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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卷13, 「高句麗本紀」 東明聖王> |
朱蒙乃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至普述水〕 ,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夲3)川 〔魏書云至紇升骨城〕 . 觀其土壤肥美4),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
주몽(朱蒙)은 이내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等)과 세 사람이 더불어
벗을 하고 가다가,
엄표수(淹淲水) 〔일명 개사수(盖斯水), 지금의 압록 동북(東北)에 있다〕에 이르렀는데,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주몽은 추격(追擊)하는 병사(兵士)가 박도(迫到)할까 걱정되어 엄표수(淹淲水)에 고(告)하길,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주(逃走)하고 있는데,
추격(追擊)하는 자(者)들이 다가와 이르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魚鼈)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朱蒙)이 건너가자,
이내 어별(魚鼈)이 흩어져 버리니, 추격하던 기병(騎兵)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 〔魏書云, 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마의(麻衣), 납의(衲衣),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朱蒙)이 물어 왈(曰),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이고 성(姓)과 이름(名)이 무엇이요?”
마의(麻衣)를 입은 자는 이름을 재사(再思),
납의(衲衣)를 입은 자는 이름을 무골(武骨),
수조의(水藻衣)를 입은 자는 이름을 묵거(默居)라 하였는데 성(姓)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朱蒙)은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默居)에게 소설씨(少室氏)의 성(姓)을 하사(下賜)하였다. 이내 대중(大衆)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승명(承命)을 받들어, 나라의 기틀(元基)을 열고자 하는데,
세분의 현인(賢人)을 우연히 만난 것은 어찌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 재능(才能)을 헤아려 각기 임무를 맡을만한 일을 주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 〔魏書, 홀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
그 토양(土壤)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하(山河)가 험하고 견고하여 마침내 도읍(都邑)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아직은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위쪽에 농막(農幕)을 이어서 거주(居住)하였다.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고, 고(高)를 성씨(姓氏)로 삼았다.
* 흘승골성(紇升骨城):
몽골 울란바타르 서북쪽, 바이칼 호수 서남쪽에 흡스골(紇升骨 Хөвсгөл нуур)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첫 도읍(都邑)을 졸본(卒夲)이라 하지만,
졸본(卒本)은 고구려가 처음 도읍으로 삼은 곳인데,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나온다.
[03] 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위서(魏書), 열전(列傳) 第八十八> (高句麗) |
朱蒙遂至普述水,遇見三人,其一人著麻衣,一人著納衣,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高句麗,因以為氏焉。 그들과 더불어 홀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거(居)하였다. |
홀본(졸존)의 위치는 중국 요령성 환인설이
19세기 말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제시한 이후 지금까지 통설로 수용되고 있다.
(那珂通世, 1894, 「朝鮮古史考, 第四章 高句麗考」, 『史學雜誌』5-9, 42쪽).
우리의 사학계에서는 위의 설을 그대로 수용하여,
고구려 첫 도읍을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하고 있는 것 같군요.^^
고구려(高句麗)의 첫 도읍(都邑)이
흡스골(紇升骨 Хөвсгөл нуур)의 성(城)인지
흡스골(紇升骨 Хөвсгөл нуур) 여행 가시는 분들께서는
<고구려(高句麗)의 흔적(痕迹)>을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 骨은 고구려말로 성(城)을 뜻하는 ‘구루(溝漊)’의 음역)
고구려 초기의 도성(都城)과 개도(改都)(성균관대 권순홍 논문) (출처) |
