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공기 발전사에 앞서서...
항공기, 아니 비행기하면 사람들은 하늘은 나는 기계라고만 생각한다. 이 하늘을 나는 기계가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고, 여기에 기계공학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라이트형제에 의해 동력비행기가 실현된지 100년도 안된 지금 우리는 음속을 넘나드는 비행기와 우주비행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상큼조는 이 항공기 발전사에 대하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이야기부터 현재 발전동향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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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날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꿈
하늘을 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꿈이었다. 거의 모든 나라의 신화
속에는 인간이 하늘을 난다는 게 그려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게
그리스의 이카루스 신화이다.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천재적인 재능가인 다이달루스(Daedalus)가 조카가 나무를 자르는 톱을 발명하여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질투한 나머지 신전의 지붕 위에서 조카를 밀어 떨어뜨려
죽이고 말았다. 이 죄로 다이달루스는 아들 이카루스(Icarus)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쫓겨가, 미노스(Minos)왕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왕비의 매혹에 말려들어 왕의 노여움을 받아 아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부자는 궁리 끝에 새털을 모아 큰 날개를 만들어 몸에 달고 탈출하기로 하였으나 아들 이카루스는 초가 녹으면 안되니까 너무 태양 가까이 떠올라 가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잊고, 그만 높이 떠올라 태양열에 의하여 초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부터 약 160년전 헌종 시대에 고증학자 이규경 선생이 쓴 오주연문장전(五州衍文長箋)이란 책의 비차변증설(飛車辨證設)이란 대목중에, "원주에 사는 정평구 선생이 따오기 모양을 한 비차(飛車)를 만들어 날개로 배를 치며 바람을 일으켜 공중에 떠올라 백척을 능히 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맞바람이 불 때는 앞으로 날아갈 수가 없으며, 회오리바람이 불 때는 날지 못하고 떨어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볼 때 하늘을 날고자 하는 옛사람들의 꿈을 엿볼 수 있다.
고대 시대 이후에도 여러 장치가 고안되었지만 정말 그것은 말 그대로 상상이었다. 그러다가 그나마 제대로 고안된 것이 15세기에 들어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든 하늘을 나는 기계이다.
그는 나사 비슷하게 생긴 헬리콥터도 고안 했고 새처럼 퍼덕거리게 만든 기계도 고안했다. 그는
비행에 관한 많은 스케치를 남겼으며, 그가 만든 날개치기 모형과 비행기의 모형은 훗날 릴리엔탈(Lilienthal, Otto)의 활공기와 큰 차이가 없으며, 유선형의 필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이 정도까지 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구상은 연구에만
그쳤고 실제로 날지는 못했다. 만일 다빈치가 계속 연구만 했다면 실제로 나는 기계를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생리학자이며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인 보렐리(Borelli,
Giovanni)는, 새의 날개치기 운동을 역학적으로 해석하고, 새의 체중과 힘의 관계를 인간과 비교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무거운 체중으로 인하여 사람의 힘만으로는 비행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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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나는 또다른 방법 - 열기구
인간은 먼 옛날부터 하늘을 날기를 희망해 왔으나, 사람들은 이를 공상으로만
여겼을 뿐 비행의 원리에 대해 과학적인 이론은 거의 없었다. 1783년 몽골피에
(montgolfier)형제가 기구를 발명할 때까지, 사람들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새처럼 팔과 다리를 날개처럼 움직여야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몽골피에
형제는 날개가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그것이 바로 열기구이다. 날개
갖고 나는 것은 공기 흐름 알아야 하고 등등 너무 복잡했다. 하지만 열기구는 달랐다. 그냥 불만 피우면 오케이다. 열기구에 성공한 사람이 '몽골피에 형제'이다. 그들은 불을 피울 때 재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들은 종이로 큰 주머니를 만들어서 뜨거운 연기를 넣었다. 곧 그것은 아주 쉽게 떠올랐다. 계속 사이즈가
커졌다. 결국 1783년 6월 4일 프랑스 아노네이라는 곳에서 지름 10m나 하는 기구를 가지고 공개
실험을 하였다. 실험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기구를 받치고 있던 8명의 남자가 손을 놓자마자 180m까지 급상승 했다. 9월 19일에는 같은 열기구에다가 실험 동물로 양, 닭, 오리를 태워서
시험하는데 성공했다. 왕과 왕비도 참석하고 큰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열 기구는 계속 발전 했다. 결국 수소기구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업그레이드 한 사람은 샤를르 형제(형제만 나오네). 알다 시피 수소는 매우 가벼운 기체이다. 불 피울 것도 없이 넣기만 하면 금방 떠오른다.
