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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79교육 원문보기 글쓴이: 강형구
매우 길고 복잡한 얘기일지라도 여러분을 위한 사랑의 충고입니다.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읽다가 (삐리리 )를 만나면 일단 정답을 확인하기 전에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마우스를 누르고 긁어서 정답을 확인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이 한층 더 자랄 것입니다. 모르는 말이 나오면 일단 국어사전을 확인해보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 있다면 질문해설시간을 이용하여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따져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메일로 보내도 좋습니다. | ||||||||||||||||||||||||
누군가 희생을(양보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1. 심리테스트 무인도시리즈 (1) 이런 상황에서의 핵심문제는 누가 뭐래도 (누가 양보(희생)해야 하는가?)일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심리테스트 무인도시리즈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지금은 없어진 옛 홈페이지에서 설문조사(투표)를 했습니다. "무인도의 두 사랑하는 남녀.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살아나갈 수 있다면?...... " 그 응답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응답결과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남녀를 합해 모두 428명의 응답자 중 같이 죽겠다는 사람은 215명으로 대략 50%가 함께 죽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라도 살기를 바라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지요. 이제 그 절반 중, 누가 살 것인지에 대해서 운명이 정해주기를 기다리겠다는 선택은 다시 나머지 213명중 103명으로 약 50%(응답자 전체의 25%)입니다 선생님은 우선 같이 죽겠다는 응답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을 말하고 싶습니다. (2) 이 테스트는 "누군가 희생을(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같이 죽자는 선택은 "최선이 아니면 최악을" 원하는 사람들의 선택입니다. 누군가 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우리가 원하는 최선의 상황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들은 최선이 아닌 상황이기에 최악을 선택하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듭시다. 버스에 올라보니 자리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차라리 둘 다 서서 가자는 얘깁니다. 사탕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둘 다 먹지 말자는 얘깁니다. 황금을 주워 좋아하다가 슬그머니 (소유)욕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드디어 형제가 서로 죽이는 상상을 하던 끝에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형제들의 이야기. 그 결말에 형제들은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리지요. 물론 황금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가져서는 안될 나쁜 것이라면 그것이 최악이 아닌 최선이었겠지요.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나쁜 일이라면 같이 죽는다는 결정은 최악이 아닌 최선일 것입니다. (3) 사람들은 누구나 최선의 결과를 기대합니다. 최선의 노력은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지요. 그래서 누구든 위의 심리테스트에서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냐"고 물어봅니다. 심지어는 테스트에 주어진 선택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문항을 새로 만들어냅니다. "끝까지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 결국에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 "없을 리 없다. 아무튼 난 포기하지 않겠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버스에 자리가 하나밖에 없을 때, 자리는 하나더라도 둘이 앉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내지요. 사탕이 하나밖에 없는데 기어코 나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냅니다. 황금을 버리지 않고 둘이 나눠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지요. 그러나 그런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다하더라도 여전히 선생님은 테스트에 따라주길 요구합니다. 왜? 이 테스트는 (누구도 양보할 필요가 없는)상황이 아니라 (누군가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는)상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고 만들어 본 테스트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노력해 보아도 둘 다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에 대한 얘기입니다.
