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문서 최종수정) 2009-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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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장 시하누크 통치기의 캄보디아 (상)
Cambodia under Sihanouk (1954–1970)
Preăh Réachéanachâkr Kâmpŭchea Vương quốc Kampuchea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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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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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도 |
프놈펜 |
언 어 |
크메르어 |
정부형태 |
입헌군주국 |
국 왕 |
- 1941–1955 |
노로돔 시하누크 |
- 1955-1960 |
노로돔 수라마릿 |
- 1960-1970 |
시소왓 꼬사막 |
국가수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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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1970 |
노로돔 시하누크 |
총 리 |
- 1953 |
뻰 노웃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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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로돔 시하누크 |
- 1969-1972 |
론 놀(마지막) |
역사시대 |
냉전시대 |
- 독립 |
1953-11-9 |
- 쿱테타 |
1970-3-18 |
- 남베트남의 침입 |
1970-4-29 |
국가수반은 국왕, 섭정, 총리 등 다양한 형태였다. | |
1954년부터 1970년 사이의 노로돔 시하누크 최초의 집권기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대이다. 2차 대전 이후 혼돈스럽고 때로는 비극적이기까지 한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노로돔 시하누크는 항상 논쟁의 중심에 가장 가깝게 서 있던 인물이다. 시하누크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를 조국을 지켜낸 수호자로 칭송한다. 이들은 시하누크가 확고한 중립성을 유지해 국가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구해냈으며, 그의 절친한 동맹자였던 론 놀(Lon Nol)의 쿱테타로 실각하기 전까지 15년 이상을 이웃한 베트남의 혁명 기도로부터 보호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바로 조국의 비극을 잉태시킨 장본인이라 여기고 있다.
목 차
- 1. 제네바 회의와 비엣 민의 침입
- 2. 국내 정치의 전개
- 3. 비동맹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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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네바 회의와 비엣 민의 침입
1953년말 캄보디아는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군사적 상황은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크메르이싸락(Khmer Issarak)의 비-공산주의 계파는 정부로 합류했지만, 친-비엣 민(베트민) 공산계열과 "이싸락통일전선"(United Issarak Front: UIF)은 프랑스연방 군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힘이 엷어지자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954년 4월 비엣 민 소속의 몇 개 대대가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로 들어왔다. 왕당파 군대가 이에 대적했으나 완전히 격퇴하기엔 힘이 부쳤다. 공산 계열로서는 부분적으로 4월 말로 예정된 제네바회의에서 몸값을 올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제네바 회의에는 캄보디아, 북-베트남, -- 베트남공화국의 전신 혹은 "남-베트남"이라 부를 수 있는 -- 베트남연합국, 라오스,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이 참가했다. 이 회의의 목적 중 하나는 인도차이나에 항구적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인도차이나에 관한 논의는 1954년 5월 8일에 시작되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수립된 저항정부를 대표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1954년 7월 21일, 인도차이나에서의 평화와 적대행위 종식에 합의했다. 캄보디아에 관해서는, 90일 이내에 비엣 민 군대가 철수하며 캄보디아의 저항군도 30일 이내에 무장해제한다고 합의했다. 캄보디아 대표도 서명한 별도의 합의서에서, 프랑스와 비엣 민은 1954년 10월까지 캄보디아 영토 내에서 모든 군대가 철수키로 합의했다.
비엣 민 군대의 철수조건으로, 제네바의 공산측 대표는 이들 나라에서 미군이 군사기지를 두는 일을 방지할 수 있도록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완전한 중립화를 원했다. 하지만 회의가 결론을 내리기 전 날 밤, 캄보디아 대표 삼 사리(Sam Sary)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즉 만일 캄보디아가 진정한 독립국이라면, 자국이 원하는 군사적 원조 청탁이 금지돼선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당시 캄보디아는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요청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는 북-베트남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들였다. 마지막 합의에서, 캄보디아는 자국 영토 내에서 “안보를 위협받지 않는 한” 외국군 주둔을 허용하지 않으며, “UN 헌장의 원칙에 위배되는” 어떠한 군사적 동맹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면서 순조로운 중립화에 동의했다.
회의는 또한 인도차이나 모든 나라들에 국제관리감독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Supervision and Control)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캐나다, 폴란드, 인도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가 전투중지, 외국군 철수, 포로석방 및 협약준수의 전반적 상황을 감독키로 했다. 프랑스군 및 비엣 민의 대부분 군대는 1954년 10월 예정대로 철수했다.
