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료는 다양한 크메르어 자료들을 영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홍보하는 "크메리제이션"(Khmerization)에서 자체 제작한 기사를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현재까지 전해진 시소왓 유테웡 왕자 및 그의 정당인 "민주당"에 대한 자료로는 가장 상세한 내용을 갖고 있다. 일부 부분에서는 캄보디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역사서술도 눈에 보이는데, 이 점은 비판적으로 고려하면서 독해해주길 권하고 싶다. |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아버지 : 시소왓 유테웡 왕자
A Biography of Prince Sisowath Youtevong, A Father of Cambodian Democracy
유테웡 왕자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께넷 T 소(Kenneth T. So)와 모니리억 께오(Monireak Keo)가 공동으로 집필한 <크메르 독립의 길>(The Road to Khmer Independence)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이들의 글은 현재 "캄보디아계 미국인 정보센터"(CARA)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다. 본 자료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이 두 저자의 글이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밝혀둔다. (Khmerization 2008-1-4) |
1. 유테웡 왕자의 가계
시소왓 유테웡(Sisowath Youtevong: 다른 표기방식으로 "Yutevong" 혹은 "Youthevong"이라고 쓰기도 함) 왕자는 1913년 캄보디아의 왕도 우덩(Oudong)에서 태어나, 1947년 7월 17일 프놈펜의 칼멧병원(Calmette Hospital)에서 사망했고, 그 다음날 화장되었다.
그의 부친은 쩜라엥웡(Chamraengvongs: 1870-1916) 왕자이고 어머니는 시소왓 유비판(Sisowath Yubhiphan: 1877-1967.1.1.) 공주이다. 그는 브후마린(Bhumarin: 1842-1909) 왕자의 손자이며, 엉 빔(Ang Bhim: 1824-1855) 왕자의 증손자이고, 엉 두엉(Ang Duong: 1796-1860.10.19.) 국왕의 형이였던 엉 엠(Ang Em: 1794-1844) 왕자의 고손자이기도 하다. 엉 엠 왕자와 엉 두엉 국왕은 모두 엉 쩐 2세(Ang Chan II : 1792-1834) 국왕의 동생들로 엉 엥(Ang Eng (1772-1796) 국왕의 아들들이었다.
유테웡 왕자는 5형제 중 막내였다. 그의 형제들을 살펴보면, (1)보파시 뜰(Bophasy Teul: 1902-1957) 공주, (2)시소왓 인드라웡(Sisowath Indravong: 1904-1977) 왕자, (3)시소왓 엉 논(Sisowath Ang Non: 1906-1975) 공주, (4)시소왓 짜까라웃(Sisowath Chakaravudh: 1906-1933) 공주가 있고, 막내가 바로 유테웡 왕자이다.(주1)
유테웡 왕자는 도미니크 라벤느(Dominique Laverne: 1924- )라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하여 2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딸들은 (1)시소왓 깐따라(Sisowath Kantara: 1945- )와 (2) 시소왓 레난다(Sisowath Lenanda: 1946- )로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유테웡 왕자는 할아버지 대에서 근친상간적 혼인관계가 있었다.(주2) 그의 조부인 브후마린 왕자는 바로 자신의 누이였던 트남웡(Thnamvong) 공주와 결혼하여 유테웡 왕자의 부친인 쩜라엥웡 왕자를 외아들로 두었다. 왕가의 전통적 법도에 따르면, 원래 유테웡 왕자는 시소왓이란 성을 사용할 수 없다. 어찌하여 그의 성이 시소왓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904년에 국왕에 등극한 시소왓(Sisowath) 국왕과의 어떤 관련성 때문에, 그의 부모들이 이익을 얻고자 이런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 유테웡 왕자는 엉 쩐 2세 국왕의 동생이자 엉 두엉 국왕의 형이였던 엉 엥 왕자의 고손자로 엉 두엉 국왕에서 시작하는 엉 두엉 왕가에 속한다. 반면 그녀의 어머니 시소왓 유비판 공주는 시소왓 국왕의 장남인 시소왓 에싸라웡(Sisowath Essaravong) 왕자의 딸이었다. 1904년에 시소왓 국왕이 등극했으므로, 1913년에 유테웡 왕자가 태어나자 그의 부모들이 그의 이름을 어머니의 성에 따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명은 크메르 왕족 전통에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훗날 유테웡 왕자가 "민주당"(Democratic Party)의 지도자가 된 일이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기획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의 반대편에 서게 된 것은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전략적으로 시소왓 왕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시소왓 왕가의 입장에서는 프랑스 식민당국에 속아 시소왓 모니웡(Sisowath Monivong) 국왕 사후 시하누크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시소왓 왕가와 노로돔 왕가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주1) Henry Sozsynski, The Genealogy of the Cambodian Royal Family.
