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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나오는 빠알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의 문제점
Pahalawattage Don Premasiri
번역: 이은주
3개의 주요 모음집으로 구성된 빠알리 경전은 통틀어 삼장(Tipiṭaka)으로 알려져 있고 테라와다 전통은 이 빠알리 경전을 붓다 가르침의 원형을 나타내는 경전집으로 간주한다. 당시 고대 인도에서 기록 문헌이라는 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이 아직 없었던 시기에 불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는 기록물을 통해 붓다의 저작이라 할 만한 경전에 손을 댈 입장이 아니고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특정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붓다를 열심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붓다의 말씀은 무엇이었나?’와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은 아주 중요하다. 불교 문헌의 상당량은 붓다가 불교의 탄생지인 인도 안팎의 스승으로 나타난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언어학적 기원에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고대인도 언어로 편집되었다. 비판적인 문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특정한 불교 전통을 열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일부 경전을 붓다 자신이 한 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러한 경전 편집은 붓다 이후 몇 세기가 지나서 만들어졌다. 불교의 역사 초기에 체계화된 서로 다른 경전본들이 붓다 이후 몇 세기가 지난 뒤 다른 아시아 언어로 번역되었다.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 모두 해석이나 주석서의 영향을 받아 많은 번역서가 들어왔다. 이런 복잡한 체계의 문헌은 종교적 경전의 학술적 조사에서 문학 평론과 종교 역사에 참여하는 현대 학자들에게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탐구적인 불교 수행자가 알고 싶은 것은 붓다가 한 정확한 실제의 말이다.
사람들이 의사소통의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사용하는 언어는 우선 특별한 문화적인 맥락에서 발달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언어의 인지적 사용에서 언어는 사용자가 참이나 거짓으로 확인하려는 현실을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고 사용자들 간에 확립된 개념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개념 구조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사용자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완전히 불가능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렵다. 인지적인 맥락과는 별개로 언어 사용과 관련된 감정적 요소가 있다. 그러한 감정적인 맥락은 그 언어 사용자의 특정한 문화적 배경과도 관련 있다. 어느 언어에서든 개념은 정해진 문화적인 내용에 크게 영향을 받고, 실재를 보는 방식에 의해 특징 지워진 삶의 특정한 형태 안에서 발달한다.
위의 내용에 덧붙여 인류 역사에서 혁명적인 사상가들은 기존 용어가 실재의 성질에 대한 그들의 통찰을 표현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익숙한 언어의 기존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과정을 통하거나 새 용어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통해 종종 기존의 개념 구조를 바꾸거나 고치려고 시도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불교 전통에서 붓다는 위에 나온 두 가지 일에 모두 참여한 사상가로 볼 수 있다. 불교 같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전통에 속하는 고대 경전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시도에서 이런 고려를 우선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초기 인도 언어의 변형인 빠알리와 산스크리트의 혼합으로 붓다의 가르침이 보존된 것은 문장의 뜻에 관해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들 언어로 보존된 초기 경전 문헌이 몇 가지 발음 차이를 빼고는 개념 자체에 관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어군에 속하는 언어나 아주 다른 지역적, 문화적 맥락에서 진화된 언어로 번역되었을 때 원래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에 관련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빠알리 언어와 현대 영어에 똑같이 익숙한 사람이 빠알리에서 영어로 번역하려 할 때 그런 문제가 일어난다. 고대 불교 경전을 티벳어, 중국어, 한국어 같은 언어로 번역할 때 이럴 가능성이 높다.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해 자국의 언어매체를 사용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테라와다 전통은 이 문제를 서기 5세기에 제시했다. 붓다 당시에 일어난 문제처럼 붓다고사는 그 문제를 다뤘고 그 당시 붓다는 스스로 권고를 내렸다. 율장(Vinayapiṭaka)에 따르면 형제였던 두 승려가 붓다에게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불교 승단에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성, 서로 다른 씨족, 서로 다른 인종, 서로 다른 신분(nānānāmā nānāgottā nānājaccā nānākulā pabbajitā)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방언(sakāya niruttiyā buddhavacanaṃ dūsenti)을 써서 붓다의 말씀을 망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그들은 붓다의 말씀을 어떤 고정된 운율의 언어(chandaso āropema)로 옮기겠다고 붓다에게 제시했다. 경전은 붓다의 말씀을 candas로 옮기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하지 않는다. 이에 관한 우리의 정보는 테라와다 주석가 붓다고사에 의한 구절 해석에 크게 의존한다. 붓다고사에 따르면 이 맥락에서 candas는 산스크리트 언어를 뜻한다(vedaṃ viya sakkatabhāsāya vācanāmaggaṃ). 그 문제에 대한 붓다의 반응은 붓다의 말씀을 candas로 옮겨서는 안 되고 그 당시 뜻했던 사까 니루띠 (sakā nirutti)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한 붓다의 반응은 붓다가 이 경우에 그의 말은 그의(즉, 붓다 자신의) 언어로 배워야만 한다고 해석되었다. 붓다고사는 이 경우 붓다 자신의 언어를 붓다가 대부분의 설법 활동을 한 지역에서 말했던 언어인 마가디(Māgadhī)로 간주했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은 나눠졌다.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와 올덴베르그(Oldenberg) 같은 일부 현대 학자들은 붓다의 반응을 이렇게 해석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붓다의 말을 자신의 언어로 배우기를 허락한다.’ 그러나 가이거(Geiger)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구절을 반복해서 검토한 결과 붓다고사가 한 설명을 고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꽤 강조하여 말한다.