2. 왜 골치 아프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까? (1) 아무리 함께 생각해보자고 열변을 토해도 귀담아듣지 않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입니까? 우리는 이와같은 테스트를 당할 때 "어떤 선택을 하든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선택을 한 것이므로 어떤 선택은 옳고 어떤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런 친구들.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바로 그런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러분께 강조합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어떤 선택이든 옳은 선택은 아니다. 강도가 목숨이냐, 돈이냐 선택하라고 강요할 때도 따지고보면 우리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선택해야 현명한 선택인지, 어느 걸 선택하는 것이 잘못인지 여러분도 아시죠? 선택의 자유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 합리화 해주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때때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답니다. (2) 우리는 왜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나요? 우리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우리 내면세계의 주범이 무엇인지 매우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상황은 대부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인간관계가 악화됩니다. 여러분이 어린 시절 누군가와 다투던 기억들을 되새겨봅시다. 그때 상황은 여러분과 상대방 중에 누군가가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나요? 예절에 대해 생각해보더라도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절이란 무엇입니까? 예절이란 "상대방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그 사회의 (관습)에 의해 형성된 (형식과 절차)에 따라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절은 이러한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예의 싹을 사양지심(辭讓之心)이라고 했습니다. 예는 일종의 순서에 관한 원칙인 셈입니다. 장유유서(長幼有序)와 같이 차례가 이미 어떤 원칙에 의해 정해져 있고, 그 차례를 지키는 것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란 이야기지요. 차례, 순서, 질서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누군가 양보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누가 양보를 해야 하나"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누가 양보를 해야하는지에 대해 사회적 관습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얘기인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 상황마다 누가 좋은 자리,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 앉을 것이며, 누가 먼저 먹을 것이며, 누가 먼저 말할 것이며... 등등이 이미 사회적 관습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예절이란 얘기입니다. 이웃과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면 "누군가 양보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서 누가 양보해야 하는가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우리는 예의바른 친구라는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3. 첫 번째 질문 : <누가 양보해야 하는가?> ⑴ 심리테스트 무인도시리즈의 남녀관계를 다른 관계로 바꾸어 생각해봅시다. 모자관계, 사제관계, 나아가 친구관계에서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모자관계에서 우리는 자식의 입장과 엄마의 입장이 다른 것을 확인해 보십시오. 같은 반 함께 앉게 된 짝과 이런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면서, 서로 자신이 살겠다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내가 죽고 만다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짝을 짓고, 서로 격론을 벌여보기 바랍니다.. ⑵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여러분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죽고(양보하고), 어떤 사람이 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그 결론을 일반화하여 보편적인 원칙으로 세워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갖게 된 원칙, 희생자를 선정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어떤 원칙을 만들어냈든, 그 생각은 여러분의 자유이지만 그 생각들이 모두 올바른 것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⑶ 이 문제는 매우 골치아픈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골치가 아파서 "될 대로 되라지" 운명에 맡기거나, 같이 죽든 혼자 죽든 차라리 자신이 죽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요. 자신이 마치 거룩한 희생양인 양. 이와같이 생각해보면 여러분이 스스로 희생의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여러분의 선택이 양심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라고 장담할 수 없겠지요? 좀 따져보아야 할 겁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결정해야 할까요? 합리적으로 생각해 나갑시다. 제일 먼저 생각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⑷ 이 문제와 관련된 선생님의 첫 번째 충고는 서로의 (차이)를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찾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희생자와 수혜자, 양보하는 사람과 양보받는 사람의 차이. 바로 그 차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서로 같은 점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조건을 찾아서 서로 다른 길을 가야하는 이유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지요. 서로 납득할 수 있는. ⑸ 만일 서로 의미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은 그런 경우 선택을 (운명에 맡기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이 때 그 의미는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게임을 하라는 것임을 명심하라고 말합니다. ⑹ 선생님의 두 번째 충고는 여러분이 발견한 차이점들이 그 상황에서 (의미있는) 차이점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피부색의 차이를 가지고 누구는 희생자가 되고 누구는 수혜자가 된다면 올바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누구는 남자고 누구는 여자라는 차이로 희생자와 수혜자가 결정된다면 올바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입니다만 선생님은 (차별)을 경고하기 위해 이런 충고를 줍니다. 여러분이 발견한 차이점들이 그 상황에서 (의미있는) 차이점이 되도록 노력하라. 이런 충고를 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러분을 어떤 위험에서 건져주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어떤 위험입니까? 교묘한 사기꾼들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으면 (운명)에 맡기라고 했건만, 동전던지기에서 눈속임으로 확률 100%의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무엇에 눈멀게 만들어 놓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지요. 사랑에 눈이 멀면 희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⑺ 어떤 차이가 의미있는 차이인가? 