(주2) Kenneth T. So and Monireak Keo, The Road to Khmer Independence (http://www.caraweb.org/). |
2. 정치생활
유테웡 왕자는 캄보디아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선구자였다. 라오 몽 하이(Lao Mong Hay) 박사는 한 논문에서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발전"은 많은 부분 유테웡 왕자의 공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라오 몽 하이 박사는 그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가 캄보이아에 민주주의를 도입했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공정했던 1946년의 최초 총선에서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승리로 이끌었던 점을 꼽았다.(주3) 민주당은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프랑스 제4 공화국 헌법을 모방한 캄보디아 최초의 헌법을 제정했었다.
또 다른 이들은 유테웡 왕자가 캄보디아에 "정치적 비전"을 제시했던 점을 평가한다. 뉴저지 주립대학(Rutgers University)의 마트 마츠다(Matt Matsuda) 교수는 <호감과 제국: 태평양에서 전해진 3/4의 설화>(Affinities and Empires: ¾ Tales From The Pacific)란 제목의 논문에서, 캄보디아의 프랑스 식민지시대를 "사랑의 제국"(an empire of love)으로 묘사하면서, 유테웡 왕자의 선구적 정치적 행동주의에 대해 "20세기 중반에 캄보디아의 왕자 시소왓 유테웡은 "이러한 정치적으로 요염한 비전의 이상적 표현을 제공했다"는 대단한 헌사를 하였다.(주4) 또한 피터 께오(Peter Keo)는 <캄보디아의 부자유한 민주주의의 흥기>(The Rise of Cambodia’s Illiberal Democracy)란 제목의 논문에서, 유테웡 왕자가 캄보디아에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도입했다고 보았다.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우여곡절을 기술하면서, 께오는 "캄보디아는 결점을 지적하는 증인들에 지루해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시작되는] 민주화의 두번째 영감적 물결은 시소왓 유테웡 왕자의 지도 하에 민족주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어, 1946-1955년 사이에 자유 민주주의를 도입하도록 해주었다"고 기술하였다.(주5)
유테웡 왕자는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아버지이자 캄보디아 헌법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캄보디아 민주주의 및 독립 쟁취를 위해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웠다. 케네스 소(Kenneth T. So)와 모니리억 께오(Monireak Keo)는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 <크메르 독립의 길>(The Road to Khmer Independence)에서, 크메르이싸락(Khmer Issarak) 활동에서 압력을 받아 프랑스가 1946년에 캄보디아에 정당 설립을 허용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양대 정당은 각각 크메르 왕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33세의 시소왓 유테웡 왕자는 민주당을 이끌었고, 그의 라이벌인 40세의 노로돔 노린뎃(Norodom Norindeth) 왕자는 자유당(Liberal Party)을 이끌었다. 크메르 민족이 처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양 정당은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노선을 달리했다.
민주당은 프랑스 제4 공화국을 모델로 하여, 시민적 자유와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했다. 민주당은 대중적인 선거로 선출된 국회와 법치주의 및 신중한 권력행사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정부를 주장했다. 또한 상당히 반-프랑스적 입장도 견지했다. 민주당의 기본입장은 프랑스로부터의 즉각적인 독립이었고, 정체는 의원내각제를 선호했다. 또한 민주당의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유테웡 왕자 자신을 비롯하여, 손 산(Son Sann), 치언 왐( Chhean Vam), 심 와(Sim Var), 이으 꼬으(Ieu Koeuss), 후이 깐토울(Huy Kanthoul)과 같은 지식층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뻰 노웃(Penn Nouth)은 민주당 고문을 맡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로돔 노린뎃 왕자와 손 워은사이(Sonn Voeunsai)가 결성한 자유당은 민주당만큼 전문 지식층의 매력을 끌지 못했다. 대부분의 당원들은 지주, 사업가, 고위 관료 및 불교 승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유당은 인권을 존중하고, 개인과 사적 재산을 중요시하며 캄보디아와 프랑스 사이의 보다 발전된 상호이해를 주창했다. 자유당은 프랑스와의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고, 민주당이 주창한 것과 같은 급진적 민주화보다는 점진적인 민주화를 선호했다. 프랑스 당국은 노로돔 노린뎃 왕자의 자유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유테웡 왕자의 민주당에 대해서는 상당한 제동을 걸었다.