이 주장의 진짜 의미는 인도 정신과 일치하여, 붓다의 말씀은 스승이 설법한 이외의 다른 형태는 없다. 따라서 붓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이 형태와 내용 둘 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을 걱정했다. 그가 죽은 뒤에 제자들의 걱정은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외부 형태는 마가디(Māgadhī)였지만 그 전통은 빠알리이다.
가이거의 해석이 맞다면 마가디(Māgadhī)가 붓다 자신의 언어라는 붓다고사의 설명에 의존할 수 있고 붓다 스스로 그의 말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초기에 스리랑카에 단단히 뿌리내린 테라와다는 이런 권고를 어기려고 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로(B. C. Law)는 이 권고에 관한 붓다고사와 가이거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맥락을 해석하면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까니루띠 (sakānirutti)는 상급 성직의 한 구성원이 그 자신의 관용구, 말씨, 언어, 표현의 수단으로 주장한 표현 방식일 뿐이며 그 언어를 비구는 잘 알고, 그것을 사람이 잘 사용할 수 있고 붓다 자신의 표현 방식은 아니지만 다양한 이름, 문화, 인종, 가족들을 대표하는 비구들에 의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모국어나 방언 또한 사까니루띠(sakānirutti)의 해석으로 될 수 있지만 붓다의 합리주의 정신뿐만 아니라 맥락과 일치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것을 어떤 특정한 언어나 어떤 특정한 방언으로 제한하는 것은 붓다의 의도가 아니었고 그것은 그의 생각과 가르침의 일반적인 논조와 일치한다. 우리는 죽은 언어나 고어, 쓰이지 않는 언어가 된 언어를 피하고, 자기가 잘 아는 표현 수단을 이용하라는 뜻으로 붓다의 권고를 해석할 수 있다.
로(B. C. Law)는 붓다가 가르침의 매체로 사용한 유일한 방언이 마가디(Māgadhī)였다고 제안한 붓다고사의 해석을 의심한다. 마가다는 붓다가 활동한 중심지였지만 붓다는 다른 지역에서 가르쳤고 그 지역의 특정한 방언을 사용하여 방언의 차이가 알려졌다.
로(B. C. Law)는 이런 맥락에서 빠알리 용어 사용의 기원과 그것이 어떻게 특정 언어와 관련하게 되었는지 더 깊이 관찰한다. 그에 따르면 빠알리바사(Pālibhāsā) 또는 빠알리 언어는 상대적으로 현대적인 조어이다. 서기 6세기나 7세기까지도 어떤 언어에 대한 표기법으로 통용되지 못했다. 스리랑카에서 마하왐사(Mahāvaṃsa)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빠알리라는 용어는 주석서와는 구별되어 원래의 불교 경전, 경전의 본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청정도론(Visuddhimagga)과 인시설론-주석서(Puggalapaññatti-Aṭṭhakathā)로부터 증거를 제시한다. 그는 또한 주석서에서 빠알리라는 용어가 Buddhavacana, Tripitaka, tanti, pariyatti에 대한 유의어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주석가들은 언어적 의미와 관련없이 빠알리라는 용어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시할라바사(Sīhalabhāsa)나 싱할리스(Sinhalese) 언어로부터 빠알리 언어나 경전의 본문을 구분하기 위해 딴띠바사(tantibhāsā)같은 표현을 하는데 제약을 느꼈다.’ 빠알리 자체를 마가다(Magadha)의 언어인 마가디니루띠(Māgadhīnirutti)로 보는 것은 주석가들에 의해서 행해졌고 붓다 자신이 사용한 언어로서 그 언어에 특별한 가치를 붙였고 모든 인류의 원어라는 환상적인 주장까지 만들었다.
붓다고사의 해석이 사실보다는 신화에 가깝다는 테라와다의 논평에 대한 로의 비판은 그 문제를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관심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사까야니루띠(sakāya nirutti)에 대한 붓다고사의 해석은 율장(Vinayapiṭaka)에 나오는 관련된 구절의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처럼 사까야니루띠(sakāya niruttiyā)의 최초 사용은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한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의 특정한 방언을 뚜렷이 언급한다. 사까야니루띠(sakāyaniruttiyā)라는 표현의 두 번째 등장은 따라서 붓다 자신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다. 로는 테라와다 전통에서 사용된 빠알리는 그 특정한 불교 전통에서 표준화된 ‘인도식 표현수단’으로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에서 편집된 경전, 주석서, 다른 보조 작품에서 사용되었다는 입장을 정당화한다. 다른 불교 종파가 이런 특정한 표현 수단을 고수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테라와다는 dhamma와 vinaya로 이뤄진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결집에서 나타난 태도에서부터 보수적인 입장을 지녔다. 붓다가 율장(Vinaya)의 사소한 계율(khuddānukhuddakāni sikkhāpadāni) 을 폐지하라고 허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집에 참여했던 상좌부는 원래 규칙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언어 매체에 대한 테라와다의 태도는 비슷한 보수주의를 나타낸다. 이런 맥락에서 로는 디빠왐사(Dīpavaṃsa) 같은 스리랑카 연대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디빠왐사(Dīpavaṃsa)는 Buddhavacana의 빠알리 원전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난 초기 분파인 대중부 (Mahāsāṅghika) 종파에 의해 가르침이 왜곡되었다고 비난조로 반대하고 있다.
조심스럽고,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을 통해서 테라와다 경전은 붓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상당량의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은 또한 현재 형태의 빠알리 경전조차도 몇 단계의 발전을 거친 결과임을 확신하게 한다. 문헌으로 현존하는 모든 빠알리 경전을 붓다 시대에 속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빠알리 버전은 붓다와 그의 초기 제자들의 말씀을 보존하려는 가장 초기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적어도 제1차 결집 이후 1세기가 지나서 다른 방언 형태로 가르침의 초기 형태를 보존하였다. 불교 경전은 나중에 중국어와 티벳어로 번역되었고 이 언어는 오랜 인도 문헌이 편집되었을 때 사용했던 인도-아리아 어족과는 아주 달랐다. 이들 번역에서 차이는 방언의 차이가 아니라 다양한 언어적 차이였다.