2. 국내 정치의 전개
제네바 협약은 1955년에 캄보디아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과 국제관리감독위원회가 선거의 공정성을 감시할 것을 규정했다. 과거 선거의 결과를 토대로 민주당은 다시 한번 승리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시하누크 국왕은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했다. 국왕의 헌법개정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55년 3월 2일,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자신의 부친인 노로돔 수라마릿(Norodom Suramarit)에게 왕위를 양위한다고 발표했다. 스스로 “섬다엣”(samdech: 왕자)이라 칭한 그는, 이러한 양위가 보다 자유롭게 정치활동에 투신하기 위한 것이라 밝혔다.
민주당에 맞서, 시하누크 왕자는 자신의 독자적 정치단체인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대중사회주의공동체)을 창립한다. 일반적으로 “성꿈”이란 약칭으로 불린 이 단체는, 그 이름과는 달리 공산주의에 대단히 적대적으로 대한 우익 성향의 단체였다. 1955년 초 발기한 성꿈은 모든 우익 정파를 왕자의 영향권 아래로 통일했다. 9월의 선거에서 시하누크의 새 정당은 83% 지지율에 국회 전 의석을 확보해, 손 웟 탄의 “크메르 독립당”(Khmer Independent Party) 및 극좌파 “인민당”(Pracheachon Party)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주었다.
1955년의 선거 결과는 사기와 협박의 산물이었다. 유권자들은 선거시스템에서 압력을 받았는데, 그들은 시하누크 파 정치인과 군인, 그리고 지역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색깔이 칠해진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어야만 했다. 많은 경우 선거결과는 오류투성이었다. 예를 들어 수년 간 비엣 민이 강한 세력을 얻었던 어떤 지역에서는 극좌파에 대한 투표를 막을 수만은 없었다. 작가인 필립 숏(Philip Short)은 1957년에 시하누크가 6개 선거구에서는 “인민당”과 “민주당 주류”가 승리했음을 인정했다고 지적했지만, 정부의 공식 선거결과는 그들이 한 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한 것으로 나왔다.
주군에 충성스러웠던 성꿈 내부에서, 크메르 민족주의의 주된 이념 문제는 부정 부패에 대한 개혁과 불교의 보호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 정당은 동남아시아 상좌부불교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불교에 대한 보수적 해석을 채택했다. 즉 민중들 사이의 불평등은 그들이 전생에 쌓은 업보(karma)로 인한 것이기에 정당하며, 가난한 계층은 복을 짓고 순종적인 행위를 통해 미래의 내생에서 보다 나은 삶의 길로 올라갈 수 있을 뿐이었다. 종교에 대한 호소는 국내의 여러 불교승려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냈는데, 그들은 특히 농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1957년 8월, 시하누크는 자신이 “토론”이라 부른 왕궁 내 회합에 민주당 간부들을 소환했다. 그들은 5시간 동안 공개적인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이 사태 후 그들은 자신들의 차량에서 기진맥진 끌려나와 시하누크의 경찰과 군대로부터 소총 개머리판에 얻어맞아야만 했다.
유사한 시기에 인민당은 선거를 위한 5인의 대표를 선정했다. 이 정당에 대항하기 위해 시하누크는 개인적으로 모든 시군구와 정부를 순행하는 여정에 올랐다. 국영 라디오방송은 인민당이 베트남의 꼭두각시라고 선전했고, 그들의 포악성을 연상시키는 포스터들이 거리 곳곳에 내걸렸다. 최종적으로는 4명의 후보가 선거에서 사퇴하도록 협박을 받았다. 오직 한 후보만이 끝까지 유세를 했지만, 인민당의 본거지로 알려진 이곳에서 3만여명의 유권자 중 396표밖에 획득하지 못했다는 정부측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시하누크와 성꿈에 반대하는 조직적 야당이 대부분 지하로 숨어들었다. 비커리(Vickery)의 연구에 에 따르면, 1957년 민주당은 해산했고, -- 군인들에 구타당했던 – 그 간부들은 성꿈에 합류할 특전을 요구했다고 한다.
특히 농촌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현상유지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성꿈은 배타적 우파 조직만은 아니었다. 시하누크는 많은 좌파를 자신의 정당과 정부로 끌어들여 우파와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그들 중에는 미래의 크메르루즈(Khmer Rouge) 지도자들도 있었다. 1958년부터 1963년 사이에 후 님(Hu Nim)과 호우 유온(Hou Yuon)은 여러 종류의 장관직을 역임했고, 1963년 키우 삼판(Khieu Samphan)은 잠시 동안 상무부 차관을 지냈다.