(주3) Dr. Lao Mong Hay, Development of Cambodian Democracy.
(주4) Wikipedia, Professor Matt Matsuda of Rutgers University, Affinities and Empires: ¾ Tales From The Pacific.
(주5) Peter Keo, The Rise of Cambodia’s Illiberal Democracy, http://www.phnompenhpost.com/TXT/comment s/rise.htm |
3. 유테웡 왕자의 민주당
시소왓 유테웡은 즉각적인 독립과 민주개혁, 의회 중심의 정부 체제를 신봉했다. 민주당 지지자들로는 교사, 공무원, 불교 승려들 중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사람들, 그리고 1942년 프랑스 당국이 폐간시키기 전까지 발행되던 <나가러왓>(Nagaravatta)의 민족주의적 호소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주6) 또한 많은 민주당원들이 크메르이싸락의 무장투쟁 노선에 공감을 갖고 있었다.
한편 노로돔 노린뎃 왕자가 이끈 자유당은 기득권층인 거대 지주들을 포함한 농촌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프랑스와의 식민지적 관계가 지속되길 바랬고, 점진적인 민주개혁을 원했다.
1946년 실시된 최초의 총선(제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67석 중 50석을 확보했다. 확실한 다수를 차지한 상태에서, 민주당은 프랑스 제4 공화국 헌법을 모델로 제헌헌법 초안을 마련해나갔다. 권력의 축도 대중적 선거를 통해 결성된 의회로 집중되었다. 1947년 5월 6일 시하누크 국왕은 마지못해 신 헌법을 선포하였다. 이 헌법은 시하누크 국왕을 "국가의 정신적 수반"(spiritual head of the state)이라고 규정했지만, 결국 그를 입헌군주로 격을 낮추는 것이었고, 국왕이 어느 선가지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없이 남겨놓았다. 하지만 시하누크는 이 모호한 부분을 이용하여 수년 후에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달성한다.
1947년 12월에 신 헌법에 따라 다시 개최된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주당은 다시금 다수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시소왓 유테웡 왕자가 서거했고, 그 뒤를 이을 확실한 지도자가 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8-1949년 사이에 민주당은 시하누크 국왕이나 그 대리인이 제출한 법률안을 거부할 때만 일치단결되었다.
당시의 주요한 현안으로는 1948년 말 프랑스 당국이 제안한 프랑스연방(French Union) 내에서의 제한적 독립이라는 조약 초안을 국왕이 수용해야만 하느냐에 있었다. 1949년 국회를 해산시킨 시하누크 국왕은 프랑스 정부와 서신교환을 통해 합의에 도달해가고 있었다. 국회의 동의를 거치진 않았지만 이 조약은 2달 후에 발효되었다.
4. 유테웡 왕자의 학문적 이력(주7)
유태웡 왕자는 지식인으로 고학력자였다. 그는 1941년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에 있는 자연과학대학(Faculty of Sciences)에서 "최고등급 평가"(très honorable)를 받으며 물리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를 마친 후 캄보디아로 귀국하기 전에, 유테웡 왕자는 미국 핫스프링스(Hot Springs)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프랑스연방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 해외령부(Ministry of Outre-Mer)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프랑스사회당(French Socialist Party: SFIO)의 적극적인 당원이기도 했다.
당시 캄보디아는 아직도 프랑스 식민지 상태로 놓여있었기 때문에, 캄보디아 민주당 인사들은 그의 경력 상 그가 당의 지도자가 될 경우 많은 이점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유테웡 왕자가 프랑스에서 수학했고 프랑스 정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프랑스연방 대표자를 지낸 점 등으로 인해, 아마도 민주당 인사들은 그가 프랑스에 대해 여전히 우호적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 당국이 민주당과 자유당 모두를 통제하고 있던 시기였다.
