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궁창에서도 연꽃은 핀다
田 正 吉(4회-아동문학가)
인간은 추억(追憶)을 반추(反芻)하며 사는 동물이다.
올해도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니 중학교 다니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입학하던 때가 52년 전 4월이었는데도 지난 일이 생생하다. 동기생들이 자주 만나 지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어 재생이 잘 된다. 모이면 흘러간 옛 노래 부르듯 자연스럽게 학창시절을 이야기하게 된다. 동창들 근황, 열악했던 학교형편, 사모하는 은사님, 추억어린 학창생활이 주된 화제(話題)가 된다.
그 때는 살기가 어려워 목구녕에 풀칠하기도 힘겨울 때다.
그런 중에 금계중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은 대부분 이웃 학교보다 싼 공납금에 유인(誘引)되어 입학했다. 남의 집 머슴, 사환직공, 식모살이 하다 공납금을 마련해 늦게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4~5년 나이 차가 나는 동급생이 3할은 되었다. 고등학교 형뻘 되는 선배가 공부해 보겠다는 향학열 하나로 나이 어린 후배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했다. 지금도 동기회 모임에서 거나해지면 최형, 권형하고 호칭하는 친구가 있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될 때가 있다.
4회는 54년 4월에 입학했는데 나도 입학금 마련을 못해 국민학교 졸업하고 한 해 놀다가 입학했다. 입학식을 하고도 수시로 동급생이 늘어났다. 학구제가 없던 때라 봉현, 안정, 순흥은 말 할 것도 없고 단양, 예천, 태백에서도 유학을 왔다. 그 때는 전 학년 모두 단 학급이었는데 97명까지 번성했으나 58명만 졸업하였다. 가정이 기울고 학비마련을 하지 못해 중도 탈락자가 생긴 탓이다. 이십여 년 전부터 여름, 겨울에 동기생들이 모이고 있다. 졸업장은 받지 못 했어도 학창생활을 함께 한 친구는 다 부르는데 볼 수 없는 얼굴이 절반은 된다.
십여 명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졸업하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동기생도 상당수 된다. 가난뱅이 시절을 잊고 싶은지 도통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지워버리려 해도 잊을 수 없던 아픔인데 늦었지만 소식이 기다려진다. 동기생이 모이면 자질구레한 학창시절의 사건들로 금새 달아오른다.
♠사인암 소풍(주먹들이 동리학생 쥐박았다가 몽둥이 들고나선 동리어른 피해 역까지 마라톤한 사건)
♠까악사건(과학을 비슷한 발음으로 ‘까악’하고 외친 급우가 김A에게 걸려 전원이 한 시간 ‘까악까악’하며 토끼뜀 하던 사건)
♠개교기념 마라톤대회(개교기념일엔 전교생[남학생만]이 봉현국민학교 앞까지 단 축 마라톤을 했다. 2등하고 런닝샤스를 상으로 받았다.)
♠낙서사건(화장실 벽에 선생님 썸씽있다고 낙서해 범인 색출한다고 곤욕 당하다. 나중 학교부근 사는 후배소행으로 밝혀져 일이 마무리 됨)
♠사은회(졸업식 며칠 뒤 뜻있는 동기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음식 장만해 사 은회 마련. 마치고 가려니 없던 친구 한 명이 교장실에 넉다운 되어 있어 일어난 소동)
4회 졸업생이 다닐 때만 해도 학교 건물은 형편이 없었다.
금계는 계삼정 교장 선생님이 가난으로 배울 수 없었던 농촌 청소년에게 배움이 균등한 기회를 주려고 세운 학교다. 모여든 마을 청년들과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고, 흙벽을 바르면서 한 칸씩 세운 학교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세운학교다. 담장이나 울도 없었고 밭 가운데 계단식 모양의 가교실이 몇 칸 연이어져 있었다. 가교실은 초가지붕이었고 복도도 마루도 없는 교실이었다. 맨 흙바닥에 책걸상만 있었다. 형편 되는 대로 한 칸씩 건물을 지어 지붕이 조금씩 높아지게 지었다. 정규교실이 맨 끝에 자리를 잡으니 정규교실이 기관차가 되어 화물열차같이 연결된 가교사를 끌고 가는 모습과 흡사했다. 우리는 우리가 다니는 학교를 ‘기차학교’라 불렀다.