수많은 논쟁이 필요하고, 상대방과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순수한 입장에서 생각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한 입장이 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처럼 교묘한 사기꾼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사기에 당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와 나"의 차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만 매달립니다. "너"라고 불리는 사람은 죽고, "나"인 사람은 살자는 얘기지요. 서로 "우리"라는 관계에서 "너와 나"의 관계, 즉 적대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⑻ 누가 양보하고 희생해야 마땅한가? 이제 이를 결정하는 의미있는 차이로 받아들여지는 몇 가지를 소개하고, 첫 번째 질문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 몇 가지는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원칙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때조차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① 나이: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이를 정반대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오래도록 윗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차례)를 양보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존경의 표시는 단순히 순서가 문제되는 경우에 차례를 양보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와 같은 희생과 양보의 문제는 누가 먼저 죽느냐의 순서를 다투는 문제가 아닙니다. 존경심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려면 먼저 상대방에게서 존경할 만한 점이 발견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러한 상황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도리인 것입니다. ② 빈부(貧富)와 강약(强弱) : 사람들은 때때로 전투력이 뛰어난 사람, 곧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수혜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전투력의 차이가) 의미있는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능력의 차이가 성과의 차이를 가져오고 성과의 차이가 차지할 몫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양보와 희생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까? 양보와 희생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라는 세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함께 나누고 함께 있고 싶지만,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를 위해 "나"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부자를 위해 가난한 사람이 희생해야 합니까? 강자를 위해 약자가 희생되어야 합니까?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는 "우리"라는 세계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적대적인 세계의 원리이며, 그것은 짐승들의 세상입니다. 물론 "우리"라는 세계의 존속을 위해, 그 영광을 위해, 우리는 우리 중에 가장 강한 자, 가장 뛰어난 자를 살리길 원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 대표선수를 선발하면서 가장 못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③ 우리는 사회적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원칙으로서 선착순의 원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인간관계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변화하면서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속담도 "찬물도 먼저 온 사람이 먹는다"로 달라져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선착순의 원리는 힘 좀 있다고 늦게 와 새치기하는 불의와 부정을 거부하는 도덕적인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착순의 원리는 서로 조건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이야기입니다. 100미터 경주를 해서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빵을 차지한다면, 경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앉은뱅이와 휠체어와 정상인이 경주를 하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라는 세계 안에서 누가 누구에게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서려거든 먼저 여러분을 희생하고 여러분이 양보하십시오. 여러분이 보다 강자고 부자라면 희생하고 양보하십시오. 희생과 양보하는 게 싫어서 스스로 사회적 약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게 싫어서 가난한 자가 되고 싶습니까?
4. 두 번째 질문 : <희생자는 수혜자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주어야 하나?> ⑴ 희생자든 수혜자든 먼저 가져야 할 것으로서 선생님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차가운 (이성)입니다. 생각은 않고 (감정)에만 의지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기 싶습니다. "골치아픈 것은 싫어. 즐겁게 삽시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골치아픈 이런 순간에 우선 죽음으로 도피하고자 합니다. 제발 여러분은 감정대로 이끌리지 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바랍니다. ⑵ 희생자는 수혜자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까요? 이제 심리테스트 무인도시리즈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각자 어떤 선택을 하든, 주어진 상황에서의 결과는 세 가지 중 하나로 귀착됩니다. 둘 다 죽거나, 여자가 죽거나, 남자가 죽거나. 그러나 어떤 결과가 같다고 해서 그 결과가 나타나기까지의 과정마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둘 다 죽는 결과를 상상해봅시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결과가 나타날까요?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적어본 뒤에 친구들과 비교해봅시다. 얼마나 다양한 과정이 있을 수 있는지 확인해봅시다.)) 생각해보면 두 번째, 세 번째 질문 "희생자는(수혜자는) 어떤 태도를 보여주어야 하나?"는 바로 이런 점에서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관계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양보(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우리"라는 세계가 맞닥뜨린 위기입니다.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그 세계는 산산조각 날 수도 있고, 금이 갈 수도 있고, 오히려 전보다 더욱 굳건해질 수도 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더욱 뜨거운 사랑으로 결합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려면 어떤 자세로 이 위기를 넘겨야 하겠습니까? ⑶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미련)을 버리는 것입니다. (미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번 내려진 결정을 다시 뒤집고 싶은 마음입니다. 뒤돌아보는 모습입니다. 