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잎·서른 일곱
왜 불교인가
Why Buddhism
엠오시 월슈 지음
M.O'C. Walshe
홍종욱·서형석 옮김
(Bodhi Leaves ·B5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 Sri Lanka
▲일러두기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대승·소승’ 논의는 우리 전통 불교권에서는 이미 숙지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서양의 일부에서는 불교가 생소한 만큼 불교의 여러 종파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불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초기에 소개된 불교를 놓고 각각 여러 가지 편견과 좁은 이해들이 전개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처음 동양에 불교가 들어올 때 격의불교가 만연했던 사정을 미루어보면 오늘날 서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필자는 얕은 이해가 초래하는 성급한 결론, 입장의 고착을 배격하기 위해서 더 깊이 연구한 후 결론짓자는 취지에서, 또 기본불교를 중심으로 폭넓고 진지한 불교연구와 입장 확립을 촉구하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글을 쓴 것 같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도 서양 불교의 융성 가능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가 많이 퍼지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 서양 불교에서 무엇이 문제되고 있는가를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저간의 사정을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옮기기로 했다. 여기 실린 세 편의 글은 각기 따로 발표되었던 글이라 일부 중복되는 내용도 있다.
▲ 차 례
왜 불교인가 7
왜 상좌부 불교인가 17
상좌부·대승·소승 26
왜 불교인가
‘어떤 것을(which)?’이라는 정기간행물이 있는데, 자동차에서 피임약, 소시지에서 재봉틀에 이르기까지, 시장에 나오는 각종 상표의 제품들을 놓고 가장 요령있는 쇼핑을 하도록 안내해주는 책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건 다 쇼핑하려 든다. 심지어 종교나 인생철학마저도. 인기 최고의 ‘나 몰라’주의나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식 오지랖주의는 빼놓는다 하더라도 종파가 수십 가지나 되는 기독교, 공산주의, 인본주의, 심령주의, 취생몽사(醉生夢死)주의, 마약주의, 비틀즈주의 등등 골라잡을 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또 이들 모든 ‘~주의’ 하나하나가 대개 몇 가닥씩의 분파를 거느리고 있으니, 실로 선택의 여지는 무한정인 셈이다. 가톨릭교마저도 이제는 고유명사가 못되고 보통명사로 변해버린 정도이니. 이렇듯 골라잡을 거리가 너무 많다보니 어떻게든 제 물건을 팔겠다고 기를 쓰고 경쟁하게 마련이다. 이래서 광고쟁이(Adman)들의 고혹(蠱惑)하는 호객성과 쇼핑광들(Madman)의 달뜬 아우성 소리가 서로 뒤질세라 높아져가는 통에 귀가 먹먹할 정도이다. 어떤 때는 도대체 이것이 광고 소린지 광란 소린지 구별이 안될 때가 많다.1) 그런 매물들 중에는 불교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그 역시 상표가 여러 가지인데 ‘인스턴트 선(禪)’이란 것도 눈에 띤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 dukkha)의 표출이 아닐까. 우리는 인생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고통을 못 느끼도록 술로, 섹스로, 환각제로, 스피드로, 심지어 공포영화로까지 자신을 마취시키거나, 아니면 온갖 종류의 몽상·환상 속으로 도피해버린다. 혹은 그것이 아무리 괴로운 일일지라도 인생의 모든 어려움과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과의 맞섬만은 피한다. “왜 부처님 가르침[佛敎]이어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이렇다. 사람들 마음속의 고질적인 어지러움을 정화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분이 고따마 붓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니까.
젊은이들이 반항적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점잖은 기성사회’가 물려준 핵무기를 비롯한 가지가지 공포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젊은 세대가 영 동참하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예 ‘기권’했나 보다고. 이런 식으로 개탄할 일이 많지만 따지고 보면 반쯤 맞거나 비슷하게 맞는 얘기일 뿐 어느 시대에나 항상 있게 마련인 변명의 한 예에 불과하다. 지금 세상이 엉망진창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는 안 그랬던가. 무명중생들의 세상꼴이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중생들이 깨닫기 전에야.
