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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모임에서 지키는 몇가지들
형제모임은 기본교리에 있어서 흔히 한국에 많이 있는 주류 교회들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서는 그들과 달리합니다. 즉, 삼위일체, 그리스도관, 구속과 죄사함등에 관하여 같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세례가 아닌 침례, 성만찬의 자주 실행,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 호칭을 형제 자매로만 부르는 점, 일인 목회를 인정하지 않고 다수의 장로 형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점등이 다른 점입니다.
성만찬 또한 장로들이나 일부의 사람들만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감사기도에 일일이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참여합니다.
형제모임에서 지키는 분별중에는 이러한 믿음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을 새로이 인간들이 개발해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제시해주시고 가르쳐 주신 모임의 방법을 제쳐놓고 인간들이 새로운 모임의 방법들을 만들어 낼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고 다시 어느 인간이 그것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모임에 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모임의 방법들에 관하여 하나님이 인간들의 자유 의지나, 재량에 맡기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가르칠 수는 없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해주신 것을 인간이 개선할 수는 없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고,성경을 정독하면, 하나님은 교회 모임에 관하여 충분한 교훈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가르치시고 계심을 성도들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를 통해서나 진리입니다. 로마제국시대에 신약성경이 쓰여졌다 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이 또 다시 다른 계시를 주셔야 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수많은 생각들은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결국에는 죄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수많은 교회들의 실패와 실수들을 통해서 깨달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1) 믿는자들의 완전 침수에 의한 침례
예수님께서 침례에 순종하셨고 승천하시기전에 침례를 부탁하셨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침례의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침례는 거듭난 이후 믿음을 공표하는, 성화의 중요한 단계이자 신앙생활의 큰 선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침례라는 그 예식은 단지 의식행사일 뿐인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실과 진리에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믿음의 표현과 순종의 의미로서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침례에 반하여, 침례 무용론, 무침례주의, 세례에 의한 침례 대체, 유아세례, 유아침례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위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모임들에서는 믿는자들의 완전 침수에 의한 침례만을 올바른 침례의 방법으로 믿고 실행합니다.
성경에서 헬라어 에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세례는 전혀 근거가 없고, 침례가 옳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받으시고 물속에서부터 나오셨습니다.
마태 3:16그리고 예수께서 침례받으시고 곧바로 물로부터 올라오시니
예수님이 물속으로 내려가셨기 때문에 물로부터 올라오시지 않았겠습니까?
사도행전 8장
38 그가 병거가 서도록 명하고, 필립과 내시가 물속으로 둘이서 내려가, 저가 그를 침례하니라. 39 그러나 그들이 물속으로부터 올라왔을 때에,
뿐만 아니라, 침례의 어원인 밥티조가 의미하는 바는 물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침례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장사되어진 다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는 사실과 진리를 믿는 믿음의 표현이며 그 믿음을 공표하고 예식으로 선언하는 행사입니다. 세례로는 이러한 진리를 몸소 실천할 수 없으며 그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한 세례라는 말은 씻는다는 말인데 실제로 몸을 씻는 것도 아니며 물 몇방울을 떨어뜨리는 일에 불과합니다.
세례는 이교도들의 풍습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정식 화폐가 아닌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례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 영원생명으로 부활하여 거듭났음을 믿게 마음에 새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침례외에 침례를 대체할 방법을 가르쳐 주신바 없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씻는 예식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마에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으로서 몸을 씻는 것도 아니며 얼굴마저도 씻는 예식이 안되고 물 몇방을 떨어뜨리는 적례(滴禮)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따라서 세례교인이란 말도 없는 것이며 세례라는 실행도 없습니다. 물 몇방울 떨어뜨리는 것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갈 2:20)을 가르쳐 주기는커녕, 씻어주는 세례 역할도 못하는 것으로서, 잡신교, 샤마니즘에서 온 고시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유아세례, 혹은 유아침례를 배격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로마카톨릭의 유아세례에 반대하여 침례를 순종한 수백만 혹은 수천만이 목숨을 잃어가며 침례의식을 지켰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형제모임도 초기에는 유아침례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으로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폐지하였습니다. 유아침례는 믿음이 없는 갓난아기들에게 부모가 서약함으로 대신 믿음을 표현하고 유아아게 침례를 실행하는 것으로서 아직 믿지도 않는 유아들에게 침례를 실행하는 것이며 그런 유아들에게 그리스도인 이름을 붙여주어 마치 그리스도인 된 줄로 착각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그런 예식을 통해서 아직 불신자들인 아이들이 교회안에 영접된 것이 되며 그리하여 수십억의 불신자들이 교회안에 들어오게하는 사탄의 고등 전술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카톨릭의 이러한 유아침례에 결사코 반대하였으며 수백만 혹은 수천만이 순교하였습니다.
유아침례를 주장하거나 실행하는 교회들은 그것이 사도행전 8장 37절에 모순됨을 알고 그들의 성경에서 그 구절을 삭제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
37 필립이 이르기를, “ 당신이 온 마음으로부터 믿으면, 당신이 합당하니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을 믿나이다.”
갓난아기들은 이러한 믿음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침례받는 것이 가하지 않다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글 개역, 개역개정등은 이 구절을 성경 본문에서 삭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문맥을 읽어보시면 이 구절이 없으면 말이 안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그릇된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때로는 성경말씀을 변개 혹은 삭제시키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 유아침례는 수십억의 불신자들을 교회안으로 끌어들여서 교회를 무력화시키거나 사탄의 회(계 2:9) 로 만들기 위한 사탄의 고등 술책들 중의 하나입니다.
