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세-원린(元璘) 으뜸 원 옥빛 린 탐진군(耽津君) 문열공(文烈公)
공(公)의 휘(諱)는 원린(元璘)이요 초휘(初諱)는 원륜(元崙)이다. 세계(世系)는 보승별장(保勝別將)으로서 흥위위 상호군(興威衛 上護軍)으로 증직(贈職)된 휘(諱) 자미(子美)공의 7세손(八世孫)이며 증직추밀원부사(贈職樞密院副使)인 휘(諱) 영유(永儒)공의 6세손(六世孫)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하여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된 휘(諱) 부(孚)공의 5세손(五世孫)이며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회헌(晦軒) 시(諡) 문성공(文成公) 휘(諱) 향(珦)의 증손이며 조(祖)는 휘(諱) 우기(于器)로 검교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 호(號) 죽옥자(竹屋子) 순평군(順平君)으로 시호(諡號)가 문순(文順)이며 선고(先考)는 휘(諱) 목(牧)으로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호(號) 겸재(謙齋)로 순흥군(順興君)이요 시호(諡號)가 문숙(文淑)이며 아들은 3형제로 장자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순성군(順城君) 시(諡) 문혜(文惠)로 휘(諱) 원숭(元崇)이며, 차자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 죽성군(竹城君) 시(諡) 역시 문혜(文惠)로 휘(諱) 원형(元衡)이며, 문열공(文烈公)은 계자(季子)다. 公은 대대로 이어오는 문형(文衡)의 혈통을 따라 1324년(고려 충숙11 갑자)에 개성(開城)에서 탄생하시어 1341(충혜 2 辛巳)에 백(伯)⦁중씨(仲氏)와 더불어 약관(弱冠) 18세로 동방(同榜) 급제하시니 고려사회가 이를 부러워하였다.
고려 말 백문거(白文擧)선생은 『정 안겸재(呈 安謙齋)』라는 시(詩)에서 『다길조(多吉兆)』와『신영광(莘榮光)』과『학사당(學士堂)』으로 노래 할 정도로 삼자 동방급제(同榜及第)를 축하하였다. 이때 원숭(元崇)⦁원형(元衡)⦁원린(元璘)⦁종원(宗源이 충혜왕(忠惠王) 신사(辛巳=1341)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이에 순흥안씨의 많은 인물이 급제하여 마치 학사당(學士堂)을 이룬듯하다고 노래하였다.
次 朴持平韻 呈 安 謙齋 盡道新年多吉兆 도리(道理) 다한 새해는 길조(吉兆)가 많을 지니 端知慶閥莘榮光 방정(方正)한 벌족(閥族) 가문 여러 영광 모였구나. 傳來古儉先人宅 전래해 온 옛날 검소(儉素), 지금 역시 선인댁(先人宅) 化作風流學士堂 풍류(風流)를 조화(造化)하여 학사당(學士堂)을 만들었네.