또 어떤 사람들은 몇 가지 근거를 내세워 우리 세대의 제반 문제가 종교의 쇠퇴로 인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역시 앞의 젊은 세대의 문제에 관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니다. 물론 교회의 위기가 사회 전반의 도덕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교황은 피임약 문제에나 매달리며 고식책(姑息策)을 강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불교를 찾게 된 것 같다. 사실 기독교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겨났다고 해서 모택동이나 코시긴의 사상이 그 틈을 메워줄 것 같지는 않고, 한때 요란하던 인본주의자들의 낙관론 역시 어둠 속에서 불어댄 절망적 휘파람 소리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게 그 음조가 수상쩍어지고 있다. 그밖에도 우리들의 소위 ‘과학적 인본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취사선택된 것들이라는 결정적 허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컴퓨터가 만능이라 하더라도 인생에 개입되는 총체적 차원을 죄 담아낼 수는 없다. 마음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보다 훨씬 더 경이로우며, 그런 만큼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초감각적 지각, 심령치료, 그 밖의 사실들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차츰 알려지게 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기존의 과학이 기존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명명백백해져가고 있다. 이제 과학자들이나 사제들이나 남을 가르치려들기 전에 자기 숙제부터 열심히 풀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이것이 서양의 그 허다한 사상을 다 제쳐두고 우리가 불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즉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 딜레마에 대해 더 충분하고 신뢰할 만한 설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순전히 머리로만 받아들인 불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교의 진리는 믿는 데에 있지 않고 행하는 데 있다. 그런데 ‘네 스스로 그것을 행하라(Do it yourself)’는 것을 서양사람들은 ‘그것을 네 자아로 삼으라(Do it your SELF)’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나 불교는 어디까지나 네 스스로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불교 경전에서는 법(dhamma)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서술한다.
“세존에 의해 잘 설해진 이 법은 지금 여기서 볼 수 있고, 시간과 무관하며, 점검을 권고하며, 열반을 향해 계속 앞으로 이끌어주며, 지혜로운 사람이 각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불법의 특성을 기술한 이 말들은 한마디 한마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여기서 볼 수 있다(sandiṭṭhiko)’라는 말은 팔정도의 첫걸음인 바른 견해(sammā diṭṭhi), 탐욕·성냄·어리석음으로 가려지지 않은 바른 눈을 암시한다. ‘시간과 무관하다(akāliko)’함은 불법이 시간적 차원 안에 있지 않고 시간에 영향받지 않으며, 또 법의 효과가 즉각적이라는 것까지 뜻한다. 뿐만 아니라 법이 전하는 내용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듯이 이 시대에도 들어맞는 것이라는 뜻이다. ‘본다’는 개념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데 ‘점검하기를 권한다’는 말의 원어는 ‘와서 보라’는 ‘ehipassiko’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조사·검토해보도록 활짝 열려있는 것이 불법이다. 무턱대고 사라고 조르지 않는다. 앞으로 ‘이끌어준다(opanayiko)’는 열반을 향해 한결같이 이끌어 접근하게 해준다는 뜻이며, 끝으로 이 법은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viññūhī)’ ‘각자 몸소(paccattaṁ)’ ‘깨닫거나 체험해야 할(veditabbo)’ 그 무엇인 것이다. 팔정도를 따라 걷다보면 우리는 자신의 실제 경험에 의해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성을 알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적정한 말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다른 길도 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매우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훌륭한 정신적 길이 있다. 그러한 길들이 그 사람을 윤회에서 벗어나게끔, 고해(苦海)로부터 피안으로 올바로 이끌어주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며 여기서 그것까지 논하지는 않겠다. 불교계 안에도 여러 상이한 학파들이 있다. 상좌부 불교가 표방하는 바는 빠알리 경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실재(實在)의 핵심에 곧바로 다가가고 곧바로 관철하는 직진성(直進性)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은 아직도 과학과 종교간의 해묵은 갈등에 사로잡혀 있어 이 둘이 과연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과학이 종교의 입지를 아예 쓸어내버리고 말 것인가를 놓고 온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런 갈등의 논리로써 바라보면 불교는 과학도 종교도 아니게 된다. 종교를 ‘구원의 길’이라 규정할 때만 불교도 틀림없는 종교가 된다. 그러나 불교를 “모든 종교의 밑바탕이 되는 ‘진정한 과학’적 기반”으로 볼 때 그 윤곽은 훨씬 뚜렷해진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길들은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손 치더라도 돌아가는 길인데 반해 불교, 특히 상좌부 불교는 바로 가는 길인 셈이다.