초기 테라와다는 경전을 다른 언어, 심지어 경전이 보존될 당시의 원어와 아주 가까웠던 싱할라(Sinhala)로 번역할 때조차 아주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래의 언어는 테라와다 불교의 주석 시기에 빨리바사(Pālibhāsā) 또는 딴띠바사(Tantibhāsā)로 알려졌다. 싱할라(Sinhala)로 된 빠알리 경전의 초기 번역은 없지만 싱할라(Sinhala)로 된 주석은 불교가 스리랑카로 소개된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에서 테라와다의 태도에 관한 이러한 시각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테라와다는 빠알리를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이상적인 언어로 사용하기를 선호했고 나중에 편집된 빠알리 문헌에 앞서 싱할라(Sinhala)로 존재했던 주석서에 관심을 덜 기울인 것은 이 전통에서 빠알리를 크게 존경했음을 보여준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매체로 배울 가능성을 열어두기에 충분할 만큼 유연하고 현실적이다라는 로의 주장이 위에서 증명되었다. 역사적으로 특징적인 테라와다의 보수적 접근은 붓다의 권고를 자신의 언어로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금지한다고 해석하게 만들었다. 빠알리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언어 철학을 살펴보면 그는 사람들이 실재에 관한 이해를 소통하는데 있어 언어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언어도 궁극적 실재를 소통하는 기능으로서 절대적 위치를 가질 수 없음을 잘 알았다. 특정한 언어가 그렇게 절대적인 위치를 가진다는 관점은 붓다가 명확히 거부했던 베다 언어 이론 때문이다. 붓다는 언어를 생각을 나누기 위한 도구로 간주했고 언어의 문법은 실재의 문법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주어를 서술하는 문장을 이루는 명사, 일반 용어, 문법 구조는 언어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실재와 성질의 영역에서 명사, 존재 형태, 일반 용어가 칭하는 고정된 실체는 없고 여러 가지로 단언할 수 있는 실체적인 핵심과 관련한 영원한 주체는 없다. 따라서 붓다는 그 사람이 언어 사용에 독단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한 언어는 생각을 효율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언어라도 잘못 사용되었을 때 언어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고 반면에 어떤 언어라도 잘 사용되었을 때 언어는 그 목적을 다할 수 있다.
로는 담마를 배우기 위한 빠알리 외의 언어의 사용 문제에 관련하여 중아함(Majjhimanikāya)의 구루수무쟁경(Araņavibhaṅga Sutta)에 나오는 구절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붓다의 율장(Vinaya) 권고에 대한 붓다고사의 해석에 도전하는 좋은 근거로 그 경전의 경우를 사용한다. 로에 따르면 붓다는 이 구절에서 언어 사용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의견으로는 여기서 더 중요하게 언급된 것은 붓다는 실재를 소통하는 도구로서 언어의 참된 기능을 무시하고 특정한 언어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다른 언어로 담마를 배우는데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붓다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것에 장애가 될 수 있는 두 가지 언어 사용이 있다고 했다. 지역적인 사용(janapadaniruttiṃ abhiniveseyya)에 강하게 집착하고 언어 형태로 전달된 개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 특정한 사용법만이 바른 것이라고 주장하면 언어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관습적인 사용(sāmaññam atidhāveyya)에 의해 전달된 의미의 적절한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면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붓다는 실제 세상의 개체에 해당하는 언어 개체를 고려할 때 독단적인 경향을 피한다면 어떤 지역적 언어도 참된 명제의 소통을 위해서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파하기 위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데 붓다가 내린 확실한 제한이 없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를 발견했다.
위의 토론에서 제기된 문제는 붓다 스스로 붓다의 가르침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데 반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빠알리로 직접 배우거나 그의 가르침의 참된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언어로 배우는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빠알리로부터 번역하는 것에 관련한 특정한 문제를 고려하기 전에 일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빠알리 경전을 빠알리와 언어적으로 아주 다른 언어로 번역하려는 사람에게 우선 필수적인 요건은 그 사람은 빠알리 언어에 아주 능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필수적인 요건은 빠알리 경전으로부터 번역하려는 도착 언어에 똑같이 능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번역가는 한편으로는 빠알리로 전달되는 개념을 성공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똑같이 대등한 개념을 전달할 다른 언어 매체에서 그에 해당하는 사용법에 익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만족되었을 때 번역과정에서 의미 왜곡을 최대한 피할 수 있다. 자야틸레케(K.N. Jayatilleke)는 그의 논문 “Some Problems of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에서 고대 불교 경전의 번역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조사했다. 그는 번역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번역가가 ‘좋은’ 번역을 하는 목적은 문구를 해석하는데 모든 문법 규칙 (형태학과 문장론)에 주의를 기울여서 원래 생각을 이해하고 번역이 된 언어 매체를 통해 제대로 전달이 됐다면 그 목적을 다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는 이 맥락에서 번역가가 원어로 구성된 문장을 도착 언어로 만족스럽게 번역하기 위해서 원어와 도착 언어에 관련한 대부분의 기본적인 언어 요소에 능숙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자야틸레케는 그렇게 능숙한 사람들이 한 번역조차도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일부 비평가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야틸레케가 지적한 그런 비평을 위한 첫 번째 근거는 “어떤 번역도 원래의 ‘정신’을 전달할 수 없는데 그 말은 원문의 순서, 음절의 배열, 문장과 생각에 반영된 관련된 문구의 풍부함을 몇 가지 병렬을 제외하고는 어떤 번역으로도 나타낼 수 없고 이러한 중요한 특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비판은 두 언어 간의 역사적인 거리에 관련되는데 “하나의 개념은 다른 개념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다. 따라서 서로 가장 가까운 등가어임에도 불구하고 원어의 독자에 비교할 때 번역어 독자는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가진다.” 세 번째 가능한 비판은 “거기에 표현된 생각과 사고방식은 대부분 우리의 것과 달라서 번역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그 상징에 대한 의미 부여가 애매한 가치에 대한 일련의 귀납적인 논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예비 평가를 한 후에 자야틸레케는 두 번째 비판을 검토한다. 그는 이 비판이 극단적인 관점을 나타낸다고 말하며 좀 더 온건한 관점을 제시한다. “언어가 달라도 사람의 생각을 소통하는 수준은 아주 커서 배경의 차이는 대부분 무시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언어의 다른 측면을 말한다. “사실 문제를 말하는데 사용되는 언어의 과학적 사용은 경험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고 ‘언어의 감정적 사용’이 아니다.” 이런 관찰은 언어 철학에서 일어난 최근 발전을 인정한데서 일어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번역의 맥락에서 고려해야 할 일반적인 사실이다. 언어 철학에 관한 토론에서 언어의 유일한 기능은 사실 정보를 전달하는데 제한되어 있지 않다. 언어는 분명히 밝히고, 감정을 일으키고, 규정하고, 명령하고, 평가하고, 외치는 등의 다른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사실을 진술하는 언어의 순수한 기능은 인지적으로 유용한 사용으로 간주되는 반면 감정적으로 유용한 언어의 사용도 있을 수 있다.