뿐만 아니라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은 『죽계안씨관군영(竹溪安氏冠群英)』『죽계안씨영걸(竹溪安氏 英傑)들 무리 지어 벼슬했네.』이라고 노래하였다 공의 벼슬은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政堂文學 檢校中樞府使)며 이봉(移封) 탐진군(耽津君)으로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시다. 문열(文烈)의 시법(諡法)은 근학호문(勤學好問)하여 문(文)이요 충군자민(忠君慈民)하여 열(烈)이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은『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에서 밀직첨서 휘문간공안종원(密直簽書 諱 文簡公 安宗源)이 평소 목은(牧隱)에게 하던 말을 인용하여
『吾族祖文成公之孫政堂公,有三子又登科,何天之厚吾安氏之至此也』 내 족조 문성공(族祖 文成公=珦)의 손자 정당공(政堂公=牧)의 아들 삼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 어찌 하늘의 후(厚)한 대접이 우리 안씨《安氏)에게만 베풀어 진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라 하고 『猶且歷三世而從其孫之登科』 『오히려 3세(三世)를 지나(밟아) 그 손자가 과거에 올랐다』라 하였으니,
역1세(歷一世)하니 문성공(文成公:諱 珦)이요, 역2세(歷二世)하니 문순공(文順公:諱于器)이요, 역3세(歷三世)하니 휘(諱) 문숙공(文淑公=牧)이니 그(珦) 손자(일반적 후손) 원숭(元崇)⦁원형(元衡)⦁원린(元璘) 삼 형제라 밝혀 놓았다. 그러므로 순흥7세(順興七世)는 확실한 삼 형제다. 순원군(順原君) 휘(諱) 응창(應昌) 백암공(柏巖公)은『문성공 회헌부자 묘지(文成公 晦軒夫子 墓誌)』와『문숙공묘지(文淑公墓誌)』에서 한결같이
『文淑生 三男一女 長曰元崇政堂文學順城君文惠公, 次曰元衡竹城君文惠公, 次曰元璘耽津君文烈公 女適判書閔愉』라 하여 삼 형제라 하였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耽津君=元璘)은 후세에 어떠한 유적(遺跡)도 남김없이 요절(夭折)하셨으니 한없이 애석하도다. 공은 슬하(膝下)에 두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는 휘가 예(禮)로 1341년(충혜2 辛巳)에 출생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밀직제학 상장군(判密直提學 上將軍)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켜 조선조(朝鮮朝)에서는 관직에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차자는 휘(諱)가 도(堵)로 우왕 14년(1388)에 등과한 후 고려조에서는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조선조 태종조(太宗朝)에 출사(出仕)하여 전사판관(典祀判官)을 거쳐 사간원 우헌납(司諫院 右獻納)을 역임하셨다. 문열공의 배위(配位)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아들의 등에 업혀 천수백리 망명(亡命)길을 따라 영산의 영축산(靈鷲山) 밑 당포(唐浦)에 우거(寓居)하였다. 그 후 이거(移居)하여 갈현(葛峴) 밑의 효자리(孝子里)에 살다가 쓸쓸히 돌아가시니, 극진히 모시던 헌납공은 여묘(廬墓)에서 피눈물로 슬피 울어 출천(出天)의 효(孝)를 다하였고, 태종(太宗)은 을유(乙酉) 1405년에 정려(旌閭)를 내려 세상에서 그의 덕행(德行)이 온 백성에게 귀감(龜鑑)이 되게 하였다. 공의 묘는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었다하나 표지(標識)가 없어 실묘(失墓)하였고, 배위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묘도 경남 영산 갈현(葛峴)에 모셨으나 역시 표지가 없어 실묘하였으니 후손들의 자괴(自愧)스런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2006년부터 전주최씨의 산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한) 결과 효촌(孝子里) 갈현(葛峴)에서 장구(長久)한 세월에 퇴폐(頹廢)된 묘지를 찾아 확인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출처: 탐진 선계 변정록(耽津 先系 辨正錄)-연곡 안 상천 저
* 2011년 신묘년 양력 10월21일부터 10월24일까지 우리 탐진군파 헌납공 대종회 에서는 경남 창녕군 도천면 논리84-2 번지에 소재한 (본문에서 언급한 효촌 갈현의 퇴폐(頹廢)된 묘지) 헌납공의 어머니 전주최씨(全州崔氏, 耽津君 配位) 묘소로 추정되는 고총(古塚)을 발굴하고 확인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묘에는 어떤 유적도 유골도 표지물도 남아있지 않아서 설혹 탐진군 문열공의 배위 였다고 해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발굴했던 묘가 아닐것이라는 심증이 더크다. 앞으로 더확실한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다 아니면 실증적인 유적과 유물을 더이상 찾기가 불가능 할것이라는 전제하에 족사연구와 종사방향을 설정 하여야 할것이다
|
첫댓글 소중한 글 올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