하지만 좌파의 독자적인 정당들은 파괴공작의 대상이었다. 1959년 10월 9일, <(주간) 인민당보> 편집인 놉 보판(Nop Bophan)이 사무실 앞에서 국가보안경찰이 쏜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1960년 2천명의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프놈펜 외곽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국가보안 범죄는 군법회의가 관할했고, 항소도 불가능했다. 군사법정은 그 시행 초기에 30명에 대해 사형 포고령을 언도했는데, 이 결정이 시하누크의 개인적 결정이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60년, 잡지 <관찰>(l’Observateur)의 편집인이던 키우 삼판을, 중앙경찰청사에서 불과 수 백 야드 떨어진 노상에서 보안경찰들이 구타하고 발가벗긴 후 사진촬영을 했다. 이 편집인은 이 사건을 여론화시키며 경찰을 공격했다. 국회는 장관을 소환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지만, 장관은 정부에 대한 반대를 예방하는 일은 경찰의 임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장관은 국회의원 중 불순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언급했다. 그 중 한 사람은 웃 웬(Uch Ven)으로 장관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시하누크는 이후 경찰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이들을 탄압할 수 있도록 훈령을 반포했고, 수 일 이내에 잡지 <관찰> 및 두 개의 다른 신문들이 정부에 의해 정간당했다. 또한 50명의 사람들이 막연한 이유로 구속되었으며, 시하누크 소유 신문의 정치부장도 강력한 정치적 탄압에 반대하다 해고되었다.
1962년 7월, 캄보디아의 대표적 좌파 지도자 또우 사모웃(Tou Samouth)이 자식의 약을 구하기 위해 거리의 노점에 나왔다, 보안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비밀리에 격리되어 며칠 동안 고문을 당했고, 최후에는 프놈펜의 스떵 미언쩌이(Stung Meancheay) 지역 쓰레기장에 단순사한 시체로 버려졌다.
1963년, 시하누크는 34인의 좌파 명단을 발표한다. 이들을 겁장이, 위선자, 파괴활동가, 불순분자, 반역자 등으로 매도한 뒤, 이들이 자신들의 정부를 구성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이들은 시하누크 앞에 끌려왔고, 시하누크만이 국가를 영도할 능력이 있다는 문서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후 이들 각 인사들의 거주지와 일터에는 경찰의 감시망이 따라붙었고, 무기한 경찰의 보호관찰 하에 들어갔다. 1962년과 1963년의 탄압 결과, 좌파 운동은 지하화해 도시에서 농촌으로 근거지를 이동했다. 정부에 반대하는 제도권 정당의 대리행위든 지하조직의 활동이든 효과적으로 제압당할 수 있는 시대였다.
좌파에 대한 시하누크의 태도는 때때로 냉소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우파의 반대파인 캄보디아 좌파에 대해 어떻게 균형있는 자세를 취할 것인가에 달려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좌파든 우파든 만일 어느 한 쪽이 승리하게 되면, 그 다음은 자신의 통치를 종식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터였다. 시하누크는 종종 자신이 만일 왕자가 아니었더라면 혁명가가 됐을 것이라 말하곤 했다. 시하누크는 오랫동안 미국이 이 지역을 노리고 있다고 의심했고, 공산화된 중국을 캄보디아의 최대 우방으로 생각했으며, 호우(Hou), 후(Hu), 키우(Khieu) 같은 저명한 좌파들을 존경했다. 게다가 그의 모호한 정치적 관념 “군주제적 사회주의”(royal socialism)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시험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회주의적 성향의 행보를 할 때마다 시하누크 및 그의 추종 세력은 보다 풍부한 정치적 “전리품”(spoils)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1963년 왕자는 경제를 외세가 통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은행 및 외환관리, 그리고 보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1964년에는 외국 무역을 담당할 "국영수출입회사"(National Export-Import Corporation)를 설립한다. 그는 이러한 국유화 조치가 화교나 베트남인들이 아닌, 크메르 민족에게 보다 많은 경제적 기회를 부여하고, 중개업자를 배제하며 불필요한 사치품의 수입을 없애, 외화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 발표했다.
이러한 정책의 시행 결과, 외국의 투자는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마치 마르코스 치하 필리핀에서 출현했던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와 유사한 “연고주의적 정실사회주의”(nepotistic crony socialism)가 출현했다. 국영 독점은 시하누크 및 그 가신들에게 금전적 이익을 안겨주었고, 그들은 이 “젖줄을 짜내”(milked) 현금화시켰다.