왜 상좌부 불교인가
‘장로들의 가르침’이라는 뜻의 상좌부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서 가르치고 있는 빠알리 경전에 근거를 두는 불교형태로서,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을 변형되지 않은 본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이다. 이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여러 말이 있다. 그러나 고따마 붓다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바를 담고 있는 신빙성 있는 유일한 기록으로서 현재 빠알리 경이 차지하는 지위는 어느 모로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보전해온 빠알리어가, 대부분의 서양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생전에 실제로 사용하시던 언어와 꼭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산스크리트어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으며, 각종 대승경전을 기록한 언어들을 구사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앞서의 논의들보다 더 중요한 점은 빠알리 경전에, 우리를 최종적 목표로 곧장 이끌어주는 수행체계, 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훌륭한 마음치유법이 설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바로 불교의 진면목이 있다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병을 진단하고 그 치유방법을 처방하신 분이다.
이곳 서양에서는 상좌부 불교를 기본불교(Basic Buddhism)라고 부르기도 한다.2) 대단히 공정한 용어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를 놓고도 해석이 엇갈릴 수 있다. 먼저 ‘근본’이란 의미에 중점을 두면, 이 기본불교에는 근본이 되는 모든 것, 실제로 필요한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는 뜻으로, 따라서 다른 교파에서 추가적으로 가르치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로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기초’라는 의미에 역점을 두면, 이 불교는 다른 종파들, 특히 대승불교가 시도하는 보다 높은 본격 비상(飛翔)에 착수하기 전에 먼저 배우고 숙달해둘 필요가 있는 초보적 가르침이란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해서 전자의 추정은 상좌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 타당성 여부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그러면 후자의 견해는 어떻게 되는가. 이 견해가 암시하는 바는 흥미롭기도 하지만 다소 아귀가 안 맞는 점도 검토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견해가 어울려서 빚어내는 결과적 상황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역사지식이 필요하겠다.
대승계통 학자들은, 최근의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상좌부 전통에 관해서 사실상 직접적인 지식을 갖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들이 소승이라 부르는 것은 기실은 서양중세사에 나오는 스콜라 철학과 비슷한 어떤 현학적 전승을 가리키며 그것은 상좌부와는 결코 맞아떨어지지 않는 별개의 학파이다. 따라서 대승의 논객들이 상좌부를 두고 소승 운운한다면 그것은 거의 논거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설일체유부3)라는 오래 전에 죽은 말에다 채찍을 가하는 데 열중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승불교 ― 매우 다양하게 번져난 각양각색의 전통들을 이렇게 뭉뚱그려 부르는 것이 용인된다면 ― 의 힘은 ‘기본’ 성전들에 체계화되어 있는 일부 가르침들이 수행과정의 각 단계에 잠정적으로 대응하는 방편성을 띠는 점에 착안하면서 나온다. 이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쉬워, 잠정적 진리를 벗어나기에 급급한 나머지, 철저한 연구 탁마를 소홀히 해버리기 쉽다는 점이다. 동양에서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다. 강을 다 건너고 나서는 뗏목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지만 물에 들어서기도 전에 뗏목부터 팽개쳐버려서야 되겠는가.
어쩌면 일부 동양의 국가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오로지 대승불교 형태만을 수용한 것은 불운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 땅의 초심자들이 공부의 첫걸음을 내딛기가 상당히 힘들었을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보면 서양의 불자들이 상좌부의 방식에 따라 공부의 기초를 확실히 다질 수 있다는 것은 미상불 행운이 될 수 있겠다.