빠알리 경전 문헌에서 불교의 필수 교리를 표현하기 위해 시적인 구성이 사용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언어의 특징은 그러한 경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사용된 구문은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정신적인 감정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숫타니파타(Suttanipāta)의 타니야경(Dhaniya Sutta)은 위에서 말한 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 사용될 수 있다. 타니야경(Dhaniya Sutta)은 Mahī 강둑에 사는 소치기 타니야(Dhaniyo gopālo)와 붓다의 만남을 이야기하는데 소치기는 그가 가진 물질적 재산에 대한 자신감과 안도감을 표현하며 붓다는 마음을 제어해서 얻은 자유로부터 나온 안도감을 표현한다.
‘음식을 요리했고 우유를 짰고 나는’ (이렇게 소치기 타니야는 말했다) ‘나를 충실하게 따르는 자와 함께 마히 (Mahī) 강둑에 살면서 내 오두막은 지붕이 덮였고, 불은 피워졌다 - 구름아 원한다면 비를 내려라.’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고 고집스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는’ (이렇게 세존은 말했다) ‘마히 (Mahī) 강둑에서 하룻밤을 산다. 탁 트인 곳이 내 오두막이고 내 불은 꺼졌다 - 구름아 원한다면 비를 내려라.’
영어 번역은 빠알리 구절의 인지적 의미를 꽤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감정적 경험을 향상시키기 위해 원래 구절에서 선택적으로 사용된 시적인 빠알리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면 구절의 인지적 의미를 순수하게 표현한 것은 부족함을 보여준다. 그에 해당하는 빠알리 구절은 아래에 나오는데 그런 상황에서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는 아주 어렵거나 때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Pakkodano duddhakhīro ham asmi (iti Dhaniyo gopo)
anutīre Mahiyā samānavāso
channā kuṭi āhito gini
atha ce patthayasi pavassa deva
Akkodhano vigatakhilo'ham asmi (iti Bhagavā)
anutīre mahiy'ekarattivāso
vivaṭā kuṭi nibbuto gini
atha ce patthyasi pavassa deva
빠알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니야(pakkodano duddhakhīro)의 물질적 성취와 붓다의 정신적 성취(akkodhano vigatakhilo)의 대조되는 입장을 드러내는 언어의 감정적 효과를 쉽게 영어 번역으로 전달할 수 없음을 여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야틸레케(Jayatilleke)는 또한 교리에 직접 관련된 맥락으로부터 그것을 설명하는 예를 끌어오는데 초점을 두었다. 경(Sutta)에서 연기법을 소개할 때 명색멸(名色滅, nāmarūpanirodho)는 열반(Nirvana)를 위한 별칭으로 사용되었고 자야틸레케에 따르면 빠알리 독자에게 승인하는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영어 번역 ‘심리적-물리적 개성의 소멸’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야틸레케가 지적했듯이 번역은 한 언어로 즐기고 표현하는 명제를 다른 언어로 즐기고 표현하는 것에 관련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도록 의도된 질문, 명령, 단어의 조합을 번역하기 위해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을 번역하는데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 경우 번역 과정은 원문이 의도한 대로 각각 적절한 언어적, 신체적,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도록 그에 해당하는 일련의 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번역가가 작업하는 단위는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이다. 여기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야틸레케는 문장의 각 단어를 이해하는 것은 필요조건이지만 문장의 이해를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특정한 언어에서 사용된 단어에 대한 모든 개별적인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몇 가지 경험적 상황에서, 말을 구성하는 일련의 소리와 표시가 적절하게 사용되거나 사용되지 않을 수 있고 (일부 언어에서) 형태학이나 형태의 변화는 변화와 활용을 한다. 그 문법과 위치, 다른 단어와의 관계는 모두 문장을 이루고 그 의미와 관련한 어원학이나 구조적인 역사를 이룬다.” 위에서 말한 문장의 각 단어에 대해 모든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어떤 단어가 조합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자야틸레케(Jayatilleke)는 ‘cakkaṃ vatteti’에서 각 단어의 뜻은 알지만 ‘rājā cakkaṃ vatteti’라는 표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예를 든다. 이것은 특정한 언어에서 그 말이 사용된 역사에서 얻어진 이 표현의 관용적 의미 때문인데 ‘바퀴를 굴린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다’ 또는 ‘권위를 실행하다’를 뜻한다.