시하누크는 우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여당 내 국회의원의 경우, 한 사람이 장기 점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6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후보 공천권을 포기하고, 성꿈 내에서 복수 후보가 경합할 수 있도록 했다. 투표결과는 놀라웠는데, 비록 호우 유온, 후 님, 키우 삼판이 재선되긴 했지만 중도 좌파가 감소하고 보수파가 약진했다. 론 놀(Lon Nol) 장군이 총리가 되었다.
성꿈 내에서 우파가 돌이킬 수없는 결별을 선언하고 그에게 정치적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시하누크는 영국의 “섀도우 캐비닛”(shadow cabinet)과 유사한 “대립 정부”(counter government)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그의 측근 대부분과 지도적인 좌파들이 참여했는데, 이 조직이 론 놀에 대해 견제력을 발휘해주길 바랬다.
좌파는 론 놀이 서양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아,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처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유혈 쿠테타를 일으킬 것이라 공격했다. 1967년 4월 교통사고를 당한 론 놀이 사임하자, 시하누크는 총리를 믿을만한 중도주의자 손 산(Son Sann)으로 교체했다. 손 산 내각은 1955년 성꿈이 결성된 이래 시하누크가 임명한 23번째 내각이자 정부였다.
3. 비동맹 외교정책
제네바 회의 직후 수 개월 간에 걸쳐 제시된 시하누크의 비동맹 외교정책은, 과거 외세에 정복당한 캄보디아 역사와 남-북 베트남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생존의 전망이 불투명했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954년 제네바 회의 직후 시하누크는 캄보디아를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SEATO)의 틀 안으로 통합하는 데 관심을 피력했다. 비록 어떤 국가도 조약에 서명하진 않았지만, 이 기구는 캄보디아, 라오스, 남베트남을 “조약 지역”(treaty area)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4년 후반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및 버마 총리 우 누(U Nu)와의 회담은 그를 비동맹 호소의 수용자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그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쉽지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은 오랜 적대국 태국과 캄보디아를 둘러싼 남베트남의 주요한 동맹국이었다. 이 두 나라는 반-시하누크 반체제 인사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사진) 1956년 프놈펜을 방문한 저우 언라이 중국 총리(좌측 앞)가 시하누크 공(우측 군복차림)의 안내로 환영행렬 앞을 지나가고 있다.
1955년 4월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에서 중국의 저우언라이(Zhou Enlai: 周恩來) 총리 및 북-베트남 외무부장관 팜 반 동(Pham Van Dong)과 회담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캄보디아의 독립과 영토적 통합을 존중한다고 시하누크에게 확언하였다. 스스로 선언한 “독립을 위한 국왕의 순례”를 통해 프랑스를 접해보았던 시하누크의 과거 경험은, 미국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종국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도차이나에서 서구의 출현은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 그리고 또한 아마도 태국 역시 – 캄보디아에 대한 지속적인 팽창정책을 일시적으로 막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북-베트남의 지원과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에 기반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중국은 이러한 시하누크의 제안을 수용해 베트남과 태국의 캄보디아에 대한 압력행사에 유용한 균형추 역할을 담당했다.