(3) 주님의 만찬의 성경적 실행
성경은 성만찬에 관하여 매우 소상하게 교훈을 주시며(고전11:23-31, 마태 26:26-)
그것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오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성만찬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부탁하셨으며(마 26:26-)
바울에게 특별히 나타나셔서 부탁하셨습니다(고전 11:23)
주님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며(룩 22:20, 막 14:22) 그분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파하는 것입니다(고전 11:26) 그것은 또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며(고전 10:16, 11:27, 엡5:30) 성도들 모두가 한 떡이며 하나됨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고전 10:17).
이것은 죄를 예방시켜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누가 죄를 범한채로 먹고 마시면 크나큰 징계를 받기 때문입니다(고전 11:27-32)
이 주님의 만찬은 어느 성직자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되시고, 성도들 모두는 명예로운 손님으로, 지체들로서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직자제도도 없거니와 누구든지 예수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그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마 18:20)
이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소위 화체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바벨론 종교에서 나온 궤변에 불과합니다. 또한 떡과 잔에 예수님이 특별히 임재하여 그것이 변한다는 루터파의 임재설 혹은 공재설 또한 근거가 없으며 형제모임은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실, 그날의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사로 믿고 실행합니다.
(4) 주님의 만찬의 자주 실행
주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전 자기의 피흘림과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며 기념해달라고 유언으로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의 만찬이라 불리우는 이 행사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과 그분의 부활, 다시오심, 그리고 그분과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과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 됨을 가르치고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또한 형벌받을 죄를 갖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인류를 대신하여 형벌받으셨음을 기억하고 믿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행사이며, 이것은 당연히 매주일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며 최고의 행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회들은 이렇게 중요한 행사를일년에 2-3회 정도로 줄여버리고, 대신 인간들의 설교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거기에는 인간 목사들이 높임을 받으며 교회의 머리로 착각되게하는 제도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as often as 로서 헬라어의 호사키스(11장 25절과 26절에) 가 두번 나오는 것을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자주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들은 빼먹었지만.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만찬은 매주 한번씩 거행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년에 두번은 결코 자주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일요일 곧 안식후 첫날에 모이는 목적이 바로 이 성만찬을 행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사도행전 20장 7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제자들이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따라서 성만찬은 매주일 실행함이 합당하며, 그 성만찬이 주일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예배의 핵심이고 경배의 최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진리를 믿고 주님의 만찬을 자주 실행하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떡나누기를 계속하였습니다(행 2:42, 46)
형제모임들은 주님의 만찬 곧 성만찬을 매주일 실행합니다.
이것은 소위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모임들의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입니다.
(5)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의 모임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 라는 말씀에서와 다른 모든 서신서를 통해 교회가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되었지, 구원얻지도 않은 자들과 구원 얻은 자들이 뒤범벅이 되어있는 교회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얼마후 등록하고, 등록했다하면, 거듭난 것으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자칫 구원의 확신 없이, 거듭남없이 일생을 마치는 교회인들의 집단 양산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형제모임들에서는 입교한 자들에게는 구원상담을 실시합니다. 누가 구원을 얻었는지 여부는 여러 형제 자매들 앞에서 간증함을 통해서 분별하며 모든 성도들이 구원얻은 것으로 공감할 때 모임에 영접하기 위하여 침례를 실시합니다. 만일 누가 구원얻었는지 여부를 분별함에 있어서 일부는 인정하고 나머지 성도들은 그가 구원얻었다함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좀더 교제해보고 분별함을 통해서 분별의 차이들을 좁혀갑니다. 그 과정에서 1대1 간증교제도 해보고 이런 과정을 통해 믿음이 확인되는 분은 다시 침례에 순종하도록 인도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거듭남이 확실한 분들로 교회는 구성되며, 구원얻지 못한 사람들과 얻은 사람들이 뒤범벅이 되는 상황은 피하게 됩니다. 구원얻지 못한 분들로서 교회에 참여하는 분들은 구도자로서 대우받고 말씀교제를 통해서 믿음을 갖도록 도움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서는 거듭남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집사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장로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이들은 거듭나지 않고서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후 목사라는 벼슬을 안고 나옵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나 방식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태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최초로 행할 수 있는 선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과 죽으심을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들 안에서 집사, 장로, 권사, 전도사, 강도사 등의 벼슬을 갖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6) 거듭나고 침례에 순종하고 모임에 영접된 자들만의 주님의 만찬 참여
그러므로 거듭나고 침례에 순종하였으며 모임에 영접된 자들이 매주일 베풀어지는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초대교회가 " 제자들이 떡을 떼려하여 안식후 첫날에 모였던” 것처럼 행20:7 (한글성경: 우리가 떡을 떼려..)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다시 오심을 기념하는 성만찬은 일요 예배의 중요한 목적이며 핵심입니다.
떡을 떼기 위함이 일요일 집회의 목적이었습니다. (행20:7)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이었으며, 부활하신 이후에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부탁하셨습니다. (고전11:23-30) 예수께서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다시 당부한 이유는 (고전11:23) 성만찬이 그만큼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고, 다시 사심과 다시 오심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진리를 다른 사도들에게서 간접적으로 듣거나 배우지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배웠습니다.