이제 앞서 하던 얘기를 좀더 진행시켜 보자. 대승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예비단계로서 상좌부의 길을 먼저 거친다고 할 때, 어느 정도까지 그 길을 따라가야 할까. 경전의 여러 비유 중에서 하나를 빌려 표현한다면 ‘흐름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라는 게 답이 될 것이다. 이것은 전문술어로 예류도(豫流道)4)라는 것인데 여기에 이르는 순간 처음으로 불법의 심오함을 진실되이 직관하게 되며, ‘자아’의 허구성을 분명히 알게 된다. 아직도 앞길은 멀고 사람에 따라서는 험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공부에 퇴전(退轉)함이 없게되며 윤회과정에서 악도(惡道)5)에 떨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이미 세속 범부가 아니며 구경의 깨달음이 보장된다. 이런저런 보다 높은 교의들이 적실한지 여부를 확신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 단계 이후의 전망은 어떠할까에 대해서는 여기서 고려할 일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말 그대로 심원한 비경(秘境)일 테니까.
예류도(豫流道)는 분명히 참을성이 있어야 도달할 수 있고 또 겸허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하기만 한 목표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목표를 달성했는지 못했는지는 객관적으로 잴 수가 있다. 이때 자기를 기만할 수는 있어도 스승을 기만할 수는 절대 없다. 팔정도에 대한 통찰지6)를 참으로 얻게 되면, 올바른 교의를 착오없이 분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로소 생겨난다. 동시에 무분별(無分別)7)의 참뜻도 깨닫게 될 것이다. 불법에 대한 확신[信根], 힘찬 노력[精進根], 마음챙김[念根], 집중[定根], 지혜[慧根]의 다섯 기능[五根]도 이 단계에 와서는 그 반대되는 요소들에 의해 꺾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발달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다섯 가지 기능[五根]은 다섯 가지 힘[五力]으로 발전되어 있을 것이다.
오랜 옛날 동양의 논객들은 하필이면 ‘무분별’을 표방하면서 소승과 대승이라는 의사(擬似) 이분법을 만들어 냈었다. 다시 근대에 와서 이 소승이란 명칭을 얼토당토않게 상좌부에다 갖다 붙여버렸다.8) 이제 우리는 오래 전에 끝난 논란을 되뇌는 셈밖에 되지 않는 이 용어들을 그만 버릴 때가 된 것 같다.
상좌부·대승·소승
상좌부는 빠알리 경전들에 근거를 두는 불교의 한 형태로 스리랑카와 미얀마 그리고 태국에 널리 퍼져 있고, 런던에 있는 세 곳의 불교 사원도 모두 이 종파에 속해 있다. 상좌부 불교는 ‘기본불교’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기본불교란 말은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덧붙이거나 변형하기 이전 원형 그대로인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더 높은 형이상학적 상부구조를 구축하기 위한 ‘기초’ 토대쯤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다양한 대승불교의 제 학파들 중에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파가 몇몇 있다. 이제 이런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큰 수레 또는 경로’라는 뜻의 대승이라는 용어는 ‘보잘것없는 수레 또는 경로’를 뜻하는 소승이라는 말과 짝지어 만들어졌고 이 폄하 투의 용어가 암시하듯이 주로 대승측에서 상좌부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들을 만들어낸 초기 대승 신봉자들에게 상좌부란 존재자체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고대의 다른 부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설일체유부였던 것이며 이들의 견해는 대승 쪽보다는 상좌부 쪽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 여러 부파는 이미 역사에서 사라져버렸고, 어찌된 일인지 요즘 와서 동양의 상좌부 측에서 스스로 소승이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나서는 경우조차 볼 수 있다. 그런 판에 여기서 딱지를 놓고 입씨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만 무방하다면 일체 가치판단을 배제한 가운데 ‘좁은 길(Narrow Path)’과 ‘넓힌 길(Expanded Path)’이란 표현을 써볼까 한다.9)
우리가 상좌부를 ‘좁은 길’이라 하는 의도는 열반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실제적 길이 빠알리 경전에 제시되어 있다는 점, 그 목표를 성취시키겠다는 단 한가지 목적 아래 부처님께서 선포하신 바 원래의 독창적 교의가 갖는 본질적 특성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빠알리 경전 여기저기 후대에 전개된 교리에 연원한 문구들이 보이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빠알리 경에 빠진 중요한 내용이 다른 자료들에서 발견된 예는 아직 없다.
