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 목포기행
1월 말일 토요일에 남도의 봄을 맞으러 한반도의 땅 끝 완도를 찾아 새벽4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갖추고 아내와 함께 출발을 했습니다. 집에서 매일 병원 문을 밟으며 약 치례만 하다보면 정말 정신이 황폐해질 것만 같아서 억지로라도 어딘가 떠나서 새롭게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봄의 생기를 찾아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에 너무 지쳐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몇 지인들과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6시간 만에 완도에 도착했습니다. 완도군은 전라남도 서남쪽 끝에 있는 크고 작은 유·무인도 201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섬이 완도이며 연륙교가 새롭게 준공되어 육지처럼 왕래할 수 있어서 서해안의 교통 요충지가 되고 있습니다.
완도는 신라시대 장보고, 조선시대 이순신장군, 윤선도등 역사적 인물들의 유적뿐 아니라 천혜의 경승과 풍광이 섬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국내관광자원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많은 홍보를 하여 국내 관광을 유치한다면 외화소비를 줄이고 지방재정을 확충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목포 최남용 감독 (목포대교수)님의 안내로 목포와드 회원들의 낙시 우정모임에 참여 하였습니다. 고기는 잡지 못했지만 그분들이 준비한 비닐 주먹밥을 맛있게 먹은 뒤에 오후에는 그곳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목포앞바다 갓바위
첫 번째 찾은 곳이 명사십리(鳴沙十里)였습니다. 이 명사십리는 이북의 원산시 갈마반도(葛麻半島)에 있는 해당화 피는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아닙니다. 완도의 명사십리는 모래가 파도에 씻겨서 우는 모래소리가 십리밖에 까지 들린다하여 명사십리 (鳴沙十里)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습니다. 십리나 될 듯한 길고 풍부한 모래밭은 너무 훌륭한 해수욕장이었습니다. 갈매기만 나르는 겨울바다의 정취는 한가하고 적막했지만 간간히 들리는 나들이객들이 삼동의 긴 잠을 깨우고 깨끗한 모래펄에 한가로이 걸어간 여객들의 발자국만을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해상 왕 장보고 대사가 828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중국과 신라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펼쳤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전진기지 청해진 옛터에 복원된 장보고 기념관을 관람했습니다. 기념관은 해변에서 3~400m 정도 떨어진 조그마한 섬이었습니다. 우리가 갔을 무렵은 오후4시경 썰물로 인해서 바닷물이 비켜나가고 바닥을 들어내어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정도리 구계등이란 해변을 들렸는데 마땅히 모래가 쌓여 있어야 할 해변에 모래는 없고 축구공만한 크기의 큰 호박돌들이 그 넓은 해변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돌들은 파도가 밀어내어 만들어 졌다고 했는데 마치 아홉 계단처럼 층층히 쌓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는 해풍을 막기 위해 조성된 아름다운 각종 수목이 빽빽하게 심어져 마치 통일신라시대 황실의 녹원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보길도에는 조선시대 문장가 윤선도의 별서정원이 있고, 봄의 왈츠의 촬영지인 청산도는 ‘겨울연가‘ ’여름향기‘ 등 드라마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촬영한 유럽풍 세트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곳은 구경하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시간을 여유 있게 할애하여 꼭 다시 찾아와야 하겠다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저녁에는 숲속에 둘러싸인 목포대학 기숙사에서 주위의 울창한 소나무 숲의 청정공기를 마시며 하룻밤을 추억을 만들었고 일요일 목포와드 금식간증모임에 참여 했으며 그곳 회원들로부터 순수하고 영적인분위기와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먼 곳에서 밤 세워 올라와 서울 성전에서 월례로 가장 거룩한 신앙을 행사하고 돌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가깝게 사는 우리들의 신앙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신앙의 열풍은 먼 남쪽에서 불어와 세속에 허우적대는 수도권 성도들을 부추겨 주는 듯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