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라나면서 가장 인생의 영향을 받는 것은 어머님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어머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기에 그러 할 겁니다.
지금은 부부가 함께 일을 해야 먹고 사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자식들은 아버지 보다는 어머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리라 생각 합니다. 그래서 아버님 보다는 어머님을 더욱 그리워 하나 봅니다. 또한 살아가는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어머니가 아닐까 나름 생각 해 봅니다.
우리집에는 아들만 아홉였답니다. 딸은 한 사람도 없었드랍니다. 한마디로 한 야구팀을 구성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적 나는 어머님과 함께 밭에 나가 고추를 심고 고구마 순을 심고 또한 논에 나가 호미를 들고 보리밭에 잡초를 뽑고 가을에는 고추를 함께 따고 고구마 감자를 함께 수확을 하는데 조력을 했습니다. 그라면서 어머님과 함께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나 방금 학교에서 배운것이나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이야기를 조잘 조잘 어머님께 이야기를 받쳐야 했지요.
한편 어머님께서는 또한 우리들에게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 이곳 저곳 동네를 떠나 서울에 가서 돈버는 다른 가정 형님들이나 누나들 이야기를 들려 주어서 동네가어떻게 돌아 가는 것을 다 알수 있지요. 왜냐하면 어머님들의 유일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가족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동네 머실 나가서 그 곳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수다를 하는 거지요. 수다라는 표현이 거시기 하지만 그 당시는 집집을 돌아 가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동네 아낙네들의 유일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면서 서방님으로 부터 받은 설음, 시어머님 험담도 서슴치 않게 이야기도 하고 친정 식구들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동네 아주머님들과 함께 이야기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달래가면서 했단 것 같습니다.
왜 내가 이런 것을 아냐구요? 우리는 5일에 한번씩 영산포 장에 나가서 물물교환 방식으로 장을 보곤 했지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함께 장을 보로 가는 동네 어르신들과 어머님이 함께 장을 보러 갈때 나역시 한 일행이 되어 함께 했지요. 십리길을 걸으면서 함께 하는 동네 사람들은 내가 옆에 함께 있다는 사실 즉 내가 어린이라는 사실을 산 속에 숨겨 놓아서 보이지 않는사람인냥 어린이 앞에서는 나누지 아니 해야 하는 성 생활 뭐 거시기 하는 이야기등 모든 것을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나는 모른척 듣고는 있었지만 내 자신이 움찔할때가 느꼈드랍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들도 머리가 크지 않지만 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기에 아이들 앞에서 항상 조심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요. 다시 돌아 와서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돌려 주셨지요. 아마도 이런 동네 아낙들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함께 나누면서 유대 관계를 돈톡히 하면서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갔었나 봅니다. 어머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러한지 어머님은 항상 비가 오면 우리를 씌어주고 눈이 오면 우리를 안아 주었지요.
내가 병원에 근무하는 것이 적성에 맡는 다는 것은 어머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무슨 뚱딴지 이야기 하냐고 이야기 들리질 수 있지요.
내가 어렸을적 머리가 아파서 열이 많이 나서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약을 구하려 산을넘고 논과 맡을 걸어서 해서 십리길을 걸어서 약을 구입 해야 하기에 무슨 손을 쓸 수가 없었답니다. 어머님께서는 하룻종일 밭일을 마치고서도 밤새 내 머리에다 찬 수건 더운 수건을 돌아 가면서 머리를 얹혀 주었지요. 그리고 어머님 손등으로 나의 열을 재워 보곤 했었지요.그래도 열이 떨어 지지 아니 하면 무슨 하얀 가루를 콜랄속에 섞어서 마시게 했드랍니다. 밤새 어머니의 손길 때문인지 그 다음날 아침에는 언재 내가 머리가 아팠느냐는 듯이 깨끗이 낳은 겁니다. 그래서 사관학교 갔을땐 동기생이 아플때 나도 우리 어머님이 우리에게 했듯이 해 보니 그 동기생도 거뜬히 일어나 다음날 비행 훈련을 받은 기억이 새록 새록 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러 어머님으로 부터 얻은 교훈은 몸이 아프면 우리는 약을 찾지만 정성이 담긴 사랑의 힘은 어떠한 약보다 강하고 질병을 몸 밖으로 내 보낼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드랍니다.
나의 어머님은 학교 문턱을 넘어 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먼 고향에 나가 있는 자식들에게 소식을 편지로 직접 전 할 수가 없었드랍니다. 국민학교때 어머님께서는 어머님 자식들 즉 나로서는 서울로 돈벌로간 형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읊어 주시면 우리는 방바닦 공책에 누워 어머님께서 불러준대로 침을 바른 연필로 써서 내려 갔지요. 당시는 책상이 없기에 배를 방에 깔고 책을 읽거나 글을 썼지요. 그래서 받아 쓸때마다 어머님의 표현력이 대단한 것을 느꼈지요.
이곳에서 영어 작문 시간이나 theater class 에서 가끔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 소재로 숙제를 제출 할때 마다 교수님들께서 나의 동의를 받고 학생들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읽어 줍니다. 하루는 작가인 교수님이 나에게 다가와 너는 글쓰는 재주가 많다고 하면서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 보라는 권유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아마도 다 이것도 어렸을적 어머님이 불러 준데로 써 나갔던 형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향을 받지 아니 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칠푼이라고 하던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왜 우리 형제는 어머님께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한번도 우리는 어머님께 글을 깨워쳐 주지 못했는가애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글을 모르면 얼마나 인생 살아온 동안 고통이 심 했을까를 우리는 왜 외면 했을까요. 그 당시에는 우리 어머님들이 모두 그러 했기는 했지만 너무 아쉬움이 큼니다.
