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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지뢰지대 설치계획 : K5 계획
"K5 계획"(K5 Plan)은 "K5 벨트"(K5 Belt), 혹은 "K5 프로젝트"(K5 Project)라고도 하며, 때로는 "죽(竹)의 장막"(Bamboo Curtain)이라고도 불린다.(주1) 이 계획은 1985-1989년 사이에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가 태국 국경 근처에 기지를 둔 "크메르루즈"(Khmer Rouge) 게릴라들이 캄보디아 영내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참호와 철조망, 그리고 사실상 태국과의 국경 전체에 걸쳐 지뢰들을 설치하는 것을 그 수단으로 동원한 계획이었다.(주2) 이 소모적인 K5 방어프로젝트는 PRK 정부 및 짧은 과도기에 존속한 그 후신인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 SOC)의 건설적 이미지에 커다란 먹구름을 드리우는 역할을 했다.
(주2) Margaret Slocomb, The 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1979-1989: The revolution after Pol Pot.
(사진) 캄보디아의 시소폰 읍(Sisophon)에서 태국의 아란냐빠텟(Aranyaprathet, 알란) 군으로 가는 도중에서 촬영된 "프놈 말라이" 산악지대의 모습(2009년 8월 촬영). 1980년대 "크메르루즈" 반군의 주요한 군사기지 중 하나였다.
(동영상) 2008년 11월 "시네마 베리떼 영화제"(Cinema Verite Film Festival) 출품 단편 기록영화. 크메르루즈의 소년병 출신으로 지뢰제거 작업과 시엠립에서 "지뢰박물관"을 운영하는 아끼 라(Aki Ra) 씨를 주제로 한 것이다.
1. 배 경
1979년 1월 "크메르루즈"는 자신들의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정권이 몰락하자 재빨리 캄보디아에서 도피를 했다. 이후 태국 정부 및 강대국의 외교적 지원을 받은 "크메르루즈" 지도자 폴 포트(Pol Pot)는, 사실상 별로 손상을 받지 않은 30,000~35,000명의 병력을 재조직한 후, 태국-캄보디아 국경 바로 뒤쪽에 위치한 밀림과 산악지대에서 조직을 재건했다.
1980년대 초반 "크메르루즈" 반군들은 "태국 영내의 난민촌에 위치한 기지들"에서 자신들의 무력을 시위했고, 이러한 장소들을 근거삼아 강력하고도 확고한 군사장비 지원을 받았다. "크메르루즈"가 획득한 무기들은 중국으로부터 지원된 것이거나, 아니면 "왕립 태국군"을 통해 미국에서 간접 지원받은 것이었다.(주3)
"크메르루즈"의 비밀 군사기지들은 태국 국경을 따라 설치되어 안보상 취약성이 따랐으므로, "크메르루즈" 반군들은 새로 성립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비록 "크메르루즈" 자체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긴 했지만, PRK의 군대인 "캄푸치아 인민혁명군"(KPRAF) 및 그 조력자이자 캄보디아 점령군이었던 "베트남 인민군"(Vietnam People's Army)에 맞서 싸우기 위해, 1975-1979년 사이에 자신들의 정권에 대항하는 반군이었던 비-공산주의 계열 반군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에게 충성하는 "푼신펙"(FUNCINFEC)과손 산(Son Sann) 전 총리가 이끌던 공화파 "크메르 민족해방전선"(KPNLF)이 바로 그러한 동맹반군들이었다.
태국 국경 근처의 전투는 건기와 우기라는 계절적 리듬을 타고 주기적 반복현상을 보여주었다. 중무장한 베트남 군대와 PRK 군대는 주로 건기에 공세를 펼쳤고, 반면 중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 연합은 주로 우기에 작전을 펼쳤다.
1982년 베트남 군대는 실패로 돌아간 대규모 공세를 펼쳤는데, 이 공격은 주로 "크메르루즈"의 주요 기지들이 위치했던 번띠 미언쩌이(Banteay Meanchey) 도의 프놈 말라이(Phnom Malai, 말라이 산)와 서부의 끄러완 산맥(Cardamom Mountains: 카르다몸 산맥) 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국경에서 내전이 지속되자, PRK는 이미 이전의 내전으로 파괴되어 상처를 받았던 국가의 재건과 행정적 장악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PRK 정권은 "크메르루즈"를 비롯한 반군들이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통해 지방행정에 혼란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국경지역에서 이들의 침투 자체를 방지하고자 하는 정책을 수립했다.(주2)
"K5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 인물은, 당시 캄보디아 점령 베트남군 총사령관이었던 레덕안(Le Duc Anh: 1997년 사망. 국가주석 역임) 장군이었다. 그는 "크메르루즈"의 캄보디아 재침공에 대비한 5개항의 캄보디아 방위 핵심사항을 제시했다. "K5 계획"에서 "K"는 크메르어로 "까 까삐어"(kar karpier), 즉 "방위"를 의미하고, "5"는 레덕안 장군의 방위조건 5개항을 의미했다. 그의 5개항 중에서 태국 국경을 봉쇄한다는 조건이 2번째에 위치했다.(주2) 이 계획의 시공에 참여했던 많은 노동자들은 "K5"란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었다.(주4)
"K5 계획"의 실행은 1984년 7월 19일부터 시작됐다.(주5)"K5 계획"은 거대한 규모의 사업으로, 수목과 초목을 포함하여 엄청난 양의 열대우림을 베어내 위치를 확보해야만 했다. 이러한 작업의 목적은 태국 국경 전체를 따라 연속적인 개활지를 조성함으로써, 관측이 가능토록 하고 지뢰를 설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개활지는 총연장이 대략 700 km에 그 폭은 500 m 규모였다. 그리고 1 km 단위로 약 3,000발 정도의 대인 및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는 것이었다.(주6)
(주4) Esmeralda Luciolli, Le mur de bambou, ou le Cambodge après Pol Pot.
