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릉의 침전 앞 양편에 도열한 석수상
유릉 무석인상의 뒷면 문양 -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조각하였다.
순종효황제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정효황후부우
* 아 ~!!! 슬프다. 순종황제는 이미 국권을 일제에 상실 한 뒤
승하하셔서 능비의 서두에 大韓 두자를 쓰지 않았다.
유릉의 예감
조선왕릉 40기의 답사와 답사 사진 및 답사기 연재를 마치면서 나는 그동안 배운것이 상당히 많다. 왕릉을 왕릉으로만 보지 말고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의 현장이며 왕조의 흥망성쇠 및 각 왕의 치적에 대해서도 다시금 되새겨 보는 기회였다. 더우기 조선왕릉은 애민사상, 자연합일의 사상이 함축된 세계유례가 없는 우수한 왕릉임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중국이나 이짚트 등 거대한 왕릉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작은 왕릉이지만 그속에 담긴 뜻은 실로 깊고 오묘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사상이 충분한 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황제 순종 황제와 그 두분의 황후의 명복을 빌며, 왕조를 마감한 일에서 깨어나 영면 하사라고 아뢴다. 황제시여 영원한 복을 누리소서 ~!!!
산신석 - 대개 인산뒤 3년이 지나면 철거하는데 유릉에서는 그대로 두었다.
순종황제 국장 - 대여 의 운구 모습
여주,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 에서 20100821
장지(지금의 금곡동 유릉)에 도착한 순종황제 대여
- 움막 같은 거푸집 속에서 능침이 조성 된다.
여주,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 에서 20100821
* 27대 순종황제와 원후 순명황후 민 씨, 계후 순정황후 윤 씨 유릉裕陵
(일봉삼합장릉)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위에 오른 순종은 고종 태황제와 명성황후 사이의 둘째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07년 즉위하였으나 이미 기운 왕조를 붙들어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간교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고 쉽게 나라를 병탄 시킬 일을 하나하나 순서를 정하여 진행 하였다. 1910년 합병 칙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계후 순정효 황후는 국새를 감추며 까지 버텼으나 오적 신을 비롯한 일제의 획책은 막을 수 없었다. 원후 순명효 황후는 1897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의 즉위 전에 사망하여 지금의 능동 어린이 대공원 안에 모셨다가 순종 승하 후 천장하여 합장하였다. 계후 순정효황후는 한일 합방, 해방, 6.25사변, 5.16군사쿠데타, 4.19혁명 등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겪고 낙선재에서 불교에 귀의하여 슬픔의 세월을 보내다 1966년 73세로 세상을 뜨셔 유릉에 합장되니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일봉삼실 합장능이 되었다. 유릉은 일반적으로 홍릉의 예를 따라 황제능으로 조영되었다. 모든 석물이 홍릉에 비하여 좀 더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만들어 졌다. 침전의 내부도 화려한 장식을 가미하여 더 권위를 높였다. 능과 침전이 지형적 조건에 따라 일직선상에 놓이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틀려 있다.
* 이로서 지난 4년 여 기간동안 답사한 조선왕조 27왕과 왕후,
다섯 분의 추존왕과 왕후의 릉 답사기 및 사진 수록을 마치며 그 마지막, 순종황제 편을 여기에 소개 합니다.
27 왕, 5 추존 왕 편은 문화재청 한 문화재 한 지킴이 블러그를 이용하시면 더 좋은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겨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