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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예프는 그 즉시 실종 신고를 했지만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는 경찰을 보다 못해 막스의 사진 한 장을 들고 편지 봉투에 발신지로 찍힌 핀란드를 무작정 찾아가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며칠간의 노력 끝에 결국 막스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프로코피예프는 그제야 그의 사망 소식을 막스의 어머니에게 전했다.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막시밀리안 슈미트호프는 프로코피예프의 분신이자 애인이었다. 각각 17, 18살의 어린 나이에 음악원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순식간에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사이로 발전했고 프로코피예프는 일기장을 온통 막스의 얘기로 채웠다. 훗날 그가 “당시 나의 반쪽은 나 자신, 또 다른 반쪽은 막스였다”고 회상한 것과 프로코피예프의 미망인이 두 남자 모두에게 강한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고 전한 것을 통해 이들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 이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청춘을 잠식한 사랑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버린 충격에 휩싸인 프로코피예프가 내놓은 첫 결과물이 바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주로 악곡이나 악장이 끝나기 직전 독주자나 독창자가 잠시 동안 혼자 연주하는 전통적인 ‘카덴차’를 넣는 대신 그는 1악장 제시부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피아노 독주에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기술들과 당시에는 생소하기 그지없던 온갖 불협화음이 혼재하는 장장 5분짜리 카덴차는 젊은 날 작곡가의 절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담은 대작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사랑이 창작의 제물이 된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공교로운 것은 더 비정상적이고, 더 아픈 사랑일수록 더 기록적인 결과물을 낳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망명길에 오른 스위스에서 자신을 전폭적으로 후원해 준 비단상 베젠동크의 아내와 불타는 사랑에 빠진 리하르트 바그너는 그때까지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니벨룽겐의 반지’ 사이클도 제쳐두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업에 착수했다. 켈트 지방 전설로 전해 내려 오던 기사 트리스탄의 이야기는 13세기에 독일인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에 의해 ‘트리스탄’이라는 장편 서사시로 재탄생했는데 바그너는 시대정신을 다소 내포하고 있던 이 작품의 줄거리만을 따오며 실상 그리스 신화식(式) 사랑 이야기로 이 작품을 탈바꿈시켰다.
이미 정혼자가 있는 여자 이졸데와 사랑에 빠진 트리스탄은 여러모로 성에 차지 않던 부인 미나를 진정한 사랑의 장애물로 여긴 창작자의 분신이기도 하다. ‘하루를 못 보면 병 들고, 사흘을 못 보면 죽게 되는’ 사랑의 묘약을 마신 남녀가 사회적 규범과 잣대로 고통 받다 결국 죽음이라는 숭고한 승리를 이룩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바그너는 사회상을 전달하는 예술가가 예술적 성과를 위해 사회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는 셈이다. 아리아를 끝마치는 때에 그 선율이 끊어지지 않고 무한정 이어지도록 하는 ‘무한 선율 (Unendliche Melodie)’ 기법이 가장 절정을 이루는 이 가극은 지금까지도 그의 가장 성공적인 대표작으로 꼽힌다.
인간사의 가장 큰 화두 두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코 사랑과 죽음이 아닐까. 언뜻 보면 전자가 인생의 밝음, 후자가 어두움일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삶의 완성이라면, 사랑은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 번뇌의 연속이다. 하물며 그것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안기는 사랑일 때랴. 단 그 아픈 사랑이 예술에서만큼은 가장 큰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가치에 맞지 않는 것일지라도 그에 대한 판단은 작품의 가치와 상쇄된다. 불공평한 특혜라고 불평할 사람들을 향해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의 영혼을 채우는 것은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셋째도 사랑!”
손열음 1986년 원주 출생. 뉴욕필과 협연하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 중이다. 올해 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2위를 했다. 음악듣기와 역사책 읽기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