유테웡 완자와 민주당은 당시에 프랑스를 크메르 민중의 적으로 보고 투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당대표가 프랑스 여인과 결혼한 사실을 수용했다. 이 일을 그의 정적들이 가만 놔두었을리가 없었을텐데도 말이다.
1946년의 최초 선거에서 민주당은 다수당이 되었다. 프랑스 제4 공화국 헌법을 모델로 한 최초 헌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그 초안의 줄기를 구상한 것은 유테웡 왕자였다. 민주당이 프랑스와 결별하고자 했음에도, 이들이 프랑스 헌법을 모델로 했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 중 하나였다. 민주당이 이러한 방식으로 헌법을 제정한 것은 프랑스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로 보아야만 할 것인가? 또한 자국의 헌법을 모델로 한 헌법안을 과연 프랑스 당국이 반대할 명분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헌법이 제정되고 나자 권력은 국회로 집중되었다.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왕실 인사였던 유테웡 왕자가, 하루 아침에 국왕보다 더 큰 권력자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47년 5월 6일, 시하누크 국왕은 새로운 크메르 헌법의 탄생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국왕은 자신이 많은 권력을 상실한 입헌군주로 격하되었음을 인식하였다.
민주당의 승리와 함께, 유테웡 왕자는 내각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캄보디아의 총리임을 의미했다. 그는 총리직과 함께 내무부 장관을 스스로 겸직했다. 민주주의의를 신봉했던 그가 어찌하여 이렇게 강력한 두 직책을 겸직했던 것일까? 어찌하여 유테웡 왕자는 다른 사람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하지 않았던 것일까? 과연 유테웡 왕자가 가졌던 복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도 성공적인 출발로 인해 민주당은 강력해진 동시에 행복에 겨웠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큰 성공이 민주당을 망쳤고, 끊임없이 내분을 겪에 만들었다. 새로운 정부 구성을 놓고 민주당 내에서 질투와 갈등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유테웡 왕자는 1947년 7월 17일 사망함으로써 민주당의 승리가 가져다 줄 열매를 맛보지 못했다.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또 급격하게 최고의 자리에 올랐었다. 그는 어찌하여 그렇게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일까? 그가 사망하기 전에 병에 걸렸다는 징후라도 있었던가? 혹시라도 프랑스 당국이나 민주당 내부에서 독살을 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유테웡 왕자의 사망으로 가장 이익을 취할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5. 유테웡 왕자의 유산(주8)
유테웡 왕자가 사망한 후, 민주당은 새로운 총재로 시소왓(Sisowath) 국왕의 손자인 시소왓 와차야웡(Sisowath Vachhayavong 혹은 Watchayavong) 왕자를 선출했고, 와차야웡 왕자는 1947년 7월 25일부터 1948년 2월 20일까지 총리로 재직했다. 이후 와차야웡 왕자의 후임으로 치언 왐(Chhean Vam)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내분으로 인해 치언 왐 총리는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고, 제대로 국정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는 힘을 실어 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질 않았다. 치언 왐은 1948년 8월 14일에 실각하고, 뻰 노웃(Penn Nouth)이 다음 총리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당원인 옘 삼바우(Yem Sambaur)가 뻰 노웃의 부패를 고발하면서, 그는 물러나야만 했다. 당시 옘 삼바우는 자신의 군소파벌을 이끌고 당에 잔류 중이었다. 뻰 노웃이 실각하자 1949년 2월 12일에 옘 삼바우가 총리가 되었다. 민주당이 다수당이 된 이후 어쩌면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런 현상을 설명할 유일한 답변은 당시의 민주당원들이 상당한 질투심들을 갖고 있어서, 당 내에서 총리를 선출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총리를 영입하는 쪽을 선호했다고 볼 수 밖에는 없다.