자야틸레케는 한 문장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르게 번역할 때 고려해야 할 요구 조건이 더 있다고 지적한다. 이 경우 그는 natthi mātā natthi pitā (중아함경 Majjhimanikāya Vol. I, p. 515)의 예를 드는데, 여기서 우리는 문장의 단어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만 문장이 표현한 명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명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장이 사용된 교리적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불교 교리의 맥락에 따르면 그것은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부정한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원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단어 대 단어를 대체해서 단어를 조합하는 과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과정으로 단어의 조합을 만들면 그 조합이 문법에는 맞을지라도 번역어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상한 사고방식으로 이해될 것이다. 대신 병렬 명제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언어로 생각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은 때로 근사치만 추구하는 우리에게 엄격하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번역의 문제는 번역의 단위로서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에 관련해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개개 단어의 번역에 관해서도 일어난다. 개개 단어의 번역에 관한 문제는 원어에서 빠알리와 가깝게 관련된 언어로 번역할 때, 즉 빠알리를 산스크리트나 싱할라(Sinhala)로 번역할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경우는 단순히 철학적인 등가어를 발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원어에서 뜻하는 단어가 무엇이지 알아야 하고 같은 뜻을 가지는 다른 언어의 병렬어를 찾아야 한다. 자야틸레케가 지적했듯이 “빠알리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단어가 사용된 문장을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단어가 사용될 때와 사용되지 않을 때의 경험적 상황을 가리키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빠알리를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같은 상황에서 사용된 병렬어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가 여기서 관찰한 것은 빠알리가 속한 언어군과 거리가 먼 언어로 번역할 때 적용된다. 여기서 어려움은 “그 언어의 역사에서 경험적 상황이나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면 다르게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최선의 대안은 번역에서 빠알리를 그대로 둬서 다른 언어의 사용자가 시간이 흐른 뒤 그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주요 용어인 여래(Tathāgata), 법(Dhamma), 열반(Nibbāna), 업(Kamma)에 적용된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어려움은 빠알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시도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야틸레케는 빠알리의 전형적인 예로 ‘행(行, saṅkhārā)’를 든다. saṅkhārā를 번역하는 어려움은 빠알리성전협회 사전을 편집한 사람들 같은 불교 연구에서 많은 권위자들과 리스 데이비스 부인(Mrs. Rhys Davids) 같은 지명도가 높은 저명한 불교 학자조차도 인정했다. 대부분의 빠알리와 산스크리트 단어들은 어근, 접두사, 접미사로 구성되고 그러한 단어를 어원적 구성요소로 분석하는 능력을 얻는 것이 이들 언어를 배우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saṅkhārā를 접두사와 어근 saṃ (접두사) + kṛ (어근)으로 쪼개서 어원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용어의 맥락적 사용에 익숙하지 않으면 그러한 분석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전의 빠알리 언어에서 그 용어가 잘 알려진, 일반적으로 쓰인 용례에 주의를 두면 이런 면에서 도움이 된다. 그 용어는 중아함경(Majjhimanikāya)의 아비달마집이문족론(Kukkuravatika Sutta) (Vol. I, p. 389-391)에서 kāya- (몸), vacī-(말), mano- (마음)와 함께 결합하여 kāyasaṅkhārāṃ, vacīsaṅkhārāṃ, manosaṅkhārāṃ로 사용된다. 이와 함께, 그 단어의 동사 형태가 접두사 abhi-를 덧붙여 abhisaṅkhāroti로 사용된다. 이 Sutta에서 그러한 몸의, 말의, 마음의 saṅkhārā는 습관적으로 형성되거나 그 사람의 규칙적인 행동에서 합쳐져 그 사람의 미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용례가 연기(paṭiccasamuppāda) 과정의 불교 설명에 나오는데 이 과정은 무명을 연하여 행, 행을 연하여 식...(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ņaṃ...)과 같은 12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공덕(puñña-), 비공덕(apuñña-), 부동(āneñja-)은 때로 saṅkhārā와 결합한다 (중아함경 Majjhimanikāya Vol. II, pp. 229, 230, 262, 263). 열반(Nibbāna)은 모든 행(saṅkhārā)이 가라앉은(sabbasaṅkhārasamatha - 상응부 경전 Saṃyuttanikāya Vol. I, p. 136) 상태를 묘사하고 열반(Nibbāna)의 성취는 행(saṅkhārā)이 없는 마음(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 법구경 Dhammapada 154)으로 묘사한다. 의행경(Saṅkhāruppatti Sutta) (중아함경 Majjhimanikāya Vol. III, p. 100)은 saṅkhārā를 배양하고, 만들어내고, 일으키는 가능한 방식을 말하는데 그래서 자신의 미래 존재의 탄생의 성질을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관련된 용어 abhisaṅkhārā는 작용력이 움직이는 한 계속해서 구르게 하는 초기의 추진력으로 바퀴가 구르는 힘이나 충동을 뜻하는 맥락에서 순수하게 물질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yāva abhisaṅkhārassa gati - 증일아함경 Aṅguttaranikāya Vol. I, p.). 자야틸레케는 saṅkhārā의 의미를 세밀하게 토론한 뒤 saṅkhārapaccaya viññāņaṃ 같은 맥락에서는 의도적인 행동이 다음 탄생에 만들어진 의식의 특성을 결정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그 용어가 사용된 많은 내용을 고려한 뒤 그 용어가 의지의 의식이나 무의식에 관한 면을 말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또한 그 용어가 의도적인 행동, 의지의 행동, 의지로 한 행동, 목적이 분명한 행동, 고의로 하는 행동, 성향, 몸의 반사적 반응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번역가는 맥락적인 의미보다는 용어의 어원에만 크게 영향을 받아 구성 요소로 된 것, 조제, 조합, 형성, 구성, 다발, 복합, 합성 등으로 용어를 선택해서 의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saṅkhārā를 영어로 번역한 것에 대해 세밀하게 토론한 후 그가 쓴 글 “Some problems of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의 결론에서 그가 관심을 기울인 점은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번역의 주된 어려움은 경험적 사실의 분류가 언어에서 언어로 아무리 적은 차이가 나더라도 이 차이는 각 언어의 낱말로 말하는 개념에 반영된다. 이것은 한 언어의 한 단어가 다른 언어의 병렬어가 사용된 모든 맥락에서 사용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한 언어의 한 단어를 다른 언어의 일부 단어들로 번역해서 일부 맥락에서는 그렇게 사용하고 다른 맥락에서는 다르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자야틸레케가 언급한 것은 고통(dukkha), 성향(anusaya), 유루(āsava), 희론(papañca), 상(saññā), 마음(citta), 의식(viññāņa)과 같은 많은 다른 빠알리 용어와 경전에 사용된 다른 용어에 관해서 사실이다. 용어의 어원적, 맥락적 적용 둘 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다른 언어로 잘 번역하려는 의도가 있는 사람에게 보람 있는 결과를 낼 것이다.
