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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산다는 동네가 보였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리다. 바다는 녹동항(港)과 작은 사슴처럼 생긴 소록도(小鹿島)를 갈라 놓고 있다. 육지와 섬은 뱃길로 5분 거리다. 그렇지만 육지 사람과 섬에 사는 한센병 환자들의 가슴에는 대양(大洋)만큼이나 간격이 있었다.
올 3월 개통한 소록대교는 1160m로 왕복 2차선이다. 텅 빈 도로를 승용차는 질주했다. 에메랄드빛 남해 바다가 발 아래 넘실댔다. 다리를 반쯤 건너자 흰색 건물이 보였다. 편백나무, 솔송나무, 삼나무, 치자나무 숲 사이에 자리잡은 국립소록도병원이다.
이 병원을 이끄는 박형철(朴亨澈·48) 원장은 부임 후 언론과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다. 이날도 기자와의 만남을 극구 사양했다. 고흥경찰서장과 총리의 경호(警護)문제를 논의한 뒤 돌아온 그는 대뜸 "소록도가 더 이상 우상(偶像)이 되는 게 싫다"고 했다.
―소록도가 그동안 우상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소록도는 상징이 됐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한(恨)이 서려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들 이곳 사람들을 동정합니다만 소록도에 대한 환상은 이제 깨야지요."
―왜 언론과 만나지 않나요.
"제가 처음부터 마음먹었다면 소록도 병원장으로 언론에 수도 없이 등장했을 겁니다. 2007년 10월 15일 이곳 병원장으로 온 이후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소록도에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갈등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지요. 문제는 갈등까지도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총리도 와서 정부의 공식 사과 의사를 전하는 만큼 소록도를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언젠가 허상(虛像)은 깨진다고 봅니다."
―자세히 이야기해보시지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도 있어야 합니다. 일제 때부터 여긴 독립 행정구역처럼 운영됐습니다. 저는 단순히 청진기만 들고 있는 의사가 아닙니다."
―그럼 의료행위 외에 다른 일도 합니까.
"병원 건물은 하나지만 소록도 전체를 다 관리합니다. 620여명의 주민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분들이 사슴 잡아달라고 하면 사슴도 잡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별일을 다 해야 하지요."
―소록도병원장이라기보다 마을 이장 같은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는 성당에서 상태가 괜찮은 원생 열댓 명을 데리고 중국 여행을 간다고 하기에 반대했습니다. 인플루엔자 A(H1N1·신종 플루) 감염 우려도 있고 혹시나 일이 잘못되면 섬 전체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납니다. 갔다 오면 일정 기간 격리 수용도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고요. 그런데도 '원장이 못 가게 한다'고만 말하면 서운한 거죠."
―서운한 일이 많았습니까.
"과거와 다른 시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환자들을 고객이라 생각하고 서비스하려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언제 너희들이 우리 건강을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하는 분도 있어요. 그럴 때면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요."
소록도에는 1000여명이 산다. 620여명의 한센인 외에 병원 직원 200여명과 그 가족, 자원봉사자를 합친 숫자다. '1번지'라 불리는 섬 오른편의 '직원지대' 혹은 '관사(官舍)지역'에는 병원 직원이 사는 관사가 있다. '2번지'라 불리는 왼편의 '원생지대' '병사(病舍)지역'에는 한센인들이 거주한다.
소록도의 7개 마을에는 1000여호(戶)의 집이 있다. 대부분 1층 건물로 일제식 병사 형태다. 소록도에 들어오는 모든 한센인에게 이 집이 주어진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되면 병원에 입원할 수 있고 괜찮으면 퇴원해 마을에서 요양하는 식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의 병상은 150여개다.
한센인이 6000여명까지 몰렸던 1940년대에는 13㎡(4평)가 채 안 되는 방에 13명이 함께 살았다. 지금은 부부나 동거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명씩 방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빨래는 병원에서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할 수 있고 4개의 공동 식당이 있어서 식사를 해결한다.
―예전보다 한센인에 대한 차별은 많이 줄었습니까?
"지난 3월에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됐습니다. 요즘엔 하루엔 2000여명, 주말에는 6000여명까지 관광객이 몰려듭니다."
―대단하군요.
"차별이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아직도 동물원 원숭이 보듯 섬 주민을 대하는 관광객들이 있어요.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쓰레기만 버리고 간다'며 싫어합니다. 그전엔 섬 내에서도 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옛날 얘기입니다."
-섬에 있는 사람들은 누굽니까?
"소록도는 병원과 커뮤니티 개념이 혼합된 곳입니다. 과거에 한 번 이상 한센병에 걸린 적이 있으면 올 수 있습니다. 섬에 들어오는 것이 입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의식주와 건강 문제는 국가가 책임집니다. 주민이라는 개념은 없고 원칙적으로는 환자만 들어올 수 있지요."
―요즘도 새로 한센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국제보건기구(WHO)로부터 나병 퇴치국가로 인정받았습니다. 발병률도 인구 1만명당 1명보다 더 낮습니다. 1년에 많으면 20~30명이 걸리는 수준이지만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죠. 거의 한센병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뭐가 제일 힘든가요?
"아직도 소록도는 오지(奧地)입니다. 이번에 직원 식당을 새로 만들려고 해도 위탁 운영을 하려는 업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병원에 저까지 포함해서 의사가 4명이에요."
―의사 구하기는 쉽나요?
"공고를 내도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공중보건의 8명으로 메우고 있습니다. 서울 한 번 왔다 갔다 하려면 수십만원이 드는데 누가 오려고 하겠어요. 급여체계라든지 처우문제를 조금 유연하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섬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뭡니까.
"주민들 사는 곳을 개선해주는 것이었어요. 주민들 사는 곳을 둘러봤는데 사람 살 데가 아니더군요. 직원들이 광고 유치하듯 뛰어다녔습니다. 대우조선해양에서 사회 공헌 차원으로 낡은 병사 3개동을 신축해줬죠."
박 원장은 전남대 경영대 79학번이다. 고등학교도 문과를 나왔다. 그러나 친형의 권유로 2년 뒤인 1981년 같은 대학 의대에 재입학했다. 한창 의사로서의 꿈을 키워 갈 무렵 자영업을 하던 부모가 파산했다. 가정형편이 갑자기 기울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 그는 광주 동구보건소장에 지원했다. 34살 때의 일이다. 돈 잘 버는 길을 놔두고 '공직'에 진출한 데 대해 그는 "원래 성격이 우직해 공직에 관심이 있었고 부모의 파산에도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2006년에 자치행정혁신 전국대회 보건복지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7년 10월, 7개월째 공석(空席)이던 국립소록도병원장에 자원하셨지요?
"당시 광주 동구보건소장으로 12년째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보건소 업무에는 통달했다고 느낄 정도로 성과도 좋았고 안정적인 생활이었습니다."
―왜 남들이 꺼리는 이곳 근무를 자원했습니까.
"점점 타성(惰性)에 젖어 들까 봐 무섭더군요. 제 남은 인생이 우스워질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집에서 반대는 없었습니까?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엄청 반대했어요. 광주에서 출·퇴근 하겠다고 온갖 감언이설로 아내를 설득했죠."
―병원장으로 부임한 지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언제까지 할 생각입니까?
"노바디 노우즈(Nobody knows),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주변에서는 소록도를 관광 명소로 더 개발해야 한다는 말들도 많은데, 거창한 장기 계획은 없습니다. 그저 박형철이 와서 소록도 안 망쳤다는 말 정도만 듣고 싶을 뿐이에요."
조선일보 2009.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