1783년 12월 1일 그들은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약
43km나 날았다. 또한, 기구는 나폴레옹이 전쟁할 때
정찰용으로도 썼다고 한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기구의 제작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비행선(airship)이 제한적이나마 교통 기관으로 등장하였다. 그 후 교통 수단으로서의 비행선의 이용가치가 인정되면서 비행선의 개발이 두드러졌는데 이 때 공적을 쌓은 사람 중의 하나가 독일의 체펠린(Zeppelin, Ferdnand)이다. 체펠린의 비행선은 경식 비행선으로서, 연식 비행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로 되어 있다. 연식 비행선은 가스가 새지 않는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수소가스를 충전시켰으나, 경식 비행선은 가벼운 재질인 두랄루민을 사용하여 유선형의 선체를 만들고, 그 속에 여러 개의 수소가스 주머니를 넣어 부력을 얻는다. 연식은 선체 자체가 물렁거리지만, 경식은 외형이 금속 골조로 유지되므로 비행선의 대형화에 적합하였다. 비행선은 제 1차
세계 대전 때에 최초로 폭탄을 탑재하여 투하했으며, 점차 실용화가 인정되어 대서양 횡단, 북극
탐험, 세계 일주 비행에도 쓰이게 되어 크게 각광 받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폭발 사고로 인하여
그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최후의 비행선이며, 크기가 최대인 힌덴부르크호가 1937년 대서양 횡단 후, 미국 뉴저지에 착륙하다가 폭발하여 대형 참사가 일어나자 여객 수송용으로서의 비행선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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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진없이 하늘을 난다? - 글라이더(무동력비행)
인류의 욕구는 구름처럼 떠다니는 비행선에서 새처럼 나는 항공기로 발전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영국의 과학자 케일리(George, Cayley)가 날개치기 방식이 아닌 기계적 방식에 의한 비행
가능성을 발표하였다. 그는 공중 비행에 대한 논문에서 연을 날리는 원리와 비교하여 양력 이론을 이론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가로 및 세로 안정성을 조사, 연구하였다. 그후 1804년 처음으로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한다. 이 비행기는 엔진이 없어서 멀리 갈 수도 없었고 멋있게 비행할수도
없었다. 하지만 글라이더가 발명됨으로서 비행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날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고 비행기 연구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글라이더는 계속 발전해서 독일의 릴리엔탈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변함없이 날개치기 비행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한쪽에서는 고정날개와 프로펠러를 이용한 비행기 개발에 꾸준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항공 역학에 대한 지식이 없던 그 때로서는 이론적인 계산만으로는 비행원리를 파악하기 힘들어, 실제로 사람이 타고 체험으로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독일의 릴리엔탈과 그 동생은 새가 날아 오르는 것을 관찰하여 새가 날개를 치지 않고서도활공하는 것을 보고, 사람도 무리하게 날개를 치지 않고서도 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활공기를
제작하게 된 그들은 1891년경부터 본격적인 실험을 하여 추락사할
때까지 6년 동안 13대를 제작하였으며, 실험 장소를 옮겨가며 2000회 이상의 활공 실험을 하였고, 이러한 사이에 비행 거리도 점차 길어져서 250m 이상을 날게 되었다. 그러나 세로 안정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결국은 이에 대한 결함 때문에 그는 생명을 잃게 되었다. 이외에도 릴리엔탈은 양력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비행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인 날개의 각을 통해 비행기의 이동방향을 바꾸는 것을 연구했다.
그후, 우리가 알고 있는 라이트 형제도 동력비행기 전에는 글라이더로 100번 넘게 실험 비행해서 비행기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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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동력 비행 - 라이트형제
활공기의 선구자인 케일리가 1804년에 만든 모형 글라이더들은 과학적인 이론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이것을 실물로 만들어 이에 맞는 경량의 기관을 붙이면 성공적으로 비행하는 것이 확실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사람이
바로 라이트 형제(Write, Wilbur & Write,
Orbille)였다. 오하이오주의 자전거 제조업자였던
그들은 수많은 활공비행 시험과 풍동(wind
tunnel)시험을 거쳐 1903년 12월 17일 인류 최초의 유인 동력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플라이어(Flyer) 1 호기에 그들이 설계, 제작한 4기통 12마력짜리 기관을 탑재하여 동생 오빌 라이트가 12초 36m, 형 월버 라이트가 59초 260m를 비행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브라질 사람인 산투스 뒤몽(Santos-Dumont, Aberto)은 파리를
무대로 하여 비행선과 동력비행기의 개발에 힘을 기울인 결과 1906년 유럽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거리 220m, 비행시간 21초의 기록을 세움으로써 기록을 공인 받기에 이르렀다.한편 프랑스의 부아쟁(Voisin, Delagrange)형제는 1908년 9월에 체공시간 30분
27초의 기록을 세움으로써 초기 항공계에 실용적 평가를 받은 라이트 플라이어 3호기의 기록과(33분 17초) 비슷한 기록을 세웠다.