1. 卒本과 紇升骨城의 위치 고구려 최초의 도성은 通典에서는 紇升骨城, 古記에서는 卒本으로 각기 달리 언급된 다. 김부식은 양자를 같은 곳으로 해석하였으나, 三國史記卷37, 雜誌6, 地理4, 高句麗. 이는 단순한 추론에 지나지 않았다. 지 명의 위치 비정은 문헌적 검토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조사도 함께 이루어졌을 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전근대사회에서는 고고학적 현상 파악이나 현장 답사가 불가능 했으므로, 졸본과 흘승골성에 대한 위치 비정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고구려 초기 도성에 관한 본격적인 위치 비정은 19세기 말 이래, 일본인 연구자들이 중국 동북지방을 실지 조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대체로 오늘날 桓仁 지역은 졸본으 로, 那珂通世, 1984 「朝鮮古史考」 史學雜誌5-9, 42쪽. 환인의 五女山城은 흘승골성으로 각각 비정되었다. 白鳥庫吉, 1914 앞의 논문, 28쪽. 이러한 이해는 종래 졸본과 흘 승골성을 동일시했던 단순한 추정과는 달리, 구체적인 사료 분석을 통해 양자의 위치를 구 분하여 비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후 졸본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답습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다만, 고구려 의 도성제가 거주성으로서의 평지성과 방어성으로서의 산성이라는 하나의 조합으로 이루어 진다는 이해 아래, 余昊奎, 1998 高句麗 城 1(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39~42쪽 ; 임기환, 2003 「고구려 都城制의 변천」 한국의 도성-도성 조영의 전통-, 서울학연구소, 13~14쪽. 환인 지역 내 평지성의 위치에 관심이 모아졌다. 흘승골성이 오녀산성으로 비정되는 가운데 졸본은 광의로서 환인 일대를 아우르는 범칭인 동시에, 협의로서 산 성인 흘승골성과 조합을 이루는 평지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협의의 졸본의 위치에는 下古城子古城,25) 喇哈城,26) 高麗墓子村27) 등이 후보에 올랐다(지도 1 참고). 25) , 1985 앞의 논문 ; 朴淳發, 2012 高句麗의 都城과 墓域」 韓國古代史探究12. 26) 田中俊明, 1994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 朝鮮文化硏究1 ; 余昊奎, 1998 앞의 책 ; Mark E. Byington, 2000 「고구려의 국가형성-세 연구에 기초한 예비적 모델-」 동아세아의 국가형성(제10회 백제 연구 국제학 술회의), 충남대 백제연구소 ; 노태돈, 2012 앞의 논문. 27) 조법종, 2008 「고구려 초기 도읍과 비류국 연구」 초기 고구려역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 梁志龍, 2008 「關于高句麗建國初期王都的探討-以卒本和紇升骨城爲中心-」 졸본시기의 고구려역사 연구(2008년 한․중 고구 려역사 연구 학술회의), 동북아역사재단. 그러나 여기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고구려 건국 당시부터 고구려 도성제에서 평지성+ 산성이 성립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윤용구, 2008 「현도군의 군현 지배와 고구려」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139쪽 ; 梁時恩, 2013 앞의 논문, 267쪽. 즉, 졸본과 흘승골성을 하나의 조합 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졸본과 흘승골성의 관계 설정과 위치 비정을 위해서는 사료 상의 모습들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그것을 시도하고자 한다. 우선 졸본에 관한 문헌적 검토이다. A-1 東明聖王 卽位年(기원전 37), (중략) (王이) 卒本川에 이르러, 그 토양이 기름지고 좋으며 山河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國號를 高句麗라 하였다. (三國史 記卷13, 高句麗本紀1) A-2 옛적 始祖 鄒牟王이 (중략) 沸流谷 忽本西 城山上에 도읍을 세웠다. (중략) 王이 忽本 東崗에서 龍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 A-3 溫祚王 卽位年(기원전 18), (중략) 朱蒙이 北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卒本扶餘에 이르렀다. 扶餘王이 아들은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는데, 朱蒙을 보고는 非常人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안 되어 扶餘王이 죽자 朱蒙이 왕위를 이었다. ( 三國史記卷23, 百濟本紀1) A-4 高句麗가 곧 卒本扶餘다. (三國遺事卷1, 紀異2, 高句麗) 위의 기사들은 고구려의 발상지로서 등장하는 졸본에 관한 기사들이다. 이를 통해서는 크 게 세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주몽이 자리 잡은 곳이 卒本川과 沸流水에 가까운 위치라는 점이다. 대체로 水는 川보다 큰 강이나 하천을 가리킨다. 가령 三國史記에서 江과 河‧水 등은 鴨綠江‧遼水‧遼河‧浿水‧漢水 등과 같이 비교적 큰 강을 지칭할 때 쓰인 반면, 川은 고구려왕들의 장지명에서 간취할 수 있듯이 고구려의 왕호 중 故國川‧東川‧中川‧西川‧美川 등은 集安 지역 내 흐르는 작은 하천(川) 혹은 들(壤)을 뜻한다 (정호섭, 2011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 서경문화사, 87~88쪽). 