캄보디아와 중국의 관계는 상호이익에 근거한 것이었다. 시하누크는 중국이 캄보디아를 위협하는 베트남과 태국을 억제시켜 주길 기대했다. 중국은 캄보디아의 비동맹 정책을, 자국이 미국 및 그 동맹국에 포위당하는 일을 막아주는 생명줄 같은 역할로 보았다. 1956년 저우 언라이 총리가 프놈펜을 방문했을 때, 저우 총리는 30만에 달하는 캄보디아 내 소수 화교들이 캄보디아 경제와 정치에 참여하고 국적도 취득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문제는 캄보디아 내 화교들의 충성심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으로, 프놈펜과 베이징 사이에 현안이 되고 있었는데, 저우 총리의 제스처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었다. 1960년 두 나라는 우호조약 및 불가침협정을 체결했다. 중국-소련 불화가 일어난 이후, 중국에 대한 시하누크의 열렬한 우정 때문에 모스크바와는 일반적으로 보다 냉랭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시하누크가 후원자로 원한 국가로는 중국만이 유일하진 않았다. 캄보디아의 안전보장과 국가재건 원조에 대한 필요는, 왕자로 하여금 국가 주권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아시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청하게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마음에 품고 그는 1955년 미국을 방문해, “왕립 크메르군”(Forces Armées Royales Khmères: FARK)을 위한 자금과 장비 원조를 얻어냈다. 프놈펜에 “미국 군사고문단”(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 MAAG)이 설치되어 미국에서 도착하는 군사 장비의 운송과 사용을 감독했다. 1960년대 초 워싱턴의 원조는 캄보디아 국방예산의 30%, 그리고 전체 예산 중 14%를 차지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원만치 않았다. 워싱턴과 프놈펜의 미국 관리들은 종종 시하누크를 평가절하했고,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괴퍅한 기인으로 여기곤 했다. 미국이 자국을 노린다고 의심하는 여러 차례의 계기들이 있었기에, 시하누크는 불신에 쉽게 빠져들곤 했다. 이러한 계기 중 하나는 캄보디아군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증대에 있었다. 무기의 보급과 캄보디아 병력 훈련과정에서 미국 군사고문관들과 캄보디아측 담당자 사이에 밀접한 유대관계가 서서히 형성되었다. 또한 양국의 장교들은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해 우려를 공유했다. 시하누크는 FARK를 자국 내 미국의 가장 강력한 협력자로 여겼다. 왕자는 또한 론 놀이 이끄는 FARK의 우파 장교들이 너무 강해지는 일과, 미국이 이들과 연합해 캄보디아 내 영향력을 더욱 토착화시키는 일을 우려했다.
두번째 계기는 미국과 남-베트남 군용기의 반복적인 영공침범에 있었다. 또한 도망친 베트콩을 추격하는 남-베트남 군대가 종종 캄보디아 영내 깊숙히 지나친 추격을 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시간이 갈수록 이 문제가 워싱턴과 프놈펜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민감한 사안으로 대두했다.
세번째 계기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자신을 퇴위시키고 보다 친-서방적인 지도자로 교체하려 한다는 시하누크 자신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1959년 시하누크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를 캄보디아 정부가 발견해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해주었다. "방콕 모의"로 불리는 이 사건에는 미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몇몇 캄보디아 지도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태국에 망명 중이던 초기 민족주의 지도자 손 웟 탄(Son Ngoc Thanh)과 베트남 남부에서 활동하던 손 웟 탄 지지 "크메르세레이"(Khmer Serei) 반군, 그리고 우파 지도자 삼 사리(Sam Sary) 및 시엠립 도 군구 지휘관 덥 추온(Dap Chhuon)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다른 발각된 정부전복 시도 중 하나는 덥 추온의 “자유” 정부 수립 기도였다. 이 계획은 시엠립 도와 껌뽕 톰 도, 그리고 라오스의 우파 지도자 보운 오움(Boun Oum) 왕자가 다스리고 있던 라오스 남부 지역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기들은 시하누크의 불신을 더욱 증폭시켰고, 결국 프놈펜과 워싱턴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963년 11월, 왕자는 미국이 태국과 베트남 남부의 "크메르세레이" 반군에 대해 지속적인 지원을 하고 있으며, 미국은 캄보디아에 대한 이러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고 발표했다.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1965년 5월 중순 남-베트남과 미국의 공군기들의 영공침입 및 영토 내 지상전 증가와 더불어 최종적으로 관계가 단절된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 육군”(Army of the Republic of Vietnam: ARVN)은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베트콩(Viet Cong: NLF) 반군과 교전 중이었다.
이 시기의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과의 관계, 그리고 워싱턴과의 외교관계 단절 등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지정학적 당사자들을 조정하고, 이웃한 베트남 남부 분쟁 상황으로부터 자국을 지켜내려는 시하누크의 노력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이러한 노력은 북부의 하노이 측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남부의 사이공 정부는 거의 무정부 상태에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 딘 디엠(Ngo Dinh Diem)과 그 군사 정부는 도시 지역에서 별로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 하고 안정감도 잃어 갔으며, 농촌지역에서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반군들에 근거지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프놈펜의 관찰자들이 보기엔, 남-베트남의 단기 생존력이 심각하게 의심되었고, 이는 결국 캄보디아로 하여금 새로운 외교정책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1963년 8월 캄보디아는 사이공과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이듬해 3월 북-베트남과의 수교선언 및 국경 문제에 관해 하노이 정부와 직접 협상할 것이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즉각 시행되지 못했는데, 북-베트남이 왕자에게 국경문제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Front for the Liberation of South Vietnam: NFLSVN: 베트콩 군대의 정치조직)과 직접 협상해야 한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66년 중반 캄보디아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국경문제에 관한 회담을 시작했고, 1년 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캄보디아 국경에 대한 불가침성을 인정했다. 북-베트남은 즉각 이에 동의했다. 캄보디아는 1969년 6월 수립된 NFLSVN 임시혁명정부를 인정한 최초의 외국 정부였다. 또한 시하누크는 3개월 후 하노이에서 거행된 호 치 민(Ho Chi Minh)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외국 정부 수반이었다.