원하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상황, 그 길을 누군가 가야만 해서 누군가 가기로 결정했는데, 가기로 결정된 그 사람이 자꾸만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미련)이 깊어지면 마치 상대방도 원하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이 나와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게되고, 경쟁자인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를 (원망)하게 됩니다. ⑷ 그러므로 희생양의 길을 걷는 사람은 그 희생을 누군가 요구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한 입장에서 어떤 조건의 사람이 희생해야 할 것인지 확인이 되었다면, 그는 요구받기 전에 자발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누구도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등 떠밀지 않았네...." 읊조리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서로 (의미있는 차이)를 발견하지 못해 운명의 결정에 맡겼다면, 그 운명의 결정에 순순히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⑸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① : 예수는 구제를 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 없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무릇 희생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뼈에 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선행의 대가는 하나님이 주실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대가를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대가를 바라고 양보를 한다면 그것은 양보가 아니라 (거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⑹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선생님은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모양을 바꾸어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려들지 말라)고 충고하려합니다. "나는 널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사랑하려는데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니?" 묻지 말란 이야깁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목숨을 바쳐 희생하는 것도 억울한데 어째서 상대방의 사랑조차도 확인해선 안됩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너도 같이 죽자)"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희생을 결심하는 그 순간, 아니 그 희생을 실천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이미 상대방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주었습니다. 상대방은 여러분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바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만큼 주는데, 너는 나에게 얼마나 줄래?" 묻는 그 순간에 상대방은 "줄 것이 없는 사람의 초라함"을 맛보아야 할 것이고, 자신은 "아무 소득도 없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만 같은 미련함"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 사랑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은 확인할 수 없는, 아니 예수가 수제자 베드로의 배신을 알고 용납하고 있었던 것처럼 상대방의 배신까지도 용납해야 하는 그런 처지를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국 처절한 고독을 견디어 낼 수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⑺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② : 이 말씀의 참뜻은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말씀으로 잘못 알아듣기 쉽습니다.((천천히 다음 질문을 생각하며 읽어갑시다. 대답을 해가면서 읽어보세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충무공의 유언은 누구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을까요? (아군, 적군, 둘 다) 아군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적군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공의 죽음을 알고 있는 아군은 없습니까? 그 아군은 공이 염려했던 방향으로 행동했나요? 이 말씀은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면 정말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상대방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보같은 짓을 한 여러분 때문에 그 관계가 이상해질 뿐이지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한 희생의 의미를 상대방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이를 마치 대가를 바래서 알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과 양보의 뜻, 여러분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과 "여러분이 희생하는 척 어떤 대가를 구하는 것"(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거래입니다.)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되, 여러분이 사랑으로 희생하고 있음을 알게 하십시오. 상대방에게 사랑을 증명해보이기를 요구하지 말되, 여러분의 사랑은 증명해 보이십시오. "사랑은 (받)는 게 아니고 (주)는 것"이라는 명제는 이런 의미에서 참된 것입니다.
5. 세 번째 질문 : <수혜자는 희생자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까?> ⑴ 지금까지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상대방의 희생과 양보로 덕을 본 사람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살아남은 자의 도리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희생되어야 할 사람보다 늘 살아남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점에서 여러분이 필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산 자의 도리". 여러분이 깨닫기 힘든 것은 "(죽을) 자의 도리"이겠지만, 여러분이 더욱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산) 자의 도리"인 것입니다. ⑵ "산 자의 도리"는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요. 그것은 한마디로 (감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쉬운 결론에도 여러 가지 생각할 일이 많습니다. 천천히 생각하기를 즐기면서 깊이 들어가도록 합시다. (감사)를 위해서는 먼저 "죽은 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죽은 자의 (사랑)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받는 사랑에 둔감합니다. "사랑은 (받)는 게 아니고 (주)는 것"이라는 명제를 생각해보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보다 그 사랑에 둔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둔감한 정도가 지나쳐 (불감증) 환자가 되어 버린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어머니를 박대했던 불효자"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글에서 그 불효자는 친어머니도 아닌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하고 있었는지를 나중에야 깨닫고 자신을 한탄합니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는 너무너무 많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제때에 깨닫지 못하여 생기는 비극적인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얘기일 수 있습니다. ⑶ "죽은 자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감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음을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으면 그만입니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을 이런 때 인용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안에만 감추어져 있는 마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알게 하십시오. 