(7) 예배수건, 머리수건, 예배포
또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은 (고전 11장1-16) 성경을 분별해보면 명백합니다. 만일 쓰지 않으면 깎을 것이요,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한다는 것이 가르침입니다.(6절) 이러한 말씀을 문화적 차이니, 시대적 상황이니(노예 문화시대) 변명하고 교묘히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둘러치기 변명들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저희는 그 말씀에 순종하며 이곳 캐나다에서나 제가 나갔던 독일 모임에서나 싱가폴 모임에서나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것을 지켰습니다. 교회가 아닌 일상, 공공관서에서도 여자들은 모자나 수건을 쓰고 다녔습니다. (1차대전까지). 긴머리가 머리통을 둘러싸는 것이므로 그것으로 예배수건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만, 고전 11장 6절 말씀은 만일 쓰지 않으면 깎든지 빡빡 밀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머리털을 일정 센티 이상으로 길러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이 아님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인정할수 있는 말씀입니다.
(8)성경 어디에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사라는 칭호가 에베소서 4장11절에 유일하게 나오면서도 그 자격요건에 대한 언급도 없고 그가 교회를 전횡으로 다스리는 현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 직책이 인간이 만든 것임을 보여줍니다.
포이멘은 다른 곳에서 목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것은 목양의 은사를 가르치는 것으로 분별합니다. 딤전 3장 1-7, 디도서 1:5-9절은 교회 안에서 약 20가지의 자격요건들을 갖고 실제 생활들을 통해 검증해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감독을 세우도록 말합니다. 이 감독은 장로들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장로들이 언급될 때마다 복수인 것으로 보아 일인 목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목사가 반대하는데 이루어지는 일을 볼 수 없고, 목사가 하려하는데 안되는 일 없는 현대교회와는 다른 것을 볼 수있습니다.
(9) 복수 장로제도 – 에베소 교회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내어 (행 20:17) 말씀전하면서 "성령께서 너희를 감독들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게 하셨으니"(행 20:28)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라는 단수의 교회에서 여러 명의 장로들이 왔는데, 그들을 감독들이라는 복수의 감독들을 세웠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감독은 여러교회를 다스리는 카톨릭의 주교와 같은 것이 아니라, 단일 교회안에서 섬기는 여러명의 장로들을 감독들로도 불렀다는 뜻입니다.
그 장로들(감독들)의 자격요건은 디모데 전서 3장1-7절에서와 디도서 1장 5-9절에 소상히 나와 있습니다
1)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2)아담하고 3)절제하며, 4)책망할 것이 없고, 5) 일을 사모하며, 6)근신하며, 7)나그네를 대접하며, 8)가르치기를 잘하며, 9)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10) 구타하지 아니하며, 11)오직 관용하며, 12)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3)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하는 자라야 하며, 14) 외인에게서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었어야 하며, 15)새로 입교한 자도 아니어야 하며(딤전 3:1-7), 16)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17) 의로우며, 18) 거룩하며,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자여야 하며, 20)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며 21) 거스려 말하는 자를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디도서 1:5-9)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들(감독들)의 자격요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격요건을
못 갖추었어도 신학교 나오면 성경에 따른 검증없이 목사 안수받고 목사되어 일인목회 하며 교회 안에서 군림합니다. 이것의 결과는 수많은 범죄와 성경진리에서의 일탈을 가져옵니다.
신학교는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이며 벽돌로 돌을 대신하던 바벨탑 쌓기(창 11:3)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 성경에는 목사의 직함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안보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사도와 장로들 형제들은 보여도 목사라는 직책은 안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를 장로라고 불렀습니다.(벧전 5:1) 사도 요한도 스스로를 장로라고 불렀습니다(요한2서 1절, 요한 삼서 1절)
빌립보 교회에 바울이 편지할 때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과 형제들을 언급하면서 목사는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빌 1:1)
바울과 바나바는 가는 곳마다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습니다행 14:23) 각교회에 목사들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각 교회라는 단수의 교회들 마다 복수의 장로들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또 디도에게 각 성마다 장로들을 세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디도서 1:5) 바울은 디도에게 목사들을 세우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장로들을 세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목사들은 목사직이 바로 장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장로라고 부를 것이지 왜 목사라고 부릅니까?
오늘날 교회안에 있는 장로들을 목사라고 불러도 됩니까? 그들이 설교하고 축도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목사들이 장로들이라면 목사들을 장로라고 불러도 됩니까?
성경에 근거가 없는 이 목사라는 칭호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목사직은 성경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러한 직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에베소서 4장 11절의 포이멘을 목사로 번역하였으나, 포이멘은 다른 모든 구절들에서 목자로 번역되었던 단어였습니다. 그것은 자격요건도 나오지 않는 목자의 은사를 목사로 변개시켜 교회안에 일인독재체제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바벨론 종교제사장제도를 교회안으로 들여오기 위한 사탄의 계략에서 나온 것으로 성경적 자격요건을 초월하는 초월적 존재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이 앉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시므로 예수님은 니콜라당의 교리와 행위를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2:6, 15)
(11) 현대교회들은 집사의 직분 또한 성경에 따라서 부여하지 않습니다.
(딤전 3:8-13)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얼마간 다니면 세례받고, 세례 받은지 얼마지나고 결혼하였으면 집사가 되며 형제 자매로 호칭하지 않고 집사님 집사님 합니다. 만일 디모데 전서 3장 8-13절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없다면 그 교회는 집사가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디모데 전서 3장
8 집사들도 이와 같이 존경할만 하며,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많은 술에 탐익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9 깨끗한 양심안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들이라야 하느니라. 10 또한 그들 스스로가 먼저 검증을 받게 하고, 저희가 책망할 것이 없으면,
그후에 그들이 집사로서 섬기게 하라. 11 마찬가지로 아내들은 존경할만 하며, 중상하는 자들이 아니며, 절제하며, 모든 일들에 신실하여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자녀들과 자기 집들을 잘 다스리며, 한 아내의 남편들이게 하라. 13 왜냐하면 집사로서 잘 섬기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좋은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많은 담대함을 얻느니라.