이는 다시 말해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빠알리경에 담겨있다는 것이 된다. 더 이상 멀리 딴 곳으로 눈을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게 되는 까닭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승불자들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논지는 물론 아니다. 또 빠알리 경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서 대승경전이 틀렸거나 쓸모 없다는 것도 아니다. 교리적 천명 또는 실수행법 규정의 형태를 띤 모든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방편이라는 것은 교파의 차이를 막론하고 불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우리가 바른 길을 걷도록 만들어주기만 한다면 어떤 방법도 정당한 것이다. 진리는 말이나 사변적 이론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대해 어떻게 말한다 해도 그것은 상대적으로만, 그리고 잠정적으로만 옳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대승불교의 교묘한 방편들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유용할 수도 있고 큰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
대충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불교는 ‘좁은 길’의 형태로서 인도의 남방과 동남방에, 그리고 ‘넓힌 길’의 형태로서 북방과 동북방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근대에 와서 불교가 서방에 처음 소개될 때에는 맨 처음에는 주로 스리랑카를 필두로 ‘좁은’ 형태의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상당한 기간이 지난 연후에야 ‘넓힌 길’의 여러 형태들이 수입되었는데, 주가 된 것은 티베트에서 들어온 탄트라승(금강승)이 ― 이 파의 가르침은 신지학에 의해 다소 희석되거나 재해석되었다 ― 다시 한참 지나서 일본으로부터 선(禪)의 형태로 소개되었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그 나름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수많은 종파 가운데 비교적 추종자가 많은 종파로는 이 셋을 꼽을 수 있겠다. 일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시 눈을 돌리자면, 일본 국내에서는 선종(禪宗)보다 ‘정토종(淨土宗)’의 신도가 훨씬 많은 형편이다. ‘신불교’의 여러 유파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불교의 원래 가르침과는 물론 ‘넓힌 길’과도 희미하게 연결될 뿐이어서 이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일본에도 티베트의 탄트라 불교와 대단히 유사한 진언종(眞言宗)이 있으나 서양에서 탄트라처럼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설마 진언종이 탄트라처럼 섹스 상징주의를 채택하지 않은 탓은 아니겠지.
교리 문제와는 별도로 일부 사람들이 ‘넓힌 길’을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로 꼽히는 것이 있다. 대승불교가 상좌부 불교보다 한층 다채롭고 또 정서적 만족을 더욱 직접적으로 줄 것처럼 보여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권에서 일부 근엄한 개신교 종파에 비해 로마 가톨릭이 어떤 종류의 호소력을 갖는 것과 유사하다. 상좌부 불교는 무미건조하고 교의적인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목표를 선명히 그려 보여주지도 않는다. 어느 작가는 상좌부 불교를 뾰족한 부분을 잘라버린 원뿔에 비유했다. 그것은 마치 산자락은 보이나 정상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산과 같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의 선(禪)은 기슭은 안보이는 채 꼭대기만 하늘 높이 선명하게 솟아오른 후지산처럼 보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올바른 마음상태에 들기만 하면 문득 그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니! 아니, 이미 그 위에 올라서 있는지도….10) 티베트 불교를 믿는 서양인들에게는 후지산보다 훨씬 높은 에베레스트 정상마저도 홀연히 안개 밖으로 그 성스러운 자태를 드러내 보여줄 테고, 어떤 신비로운 의식을 잘 치러 내기만 하면 경이적 방식으로 어느덧 그 정상에 옮겨지는 황홀한 경험도 코앞에 임박해 있을 테지…. 너무 빈정거린다 하겠지만, 실은 세 가지 불교를 놓고 선택에 고심하는 무명중생들이 그리고 있을 모습들을 단순화시켜 본 것이다.
이러한 범부들에게 상좌부라는 길은 갈데 없이 힘들고 고된 일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고 목표점 또한 너무나 불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다른 길들은 재미도 있고 쉽기도 할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결국, 겉보기와 내용이 다른 것은 ‘방편’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런 겉모습은 한 유명한 대승의 우화가 말해주듯 ‘교육용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아버지가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아주 매혹적인 장난감들을 바깥에서 보여주어 아이들을 유인해낸다는 우화 말이다.