saṅkhārā 같은 아주 골치 아픈 용어를 순수하게 어원 분석을 바탕으로 한 번역과 관련하여 자야틸레케의 관찰을 기억하면서 어원을 고려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게 되는 다른 경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빠알리 언어의 일반적인 특징은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어근과 합성하여 접두사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특히 경전 불교의 철학적, 심리적 언어를 다룰 때 빠알리 언어 사용의 이런 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것 역시 몇 가지 예로 설명할 수 있다. 불교 심리학은 마음 인지 활동의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빠알리 경전 언어는 어근 jñā ('안다‘는 뜻)를 써서 인지 활동을 나타내는 반면 특정한 인지 내용과 관련해 어근에 접두사 saṃ-, vi-, pari-, abhi-, pa-를 써서 뚜렷이 구별한다. 상(saññā), 의식(viññāņa), 변지(pariññā), 신통(abhiññā), 반야(paññā)와 같은 명사적 사용과 sañjānāti, vijānāti, parijānāti, abhijānāti, pajānāti 같은 동사적 사용에서 다른 방식의 인지를 나타내는 빠알리 용어를 번역할 때 각각의 접두사에 붙은 특별한 뜻은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vijānāti와 pajānāti 둘 다 영어로 ‘알다’로 번역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두 가지 활동이 모두 앎과 관련되지만 각 경우에 언급된 아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이다. 어근 jñā에 vi-가 아니라 pa-가 붙은 pajānāti는 깊고, 통찰하고, 사색하는 앎을 제시하지만 ‘vijānāti’는 그와 관련하지 않는다. 다른 용어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따라서 sañjānāti는 개념적 구성, 생각, 사고로 앎과 관계있지만 parijānāti는 어떤 것의 실재를 몇 가지 다른 관점에서 봄으로써 얻은 결과로부터 폭넓은 앎을 말한다. abhijānāti는 텔레파시, 천안, 모든 더러움에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앎과 같은 특별한 인지력의 배양에 의해서 아는 것과 같은 더 높은 앎의 방식에 관련 있다. 각 접두사의 사용에 의한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원래 용어의 참뜻은 번역판에서 나타내기 어렵다.
불교 경전 언어에 사용된 접두사가 전달하는 의미에 부적절한 주의를 둔 하나의 분명한 예가 있는데 빠알리 용어 upadhi의 번역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의 주의 깊은 개념을 아주 풍부하게 간주한 것이다. 빠알리성전협회의 빠알리 영어사전은 그 뜻을 (재생의) 토대, 바탕, 땅, 기층으로 나타낸다. 빠알리성전협회에서 최근에 나온 사전은 그 뜻을 ‘세상의 소유물이나 재산...(재생을 위한 바탕을 형성하는) 그러한 소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 자야위크라마(N.A. Jayawickrama)는 PED에서 제시한 용어를 채택하고 숫타니파타(Suttanipāta)의 타니야경(Dhaniya Sutta)에서 등장하는 upadhīhi narassa nandanā를 ‘기층은 기쁨의 원천이다...’로 번역한다. Saddhatissa는 빠알리의 심리적 용어 ‘upadhi’를 하나의 용어를 써서 영어로 번역하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감각적 존재의 요소’라고 제안했다. upadhi는 경전 언어에서 자주 등장하고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독자는 심오한 심리적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 용어를 번역한 대부분이 원래의 참뜻을 적절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럽다. 접두사, 어근뿐만 아니라 그 단어가 사용된 특정한 심리적 맥락에도 조심스레 주의를 기울이면 그 용어를 다른 언어로 적절하게 번역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접두사 upa-는 뭔가에 다가가는 생각, 뭔가에 가까이 가는, 뭔가에 이르는, 뭔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빠알리에서 흔히 사용된다. 어근 dhā는 확립하거나 자리 잡는 것을 말하기 위해 흔히 사용된다. 따라서 upadhi는 감각 세계의 지각 경험과 관련된 심리적 성향을 전달하기 위해, 집착의 대상을 향해 정신적으로 기울어진, 거기에 마음이 고정되거나 자리 잡는 것을 전달한다. ‘고정된 집착’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더 깊게 사유하면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는 문맥 사용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용어의 어원에 우선순위를 주는 경우이다.