환경적 관점에서 보면, 대규모 벌목은 하나의 환경적 재앙이었다. 산림이 황무지로 변했고, 생물종이 멸종위기에 처했으며, 이용불가능한 지역들을 만들어냈다. 끄러완 산맥 같은 보다 오지 지역들은, 1980년대 "크메르루즈"가 요새를 구축하기 전까지 거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지역조차 생물종의 멸종위기 상태가 발생하고 있다.
"K5 계획"의 입안자들이 사전에 예견하지 못한 점들은 군사적 관점에서도 나타나, PRK 자신들에게도 하나의 위협이 되었다. 즉 "K5 벨트"가 "크메르루즈" 반군의 침투만 방해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PRK 정부 자신들의 효과적인 태국 국경 경비활동 자체까지도 방해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지역을 유지 보수하는 데도 많은 난관이 있었다. 아열대의 기후는 매년 이 지역들에서 사람 키 높이로 새로운 초목들이 울창해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주7)
(사진: Auswärtiges Amt)
"K5 벨트" 지역에서는 지뢰제거 단체들이 설치한 위험경고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K5 계획"은 폴 포트 정권 하에서 파괴된 캄보디아를 재건해야만 할 PRK 정권의 이미지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쳤다. 이 계획에 상당한 공력을 기울였지만, 결과적으로 비성공적인 것이었고, 이 새로운 친-베트남 정권의 적대적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러 캄보디아 농민들은 PRK 정권이 농업에 개입하여 전통적 농법을 강요했던 폴 포트 정권과 다른 동시에, 세금까지 감면해준 혜택은 환영을 했지만,(주2) 이 정권에 대해서도 곧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농민들은 정글 속의 작업에 동원되기 위해 자신들의 논밭을 내팽겨쳐 두어야만 했고, 이 과중한 노동이 실은 무익하고도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주7) 그들은 결국 새롭게 부과된 이 노동이 처형만 동반하지 않았을 뿐, 크메르루즈 학정 시대의 강제노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분노를 표출하였다.(주8) 접근성이 좋지 않았던 탓에 위생시설이 결여되었고, 해당 지역의 수많은 모기 떼와 제대로 먹지 못하는 점 때문에, "K5 계획"에 동원됐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말라리아와 영양실조로 희생되었다.(주9)
"K5 벨트"의 많은 지역들이 현재도 그대로 남아,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을 위험지대로 남겨놓고 있다. 캄보디아 내전이 끝난 후, "K5 벨트"는 캄보디아에 광대한 지뢰문제를 안겨주었다. 1990년 한해에만 캄보디아에서 지뢰로 인해 발목이나 다리를 절단한 사람들이 약 6,000명에 달한 바 있다.(주10)
(주7) Soizick Crochet, Le Cambodge, Karthala, Paris 1997.
(주8) Margaret Slocomb, The K5 Gamble: National Defence and Nation Building under the 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01), 32 : 195-210 Cambridge University Press.
(주9) Craig Etcheson, After the killing fields: lessons from the Cambodian genocide.
허의철학 님 말씀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을듯 하네요... 이전에 우리가 700킬로미터에 달한다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그 폭 역시 500미터에 달한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얼추 700킬로에 걸쳐 210만발 이상을 설치했음을 알수 있네요.. 태국 국경 지대에만 말이죠..
첫댓글 어마어마한 규모의 K5의 군사작전이었군요. 베트남이 게릴라전으로 미국과 싸움에서 승리했기에 게릴라전의 무서움을 알기에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전개했군요. 이글로 인해 캄보디아의 지뢰에 대한 궁금증이 약간은 이해가 갑니다.
허의철학 님 말씀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을듯 하네요... 이전에 우리가 700킬로미터에 달한다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그 폭 역시 500미터에 달한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얼추 700킬로에 걸쳐 210만발 이상을 설치했음을 알수 있네요.. 태국 국경 지대에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