비록 기차학교에 다녔으나 건물 짓는데 노력 봉사를 하지 않아 우리는 만족했다. 선배들은 소백산에서 서까래, 기둥도 잘라 오고, 주춧돌도 손수 주어와 교실을 지었다는데 거기 비하면 호강한다며 자위하고 다녔다. 밭에 백인 돌을 캐내어 운동장을 넓히고, 개울에서 자갈을 주워 책보에 싸서 나르는 작업은 했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때는 학습자료가 한 개도 없어 분필로 칠판에 써주는 필기물이 유일한 학습내용이요, 교과서가 완전학습지였다.
지금은 모교를 찾았을 때 월계문을 들어서면 정비된 운동장과 번뜻하게 자리잡은 삼층 건물이 우선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건물안에 잘 갖춰 잇는 학습자료, 풍성한 학습결과물을 둘러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기들이 모였을 때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면 은사님들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은사님의 수업특징, 성격, 얽힌 에피소드가 화제(話題)가 된다.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근무하신 은사님은 송지향(宋志香), 이종우(李種宇), 최종로(崔鍾魯) 세 분이다. 입학하고 중간에 만났으나 졸업할 때까지 가르쳐 주신 은사님은 김동현, 김정철, 정길원 세 분이다. 선생님들 인사이동이 잦았다는 게 기억에 남아있다. 방학이 끝나고 등교하면 몇 분은 가셨고, 학기 중에도 간혹 이임인사를 하곤 했다.
모교에 사오년 근무 하셨지만 우리가 졸업하기 전에 이직하신 은사님도 허윤, 김상규, 배동선, 한진원 네 분이나 된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여행 떠난 나그네같이 들렸다가 서너달 교단에 머물다 가신 분도 최희관, 신영길, 천정록, 류원희, 서상훈 다섯 분이다.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던 것은 몇 분 은사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원 인사이동이 잦은 공백을 메꾸려고 교과목, 수업시수 다투지 않고 열성으로 자극을 주고 채찍질하신 세 분 은사님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1. 송지향(宋志香) 선생님
혼을 싹틔워 주고, 인격의 틀을 잡아준 스승이시다.
길다란 수염을 늘어뜨리고, 사시사철 바지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시던 인간문화재이셨다. 선생님은 늘 자신을 ‘서푼짜리 인생’이라고 자책 하셨는데 내가 살아온 게 서푼이나 될까 늘 되돌아보게 한다. 선생님은 작은 체구에 태산 같은 무게를 가졌으되 온화하고 과묵하신 분이셨다.
유명(幽冥)에 계시니 뵈올 길 없어 가슴이 미어진다.
2. 김정철(金正哲)선생님 (Kim C)
이지력(理智力), 판단력(判斷力)을 배양시켜 주신 스승이시다.
2학년 중간에 부임하셨으나 공백을 잘 메꿔 주셨다.
색있는 안경을 끼고 늘 정장을 하고 출근하셨다. 조리(條理)있고 분명한 말씨가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으나 매사에 명명백백(明明白白)하신 분이셨다.
3. 김동현(金東顯)선생님 (Kim B)
예술세계로 입문, 공부하는 방법, 위기를 돌파하는 지혜를 주입시킨 스승이시다.
자신은 숙직실에서 자취하며 교육에 전력투구 하셨다.
2,3학년 때 우리를 거퍼 담임하면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불도저 선생님이다.
매주 영수(英數)시험지를 성적순으로 벽이나 복도에 붙여 놓고 스파르타식 저돌(豬突)로 몰고 가셨다.
선망하던 상급학교에 많이 진학시킨 것은 선생님의 저력이었다. 개교이후 처음 얻은 성과라고 모두 기뻐하였다.
저돌적인 돌파력, 냉철한 차가움을 감싸안는 온화하고 과묵한 세 분 스승의 성품이 조화를 이룬 바탕에서 우리가 자랐다.
계삼정(桂三正) 교장 선생님 이야기로 은사님 시리즈 마무리를 해야겠다.
선생님은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미술을 전공하신 멋쟁이시다. 늘 밝고 인자하신 모습에 한 점 흐트러지신 적이 없었다.
