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텅한 소의 내장”(「딜리 두르헤」)처럼 뒤얽힌 바라나시(Varanasi)의 뒷골목은 독한 냄새를 풍겼다. 지린내와 누린내, 쉰내와 탄내 같은 온갖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대낮인데도 땅거미가 내린 듯 음침하였다. 햇살은 지붕 끝으로 올라가고, 바닥은 구정물로 질척거렸다. 구절양장 꺾고 도는 낯선 골목에서 길라잡이를 따라잡자니 진 데 마른 데 가릴 겨를도 없다. 앞사람 뒤통수만 보고 걷다가 뛰다가 어디로 어떻게 왔는지 가정집을 개조한 허름한 식당 앞에 서서야 비로소 배낭을 맨 어깨가 심하게 결림을 알았다.
갠지스강은 언덕 하나 너머에 있다. 물비린내와 피내음이 서풍을 타고 간간이 흘러든다. 푸자 게스트 하우스(Fuja Gest House)에 짐을 풀고 저물 무렵 강으로 나갔다. 배 한 척을 흥정하여 초와 꽃을 사고 별이 뜨기를 기다렸다. 낮에 잠깐 마주쳤던 한 생은 이미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 있으리라. 불가촉 천민 네 사람이 어깨로 떠받치고 가던 꽃장식, 좁은 골목에서 갑작스레 부닥친 운구 행렬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갠지스 성수에 온몸을 담그던 노인네와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도 겹친다. 부활과 죽음과 일상이, 신성과 허무와 실존이 뒤얽힌 곳. 강물에 촛불 띄우고 꽃잎 뿌리며 갠지스를 거슬러오르니, 강변 여기저기서 벌겋게 불빛이 일기 시작한다. 시체 타는 노린내가 물결 따라 일렁인다. 일행들은 “낯익은 죽음의 예감으로 술렁거렸다”(「갠지스는 24시간 성업 중이다」).
멀찌감치 에돌아 배를 대고 콩닥이는 마음을 달래며 ‘가트’(Raja Ghat, 갠지스 강변의 노천 화장터)에 이르니, 독한 노린내가 뜨거운 불기운보다 먼저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몇몇 장작더미에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흘러내린 기름이 찌지지지지지 불이 붙은 채 갠지스로 내려간다. 온몸의 기가 다 모인 듯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발에 눈길을 주는 사이, 타다 만 손 하나가 몸체에서 삐져나와 장작더미 옆으로 툭, 떨어져 지글거린다. 이승의 것 다 놓아버리고 승천하는 영혼을 차마 마저 바라볼 수 없어 코부터 움켜쥐고 눈을 돌린다. 바로 옆에는 건장한 사내 몇이 웃통을 벗고 장작더미에다 막 주검을 올리는 중이다. 화려한 천으로 정성스레 감싸놓은 고인 옆에서 여인네 몇 낮게 흐느낀다. 장작불은 밤늦도록 꺼질 줄 모르고, …… 한 생이, 그렇게 갔다.
인도 소풍(‘인도 소풍’은 여행사 이름)에서 가장 강렬했던 이 경험은 강해림 시인의 뇌리에도 오래 남았을 터. 둘째 시집 『환한 폐가』(한국문연, 2006) 2부 인도시편은 역시 죽음 이미지가 밑절미를 이룬다. 첫 작품 「무모함에 베이다」부터 을씨년스런 죽음이 덮고 있다. “마지막 거래를 끝낸 시간의 검은 손”(「갠지스는 24시간 성업 중이다」)이 시의 목을 단단히 붙든다. 그러나, 타지 마할(Taj Mahal)의 아름다움도 죽음에 감싸여 있고 아그라 포트(Agra Fort)의 화려함도 결국 삶의 허망에 이르지만, 라자 가트처럼 격렬하게 영혼을 뒤흔들지는 않는다. 섬세함이나 웅장함은 돋보일지언정, 주검의 냄새는 오랜 시간에 바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살과 피가 타는 노린내, 뼈가 녹아내리는 소리 낭자할 때야, 시조차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트는 그야말로 죽음의 난장판에 가깝지만, 그 현장성이 정신의 꼭지를 틀어쥐고 놓지 않는다. 격렬함이 숙지고 난 뒤, 이 경험을 직접 드러낸 작품 한 수를 읽어보자.