1965년, 시하누크는 중국 및 북-베트남과 협상했다. 이미 이전부터 캄보디아 영내에 일시적으로 들어오던 베트공과 북-베트남에 대해, 이 협상은 캄보디아 영토 내의 지속적인 군사시설 사용을 허용했다. 캄보디아는 또한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베트남으로 가는 군사보급물자 선적을 위해 항구도 개방했다. 이 협상의 결과, 대량의 현금이 캄보디아 지도부로 들어왔다. 특히 이 협상은 중국이 캄보디아로부터 매우 높은 가격에 쌀을 수입하도록 했다. 시하누크는 공식적으로는 캄보디아의 중립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효과적으로 베트남 분쟁에 직접 개입했던 것이다.
중국과 북-베트남을 우방으로 만든 후, 시하누크는 정치적으로 우파적 성향을 지향하면서도, 국내 정치에서 좌파들을 지하조직화하게 했던 탄압의 고삐를 늦췄다. 중국과 베트남과의 협상은 잠시 동안이지만 캄보디아 좌파에 대한 이 두 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중단시켰지만, 이들 반군이 독자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서는 것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1960년대 후반에 중국 및 북-베트남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시하누크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방과의 관계복원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아시아의 여러 정황들에 대한 또 다른 조정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외교 문제들에 거의 대처할 수 없었다. 또한 캄보디아 동부에 북-베트남의 출현은 캄보디아의 정치, 경제적 안정성을 해칠만큼 중대한 사안으로 부각되었다. 더구나 1960년대 후반 캄보디아 좌파가 지화화될 무렵, 시하누크는 우파와 합의를 도출해야 했지만, 우파에 대적할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북-베트남과 베트공 군대의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침해는 점차로 증대되었는데, 이 지역은 소위 “호치민루트”의 남쪽 종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베트남 및 캄보디아 자체적으로 사용되며 개척된 곳으로, 병참보급의 중요한 요지였다. 캄보디아의 중립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문화혁명의 와중에 있던 중국은 하노이 정부와의 중재를 해주지 못했다.
한편 캄보디아 동쪽 국경에서는 놀랍게도 -– 심지어는 1968년의 공산측 신년대공세(Tet Offensive)에 직면해서도 -- 남-베트남이 무너지지 않고 있었고, 응우옌 완 티에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의 정부가 전쟁에 지친 국가를 안정시켜 가고 있었다.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총 400만 달러에 이르는 미국으로부터의 군사, 경제 원조의 상실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프놈펜 정부는 워싱턴과의 관계 단절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장비 및 기타 부문을 사용할 수 없자, 소련, 중국, 프랑스로부터 저질의 그나마도 소량의 대체물들만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1967년 후반과 1968년 초 사이에, 미국과 남-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 영토 내로 베트공을 추격해 들어오는 일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란 신호를 보냈다. 이 무렵 워싱턴 정부는 “베트남주둔 합동참모부”(U.S. Military AssistanceCommand, Vietnam : MACV)의 건의를 받아들여, 1969년 3월 초 북-베트남과 베트공이 사용 중이던 캄보디아 영내에 대해 일련의 공습을 명령했다(메누 공습: The Menu airstrike). 이 공습 임무의 명령권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닉슨 행정부는 시하누크 왕자가 “허가했으며” (allowed) 심지어는 “격려하기” (encouraged)까지 했다고 발표했지만, 영국의 언론인 윌리암 쇼크로스(William Shawcross) 등은 이같은 주장을 반박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시하누크가 이전에 북-베트남과 베트공으로 하여금 군사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 균형을 맞추려는 정책을 취해 미국의 폭격을 허용한 것인데, 당시로서는 캄보디아 내 베트남의 출현에 대해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국가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적 차원에서 메누 공습은 이후의 행보에서 상호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1969년 4월, 닉슨은 왕자에게 친서를 보내, 미국은 “캄보디아의 주권과 중립성, 그리고 현존 국경과 더불어 영토적 통합”을 인정하며 존중한다고 말했다. 얼마 안 되어 1969년 6월 프놈펜과 워싱턴 사이에 완전한 외교관계 복원이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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