버스를 타고 외가에 갈때는 어데서 내려 할지 몰라서 몇 정거장만 남아 있는가를 어머니께서는 세기 시작 합니다. 그러다 밖에 있는 싸인을 읽지 못하니 정거장 내리는 것만 세다가 시골 버스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지나 치기에 정거장 새는것은 맞지만 정차하는 곳은 엉뚱한 곳에 곳에 내려 주면 우리는 먼 길을 걸어서 걸어서 저녁 늦게 외가에 도착 하곤 했지요.
그때 어머님 마음은 자식에게 표현 하지 못 한 것 즉 내가 글을 알았다면 싸인을 보고 내릴 수 있었는데 자식에게 글을 읽지 못하니 네가 밖을 봐서 내리는 곳을 나에게 알려 주렴 하라는 것을 자식에게 내 비치지 못하는 어머님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도 느끼지만 도착지에 도착 할때 쯤 어머님 손을 움켜 지는 것과 땀이 많이 나는 것을 목격 했는데 당시에는 버스가 더워서 그러나 생각 했는데 지금 생각 해 보니 글을 모르니 내리는 곳 쯤에 도착하면 또 다른 곳에 내릴까 조마 조마 해서 그렇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하루는 우리 조카 민정이 이름을 알드라구요. 나는 엄니 어떻개 민정이 이름 알아서요 라고 물으니 동그라미와 네모를 보고 알았다 하면서 하늘을 쳐다 보시드군요. 그때 왜 나는 어머님께 한글을 왜 알려 줄려고 생각을 못 했는지 후회가 막심 합니다.
어머님 입장에서는 자식들에게 한글을 배우고 싶다라고 말을 차마 꺼내지 못 했을겁니다. 속 마음을 읽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 했습니다. . 나는 글을 알기에 사는데 불편함이 없기에 글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의 고충을 몰랐습니다. 왜 이글을 쓰면서 눈물이 쏟아 지는지 모르게씁니다. 어머님이 많이 많이 오늘따라 보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밑으로 두 동생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대학의 문턱을 국비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동생들은 서울에 있는 명문 대학교에 입학해도 시골 농사로는 학교를 보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임관후 두 동생을 학비를 졸업할때 까지 도와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미국을 오게 되었을때 버스 안에서 우리 어머님께서는 내 손을 꼬오옥 잡으시면서 제게 이렇게 들려 줍니다 ”내가 네 두 동생 학비를 전부 대 주어야 했는데 네가 대신하게 하여 정말 미안 했다. 그리고 네 동생이 오토바이에 치여 병원에 있을때도 네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다“ 하면서 우시는 거예요. 저는 어머님에 여유있는 형이 동생들 좀 도와 준게 당연한것 가지고 그러하니 우시지 말라고 하면서 저도 따라 울었드랍니다. 왠냐하면 내가 미국으로 떠나면 나 처럼 부모님을 누가 돌봐 주실까를 생각 하니 눈물이 마구 쏟아집니다. 어머님께서는 군에 오래 있기를 근무 했기를 바랬지만 미국 가서 공부하여 꼭 성공 하여 효도 많이 할거라 말씀을 드렸드랍니다. 그때가 나의 어머님과는 마직막 만남이 될 줄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지금도 나의 머리에는 곱게 피마지로 빗은 어머니의 얼굴이 살아 나곤 합니다. 나는 그 사진을 지갑에 지니고 다녔는데 공군에 있을때 육군 지원하는 훈련에 참석 했다가 그 사진과 함께 지갑을 분실 했드랍니다. 지금도 그 사진은 어떤 걸 보다 소중 한 것이 었는데…
아십니까. 이웃에 담을 두고 두 건장한 청년이 살았드랍니다. 철수는 어머님이 원하시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 차려 어머님께 불편이 없도록 지극히 모십니다. 한편으로는 옆에 사는 길동이는 밖에 나가 말썽만 부라고 항상 옷을 더럽게 하고 다녀 길동 엄마는 자식 뒤 바라지 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쁨니다. 그런대 철수 어머니는 항상 어두움으로 가득하고 행복감을 못 느낍니다. 철수가 생각하기엔 길동이는 말썽 꾸러기 인데도 길동이 엄마는 뒷차다 거리면서도 항상 만족한 웃음을 주고 있는 겁니다.
왜 길동이 엄마는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 짐작이 가겠지만 그렇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자식에게 모든 사랑을 베풀어 주면서 자식이 행복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은 그런 어머님이 자식들을 챙기면서 느껴야 할 행복을 내가 동생들 등록금을 대신 내 주어 어머님이 누렸어야 할 행복을 빼았다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 어머님께 불효를 드린것 같아 마음이 아프답니다.
어버이날엔 나는 군에 있을때나 미국에 살면서 항상 카네이션을 소포로 보내 드렸는데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 보고 있음을 봅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 랍니다. 효도라는 것은 그분 자식들이 어데 가서 살든 부모로서는 자식을 믿고 두 다리 편하게 뻗고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버이 날이라 몇자 나의 어머님에 대하여 몇자 긁어 보았습니다. 교관님들의 어머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이어 졌는지요? 긴글 끝까지 읽어 주어 감사합니다.
첫댓글 옛날 어머님들은 다 그러셨고 많은 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이네요
어머님 자체의 단어에는 너무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 하는 것 같습니다 . 그중에서 저는 unconditional love가 어머님이 우리에게 배푼 사랑이 아닌가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