한 때 각 학교와 사회에서 벌어지던 "예고미수" 캠페인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서양 사회의 사회적 습관인 "팁"도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례"와 "뇌물"을 구별하십시오. "뇌물"을 주어서는 안되겠지만, "사례"는 하십시오. "사례"란 "謝(감사)禮(예절, 예법)", 곧 "감사의 예절"입니다. ⑷ "산 자"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입니다. (기린다)는 것은 국어사전의 설명을 빌면 "우수한 점이나 잘하는 일을 추어서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쓰자면 칭찬을 하자는 얘기입니다. 찬양하자는 것이지요. 나아가 그를 기념하자는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넘쳐나면 찬양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고을을 훌륭하게 다스리던 원님이 떠나게 되면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송덕비를 세우기 마련입니다. 죽을병에 걸려 있다가 훌륭한 의사를 만나 고치게 되었을 때, 그 의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훌륭한 의사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의사를 찾아보라고 권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 의사를 권하게 되지 않습니까? ⑸ 기리는 일의 중요함은 바로 여기서 새롭게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찬양은 누구를 위해 필요한 일인지 새롭게 생각해봅시다. (감사)가 "나에게 혜택을 끼친 자"에게 주어지는 답례라면, (찬양)은 "혜택을 받은, 받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해나가는 일 아닐까요? 원님이 눈앞에서 우리를 다스릴 때가 아닌, 원님이 떠난 뒤에 세워지는 송덕비. 이 송덕비는 누가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겠습니까? 어떤 의사를 명의라고 소문내는 일은 누구를 위한 일이겠습니까? 기리는 일을 소홀히 하면, 양보와 희생이 필요한 순간에 아무도 양보와 희생을 실천하지 않는 불행한 사태가 오게됩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역사는 바로 이 점에서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라는 것이 생긴 그 시절,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쓴 투사들은 제대로 기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이제 누가 자기 자녀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라고 가르칠지 모를 일이지요. 그런 것은 오로지 입으로만 해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찬양"은 "산 자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6. 여러분의 다양한 응답들에 대한 강형구 선생님의 충고 : "누군가 양보를(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주제로 한 선생님의 강의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심리테스트 "무인도 씨리즈"에 응답해준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충고에 대해 마음이 안 드는 친구들은 자신의 생각을 선생님에게 글로 보내주기 바랍니다. ⑴ "절대 헤어질 수 없어. 차라리 같이 죽는다"고 대답한 50%의 친구들에게 : 선생님은 이번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의 선택을 최악의 선택으로 질타를 가했습니다. 가장 혹독한 평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업을 마치면서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자합니다. 여러분의 선택을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간단히 바꾸려들지 마십시오. 선생님의 이야기는 선생님 나름대로의 어떤 기준을 가지고 꾸준하게 생각을 발전시킨 결과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판단근거에는 대체로 "사랑하는 사람과 절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잘못된 것인가요? 선생님은 절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별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잘 압니다. 이별의 아픔을 겪느니 차라리 함께 죽겠다는 생각을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더구나,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도 저세상이 계속된다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고, 그것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면, 당연히 차라리 같이 죽는 일을 선택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이 지상에서의 삶이 가장 귀중한 것이라면 절대로 둘 중에 누가 양보하는 일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의 비판을 여러분은 다만 이런 질문으로 받아들여 주길 바랍니다.("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입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까?" "잠시 헤어져 있는 채로 사랑을 할 순 없습니까?" "죽음이란 영원한 이별입니까?" )"……" "……"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사실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이 오직 한 사람, 그 뿐입니까?" "여러분의 '우리'라는 세계 안에는 단 둘만 존재합니까?") ⑵ 상대를 살리고 자신이 죽는 선택을 한 친구들에게 : 여러분의 선택에 일단 경의를 표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지적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선택이 생각하기 귀찮아서, 생각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도피수단은 아닌지 반성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합리적인 선택인지" 다시 생각해보라는 얘기입니다. "누가 양보해야하나"를 결정하는 "의미있는 차이"가 "(누가 더 희생정신이 강한가)"로 귀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희생자의 사랑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더 상대방을 사랑하는가, 누가 더 희생정신이 큰가를 따져 더 큰 사람이 죽자"고 말한다면 "지가 죽고싶어 죽었지, 뭐"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⑶ 자신이 사는 길을 선택한 친구들에게 : 여러분의 선택을 부끄러워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택은 "사는 일의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선택이 단지 "너냐 나냐"라는 차이에만 주목한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우리라는 세계"안에 여러분 자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 주십시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산 자의 도리"를 충성을 다하여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⑷ 운명에 맡기겠다는 친구들에게 :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여러분의 선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선생님도 신앙인으로서 그러한 상황에서라면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이성적 판단을 포기하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생각하기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앞서 말한 것처럼, 운명에 맡기는 것은 ("의미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때)의 선택임을 잊지 마십시오. 최대한 의미있는 차이를 연구하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