지금 내 서랍 속에는 죽음이 인화해 낸 풍경 몇 장이 들어 있다
뭉얼뭉얼 구름덩이가 되어 피어오르던 화장터 연기 사이 어슬렁거리던 개 한 마리가 킁킁거리며 물어뜯던 검고 딱딱한 물체가 금방이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까까머리 사내들이 울긋불긋한 천으로 싼 어떤 주검을 들것에 둘러메고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던 골목길……
무덤 속이라도 좇아가 꽃 피워댈 것처럼 저승꽃 만발한 노인의 눈동자가 장작 살 돈을 구걸하다 말고 무심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뭇 사내들을 다 받아들인 양 크고 헐렁헐렁한 강의 자궁, 석양의 갠지스가 형형색색 죽음의 재로 목욕하고 막 자진하던 순간 파노라마로 펼쳐진
풍경과 풍경 사이
서랍 속에서 강물이 빠져나와 방안 가득 차오른다 흐르지 않는 시간 나를 누르고 있던 장작더미가 무너지고 환한 불꽃, 활활 불길이 치솟자 죽음보다 내가 환해졌다 ꠏꠏꠏ「죽음과의 산책」전문
끔찍한 죽음의 경험을 무의식으로 억누르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정제하여 풍경처럼 기록하게 한 동인이 시간의 풍화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와중에도 박미영 시인이 알프스에서 가져왔다는 신성한(?) 나무토막 몇 개를 천금에 구입해 첫 시집을 화장하여 천도제를 치르고, 자정 가까워 라자 가트에서 빠져나왔을 때, 정말 그때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천상의 방”이 뒷골목 언저리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독한 죽음의 냄새가 감미로운 천상의 선율로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시인은 “그날 밤 그 방으로 흘러든 건 행운”이라고 되씹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가트에서 밤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생과 죽음, 지옥과 천상이 어찌 따로 떨어져 존재하겠는가.
이 “낡고 누추”한 “천상의 방”(Sur Sarita The Music School)에는 천상 신선이라고 할밖에 없는 악사들이 있었다. 타블라를 두드리고 피리를 부는 노인들, 우아하게 때로 경쾌하게 맨발춤 추는 백발노인. 아직도 “몸에선 화장터 냄새가 났”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장작불보다 환해졌”다. 이 기이한 만남, 죽음의 냄새를 가로지르는 이 천상의 선율은 시인에게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주술을 건다. 죽살이는 이제 둘이 아니다. 냄새와 소리가 하나로 얽히고, 전생의 너와 후생의 내가 하나로 설킨다. 단 하룻밤 만에 우리는, 시인은 격렬하게 상치하는 두 경험을 껴안고 몽롱한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것이 나중에 인도시편으로 나오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어느 정도 이성의 간섭을 받고 난 다음이다. 「그날 밤 우리는 죽음의 향연에 초대되었다」의 배후에는 인간의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전율과 신명이 깔려 있는 것.
그날 밤 그 방으로 흘러든 건 행운이었어요 스스로 제 몸 열어 거풍한 기억이 오래인 듯 낡고 누추했지만 아늑했지요 천상의 방이었어요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제문을 읽는 제사장의 목소리 같은 경건한 침묵이 흘렀지요 둥둥 두둥둥 연주가 시작되었어요 악사들은 콧수염을 기르거나 빨간 두건을 썼어요 환각 먹은 듯 몽롱한 표정이었지요 우리들의 몸에선 화장터 냄새가 났어요 보트를 타고 화장터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었거든요 둥둥 두둥둥 타블라 소리가 심장에 구멍을 뚫고 파고들었어요 사람들의 얼굴이 장작불보다 환해졌지요 그때 맨발의 백발노인이 춤을 추었어요 방금 막 유체이탈 한 혼백이 날아오르듯 나풀나풀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이었지요 신들린 듯 허공을 향한 눈빛이 둥둥 두둥둥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었어요 방 안 가득 검은 강물이 흘러들었지요 주술에 걸린 듯 둥둥 몸이 떠올랐어요 우리는 깊고 깊은 강 속으로 자맥질해갔지요 진혼가가 들렸어요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의 갈비뼈 같은 것들이 노 저어가는 듯 자꾸만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요 둥둥 두둥둥 제의도 없이 죽어간 슬픈 혼들이었어요 우리는 ꠏꠏꠏ「그날 밤 우리는 죽음의 향연에 초대되었다」전문
인도시편을 읽으면, 강해림 시인은 철저하게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 시인인들 경험 없이 시를 쓸까마는, 강해림 시인의 상상력은 경험의 가장자리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드물다. 설핏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는 관념은 시인 세대의 역사가 조작한 초자아의 해묵은 습성. 그럼에도 강해림 시인의 작품들은 사실성보다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경험의 강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경험을 선택하고 재구성하는 몸이 서정성을 타고난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배를 맞대고 있었다. 딸 셋 둔 집안에 딸 쌍둥이로 들어선 기막힌 운명, 유모에게 맡긴 동생이 “배냇머리도 한 번 못 깎아보고”(「생일」) 떠나버린 처연한 사정이야 커서 들은 얘기겠지만, 갓난아기이기에 오히려 몸 곳곳에 배어든 죽음의 냄새를 쉬 버리지 못했을 터.