당신의 교회에서는 집사 선임을 이 말씀 기준에 따라 행합니까? 아니면 인간적 조직의 벼슬 관리 차원에서 행하여집니까?
(12). 형제호칭 :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호칭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 우리는 성도들이라는 신분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서로의 호칭은 주님께서 랍비라든가, 지도자라든가, 아비(신부)라든가 하는 호칭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 너희 선생은 단 한분 그리스도 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니라"(마태23:8)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형제 또는 자매로 부릅니다. 장로일 때에는 장로의 일을 맡고 계시는 형제로 부릅니다. 어느날 제가 웨슬레안 교회에서 목사에게 형제라고 부르고 여전도사에게 자매라고 불렀을 때 엄청난 비난을 당하고 펄쩍 펄쩍 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의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돈안들이고 알아보는 방법은 목사에게 형제님, 여전도사에게 자매님 하고 불러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교역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교만의 깊은 잠에 빠져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신약에 형제호칭은 약 330번 나옵니다. 베드로가 바울을 부를 때에도(벧후3:15) 바울이 두기고, 디모데, 디도를 지칭할 때에도 형제로 불렀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함을 받은 자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히브리서 2:11)
오늘날 목사들은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들입니까? 예!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예수님보다 그들 스스로가 더 높습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마 23:8)
(13) 우리는 교회 강단의 사용권이 성령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거듭난 형제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싶으면 강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전 14:29-33)
고전 14장
29 그러나 둘이나 셋 예언하는 자들로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하게 하라. 30 그러나 만일 앉아있는 다른-사람에게 어떤 것이 계시되어졌으면, 먼저의-사람은 잠잠하게 하라. 31 왜냐하면 모두가 배우도록 그리고 모두가 권면받도록 너희 모두가 하나 하나씩 예언할 수 있음이라.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실행합니까? 형제모임은 바로 이렇게 실행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무질서가 야기 되는 것은 한번도 못보았습니다. 성경대로 지키면 혼란이 올 것같아서 실행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성경에서 가르치셨습니까?
성경에 있지도 않은 직책인 목사라는 사람이 강단을 독점하는 관행은 성경상의 초대교회에는 없었습니다.
(14) 우리는 총회본부도, 총회장도, 교리책도, 헌법이나 헌장도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총회본부, 총회장, 교황, 추기경, 주교, 대주교, 등의 직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총회본부는 하늘나라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총회장이시며, 교리책과 교리 교본은 성경책이며, 우리의 헌장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친히 기록해주신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많은 교파들이 총회장, 성가총회장, 증경총회장, 세계복음화 총본부장, 총감독, 감독회장,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 등등 무시무시한 벼슬들을 만들어내어 갖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경에 전혀 없는 직책명이며 인간들이 인간들에게서 높임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시면 총회장들을 소집하고 교황과 정상회담 하실까요? 그것들은 인간들이 인간들에게서 영광을 취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벼슬들입니다.
(15) 교파이름, 교파주의 배격
우리는 성경에서 로마 장로교회나, 에베소 감리교회나, 빌립보 침례교회를 찾아볼 수 없음같이 아무런 교파이름도 없이 모입니다.
단지 지역의 이름에 교회 혹은 예배당이라는 말을 붙일 뿐입니다. 한 도시에 한 교회라는 것은 근거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구 천만인 도시에나, 인구 5천명인 마을에 다같이 한 교회만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만큼 하나님은 미련하시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교파의 이름을 금하고 있습니다. (고전 1장 12-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모이는 형제자매들의 모임을 형제교회다 형제회다 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형제모임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원하여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이 아니고, 외부인들의 편의상 구분하기 위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모여야 정상입니다.
실제로 형제모임들은 세계의 어느 교회든지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실행하는 것이 확인되고 나면 그 모임 전체를 인정하고 교제에 참여케합니다. 세계 어디에도 형제모임이라고 이름 붙인 형제모임의 모임은 없습니다.
(16) 성경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칩니다.
(고전 14:34) 소위 형제 모임이라고 불리우는 곳들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들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과도 관련있습니다. 여자가 목사가 되어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교회안에서는 금하신 사항입니다. (디모데 전서 2:12) 다만 교회안에서 자매들은 어린이들을 가르칠 수 있으며, 자매들은 또한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며, 나이든 자매가 젊은 자매를 가르치고, 자매들이 찬송가를 작시, 작곡하는 것, 그외의 다양한 성경적 은사를 발휘하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의 수많은 기도 모임들과 봉사활동들은 형제모임의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지원세력이며 매우 큰 헌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17) 천거서
초대교회는 성도들의 이동이나 방문에 천거서를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고후3:1, 롬 16:1) 형제모임은 성도들의 이사나 방문등에 그것을 사용하며 때로는 전화로 천거하기도 합니다. 일반교회에서는 너왔느냐 나간다식의 집회가 많지만 형제모임에서는 그보다 훨씬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으며,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국제간의 교류에도 그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교파 교회들에서는
불신자와 신자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고 그 천거서의 필요성이 적은데 반하여 소위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곳들에서는 이미 인정되고 확인된 거듭난 성도들을 천거할 필요성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18)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며(요일2:27),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2:5, 2:9 계 1:6, 5: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내려와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는 인간들이 우두머리로 앉아있으며, 신자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참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거나 무시합니다. 많은 교회에는 당회장이다, 담임목사다 하여 그들이 마치 그 교회의 영혼들을 위해 피흘리고 죽은 양, 스스로 그 영혼들을 책임지겠다고 호언하기도하며, 성령님께로 순종하기 보다 인간에게 순종하도록 세뇌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행의 일인목회 지도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성경적 모임에서는 찾아볼수 없으며,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 20:30) 하고 경고하였던 바이기도 하며, 사도 요한이 말한바 “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일반교회들에서 목사라는 직책의 특정인들은 목자이며 나머지는 양들이라서 모두 특정직책의 사제나 신부, 목사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교리를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인목회제도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19) 교회는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입니다.(마18:20) 이것이 수많은 형제단들이 믿음을 지켜왔던 방법입니다. 거기에는 목사나 신학교 출신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특별히 안수받아야 한다는 요건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정 규모의 건물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일정규모의 숫자 이상이어야 한다는 제한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 모임들이 가정집에서부터 모였음을 볼수 있게 해줍니다. 대형교회들에서는 누가 왔다 가는지 몰라도 되며 교회 성도들간의 교제보다는 목사의 일인목회 설교를 듣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믿음을 점검하거나 각자가 믿음을 발표하는 기회가 적으므로, 구원얻지 않고도 끼어들수 있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곳들에서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기도하며 강단에서 설교하며, 주님의 만찬으로 감사드리며 찬송드리는 기회들이 많으므로 각자의 믿음이 드러나며 보다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소위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모임들에서는 일정규모 이상으로 모임이 커지면 분가하여 별도의 모임들로 나아가는 이유들입니다.