비교적 작은 하천을 가리킨다. 水經注에 따르면, 水에는 大小가 있는데, 地溝에서 나와 大水나 海로 들어가는 것을 川水라고 한다. 또 「孔 穎達疏」에 따르면, 川 중 큰 것을 江․河․淮․濟라고 이른다(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2001 漢韓大辭典, 단국 대학교출판부). 즉, A-1에 나타나는 卒本川은 沸流水보다 작은 규모의 강이나 하천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가까운 지역 안에서 두 개의 크고 작은 물줄기가 평행해서 흐르기 어렵다고 봤을 때, 여기서의 졸 본천은 비류수의 지류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008 앞의 논문, 34쪽 이때 주몽이 정착한 곳이 졸본천과 비류수, 양자에 가깝다는 것은 이 지역이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점임을 뜻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주몽이 정착한 곳이 졸본이라는 지명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A-1에 따르면 주 몽은 卒本川에 이르러 이곳에 도읍할 뜻을 정하고 沸流水上에 정착하여 건국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卒本川上이 아닌 沸流水上에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卒本川에 이르러 멈췄다고 표현한 것은 이 일대를 다른 지역과 구분 짓기 위한 가장 분명한 지리적 특징이 卒本川이었 음을 뜻하는 것이다. 고구려 발상지로서의 졸본의 모습은 A-2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A-2는 414년에 세 워진 의 세계와 약력 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시조 추모는 忽本(卒本)의 서쪽 城山 위에 나라를 세우고 홀본(졸본)의 동쪽 언덕에 묻혔다고 한다. 이는 홀본(졸본)을 중심 으로 동서 대칭구도로 나누어 설명한 것으로, 立碑 당시의 고구려인들에게 홀본(졸본)이 시 조 추모 및 초기 도성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주몽이 건국 직후 얼마동안 궁실을 짓지 않고 지냈다는 점이다. A-1에 따르면, 주 몽은 졸본에 정착한 이후에도 한동안 성곽‧궁실을 짓지 않고 지내다가 3년이 지나서야 성곽․ 궁실을 지었다고 한다. 三國史記卷13, 高句麗本紀1, 東明聖王 4년조 이것은 즉 졸본이 특정 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근․지역 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음을 의미한다. 때 주목되는 것이 바로 A-3의 기사이다. 이에 따르 면 주몽은 졸본부여 내로 편입된 후 그를 바탕으로 하여 고구려를 세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몽이 3년간이나 성곽‧궁실을 짓지 않고 지냈던 것은 기왕에 졸본부여가 사용하던 시설을 그대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졸본부여와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주몽은 졸본부여의 중심지를 그대로 이어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A-4에서 일연은 고구려를 졸본부여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다만, 3년 후에는 스스로 성곽․궁실을 조영할 정도로 대내적 정비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내부적 힘은 태백산의 荇人國 과 그 너머의 北沃沮에 대한 대외적 정복활동을 통해 표출되기도 하였다. 三國史記卷13, 高句麗本紀1, 東明聖王 6년조․10년조. 이상에서 졸본에 대한 문헌적 검토를 시도하였다. 결국 주몽이 자리 잡았던 졸본은 광의 로서 환인 일대를 가리키는 범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 성만을 가리키는 城名도 아 니었다. 단지, 비류수와 졸본천의 합류지점의 지명으로 기왕의 선주세력인 졸본부여가 근거 했던 지역이었다. 주몽은 졸본부여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성곽과 궁실이 당장은 필요하지 않았고, 3년이라는 대내적 정비 기간을 거친 후에야 성곽․궁실 조영에 착수했던 것이다. 다음은 이를 바탕으로 한 졸본의 구체적인 위치 비정인데, 그에 앞서 또 다른 도성으로서 언급되는 흘승골성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B-1 朱蒙이 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居하고, 高句麗라고 불렀다. (魏書卷100, 列傳88, 高句麗) B-2 古記에서 말하길, 前漢 宣帝 神爵 3年(기원전 59) 壬戌 4月 8日, 天帝의 아들이 五龍 車를 타고 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稱王하면서 國號를 北扶餘라 했다. 스스로 이름 하길 解慕漱라 했으며, 아들을 낳아 扶婁라 이름 짓고 解를 氏로 삼았다. 王이 훗날 上帝의 명으로 인하여 도읍을 東扶餘로 옮겼다. 