이제 우리는 교리논쟁을 일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 옛날 대승경전에서 소승이라고 언급할 때 고자세로 폄하하는 어투를 쓰게 된 것도 원인이 있었다. 소승 즉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설일체유부 등 몇몇 부파들이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하리만큼 교리논쟁에만 열중하였고, 그러다 보니 사변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명상은 너무 적게 한 결과가 되어 마침내 메마른 교리의 사막에서 말라죽고 말았던 사실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대승불교에는 여러 갈래의 방대한 경전군이 있지만 세속적 의미에서의 역사적 전거성을 주장하는 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세속을 초월한 높은 차원의 천계(天啓)를 빌려 그 공백을 보완하고 있다. 일례로 용수보살이 용궁에 가서 화엄경을 얻어왔다는 얘기처럼. 소위 실체적 사실을 고집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얘기는 신앙심이 빚어낸 한낱 황당한 허구로밖에 안보일테지만 우리는 이 저술들이 어디까지나 영적 스승들의 소산이라는 점이 이런 방식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될 것이다. 설사 허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묘한 방편’이라는 뜻에서 일 뿐, 천박한 거짓이라는 뜻의 허구는 아닌 것이다. 대승경전이 주장하는 바는 ― 진부는 여하간에, 깊은 사려에서 나온 주장인 것만은 분명한데 ― 대승경전들은 소승경전보다도 진리의 더 심오한 측면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소승경전을 능가할 따름일 뿐 하열한 경전을 폐기시키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기독교 학자는 이러한 대승 경전 중 어느 한 권을 ‘고등불교의 신약성서(The New Testament of Higher Buddhism)’라고 부른 일이 있는데, 우리야 그런 단정을 용납하지 않지만, 그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승불교가 새로이 주창한 요소는 보살상(菩薩像)을 아라한상보다 더 윗전에 두려한다는 것, 그리고 이와 더불어 지혜와 자비를 대승의 ‘두 기둥’으로 선포한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거론하기 전에 우선 상좌부 불교의 법 체계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깨달음은 팔정도를 밟음으로써 얻게 되며, 이 팔정도는 지혜·도덕성·마음 닦음[명상]의 세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11) 처음 팔정도를 걷기 시작하려는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는 ‘세간적인 지혜’12)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지만, 출세간적 지혜[慧]라는 최종적 결실은 오로지 팔정도의 윤리적 부문[戒]과 명상의 부문[定]을 완성했을 때 비로소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목표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저 피안에 도달한 지혜’라 규정할 수 있으며,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prajñāpāramitā’, 한문 표현으로 ‘반야바라밀다(般若婆羅蜜多)’가 된다. 이 이름이 대승경전군 중의 한 부분인 반야부의 이름이 되고 있는 것은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이제 이 두 경우의 지혜를 동일한 것이라 성급하게 단정짓거나 혹은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캐내는 데 열중하는 것은 모두 사려깊은 일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런 경박한 짓일랑 지양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불자의 길』이란 잡지에 실린 글 중, 상좌부 입장에서 보살상에 대해 논한 것이 있었다. 이 글에서 논하기로는, 주로 『본생경(Jātaka)』에서 두드러지듯이 깨달음을 얻기 전의 고따마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보살 고따마는 부처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덕성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또 보살이란 용어의 원래 산스크리트어 표기는 보디사뜨와(bodhisattva, 깨달음-존재)가 아니라 보디삭타(bodhisakta, 깨달음을 향해 일념인 사람)이었다는 점도 제시하고 있다. 