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모라비안 교도들의 이야기
1. 설립배경
개혁가 죤 후스- 교황의 면죄부 판매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공격.
교회의 머리가 교황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며,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주의자며
교황은 그를이단으로 몰아 1415년 화형.
1457년핍박을피해 성에 숨어들어가 신약성경을 모델로 복음적인 신앙 공동체 형제회 설립. 모라비안교회 전신
2. 피박받는 모라비안
카톨릭은 이 모라비아의 후수파인 형제회를 잔인하게 핍박.
형제들은 재산몰수와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해 추위와 굶주림으로 굶어죽었갔지만 신앙을 결코 포기치 않았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견고해졌다..
또한 그들은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는데, 그 나라 최상의 학문은 그들로부터 나왔다.
1558년 모라비안 교회에 호의적인 왕들로 60년 동안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갖게되었다.
이때에 필사적으로 붙들었던 순수 복음신앙을 버림으로 영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카톨릭과 모라비안 교회의 30년 전쟁이 치뤄졌고, 1620년 모라비안 교회가 패배해 다시 핍박을 받는다
3, 헌신적 지지자 진젠도르프와의 만남
1722년 오랜핍박으로 거의전멸하고 남은 자들이 진젠도르프의 땅에 정착하게 되었고
거주와 생활에 많은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진젠도르프는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를 결성,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있던 모라비안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 하에 신앙 훈련을 시켰다.
4 모라비안의 선교활동
1731년 진젠도르프는 덴마크대관식때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인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선교사를 파견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계기로 모라비안 교회는 소극적인 경건 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고.
선교활동 초기의 모라비안들은 겨우 200명 가량의 피난민들이었지만 해외로 1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선교의 확산은 계속되었으며 1930년까지 세계 14나라에 3,000여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19세기 유럽에는 15개의 선교 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5. 끊임없는 선교의 열정과 영향
진젠도르크는 주변의 시기로 1736년에 고향인 작센으로부터 추방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라비안의 선교 사역을 통해 변화되었다.
초기에 루터교회의 영향력안에 있었지만 1760년 진젠도르프 사후 완전한 결별을한다
영국안에 15개의 모라비안 형재단이 있었으며
말씀에 대한 경외감, 구원의 확신, 그리고 믿음에 근거한 분명한 신앙 간증으로
영국의 복음적 각성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는 런던의 훼터 레인(Fetter Lane)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에 가입하였다...
존웨슬레가 이들과 결별한건 그들의 지나친 경건주의와 정숙주의 때문이다..
구원에 대한 참회 체험 존 웨슬레만 아니라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까닭에 모라비안 형제단의 가치는 그들 자체 운동에 의한 파급 효과로 인해 세계 선교열을 일으킨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그 파장이 길게 연결된 것이다.
6. 모라비안교회특징.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로, 지역교구의 교인보다 선교사가 3배나 더 많은 특수한 교회며,
다종 다양한 각계 각층의 귀족, 법원의 사람, 대학생, 교수, 흑인, 백인을 가리지 않는
전세계인 모두가 그들의 전도 대상들이다.
핍박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교로 많은수의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했다.
자립선교로 선교사들은 자신의 기술과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먹고살며 선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의료사업이나 교육선교사업 또는 꼭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각 교회별로 선교기금을 모아 선교지원을 하였고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많은 돈이 들지 않았기에 그들이 필요한 곳에 적절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할 수 있었다.
세상의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참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로 부터 비롯된 교회 안의 교회며
'세상의 소금'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나아오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어,
모라비안 교회는 부흥을 맞고 루터교회와 결별의 계기가 된다.
경건주의는 개인적이고도 체험적인 것으로써의 종교, 인격적인 참여에 의한 삶의 증거,
하나님 말씀에 의한 능력이 나타나는 생활, 영혼 없는 제도, 생명력 없는 몸,
내용 없는 형식 등에 대한 저항등이 전체에 흐르는 핵심을 이룬다..
7. 모라비안의 선교지역과 교세 현재의 모습
1732년 서인도지역을 처음 파송하고 후에 1735년에는 그린랜드, 1735년 수리남(Sirinam),1737년 아프리카,
1740년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 1742년 중국, 1747년에는 페르시아, 1754년 자메이카,
1756년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진젤로프가 죽은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선교사가 활동했다. 그의 사후에도 선교사업은 지속된다
진젤로프 사후 모라비안 교회는 많은 수의 교세를 자랑한 적도 없고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숫자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지는 못하였다.
19세기를 정점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핍박이 없는 평화에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지도층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민주적이되어서 그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다.
하지만 이들이 벌인세계 선교사와 현대교회에 끼친 영향은 막대 하였다...이
들영향으로 대서양 연안 지역에 모라비안교도와 국가가많다
이들의 선교사역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작은 교회는 믿음과 사랑으로 계속 나아가 개신교들이 200년 동안 한 것보다 20년 동안에 더 많은 선교를 하였다.”
이같은 탁월한 선교사역을 성취한 형제들의 특징은 단순 소박하고 성령을 따라 경건한 삶을 영위하며,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한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은 형제애를 강조하며, 기도에 전심으로 애썼다. 또
한 그들은 많은 경우에 팀으로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반면 남아 있는 성도들은 가정적으로 그들을 후원하는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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