東明帝가 北扶餘를 이어 일으키고, 도읍을 卒本州에 세우고 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高句麗의 始祖이다. (三國遺事 卷1, 紀異, 北扶餘) B-1은 흘승골성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중국측 사료로서, 주몽은 졸본이 아닌 흘승골 성에서 建都하였다고 한다. 한편 B-2에서 흘승골성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건도한 곳이고,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졸본에서 건국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흘승골성은 고구려의 建都地로도 등장하지만, 북부여의 建都地로도 거론되었다. 이런 착란 중에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B-2에 나타나는 흘승골성의 특징이다. 천제의 아들이 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에 내려 와 立都했다는 내용에 따르면, 흘승골성이 천상계와 인간세계를 잇는 중심이자 통로임을 알 수 있다. 곧, 흘승골성이 한국 고대의 보편적 종교현상인 샤머니즘적 세계관 속에서 2002 한국 고대의 샤머니즘적 세계관」 강좌 한국고대사 8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4~23쪽. 세계의 축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뜻한다. 샤머니즘적 우주론에 의하면 세계축(axis mundi)은 천상․중간․지하의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 구실을 한다. 세계축은 나무나 산으로 표상되는데, 전자를 우주목(cosmic tree), 후자를 우주산(cosmic mountain)이라 부른다 (Mircea Eliade․이윤기역, 1992 샤마니즘-고대적 접신술-, 까치, 248~253쪽). 이에 따르면, 흘승골성은 우주산 위에 세워진 성인 셈이다. 이것은 흘승골성이 사실상의 건도지가 아니라 명목상 의 신성지일 개연성을 뒷받침한다. A-2가 이러한 가능성을 구체화한다. 여기에는 ‘沸流谷 忽本西 城山上에 도읍을 세웠다’라 는 표현이 있는데, 먼저 이 기사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 기사를 ‘비 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고 해석하는데, 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7쪽. 이 경우 ‘城山上’의 城을 술어로 보아 ‘山上에 城을 쌓아’라고 풀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으로서, 이 때의 城을 술어로 보지 않고 ‘城山上’을 ‘城山의 위’라고 해석하여 ‘비류곡 홀본 서쪽 城山 위에 도읍을 세웠다’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와 같이 해석할 경우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 而建都焉”에서 어조사 而 앞에 술어가 없다는 한문법적 문제가 지적될 수 있지만, 문장을 앞의 ‘然後造渡’까지 확장해서 본다면, 어조사 而를 통해 뒤의 建都와 이어 지는 술어는 城이 아니라 造渡가 될 수 있다. 오히려 ‘沸流의 谷’․‘忽本의 西’와 함께 병렬적 으로 ‘城山의 上’이라고 해석될 때 보다 자연스럽다. 더구나 앞서 언급했듯이 ‘홀본 동쪽의 언덕[忽本東崗]’과 ‘홀본 서쪽의 성산[忽本西城山]’이 대구를 이룬다면, 城이 술어로 해석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이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면, ‘城山’이라는 표현이 주목될 수밖에 없다. 이는 말 그대로 외관상 ‘城같은 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제주 성산일출봉의 경우에도 성채 같은 모습에서 지명이 유래하였고(新增東國輿地勝覽卷38, 旌義縣, 城山), 南原 雲峰의 城山(한글학회, 1966 한국지명총람, 한글학회) 또한 ‘城같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지명이 유래하 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일찍이 ‘城같은 山’을 城山으로 불러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이때의 山을 환인의 오녀산으로 비정하였는데, 盧泰敦, 1992 앞의 논문, 22쪽. 특기할 만한 것은 지형학적으로 오녀산이 butte지형이라는 점이다. 풍화와 침식으로 계곡과 하천이 생기면서 대지가 점점 좁아져 단단한 암석만 남게 될 경우, 이를 mesa라고 한다. 여기에서 풍화와 침식이 더 진행되면, 마치 시루떡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좁은 모양의 butte가 만들어진 다(김현숙 외, 2005 환인‧집안 지역 고구려 유적 지질조사 보고서, 고구려연구재단, 40쪽). 이 지형의 특징은 산의 정상부가 깎아지 른 듯한 암석이고, 그 위에 평평한 대지가 펼쳐진다는 점인데, 오녀산은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녀산의 깎아지른 듯한 암석은 마치 城壁처럼 보이며, 5세기 당시 고 구려인들은 그 산을 ‘城같은 산’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입론이 가 능하다면, A-2에서의 城山은 오녀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다. 