이러하니 시인의 몸은 죽음, 폐허, 소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소래포구는 폐허다」, 「바닥」, 「손 1」, 「책들」 등은 폐염전, 밑바닥 인생, 무지렁이 농사꾼, 금서를 매개로 어두운 내면 세계를 드러낸다. 파도와 석양과 갈매기도 있는데 소래포구까지 가서 하필이면 폐염전 소금창고에 버려둔 부서진 피아노를 보고 왔을까? “주워 담을 수도 흘려버릴 수도 없는/이미 엎질러진” 노숙자의 낭패를 왜 하필 시에 비유했을까? 「손 1」을 보면 이러한 시작 태도가 사회 문제나 역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나, 시인은 아무래도 현실 문제보다는 내면의 상처, 존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듯싶다. 「신성한 접속」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운명에 맡기는 것처럼 보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인간의 “무의식 속 풍경”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소래포구는 폐허다」는 단지 소금창고를 묘사한 것만 아니다. 다리가 없는 피아노, 삭아 헐거워진 건반의 입, 이 “불구의 몸”은 곧 시인의 내면 풍경. “사는 게/참 치욕 같”은 실존의 슬픔이 고여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바닥」 또한 그러하다. 시인은 “걸신 들려/노려보는 짐승 한 마리 내 안에 살고 있지”라며, 대합실 사내들의 바닥이 곧 자기 생의 바닥임을, 내면에 도사린 욕망과 좌절임을 암시하고 있다. 삶은 바닥에 나뒹구는 “얇은 주검”처럼 아프다. 이 “불구의 몸”과 “얇은 주검”은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더욱 처연한 느낌을 준다. 오래 흘러온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공간 속에 갇힌다. “일편단심 흙의 경전만 파고들다 뭉퉁해진”(「손 1」) 시간은 이제 손의 표정으로 단단히 굳어 있다. 라자 가트도 천상의 음악원도 “흐르지 않는 시간”(「죽음과의 산책」)에 매여 있다.
시인의 공간은 애상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은 아픔을 회복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갯벌처럼 드러낸 가슴들끼리 서로의 상처 핥아주며 온기 나누”(「소래포구는 폐허다」)던 시간은 폐허의 공간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한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짧은 생의 한나절”에는 “마디마다 옹이가”(「손 1」) 박혔다. 한때 천상의 선율에 몸을 떨던 시인은 어느새 다시 죽음의 가트로 내려와 있다. 이것은 물론 시인이 살아온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삶이나 심리 상태가 그만큼 답답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터.
그러나, 한편으로 강해림 시인은 “이제 막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여인”처럼 “시간의 자궁”(「책들」)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가 오기를 꿈꾼다. 어쩌면 폐허와 바닥이 시인에게는 이미 신생/신성의 시간을 예비해둔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가 서성거리고 있는 폐허와 신성 사이 어디쯤에서, “겨우겨우 소리나는”(「소래포구는 폐허다」), 그러나 틀림없이 다가오는 기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죽살이가 하나로 얽혀든 그때 그 주술의 시간을, 신성한 천상의 ‘시-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