모로 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낭장(郎將)이 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 만호(萬戶)를 역임(歷任)하였다.
충선왕이 元나라에 들어가 있을때 오기(吳祁), 석천보(石天輔) 등이 왕의 총애(寵愛)를 미끼로 왕의 부자(父子)를 이간(離間)시키므로 홍자번(洪子藩)과 함께 삼군(三軍)을 인솔하여 왕궁(王宮)을 포위(捕圍) 오기(吳祁)를 잡아서 元나라에 압송(押頌)하였다.
뒤에 충렬왕을 따라 元나라에 들어가 충선왕을 모시고 나와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공(公)의 따님이 元나라의 황후(皇后)가 되어 元나라로부터 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의 벼슬을 받았다. 충숙왕때 수첨의정승 판총부사(守僉議政丞 判摠部事)에 이르고 여절보안공신(礪節保安功臣)에서 수성수의충량공신화평부원군(輸誠守議忠亮功臣化平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고 협보공신(協輔功臣)의 호(號)를 더 받았으며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판총부사헌부사(判摠部司憲府事), 상호군(上護軍),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 등 벼슬을 하였다.
첫댓글 대태양님 수고 하셨습니다. 카페 방문하시는 우리 일가님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후손들은 선조님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근신하며 孝 의 정신으로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일가님들 건강하시고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