(20) 교회에서는 반드시 징계가 행해져야 합니다.
징계는 성도를 거룩히 보전하기 위해 고통스럽지만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의 징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보다는 교권주의에 반대했다거나, 일인목회자의 권위에 반대했거나 자기들의 이해에 안맞았을 때에 행해지고 반대로 음행이나, 악행들에 관해서는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비추어 옳지 않습니다.
목사의 비리를 들추어내어 훈육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징계가 행해지고, 각종 비리와 범행들을 저질렀어도 목사에게 충성하면 그대로 두는 제도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21) 헌금과 십일조
형제모임은 십일조가 율법의 일부로서 제사장제도와 함께 실행되었던 성전제사법의 일부였으며 그 성전 제사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으므로, 신약교회에서는 더 이상 가르쳐지지 않고 대신 연보가 고린도 후서 9장 7-9절에서와 8장 14-17절에서 가르쳐 지고 있으며 그것은 마음에 정한대로, 즐겨내는 것으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가 아닌 것으로, 규칙적으로(고전 16장 2절) 행하는 연보로 바뀌었음을 알고 십일조를 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마음에 정한대로 라는 말씀과 십일조라는 의무화는 양립될 수 없다고 믿어집니다.
또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마 6:3) 그대로 실행하여 헌금액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교회 안의 뒷면에 헌금함을 두어 자유롭게 그리고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헌금하도록 하고 있으며 10년을 다녀도 헌금강요 설교를 들을 수 없습니다.
말라기의 십일조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 제사를 드리던 시대에 그 제사장들에게 지급하던 인건비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민수기 18:21, 26) 수많은 성전 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완성하시고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신 이후의 신약교회는 더 이상 동물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모두가 제사장들이며 (벧전 2:5-9, 계 1:6, 5:10)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안에 제사장 직분은 없으며, 교회안의 장로, 사역자들은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데살 후 3:8-12) 그런 까닭에 신약교회에서는 십일조는 폐해졌고 대신
연보가 있어서 성도들간에 평균케 하는데에 쓰이는 것입니다(고후 8:14-17)
다만 가르치는 장로들을 위하여 그러한 연보가 사용되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딤전 5:17-18)
헌금이 강요되지 않고 왼손이 하는 헌금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비공개의 원칙은 중요한 것입니다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헌금액수를 공개하기도 합니다. 형제모임은 그러한 인간적 나팔불기를 행하지 않습니다.(마 6:2)
또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서라도 십일조를 행해야 한다는 엉터리 교리를 소위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곳들에서는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오늘날에도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바리새인들이 많이 있는 것이 오늘날 그릇된 교파 교회들의 현실입니다.
(22) 성경적 모임들의 교회사
성령님께서는 역사상 저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며, 성경대로 모이고 성경대로 실천했던 모임들을 지구상에 항상 유지하여 오셨습니다.
도나티스트, 바울파, 몬타누스, 보도아 형제단, 알비진, 왈덴지안, 보고밀파, 네스토리안, 서부독일 형제단, 프로방스 형제단, 페트로 드 부르시안, 롤라드파, 쟌 후스파, 보헤미아 형제단, 재침례파, 모라비아 형제단, 플리머스 형제단등 수많은 형제단들이 하나님에 의해 보호되어지고 지켜져왔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왈도파 형제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을 들었으며 웨슬레는 모라비아 형제단의 스팡겐베르크와 피터뵐러의 복음을 듣고 거듭났습니다. 이들은 마리아숭배, 마리아에의 기도, 성인통공, 교황제도, 성상숭배, 등의 비성서적 관행들을 거부하고 성경에 충실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아 1827년부터 더블린에서 시작하여 영국에서 일어난 형제운동이 바로 오늘날 전 세계와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있는 형제모임들입니다.
(23) 모임진리에 관한 책들
그밖에 형제 모임이 옳다고 분별해놓은 바들에 관해서는 전도출판사에서 발행된 수백종류의 책들, 소책자들이 매우 쉽게, 모두 성경에 근거하여 모임의 진리와 성경진리를 제시해놓고 있습니다.