붓다가 법문에서 한 용어의 선택은 때로 기존의 용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줌으로써 개념 자체를 수정하도록 이끌었다. 다른 경우는 실재의 성질에 대한 그의 거룩한 관점을 표현하기에 기존 용어가 부적합할 때는 불교 이전의 종교 철학 용어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학적 사용을 채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한 용어의 놀라운 예가 연기(paṭiccasamuppāda)이다. 불교 이전의 사상 체계에서 그런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에서 사물이 일어나고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붓다의 통찰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만든 이유는 기존 용어의 부적합함과 철학적 부정확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붓다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설명 원리로서 존재(Being)와 비존재(Non-Being)의 초기 개념을 대체하는 대안으로서 연기(paṭiccasamuppāda)의 개념을 설명했다. 붓다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Being)의 개념을 사용한 사람들은 영원주의자 (sassatavādā)이고 비존재(Non-Being)의 개념을 사용한 사람들은 영혼 단멸론자(ucchedavādā)였다. 연기(paṭiccasamuppāda)는 위에서 말한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하는 중도의 입장으로서 붓다가 표현한 것이다.
칼루파하나(D.J. Kalupahana)는 붓다가 ‘존재의 언어’를 피하면서 ‘되어감의 언어’를 적용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붓다에게 실재론자와 허무주의자의 의미를 피하는 언어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연기’(paṭiccasamuppāda)의 언어로서 영원한 존재와 허무적인 비-존재의 극단으로부터 떨어짐이다.” 빠알리 경전의 불교는 붓다가 새로운 철학적 관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 장치를 제대로 이해할 때만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빠알리 경전 불교를 번역할 때 붓다가 전달하려 했던 철학적 관점이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연기(paṭiccasamuppāda) 같은 용어를 다른 언어로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용어의 복잡한 어원적 구조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붓다는 기존 언어에서 그 요소들을 숙련되게 사용해서 사물의 성질에 대한 그의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려는 의도로 거룩한 방식으로 그 요소를 결합하여 새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접두사 paṭi-, 어근 ī, 동명사 t-ya, 접두사 saṃ+ud, 어근 pad과 합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접두사 paṭi-는 현상이 교류하고 서로 의존하는 성질을 나타낸다. 어근 ī 는 현상의 성질 같은 역동성과 과정을 나타낸다. 다음 접두사 saṃ-은 특정한 현상을 가져오는 여러 조건들을 나타낸다. 접두사 ud-가 붙은 어근 pad는 조건에 따라 관련된 현상이 일어남을 나타낸다. 연기(paṭiccasamuppāda)에 포함된 의미의 여러 가지 측면을 담아내기 위해서 영어로는 ‘의존해서 일어남’ 또는 ‘의존해서 함께 일어남’으로 번역된다. 그러한 빠알리 경전 용어를 다른 언어로 옮길 때 모든 언어 요소의 조합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루파하나가 쓴 책의 11장은 무엇이 참이고 진짜인지 표현하기 위해 붓다가 채용한 언어에 초점을 둔다. 붓다는 진리의 일부로서 변화와 변형을 인식하려 했다. 붓다는 bhūta를 썼는데, 그것은 어근 bhū ‘되다’에서 파생된 과거분사이고 ‘되기 위해서 나온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다고 그는 지적한다. bhūta는 변화 또는 변형을 의미한다. 칼루파하나에 따르면 불교에서 bhūta는 sacca 또는 그것의 음성학적 변화로서 같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인도 언어에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bhūta 또는 ‘되어감’은 변화나 변형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리는 핵심이나 물질 같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 또는 변형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안한 점은 빠알리 경전 언어에서 ‘있는 그대로 안다’로 자주 등장하는 불교적인 표현 yathābhūtaṃ pajānāti의 널리 알려진 영어 번역과 관련 있다. 붓다가 사용한 그 표현의 철학적 의미는 그러한 번역이 적용되었을 때 ‘존재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에 비하면 꽤 거룩한 것이다. 칼루파하나의 관찰에 따라서 yathābhūtaṃ pajānāti를 ‘그것이 정말로 된 대로 (뭔가를) 통찰 있게 이해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번역에서는 아주 작은 차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뒤에 깔린 철학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칼루파하나는 생각할 것이다. 불교는 영원한 존재에 관한 철학의 여지는 남겨두지 않고 ‘되어감’의 철학만 인정한다.
불교처럼 종교적, 교리적, 철학적 내용을 지니는 경전의 번역 과정은 번역가가 지닌 전통의 특정한 번역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해석과 번역은 교류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때로는 해석가가 지신의 견해를 은근히 제시하는 것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한 사상의 형이상학적이고 교리적인 교의에 아주 익숙한 해석가가 다른 사상의 전통을 해석하려고 할 때 후자의 번역에서 전자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우 그는 선입관으로 새 전통을 번역하려고 한다. 유대교-기독교 종교 전통의 개념과 구조를 물려받은 사람이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시도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다. 피터 매스필드(Peter masefield)는 그가 쓴 책 Divine Revelation in Pali Buddhism에서 sāvaka, sotāpanna, paratoghosa 같은 특정한 불교 용어를 어떤 초능력적인 계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려 했다. 깔라마(Kālāma)나 창키(Caṅkī), 산다카(Sandaka) 같은 경에서 뚜렷이 나왔듯이 유대교-기독교 종교 전통과는 달리 계시의 개념은 불교에는 꽤나 이질적인 것이고 지식의 수단으로서 계시의 궁극적 유효성을 거부한다.