옘 삼보우가 총리가 된 후 민주당은 새로운 생각을 품게 되었고, 결국 총리를 탄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탄핵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빌미로 시하누크 국왕이 1949년 9월 18일에 국회를 해산시키고,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일부 제한적인 자치를 획득한다. 이 조약은 행정의 대부분 기능을 크메르인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가 태국에서 반환받은 밧덤벙(Battambang)과 시엠립(Siemreap) 지방에서는, 프랑스의 간섭을 받지않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자치를 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을 "자치구역"(autonomous zone)이라 불렀는데, 이는 마치 훈 센(Hun Sen) 정부가 항복한 옛 크메르루즈(Khmer Rouge) 세력에 빠일른(Pailin, 파일린)을 자치구역으로 허용했던 것과 유사한 조치였다. 하지만 외교에 관해서 캄보디아 정부는 프랑스연방의 결정에 협조해야만 했다. 프랑스는 또한 대부분의 사법기능과 재정 및 관세 분야의 관할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밧덤벙과 시엠립을 제외하곤 다른 모든 지역의 군사작전권 역시 프랑스가 소유했다. 프랑스가 여타 지역의 작전권을 유지했던 것은 태국보다는 베트남의 위협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었고, 이 위협은 프랑스연방을 해체시킬 가능성까지 갖고 있었다.
당시의 헌법을 보면, 국회해산 시 국회의장이 다음 총선을 관장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국회의장은 이으 꼬으(Ieu Koeuss)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1950년 1월에 암살당했다. 이으 꼬으의 죽음에 관해서는 추측이 무성했다. 어떤 이들은 옘 삼바우를 배후로 지목했고, 또 다른 이들은 노로돔 노린뎃 왕자를 지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제로 남아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회의장이 사망하자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옘 삼바우를 총리에 임명했고, 옘 삼바우는 바로 자기 자신의 후임 총리가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곧 총선을 연기시켰다는 점에서 민주당 의원들을 동요시켰다. 캄보디아 정세가 이렇게 혼란에 빠지게 되자, 시하누크 국왕은 헌법 개정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회를 자문기관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회복할 방안을 원했다. 하지만 헌법에 따르면 어떠한 헌법개정안도 재적 국회의원 4분의 3의 동의가 필요했다. 국회가 해산된 상태였으므로, 1951년 10월 국왕은 각 정당 지도자들에게 헌법개정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민주당과 자유당 모두 국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어떠한 헌법개정안도 반대했다.
그나마 민주당으로서는 다행스러웠던 점은, 국왕이 제안한 법률안 및 그가 임명한 각료를 반대하는 데는 모두가 일치단결했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 시하누크 국왕의 모든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국왕이 시도한 것이면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민주당은 대립하고 반대했다.
1951년 9월에 새로운 총선이 개최되었고 다시금 민주당이 78석 중 54석을 차지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자유당이 18석을 획득했고, 나머지 의석은 그외 군소정당들에 돌아갔다. 1951년 10월 후이 깐토울(Huy Kanthoul)이 총리가 되었고, 이어 민주당이 프랑스 당국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반대활동을 전개하면서, 크메르-캄보디아 관계는 심각할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기 시작했다. 옘 삼바우 이후 후이 깐토울이 총리가 되는 과정에 2명의 총리들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시소왓 모니웡(Sisowath Monivong) 국왕의 아들인 시소왓 모니뽕(Sisowath Monipong) 왕자로 1950년 6월 1일부터 1951년 3월 3일까지 재직했고, 그 뒤를 이어 오움 치엉 손(Oum Chheang Sun)이 1951년 10월 12일까지 재직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여론을 견제하기 위해, 시하누크 국왕은 프랑스 당국에 대해 프랑스에서 가택연금 중이던 손 웟 탄(Son Ngoc Thanh)을 귀국시켜주도록 요청했다. 1951년 10월 29일 손 웟 탄은 개선장군과 같은 모습으로 귀국했다. 후이 깐토울 총리는 손 웟 탄에게 내각에 참여해주도록 요청했지만, 은근히 총리직을 넘겨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손 웟 탄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손 웟 탄은 주간지 <크마에 끄록>(Khmer Krauk: 깨어나는 크메르)을 창간하고, 프랑스연방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하지만 곧 구속될 것이란 소문이 무성해지면서, 손 웟 탄은 프놈펜을 떠나 무장단체 크메르이싸락에 합류하였다.