빠알리어에서도 이 두 단어의 유래를 밝혀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할수록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산스크리트어 보디사뜨와는 용어사용법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건 대승불자의 주장은 ‘자신을 위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상은 이기적이며, 중생 제도를 추구하는 보살이 아라한보다 더 높은 이상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이라는 말 자체부터가 정의상으로도 ‘자아가 없다’는 뜻이므로 그런 주장은 이치에 맞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런 견해가 팽배하였던 그 시대에는 자신이 깨달은 걸로 스스로 속고 있는 아라한 아닌 ‘아라한들’이 많았던 시대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서양에서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반야부 경전의 저자들은 보살이 되려는 이들에게, 그들이 중생을 모두 건지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있을지라도 사실은 건질 ‘중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13) 기회있을 때마다 지치지 않고 거듭 상기시켜주고 있다. 서양에서 그 동안 우리가 경험한 바 같아선, 홀로 조용히 지내는 편인 ‘사이비 아라한’들 쪽이 제멋대로 이상한 교리를 전도하러 설쳐대는 ‘사이비 보살’들보다는 덜 성가신 것 같다는 것이 아마 공정한 평이 될 것이다. 이들은 바깥활동에 바쁘다보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틈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데 정말 중요한 문제는 바깥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비 아라한이든 사이비 보살이든 문제는 ‘아만(我慢)’이다.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서양 사람들이 불교 경전 몇 구절을, 그것도 대개는 남에게서 얻어듣고는 그대로 자기 견해로 삼아버린다. 그리고는 공부를 좀 하다가 어떤 ‘경험’이라도 하게 되면 이를 엉뚱하게 제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자신이 ‘깨달았다’거나 아니면 깨달은 거나 진배없다는 결론으로 비약해버린다. 그때 그들이 아라한을 자처하느냐 보살을 자처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관심을 돌려 오늘날 서양에 과연 참된 아라한 또는 보살이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설령 있다손 치자. 그렇더라도 이런 사이비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뉘 있어 그들을 알아주겠는가.
덧붙여 한마디 언급해두고 넘어갈 것은, 선종은 엄밀히 따져서도 대승교파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데도 보살에 대해서는 그다지 탐탁해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들은 자력구제를 지향하며 결코 보살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육조(六祖) 혜능대사도 보살서원을 세우되 바로 우리 자신의 ‘이 마음속 일체중생을 해탈시키기’를 서원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자, 이제 ‘기본불교’로 되돌아가자. 팔정도의 세번째 부문은 올바른 노력·올바른 마음챙김·올바른 집중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도 서양의 일부 선사인 체 하는 사람들 중에는 노력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린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단 일주일간이라도 선원에 들어가서 애써 정진해보도록 권하는 길밖에 없다.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마음챙김을 해탈로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라 선언하셨다. 그것은 위빠싸나, 즉 통찰지혜의 길이다. ‘마음챙김과 분명한 알아차림[正念 正知]’에 의하지 않고 다른 무슨 방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올바른 집중[正定]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는데 그 중에는 사무량심(四無量心, 四梵住處)이 있다. 자애[慈]·연민[悲]·더불어 기뻐함[喜]·평온[捨]이 그것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마지막 두 단계, 즉 마음챙김[正念]과 집중[正定]을 닦음으로써 우리는 ‘대승의 두 기둥’인 지혜와 자비를 함양할 수 있게 된다. 처음부터 아라한이 되겠다 보살이 되겠다는 식으로 미리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어떤 보살이 마음챙김을 너무 많이 닦다가 실수로 아라한이 되어 버렸다면? 허허 이를 어쩐다…?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The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 O. 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 잎·서른 일곱