그 책자들은 대부분 작고 쉽기 때문에 전철에서나 어디서나 틈틈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 모임에 대한 성경의 원리(알프레드 깁스 형제)와 참 제자의 길,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 (윌리암 맥도날드 형제)등이 매우 유익하며, 순례하는 교회사라는 책이 영국인 브로드벤트에의해 저술된 것으로 형제단들의 2천년 역사를 잘 서술해놓았습니다. 많은 한국 모임의 형제들 또한 훌륭한 복음 글들로 구원과 거듭남, 교회 모임의 진리에 대하여 저술하여 보급하고 있습니다.
전국 여러 교파들의 교회들 중의 엄청나게 수많은 교회들이 전도출판사의 전도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형제모임을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교회에서도 그들이 사용하는 전도지는 바로 전도출판사에서 발행한 전도지였습니다.
(24) 형제모임 사람들에 대한 주 하나님의 축복
작은 일들에 충실함으로 (계3:8) 필라델피아(형제사랑) 모임이 주께로부터 칭찬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동안 많은 축복을 모임의 형제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죤 넬슨 다비는 형제운동을 1827년경 처음 시작하여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죠지뮐러는 고아들의 아버지, 5만번의 응답받은 기도등으로 알려졌으며,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륙 선교회로, 매킨토쉬는 모세 오경강해로, 죠셉 스크리븐은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구인지”로 알려졌습니다. 그외에도, 에드워드 크로닌, 다니엘의 70이레의 로버트 앤더슨, 로버트 채프만, 에릭 사우어, 해리 아이언사이드, 찬송가들의 제임스 데크등은 형제모임에 참여하였던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또 앞으로도 하나무수히 나올 것으로 기대하며 여기에 새로이 참여하는 분들 또한 앞서간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을 능가할수도 있음을 우리는 기대할수 있습니다. 에릭 사우어의 세계구속의 여명, 십자가의 승리, 영원에서 영원까지 등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책들입니다.
형제모임의 사람들 중에 W.E. Vine 같은 헬라어의 권위자와 수많은 히브리어, 헬라어 권위자들이 많이 나온 사실 또한 주목할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25) 토론- 교회 안에 있는 두 가지 직책명
교회안에 감독이 있고, 장로와 집사가 따로 있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교회 안에는 오직 두 직책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로이며 다른 하나는 집사입니다.
장로는 그 역할과 기능을 말할 때 감독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교회 안에 감독이 있고 장로와 집사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행 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행 20: 28
성령이 저들 가운데서 너희를 감독들로 세우고...
에서 바울은 장로들을 감독들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로와 감독이 다른 것이며 장로들중에 감독 아닌 자가 있었다든지 감독 중에 장로 아닌 자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1:1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및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빌립보에는 장로들이 없었을까요? 왜 장로들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감독들이 복수인 사실은 주목할 일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이라는 부류로 분류되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디모데 전서 3장1절-13 여기서 감독과 집사의 자격요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축복하실 것이며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감독외에 감독 아닌 장로가 있었다면 장로의 자격요건 또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또 장로들 중에서 감독을 뽑아야 한다면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 그러므로 감독은 장로된지 수년이 경과한 자들로서...."
감독에 대하여 딤전 3장에서 기록하신 다음, 다시 5장17-20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 장로의 자격요건은 왜 안나왔을까요?
디도서 1장5-9
5절에서 바울은 디도를 남겨둔 이유는 그로 하여금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함이었다 하고, 장로들의 조건들을 열거한 다음 단어를 바꾸어서 감독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문맥을 잘 살펴보시면 두 종류의 직책의 요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직책에 관하여 설명하는 도중에 갑자기 바꾸어서 호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7절에는 한글 성경에는 없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붙여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문을 번역해보겠습니다:
5 이를 인하여 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둔 것은, 내가 네게 지시한 바와 같이, 네가 부족한 일들을 바로잡고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도록 하려함이니, 6 만일 누가 흠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방탕하다거나 불복종한다는 비난이 없는, 믿는 자녀들을 가졌으면 이니라. 7 왜냐하면 감독은 마땅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며, 쉽게 화내지 않으며, 술취하지 않으며, 구타하지 않으며,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않으며,
위에서 장로의 자격요건중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믿는 자녀들을 두어야 하고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딤전3장에서 감독의 자격요건으로 언급한 바입니다. 킹제임스는 FOR 를(그리스어 GAR) 살렸음을 주목하십시오.
(반론)
바울이 디도로 하여금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하였으니까 디도나 디모데는 사도이거나 속사도였으며 따라서 특별한 지위에 있었고 장로나 감독이었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들이 속사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사도, 선지자, 속사도 이러한 것들은 직책명이 아닌 은사나 사역의 특징을 말합니다. 교회 안의 직책을 그렇게 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로가 장로를 세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습니다.카톨릭들이 초대 교황이라 부르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습니다.(벧전 5:1) 그러면서 장로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벧전5:1-4) 그리고 그 장로들에게 양무리들을 감독하라고 말합니다. 제가 번역해보았습니다.
너희중의 장로들을 내가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들의 증인이며, 장차 나타날 영광에의 참여자라. 2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목양하며,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하며,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유업으로 맡겨진 자들 위에 군림함같이 말고, 양떼의 본이 되어라.
장로들에게 감독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디모데나 디도가 장로는 아니었겠습니까?
디도나 디모데 역시 감독이었으며 동시에 장로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에서 사도와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왜 감독들은 언급되지 않았을까요?
요한도 스스로를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요한2서 1절, 요한 3서 1절)
왜 목사라는 직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장로들을 언급할 때 왜 감독들은 언급되지 않았을까요?
