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수정>-여우와 곰의 흔하디 흔한 연애 다큐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관객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혹자는 강한 불쾌감을 느끼고, 몇몇은 뜨끔해서 얼굴을 붉히며, 누군가는 몹시 통쾌해 하기도 한다.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오! 수정>은 흑백영화다.
내공 강한 배우들의 연기의 결이 한층 두드러져 보이는 효과를 주는데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동상이몽 식 연애관이 흑과 백의 대구를 이루며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다.
이야기는 별로 복잡하지 않은 줄거리를 갖고 있다.
케이블TV 구성작가인 수정(이은주 분)을 사이에 두고 같은 프로그램 PD인 영수(문성근 분)와 그의 후배인 재훈(정보석 분)이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다 재훈의 재력에 마음이 동한 수정의 노력(?) 덕분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는 완벽한(?) 커플을 이루게 된다.
영화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부제 속에 의미심장한 속뜻을 숨기고 있다.
1부) 하루 종일 기다리다
2부) 어쩌면 우연
3부) 공중에 매달린 케이블카
4부) 어쩌면 의도
5부) 어쨌든 짝만 찾으면 만사쾌조
재밌는 건 똑같은 사건의 구성원인 주인공들이 각기 다른 식으로 사건에 접근하고 저마다의 입장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전반부는 재훈의 시각으로, 후반부는 수정의 시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감독은 늘 그랬듯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엄폐물 하나 없는 사실적 공간속에 그들의 행위를 낱낱이 까발려 놓는다.
재훈이 기억하는 수정과의 조우는 '어쩌면 우연'이지만 수정이 의식하는 재훈과의 만남은 '어쩌면 의도'인 것이다.
(일례로 재훈의 기억 속 '포크'가 수정에게는 '스푼'으로, 재훈의 '젓가락'이 수정에게는 '휴지'가 되는 식이다)
연애라는 관계맺음은 상당히 치명적인 함정을 이면에 감추어 두기 십상이고, 똑같은 상황에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색깔로 해석되고 각인된다.
(첫 만남에서 상대를 더 나은 사람으로 기억하던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왜곡시킨다)
수정은 영수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를 유혹하려 하지만 처가의 입김으로 입사해 촬영기사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는 그의 무능력에 실망하게 된다.
그때 영수가 추진하던 독립영화 제작에 후원자로 만나게 된 재훈이 수정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수정은 자연스럽게 그와 가까워진다.
영수는 수정에게 마음이 있지만 영화 제작자인 후배 재훈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내색을 하지 못한다.
지인들과의 파티에서 술에 취해 사는 게 어떠냐고 묻는 영수에게 짜증이 난 수정이 되묻는다.
"감독님은 사는 게 어때요, 요새?"
영수는 바짓단을 걷어 올려 보여주며 말한다.
"나 내복 입고 있다"
늙고(?) 무능한 40대 유부남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부하직원을 후배에게 양보(?)하며 늘어놓는 못난 푸념이다.
그에 비하면 재훈의 속물성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다소곳한 수정의 모습에 반한 그는 그녀와 가까워지지 못해 안달이다.
떼를 쓰고 사정하며 비굴하게 굴던 그는 다급해진 수정이 내뱉은 '처음'이라는 말 한 마디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녀가 '처녀'임을 재차 확인한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의외로 순진한 재훈의 태도에 머쓱해지는데 이게 웬걸, 지인들과의 파티에서 수정과 영수가 내복을 화두로 선문답을 하고 있는 사이 주방 한 쪽에서 다른 파트너와 19금 영화를 찍고 있다.
순진한 노총각의 외피를 쓴 자유인 재훈은 수정이 우연을 가장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걸 꿈에도 모른다.
그가 자주 가는 공원을 영화 촬영 장소로 고집하고, 그가 앉았던 벤치에서 가죽장갑을 주워 우연인 듯 재훈에게 건네는 영악한 여자.
그가 영수에게 빌려주었다 잃어버린 값비싼 카메라가 수정의 오빠에게 전달되어진 사실은 물론이려니와 수정과 오빠의 괴이한 관계가 풍기는 혐의까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 부잣집 망나니 도련님 재훈은 과연 늑대일까, 곰일까?
어쨌든 두 사람은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 과정을 거쳐 좀 더 친근한 사이로 발전한다.
(그들이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발견한 뽀뽀껌 종이는 관계 도중 다른 여자 이름을 불러놓고도 '뭐가 그렇게 이름이 중요하냐'며 소리지르던 재훈의 적반하장이 용서 될 만큼 사랑스럽고 낭만적이다)
여자의 순결에 목숨 거는 멍청하고 속물적인 남자와 생물학적 순결을 담보로 어수룩한 남자의 조건을 사들이는 되바라진 여자의 결합은 말 그대로 '어쨌든 짝만 찾으면 만사쾌조'로 결론 내려진다.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룬 재훈은 행복에 겨운 얼굴로 말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결점들, 목숨 걸고 고칠게요"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때 흘러나오던 어쿠스틱 피아노 연주곡이 엔딩에서는 디지털 피아노 곡으로 바뀐다. 연주가 녹음되듯 사랑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해피엔딩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이유 모를 불편함으로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감독은 예의 그 무미건조한 어투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무늬만(?) 순결한 여우와 어리석은 곰 중 누가 더 속물일까??
글/배성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