금탉이 알을 품고 잇는 무릉터전에 고난을 극복하고 학교를 세우신후 평행을 오직 교육에 몸 바친 스승이시다.
우리들에게 성취동기(成就動機)를 파지(把持)시키려고 조회시간에 열심히 훈화(訓話)해 주셨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뜻을 세워 남보다 열심히 배워야 한다며 꿈과 희망의 청사진을 제시해 주시곤 했다. 그 때 교장 선생님은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支柱)이며 인생의 길잡이셨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평생동안 금언(金言)이 되었으니
‘시궁창에서도 연꽃이 피니 너희도 연꽃을 피워라’다.
연꽃은 여러해살이 물풀로 보통 못이나 늪에서 자란다. 잎자루가 물위에 나와서 방패모양의 잎이 떠있고, 꽃자루가 물위에 솟아 꽃이 핀다. 연꽃이 자라는 곳은 진흙과 개흙이 물과 섞이어 늘 물이 괴어 잇는 땅이다. 선생님은 연꽃이 자라기 더 어려운 곳을 강조하기 위해 수렁이나, 늪보다 더 열악한 환경인 시궁창에서 연꽃이 핀다고 하셨다. 시궁창은 빗물이나 수쳇물이 잘 빠지지 않아 질척질척하게 된 곳이니 극빈(極貧)중에 극빈자인 우리들 가정환경을 비유(比喩)한 것이다. 가난이 씨가 되면 물 고여 썩은 개흙에서 깨끗하고 화사한 연꽃이 피듯 성공할 수 있다는 암시(暗示)다. 어렸을 때 이 말은 희망이 메시지였다. 시궁창에서도 연꽃은 핀다. 내 가난한 환경을 탓하지 말자, 고진감래(苦盡甘來)할 때까지 인내하며 사는 힘이 되었다. 세상 명리(名利)에 물들지 않은 선비의 높푸른 기상으로 구름위에서 저희들을 굽어 보고 계실 선생님이 그립다.
다음 동기생들이 모이면 은사님들 기리고 모교의 무궁한 발전과 후배들의 건승을 기원하면서 힘차게 교가를 합창해야겠다.
소백산 영봉에 정기를타고
무릉터전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향기속의 배움터 새로운 기상
빛나도다 그 이름 금계중학교.
<위> <4회 전정길 선배님 자료>1956년 4월 7일 촬영. 과학반(1,2,3학년 합동수업)- 맨 뒷줄 좌로부터 3명 계덕룡(5회) 전정길(4회)이향배(4회) 맨앞 왼쪽 김진하(4회) 우측 키크신분 김동현선생님 여학생 우로부터 계혜미,김영길(6회) 맨앞 중간 진영일(5회).
<아래>금계중 4회 전정길 선배님(아동문학가 019-9206-8278 영주시)자료 4290년(1957년 3월 7일) 4회 졸업사진
<4회 전정길 선배님 자료>1956년 4월 7일 촬영. 과학반(1,2,3학년 합동수업)- 맨 뒷줄 좌로부터 3명 계덕룡(5회) 전정길(4회)이향배(4회) 맨앞 왼쪽 김진하(4회) 우측 키크신분 김동현선생님 여학생 우로부터 계혜미,김영길(6회) 맨앞 중간 진영일(5회).
첫댓글 전정길님,이름은 기억납니다,자라나는 새 세대를위한 아동문학 ,정성에 메마른 우리 시회에 촉촉히 단비를내려주시길....
전정길 선배님 반갑습니다. 선배님 글 읽으면서 왜 주책스럽게 눈물이 괘는지.... 저는 바로 아래 5회 김광수입니다. 선배님의 모습이 서언합니다.중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그냥 목이 매입니다. 그때의 어려웄던 삶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밀려나 이렇게 옛날 이야기처럼 되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세월의 속도를 가늠하기조차 어럽습니다. 저는 인천에서 2003년에 정년하였습니다. 진영일과는 교분이 잣고 한경수 형과도 가끔 연락하면서 지냄니다. 지난 겨울 이윤재 선배와 이강일 선생과는 풍기에서 소주한잔 같이 한 적 있습니다. 한 번 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