왜 불교인가
2001년 4월 25일 1판1쇄 인쇄
2001년 4월 30일 1판1쇄 발행
지은이 : M.O'C. 월슈
옮긴이 : 홍종욱·서형석
펴낸이 : 한기호
펴낸곳 : 사단법인 고요한소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 (우: 110-300)
전화 739-6328 / 725-3408 ·전송 723-9804
E-mail : calmvs@unitel.co.kr
인터넷 홈페이지 : http://www.calmvoice.org
부산지부 051)513-6650·대구지부 053)425-4035
출판등록 제1-879호 1989.2.18
값 500 원
ISBN 89-85186-60-4 02220
주 해
1) 필자는 여기서 단어놀이를 하고 있다. The din is appalling as the syren strains of the Admen competed with the manic screams of the Madmen. 이 문장에서 Admen(광고인)과 Madmen(광인)을 비견하고 syren strains로 뭇 뱃사람들을 매혹적인 노래 소리로 유인하여 난파하게 만들던 요정(syren) ― 율리시즈에 나오는 ― 에 비유함으로써 현대인들의 위기를 은유하고 있다. Adman과 끝 글자가 다른 Admah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신의 저주를 받아 파멸한 도시 이름이다. 본문으로
2) 근본불교·원시불교·초기불교 등 여러 용어가 쓰이고 있으나 이들이 주로 시대구분적 용어임에 반해 여기 기본불교는 내용·기능면의 특성을 강조한 용어임. 그러나 이 용어들이 아직 정립되지 않아서 때로는 남북 양전의 아함이 담고 있는 내용을 근본불교라고 하기도 함. 본문으로
3) 설일체유부(sarvāstivadin) : 완전한 이름은 성근본설일체유부(聖根本說一切有部). 보통 유부(有部)라 부르며 설인부(說因部)라고도 부름. 소위 소승 20부파의 하나. 불기 300년대 초기 경에 상좌부에서 갈라져 나옴. 창시자는 카챠야니푸트라(kātyāyaniputra).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를 주장함. 대승에서는 이 파가 아공법유(我空法有)를 말하는 데 비해 자기들은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설함으로 더 수승하다고 함. 이 파의 특색은 경·율·론 삼장 중 논장을 가장 중히 여기는 점이며 독자적으로 칠론(七論)을 갖추었는데, 그 중 핵심격인 아비담마 발지론(發智論)을 해석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은 유부 교의의 집대성판임. 이후 이를 간략히 강목화하는 저작들이 꾸준히 나왔는데, 우리 나라에 많이 알려진 세친보살의 구사론도 그 중의 하나임. 본문으로
4) 예류도는 출세간(出世間)을 구성하는 네 가지 도(예류도·일래도·불환도·아라한도)의 첫번째. 수행자는 이 단계에 듦으로써 비로소 성자(聖者)의 대열에 즉 흐름에 들게 된다. 보리수잎·하나 『영원한 올챙이』13~15쪽 참조. 본문으로
5) 악도: 나쁜 업을 지었기에 태어나게 되는 고뇌와 고통에 찬 세계. 악취(惡趣)라고도 함. 보통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를 말하는데 여기에 아수라를 더하여 사악도라 하기도 함. 본문으로
6) 팔정도에 대한 통찰지: 성도지(聖道智)를 말함. 남방 상좌부 전통에 따르면 이 지혜는 출세간도에 도달한 수행자들이 얻는 지견청정(知見淸淨)의 단계에 해당한다. 『중부』 제24 「전차경(轉車經:Rathavinīta Sutta)」참조. 본문으로
7) 무분별(無分別, nirvikalpa): 개념작용·사고작용에 의한 주관·객관의 상대적 견해를 떠나 무분별심·무분별지에 의해 진리를 직관하는 것. 본문으로
8)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기까지 대승·소승 간에 벌어졌던 각축은 필자의 지적대로 대승과 설일체유부 간의 일이었다. 북방 대승과 남방 상좌부가 서로 만나게 된 것은 근세에 와서의 일이다. 본문으로
9) ‘좁은’ 길(Narrow Way), ‘좁은’ 문 등은 성경에서 진리·정의의 동의어와 같으므로, 그런 가치관을 배제한다는 뜻. 본문으로
10) 본래열반(本來涅槃)사상을 지칭하고 있음. 중생이 본초부터 열반에 들어가 있다는 것. 본각사상과 통함. 본문으로
11) 보리수잎·하나 『영원한 올챙이』, 20~22쪽 참조. 본문으로
12) 세간적 지혜 : 사량분별에 의한 지혜. 인식[想]이 작용·주도하는 지혜. 본문으로
13) 능소(能所, 주와 객)가 사라진 깨달음의 경계에서 보면 제도할 나도 제도될 중생도 없고 다만 모두 이름에 불과할 뿐이라는 대승의 일반사상. 따라서 중생제도를 서원하되 중생제도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의미. 본문으로
보리수3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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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각기 구분되는 불교의 특성을 융합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