빌립보 교회에는 감독들과 집사들만 있고 장로들은 없었을까요? 왜 빌립보 교회에는 목사라는 직책이 언급되지 않았습니까? 에베소 교회에는 반대로 장로들만 있고 감독들은 없었을까요? 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감독들로 세웠다고 말했을까요?( 행 20:17, 28)
사도 베드로는 스스로를 장로로 불렀습니다(벧전 5:1).
요한은 스스로를 장로로 불렀습니다(요한 2서 1절, 요한 3서 1절).
사도 요한위에 목사나 감독을 맡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 위에 목사직책가진 사람이 있었을까요?
오늘날 장로들은 신학교를 안나왔다는 이유로 축도도 못하고, 설교도 못하며, 침례(혹은 세례) 베풀기도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침례도 못베풀고 성만찬도 집례하지 못했을까요? 오늘날의 장로들은 초대교회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직책으로 하락했습니까?
호칭에 관한 한 소스데네, 디모데, 디도, 에바브라, 바울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음은 주목할 일입니다. 사도, 선지자, 속사도는 직책이 아닌 은사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오직 장로와 집사의 두 가지 직책이 있을 뿐이며 장로는 감독으로도 불리었습니다.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역할 범위를 가졌으며 그것이 다른 것처럼 하여 장로들 위에 감독이 있다든지 감독들 위에 장로들이 있다든지 하여 조직을 만들고 그것으로 총회본부를 세우며, 노회를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기 위한 구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총회본부는 없었으며, 노회도 총회도 총회장도, 교황이나 추기경도 그 용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성경에 기록한 말씀은 지키지 않으면서 성경에 없는 직책과 호칭과 명칭이며, 새로운 계명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총회장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총회본부는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2절에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 직접 지시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오늘날 총회조직을 생각하면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지시하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에게 수없이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지시하실 때에 예루살렘 교회 통해서 지시하셨겠습니까?
성령께서는 개교회에 개인에게 나타나십니다.
교회에는 오직 두 종류의 직책이 있으며 오늘날의 목사제도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바벨탑입니다. 그 바벨탑은 반드시 붕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나 사도 바울이 오늘날 오셔서 교회들을 세우신다면 오늘날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교회 모임들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며 교회 생활을 그와같이 가르칠 것입니다. 그분들은 총회장으로 취임하려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http://cafe.daum.net/Eliyahu?t__nil_cafemy=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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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나 이상적인 교회인데 성경대로 이루어진 교회가 존속되어 왔다는 것을 이제사 알게된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저도 형제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형제모임 가보시면 예배가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샬롬
저는 형제교회가 정확히 어떤 모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위 게시물 내용을 보면 건강하고 건전한 곳이라 생각이 듭니다.
평신도교회와도 너무 많이 닮은것 같습니다. 형제모임은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불림 받는것을 좋아해야 하는데...기성교회들이 왜이리 높아질려고 하는지 좀 안타깝습니다.
문제는 일반교회들이 형제모임을 이단이라 하면서 형제모임을 신천지, 만민중앙회, 여호와의 증인, 제수이트 등과 동일시 하려는 노력에 있습니다. 저는 저들 이단들이 위에 언급한 성경분별만큼 잘 이해하고 지키려 한다면 참으로 칭찬해주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형제모임을 비방하는 자들이 이런 실행들을 설명하면 말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어떻게 하는가로 보여주면 되는데 이러한 성경적 실천을 하는 모임들은 결국은 형제모임 체제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비방들이 많지만 우리는 그들의 실행들을 놓고 비교하여 그 열매로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아직도 세례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침례실행자들을 은근히 비방합니다. 목사제도, 일년의 두차례 성만찬을 실행하면서도 갖가지 변명으로 형제모임을 비방할 거리를 연구해냅니다. 그런자들은 예수님이 형제라 부르도록 명하신 명령은 무시해버립니다. 목사로서 존경받기를 예수님께 순종하기보다 우선시합니다.
제가 종전에도 지적했지만 형제모임이 대부분 믿고 따르는 교훈중의 하나가 세대주의 해석에 의한 환난전 휴거입니다. 형제모임안에서도 그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죠지 뮐러가 그 예이었습니다. 저도 그것이 잘못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계시록 해석에 관해서는 수천개의 교회집단들이 틀리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거의 모든 교회 집단들이 계시록 종말론 해석에서 서로 다르면서 거의 모두 틀리고 있습니다. 단지 아무 말도 안하는 사람이 옳다 할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놓고 형제모임이 틀렸다고 비방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도 시간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형제모임도 변화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1827년부터 오늘날까지 매우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형제모임에 속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저술들을 읽어보면 압니다. 중국에는 허드슨 테일러를 보내셨고, 독일에서는 에릭 사우어, 아프리카에 데이비드 리빙스턴, 미국에 윌리암 맥도날드, 영국에 죠지 뮐러, 매킨토쉬 등 무수한 형제들을 하나님은 축복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형제모임안에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오리라고 저는 예상하고 있으며 그들 중에 계시록에 정통한 사람들도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간이 지나면 계시록에 관한 오해문제도 해소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제모임의 사람들을 축복해주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세례가 아닌 침례를 실시하며, 성경대로 자주 주님의 만찬으로 그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분이 오실때까지 전파합니다. 성경대로 만인 제사장의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어느 형제나 강단에 설 권리가 주어지며, 예수님의 명하신대로 누구든지 형제 자매로 호칭됩니다. 성경대로 장로와 집사의 직분들을 두고 성경대로 오른손이 하는 헌금을 왼손이 알수 없도록 헌금액수를 공개하지 않으며, 마음에 정한대로 헌금하도록 강제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남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자기 양식을 먹는 것(데살 후 3:8-12)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교회에는 직업이 발달되며, 교회의 헌금액에 매달려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모임의 재정들은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것은 형제모임에서 거창한 건물들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창한 교회 건물은 페르시아 미트라 종교의 사당들과 쥬피터 사당들이 가졌던 건물들이 기독교로 둔갑할 때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교회의 뾰족탑은 구약시대 산당에서 우상 섬기던 것을 현대화 시킨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가정집에 모이기도 하였듯이 어디든지 실용적인 건물에서 모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한국 땅에서 일부라도 형제교회(형제모임)를 이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은 매우 애석하며 부당한 일입니다. 형제모임처럼만 해도 소위 개혁의 진도는 큰 발을 성큼 내어 딛는 것입니다.