이 점은 서양의 저명한 두 학자인 푸생(Poussin)과 키스(Keith)가 빠알리를 잘못 번역한 것에 대한 자야틸레케의 토론에 잘 나와 있다. 이 학자들이 번역한 빠알리는 주석시기에 속한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빠알리 원래 구절은 다음과 같다. ...sabbadevamanussānaṃ imasmiṃ dhamme assddhiyaṃ vināseti saddhāsampadaṃ uppādeti. Ten'etaṃ vuccati: Vināsayati assaddhaṃ saddhaṃ vaḑḑheti sāsane (장아함경 주석서 Dīghanikāya-Aṭṭhakathā Vol. I, p. 31) 푸생(Poussin)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법은 믿는 자를 구하고 믿지 않는 자를 파괴한다.’ 키스(Keith)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믿는 자를 구하고 믿지 않는 자를 파괴한다.’ 푸생(Poussin)과 키스(Keith) 둘 다 ‘saddhaṃ’을 사람으로 생각해서 ‘믿는 자’로, assaddhaṃ을 ‘믿지 않는 자’로 해석했다. 자야틸레케는 assddhiyaṃ이 원문의 맥락에서는 ‘불신’을 뜻하고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고 바르게 지적한다. 이 경우 번역가는 믿지 않는 자는 신이 내리는 위험한 지옥살이를 거쳐야 한다는 유대교 기독교에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 이 경우 빠알리를 부정확하게 번역했을 때 의미에 끼치는 차이를 볼 수 있다.
불교 윤리 언어에서 신중하지 못한 번역은 그 결과로 놀라운 예를 볼 수 있는데 불교에서 윤리에 부여한 역할을 잘못 생각하게 할 수 있다. 몇몇 학자들은 불교 수행의 목표는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생각은 사람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 특성과 부정적 특성을 각각 평가하기 위해 불교 언어에서 사용된 puñña 와 papa의 신중하지 못한 번역에서 나왔다. Puñña는 ‘좋음’을 ‘pāpa’는 나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법구경(Dhammapada)과 숫타니파타(Suttanipāta) 같은 경전은 해탈한 사람이 puñña 와 papa를 넘어선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윤리적 구별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그릇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불교에서 puñña는 해탈 교리의 더 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불교에서 puñña 개념의 검토는 업(kamma), 열반(nibbāna), 윤회(saṃsāra)와 같은 다른 교리에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puñña와 papa를 넘어선 것은 윤리적 의미에서 좋고 나쁨을 넘어선다는 뜻이 아니라 해탈하지 못한 사람의 보통 관심사인 업보와 관련해 이롭고 해로운 결과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puñña와 papa의 불교용어에 대해 ‘좋고 나쁜’ 또는 ‘공덕과 공덕이 아님’ 같은 번역은 오해로 이끈다. 훨씬 더 나은 대안은 ‘업보와 관련해서 이로운’ 과 ‘업보와 관련해서 해로운’이다.
앞서 말한 토론에서 붓다의 원래 가르침의 발견에서 빠알리 경전 내용의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테라와다 전통은 경전의 가르침을 원어로 보존했던 대로 지킬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붓다는 스스로 그의 가르침을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배우기를 바랐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빠알리 경전의 원전 번역에서 오역을 바탕으로 한 번역이나 오역으로 이끄는 번역이 되지 않기 위해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부 경우에 자신의 문화적 맥락과 배경에 의해 겪은 이념적 전통에 익숙해서 나온 잘못된 편견의 결과로 그러한 오역을 볼 수 있었다. 정확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사용된 각 용어의 어원적인 측면, 맥락적 사용, 불교 경전 언어에서 사용된 이념적인 틀 안에서 관련된 개념 구조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때로는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고 비슷한 번역만 가능할 때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 빠알리 원어 그 자체를 번역에서 살려둬서 주어진 언어의 사용자가 그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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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공감되는 글이네요.
안 그래도 지금 번역어들 때문에 집필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upadhi같은 단어는 파악해보니 일종의 환상구조물입니다.
'모르는게 약이다'처럼 엉터리 전제를 말하죠.
'아라마나arammana'도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존재상태와 유사합니다. 주체의 상태가 대상에 표출되는 거죠.
그리고...
upadhi는 다시 궁구해보니
소유욕으로 파악했네요.
다른 것도 검토하고 있네요.
viveka도 멀리여윔이나 홀로가 아니라, 탈바꿈에 가깝습니다.
관점이 바뀐다는 말이죠.
초선의 번역도
(대상에 대한) 탐색vitakka尋과 검토vic?r?伺 덕분에 탈바꿈(viveka)함으로써 일어나는 희열p?ti喜의 즐거움...
이래야 실제 상황에 들어맞더군요.
이외에도...
viveka는 흔히들 (감각적 욕망을) 멀리여읨, 혹은 閑居로 번역하는 용어...
離別?-離貪-消滅-防棄
viveka-viraaga-nirodha-vossagga의 순서로 나오는 경문도 있습디다.
@봄봄 탈바꿈-초탈-환멸-포기?
이렇게 개념을 잡아봅니다.
자신의 변해야 환경이 바뀐다는 말로,,,
@宙宇 어감의 문제인데... 이런 말씀이 생각나네요.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라.” (서암스님, 꿈을 깨면 내가 부처, 정토출판, 2015. 117쪽.)
---온라인에서---
습관적인 생활을 버리고=포기하고, (익숙하지 않아) 낯선 것은 익숙하게 하라?
@봄봄 희열이 생기려면 이유 없이 생기면 안된다고 봅니다.
어떤 답을 알았을 때의 떨림과 같은 것이죠. 놀라운 떨림이죠.
실제 해보는 게 중요하긴 하죠
관찰해보니 삼매가 너무 단순해서 다들 어려워 하는 것 같습니다. 오해가 많다고 봅니다.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