시하누크 국왕에 대해 독재자이며 헌법을 무시한 군주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시하누크는 니름대로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가 헌법을 개정하려고 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을 것이고, 동시에 격동기에 이러한 혼란이 재연되는 것을 막고자 한 의도도 있다. 그는 국회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헌법을 준수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려 했고, 헌법에 순응했다. 캄보디아 정치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지 않은 채, 섣불리 시하누크의 행동들을 판단해려 해서는 안 된다.
한편 후이 깐토울의 정부는 전단지유포 사건에 개입된 인사들의 구송영장 발부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시엠립에 머물고 있던 덥 추온(Dap Chhuon)의 정당인 "에이산 미언쩌이"(Eysan Mean Chey: 당시 프놈펜 지역대표는 마오 추오이[Mao Chhoy]임)가 프놈펜에서 불온전단지를 유포시켜 혼란을 조장한 것이다. 후이 깐토울 총리는 론 놀(Lon Nol)이나 옘 삼바우 같은 인사들에게 구속영장 발부를 지시했다. 당시 경찰 총수는 심 와(Sim Var)였다. 론 놀은 후에 풀려났지만, 옘 삼바우는 "시네 씨어터 럭스"(Cine Lux movie theater) 인근의 번띠쯩크마오(Banteay Cheung Khmao)에서 가택연금되었다. 론 놀 및 전 총리의 준-구속상태는 캄보디아 정국을 극도로 위험스런 상황으로 몰고 갔다. 캄보디아가 통제불능의 상황으로 들어감을 감지한 시하누크 국왕은 후이 깐토울 내각을 해산시킨 후, 1953년 1월 13일에 국회해산과 더불어 계엄법을 선포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시하누크 국왕은 크메르 대중들의 염원, 즉 프랑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쟁취에 눈을 돌렸다. 캄보디아 상황이 더욱 나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953년 3월 시하누크 국왕은 프랑스 방문을 결정했고, 프랑스 대총령에게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시하누크의 요청에 귀를 닫았고, 그를 민심을 어지럽히는 인물로 여겼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는 시하누크가 계속해서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왕위를 교체시킬 수도 있다는 위협을 가했다.
당시 민주당과 크메르이싸락은 독립 문제를 국가적 현안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는데, 시하누크 국왕이 한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 프랑스가 거부 반응을 보이자, 그는 크메르 독립 문제를 국제적 차원으로 승격시켜 다루고자 했다. 그는 장차 자신의 왕위를 박탈당할 각오를 한 채, 프랑스에 대항하는 홍보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박대를 당한 그는 캄보디아로 곧장 귀국하기보다는, 미국, 캐나다, 일본을 순회하며 "독립을 향한 국왕의 순례"를 홍보한다는 기막힌 전략을 선택했다. 프랑스가 그를 다른 국왕으로 교체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결정은 상당히 과감한 것이었다.
프랑스를 점점 코너로 몰아 부치면서, 그는 1953년 6월에 자신은 태국에서 스스로 부여한 망명을 시작할 것이며,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태국 정부는 국왕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고, 그가 방콕에 머무르는 것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태국 정부는 캄보디아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 크메르이싸락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동일한 주장을 한 시하누크에게는 비협조적이었던 것일까? 아마도 태국 정부는 크메르이싸락은 자신들의 동맹자로 남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시하누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은 방콕에서 환영받지 못하자 시엠립의 자치군구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시하누크와 론 놀의 관계가 여기서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론 놀은 1949년 프랑스와의 조약을 통해 설립된 시엠립 자치군구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제 인도차이나 전역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하누크 국왕과 론 놀은 시엠립의 기지를 근거지로 프랑스에 저항해 싸웠다. 프랑스는 크메르이싸락 때문에도 상당히 고전했다. 결국 1953년 7월 3일, 프랑스 정부는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 논의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시하누크는 자신의 4개항 요구를 주장했다. 즉 국방, 경찰, 사법, 재정에 관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에 동의했고, 시하누크는 프놈펜으로 돌아오며 개선행진을 하였다. 1953년 11월 9일이 크메르독립기념일로 선포되었다.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 쟁취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 했지만, 시하누크 국왕의 주요한 역할에 대해서도 반드시 평가를 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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