아멘!! 문제는 구원파등도 형제모임이라하니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것 같습니다. 순수한 형제 모임은 정말 거룩하고 좋습니다.
복음도 중요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기록된 대로 교회를 이루어가야 하는 교회진리 또한 매우 중요하지요,, 모임에서 행하고 있는 예식이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들이기에 모임에서 행하는 교회진리를 또한 사랑하고 이러한 모임에 소속되어 주님을 섬기고 있는것이 복된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안에는 성경대로 지키는 사람들을 시기하여, 어떻게든 잘못을 찾아내려 열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는 주님이 명하신 바는 지키지 않으면서 형제모임이 주장하지도 않는 바들을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또 형제모임이 실행하지도 않는 바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지적하는 모임들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에 대한 해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신약성경에 어긋나게 실행하고 있는 모임은 진정한 형제모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형제모임이란 신약에서 가르치는 바를 충실히 지키는 모든 모임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모임이든 목사제도를 배격하고, 침례를 실행하며, 성만찬을 자주
실행하고, 자매들이 예배수건을 쓰고, 형제 자매로만 호칭하며, 강단이 성령님께 드려져 있고, 성경대로 장로들을 세우며, 교파의 이름을 세우지 않고, 성경대로 오른손이 모르게 왼손이 헌금하며, 헌금이 강요되지 않으며, 교역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교회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성경적 교회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형제모임입니다. 그러한 교회들과 기존의 형제모임은 교제의 악수를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형제모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눈속에 있는 통나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속의 티끌을 찾아
비방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형제모임의 성도들의 행실들이 증거될 것입니다. 일반 교회에서 죠지 뮐러에 비할만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수한 형제들의 삶의 간증들이 주님의 날에 증거되고 인정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들은 형제모임이 영지주의자들의 모임이라면, 찬송가 책에서 "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부터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이 영지주의자들이라면 그들에게서 전도받고 거듭났다는 챨스 웨슬레의 만입이 내게 있으면, 천사 찬송하기를 등 수많은 곡들도 찬송가 책에서 빼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그냥 한번 떠들어보는 식의 비방을 할 뿐입니다.
영지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 영지주의라고 하는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완전 이단입니다. 형제 모임은 순수한 주님의 교회이고요.
부산 동래모임의 장로형제이신 이춘원 형제님이 저에게 실제 들려준 일화가 있습니다. 주변의 장로교회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동래 모임은 이단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전도지를 살펴보니 전도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도출판사에서 발행한 전도지의 뒷면에 자기네 교회의 주소들을 인쇄한 다음 그것을 전도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전도지를 기안하고 작성하신 분은 바로 이춘원형님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어찌하여 이단들이 작성한 전도지를 전도지로 사용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전도출판사의 전도지들은 매우
간소 간결하면서도 성경적이며 매우 좋은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전국의 수천개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하늘샘님이 올리신 전도지도 바로 전도출판사에서 나온 것임을 저는 보았습니다. 대략적인 통계로는 전도출판사의 전도지가 전국에서 실제적으로 배포되는 전도지의 80%가 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도출판사의 전도지를 사용하는 교회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들이 매우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영혼 구원을 진심으로 바라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
형제 모임의 실행에 관하여 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더 부탁 올리고 싶은 것은 초기 교회로 부터 연결되어 온 형제 모임의 교회사의 사료도 부탁을 드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전도신문은 앞면의 히로시마 원폭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올린 전도 신문의 안쪽의 메세지는 제 창작 품이구요 ^^
초기 교회사에 연결된 형제 모임의 역사를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후에 제 견해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전도출판사에서 전도지로 발행된 수많은 전도지중에 한가지가 하늘샘님께서 인용하신 히로시마의 원폭에 관한 내용입니다..
형제모임의 교회사에 관한 사료중 도표로 요약된 것을 올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히로시마 원폭이전에 경고가 있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많은 교회 목사들은 자기들의 전도지로 사용하는 히로시마 원폭 이야기가 형제모임에서 작성한 전도지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전도출판사의 전도지와 분당북부교회의 황성진형제가 제작 배포하고 있는 전도지도 복음적인 전도지라 여깁니다..
"어부와목자"를 운영하며 전도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황성진형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내용의 전도지 입니다..
http://www.fnsbook.com/doc/
아주 좋은 복음 전도지 입니다. 그림이 있어서 보기가 쉽습니다.
저는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않아 한동네사시는 친정부모님으로부터
무척 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한 때 교회다녔던 몇개월을 기억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 서원하기를 자녀를 낳으면 하나님믿게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로 만든다고 하지않았습니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좋은 간증입니다. 귀한 기도의 자녀들이 앞으로 계속하여 훌륭하게 되기를 주님께 의탁드립니다.
잘 정리해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