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촬요25-2 20110501 보조진심직설-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九. 眞心所在 (참마음이 있는 곳)
或曰하되 息妄心而하면 眞心現矣하니 然則眞心體用은 今在何處이오 曰하되 眞心妙體가 ?一切處하니 永嘉云하되 不離當處常湛然하여 覓則知君不可見하며 經云하되 虛空性故로 常不動故며 如來藏中는 無起滅故니라 大法眼云하되 處處菩提路요 頭頭功德林이라 此卽是體所在也니라 眞心妙用은 隨感隨現이 如谷應聲이니 法燈云하되 今古應無墜하여 分明在目前이니라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所以로 魏府元華嚴云하되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在行住坐臥處하며 喫茶喫飯處하며 語言相問處하며 所作所爲하나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이니 故知하라 體卽?一切處하여 悉能起用하고 但因緣有無不定故로 妙用不定耳이나 非無妙用也니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 度諸生死하면 莫迷眞心體用所在也니라
묻기를“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난다 하니, 그렇다면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요?”
답하기를“참마음의 묘한 본체가 온갖 곳에 두루 하나니, 영가(永嘉)선사가 이르기를‘제자리(當處)를 여의지 않고 항상 담연(湛然:담담하고 고요)하여 찾으면 그대는 보지 못할 줄 알 것이다’하였으며, 경에 이르기를‘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항상 요동치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如來藏) 가운데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기 때문이라’하셨고, 대법안(大法眼 文益)은 이르기를‘곳곳마다 보리의 길이요 일마다 공덕의 숲(功德林)이라’하셨으니, 이것이 곧 마음이 있는 곳이니라.
참마음의 묘한 작용은 느낌(感)에 따라 나타남이 마치 골짜기에 메아리가 응하는 것 같나니, 법등(法燈)이 이르기를‘예나 지금이나 응당 떨어짐이 없이 분명히 눈앞에 있노라. 조각구름은 늦은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鶴)은 먼 하늘 끝에 내린다’하였느니라.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이 이르기를‘불법이 일상생활 속에 있으며,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는데 있으며, 차 먹고 밥 먹는 곳에 있으며, 말하고 문답하는 곳에 있으며 동작과 분별하는 곳에 있으나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면 또 옳지 못하다’하였으니, 그러므로 알라. 본체는 곳 온갖 곳에 두루하여 능히 모든 작용을 일으키고 다만 인연의 있고 없음이 일정치 않은 까닭에 묘한 작용도 일정하지 않으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을 닦는 사람이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서 모든 생사를 건지려한다면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아야 하니라.
十. 眞心出死 (참마음은 죽음을 벗어남)
或曰하되 嘗聞見性之人은 出離生死然이나 往昔諸祖인 是見性之人이 皆有生有死하며
今現見世間修道之人도 有生有死事이니 如何云出生死耶인가 曰하되 生死本無거늘
妄計爲有니라 如人이 病眼하여 見空中花하나 無病人說하되 無空花하면 病者不信타가
目病若無하면 空花自滅하여 方信花無하니 只花未滅해도 其花亦空이라 但病者가
妄執爲花라도 非?實有也니라 如人이 妄認生死爲有하면 或無生死人이 告云하되
本無生死해도 彼人不信타가 一朝妄息하여 生死自除하면 方知生死本來是無이니
只生死未息時에는 亦非實有이나 以妄認生死有니라 故經云하되 善男子 一切衆生이
從無始來로 種種顚倒가 如迷人이 四方易處를 妄認四大하여 爲自身相로 六塵緣影을
爲自心相하니 譬彼病目으로 見空中花하며 乃至如衆空花이 滅於虛空도 不可說言有
定滅處니라 何以故하면 無生處故니라 一切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滅하니 是故로
說名輪轉生死니라 據此經文하되 信知達悟圓覺眞心 本無生死하리라 今知無生死而
어도 不能脫生死者는 功夫不到故也니라 故로 敎中說하되 菴婆女가 問文殊云하되
明知生是不生之法이나 爲甚?로 被生死之所流인가 文殊云하되 其力未充故라 後有
進山主가 問修山主云하되 明知生是不生之法해도 爲甚?로 却被生死之所流하니
修云하되 ?畢竟成竹去하나 如今 作筏使得?인가 所以로 知無生死가 不如體無生
死하고 體無生死가 不如契無生死하고 契無生死가 不如用無生死니라 今人이 尙不
知無生死거늘 ?體無生死거나 契無生死거나 用無生死耶리오 故로 認生死者하면
不信無生死法이 不亦宜乎리오
혹 묻기를“일찍이 들으니 ‘성품을 본(見性) 사람은 생사(生死)를 벗어난다’ 하였으나 옛 조사들인 곧 견성한 사람이 모두 나고 죽음이 있었으며, 현재 세간에서 수도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남도 있고 죽는 일도 있으니,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 하는 것인지요?”
답하기를“생사가 본래 없거늘 허망하게 계교하여 있다고 여길 뿐이니라. 마치 사람이 눈병이 나서 허공에 꽃이 있다고 보나 병 없는 사람이 말하기를‘허공에 꽃이 없다’하면 병든자가 믿지 않다가 눈병이 없어지면 허공꽃이 없어지니 비로소 허공꽃이 없는 것을 믿나니, 다만 꽃이 사라지지 않아도 그 꽃은 역시 空한 것이라 다만 병들은 자가 망령되게 꽃이라고 집착할지라도 모습(體)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를 그릇 인정하여 있다고 할 때에 생사가 없는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고 일러줘도 그 사람이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지면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다만, 생사가 쉬지 않았을 때에는 역시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나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나니라.
그러므로 경(圓覺經)에 이르기를‘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시작없는 옛부터 지금까지 갖가지로 뒤바뀜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처소의 네방향(四方)과 사대를 망령되이 인정하여 자기 몸의 모습을 삼아 여섯경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자기 마음의 모습으로 삼나니,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 가운데 꽃을 보며, 나아가서는 마치 온갖 허공꽃이 허공에서 멸할 지라도 결정코 멸하는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하면 생기는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이 생하는 것이 없는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멸을 보나니 이러하므로 ‘이름하여 생사에 굴리어지게 된다(輪廻)’ 하니라.
이 경문에 의하건대 원각(圓覺)의 참마음을 통달하여 깨달으면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믿으리라.
지금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철저(到底)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경전(敎學)에 설하기를 ‘암바녀(庵婆女)가 문수(文殊)보살에게 묻기를 ‘生이 곧 생함이 없는 법임을 분명하게 알았으나 무엇 때문에 생사의 흐름(輪廻)을 받나이까?’하니, 문수가 이르기를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이라’하셨으며, 후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生)이 곧 생 아닌 법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생사의 흐름을 받나이까?’하니, 수산주가 이르기를 ‘죽순(筍)이 결국 대(竹)가 되나 지금 당장에 뗏목을 만들면 쓸수 있겠는가?’하였으니,
그 까닭에 생사 없는 줄 아는 것이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생사 없음에 계합(契合)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생사 없음을 계합하는 것이 생사 없음을 쓰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요즘 사람들이 오히려 생사 없음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 없음을 체득하거나 계합하거나 활용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면 생사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리오?”
무애심: 선문촬요강설 마지막 부분이며 뒤이어 만들어 놓으신 자료는 강설하시지 않아 음성법문에는 올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