이때 흘승골성의 ‘骨’字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래에는 흘승골을 승흘골의 오기로 보아 ‘솔골’, ‘수릿골’의 음역으로 파악하기도 하였으나, 1959 韓國史(古代篇), 震檀學會, 228~229쪽. 오히려 이때 骨은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고구려말로 城을 의미하는 ‘溝漊’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白鳥庫吉, 1914 앞의 논문, 24~25쪽 ; 田中俊明‧박천수 역, 2008 전기와 중기의 왕도」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동북아역사재단, 118쪽.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鶻嶺의 존재도 이를 뒷받침한다. C-1 좋은 형세에 王都를 여니, 山川이 울창하며 높고 크다. (중략) 7月에 검은 구름이 鶻嶺 에 일어 사람들이 그 산을 보지 못하는데,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土功처럼 들렸다. 王이 말하길, “하늘이 나를 위해 城을 쌓는다”고 하였다. 7日이 지나 雲霧가 스스 로 걷히자 城郭․宮臺가 스스로 이루어졌다. 王이 皇天에게 절하고 나아가 居하였다. ( 東國李相國集卷3, 東明王篇) C-2 東明聖王 3年(기원전 35) 春3月, 黃龍이 鶻嶺에 나타났다. 秋7月, 경사스런 구름이 鶻 嶺 南쪽에 나타났는데, 그 色이 푸르고 붉었다. (三國史記卷13, 高句麗本紀1) 다분히 설화적 내용이지만 C-1과 C-2에 따르면 고구려 최초의 도성과 관련하여 鶻嶺이 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골령은 하늘과 주몽 사이의 소통과 감응의 매개였는데, 이를 통해서 골령도 흘승골성과 마찬가지로, 天을 숭상하는 샤머니즘적 세계관 속에서 세계산․우주산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의 鶻도 城을 뜻하는 溝漊와 통한다면, 城山과 鶻嶺은 흘승골성과 함께 건국시조의 신성성을 높여주는 우주산일 뿐만 아니라, 이름마저도 공히 ‘성같은 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오녀 산이 금석문에서는 城山, 문헌에서는 鶻嶺으로 각각 나타났으며, 그 위에 세워진 성은 ‘城山 위의 城’을 뜻하는 紇升骨城으로서 등장했던 셈이다. 이에 따라 翰苑에서는 흘승골성을 骨城으로 줄여 부를 수 있었다. “靈河演貺照日晷以含胎 伏鼈摛祥 叩骨城而闢壤” (翰苑蕃夷部, 高麗) 이제 남은 문제는 졸본과 흘승골성과의 관계이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A-2와 B-2․ C-1~2에서 드러난 城山․紇升骨城‧鶻嶺의 기능과 역할에 있다. 에서 언급했듯이 A-2에서 城山은 東崗과 함께 시조 추모의 신성성을 제고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山上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하더라도 이곳이 상주처가 될 수 없다면, 余昊奎, 1998 앞의 책, 141쪽 A-2에서 城山上에 도읍을 세웠다 고 표현한 것은 5세기 당시 시조 추모를 신격화하는 과정 에서 趙仁成, 1991 「4, 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 한국고대사연구4, 70~71쪽. 신령스런 산을 추모와 연 관시키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B-2에서 흘승골성이 천제의 아들이 내려온 신성한 곳으로 표현된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C-1~2에서 나타나는 鶻嶺의 신성성에서도 다시 한 번 부각된다. 결국 이때의 城山‧鶻嶺, 즉 오녀산은 고구려사회 에서 샤머니즘적 우주산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마찬가지로 흘승골성 또한 최초 도성이 라는 역사성 보다는 우주산으로서의 신성성에 따라 후대에 건도지로 설정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따라서 고구려의 사실상 첫 도읍은 졸본이며, 흘승골성은 첫 도성으로서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명목상의 설정에 지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도 오녀산성에서는 정확한 축성 연대 를 알 수 있는 유물이 나타나지 않아 2004 五女山城-1996~1999, 2003年 桓仁五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社, 12쪽 ; 梁時恩, 2013 앞의 논문, 138쪽. 최초의 도성임을 입증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최초의 도읍인 졸본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이것은 A-2의 城山이 오녀산으로 비정됨에 따라 추적할 수 있다. A-2에 따르면, 홀본(졸본)의 서쪽에 城山이 위치하게 된다. 즉 졸본은 오녀산의 동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동시에 앞서 확인했듯이 졸본은 비류수(혼강) 와 그 지류인 졸본천(富爾江 혹은 新開河)의 합류지점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에 따라 주목되는 곳은 桓仁縣 北甸子鄕 일대의 충적평야와 喇哈城뿐이다(지도 1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