그 당시의 비행기의 모양은 라이트형이거나 부아쟁형 모두
겹날개 비행기로서 이것이 기본형이었지만, 홑날개 비행기로 착실하게 기초를 닦은 사람은 프랑스의 볼레리오였다.
이 볼레리오 홑날개 비행기는 겹날개 비행기에 비해 크기가 작아서 경량화와 성능, 조종성 등에 있어서 그 당시의 겹날개 비행기를 능가하였다. 1909년 7월 25일, 볼레리오는 자신이 직접 조종하여 영불해협 횡단에 도전함으로써 약 40km를 32분만에 횡단 비행하는 최초의 횡단비행에 성공하였다. 이 32분의 비행은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 그다지 높은 기록은 아니나, 영불해협은 오랜 세월동안 유럽
대륙과 영국과의 정치적, 문화적 거리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처음으로 허물었다는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최초의 해양 횡단 비행이기 때문에, 장차 비행기가 국방상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증명한 결과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급히 군용 비행기 개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고, 프랑스에 대응하는 항공부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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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대전...전쟁의 부산물 - 전투기
엔진 즉, 왕복 기관 비행기는 제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비행기는 전쟁시기에 군용 비행기로서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 군용 비행기가 민간 비행기로 역할이 전환되면서 과학 문명의 이기를 제공하여 왔다. 다시
말해, 비행기의 발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인류의 비극인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에 정찰을 주임무로 했던 비행기는 점차 용도가 다양해짐에
따라 용도별로 세분화되어 정찰기, 폭격기, 전투기 등의 기종이 출현하게 되었다. 비행기의 형식에 있어서도 크게 변혁이 있어 홑날개, 겹날개, 세겹날개 등 여러 가지 날개 형태가 있었고, 기관의 냉각 방식에서도 수냉식과 공랭식이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의 비행기는 실용적으로 겨우 사용될 수 있는 정도였으나, 전쟁 4년을 겪는 동안 비행기의 성능은 급격히 향상되었고, 각 임무와 용도에 따라 비행기의 분류가 명확해졌으며, 대전 중에 급격한 소모와 용도의 다양화로 대량 생산되었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활약한 군용 비행기로는 왕복 기관 비행기가 독무대를 이루어, 전쟁
초기에 쓰이던 성능 좋은 군용 비행기는 그대로 전쟁 말기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왕복 기관이 한계점을 드러냄으로써 제트 기관의 출현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 제트 기관이 실용화될 즈음에 이르러 전쟁이 끝났지만, 대전 후의 고속 비행기는 대부분 제트 기관 비행기가 차지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단일 좌석, 단발 기관의 소형 고속기가 활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유명한 전투기로는 독일의 메세르슈미트, 영국의 스피트파이어, 미국의 헬커트 등이 있었고, 후반에 들어와서는
동체가 둘로 구성된 P-38 라이트닝을 비롯하여, F-51 무스탕,
F-4U 콜세어 등이 유명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비행기의 대부분은 전투기가 주종을 이루었고, 폭격기는 원시적인 수법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정도의 전술적인 것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들어와서는 대마력화, 대형화, 고속화되었으며, 특히 대형기에 있어서는 적의 전투기에
대한 방어 화기의 발달이 현저하였다. 이 때의 폭격기로서는 독일의 하인켈 He-111, 융커스
Ju-88, 영국의 애브르 랭커스터, 미국의 B-17, B-29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폭탄 투하 방식의
개선으로, 조준 장치의 정확성과 레이더로 목표를 발견하고 폭격기 자체를 레이더로 유도함 으로써 야간이나 구름, 또는 안개 속에서도 정확하게 명중시키기 때문에 그 전과가 확대되어 공격 효율이 높아졌다. 특히, B-29기의
전략 폭격은 상대국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하였고, 원자탄의 투하는 전쟁을 끝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 중에는 전투기와 폭격기 등의 생산, 개조에 주력하게 되어, 수송기는 전쟁 초기의 것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용한 것이 많았으며, 미국의 C-46, C-47, C-54, 영국의 프라밍고, 엘버트로스, 등은 가장 오래 사용된 비행기로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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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끝난후... - 전투기의 기술은 민항기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 초계기
등 특별한 요구에 바탕을 둔 비행기들이 설계, 제작되었으나,
전쟁이 끝나면서 이러한 비행기는 민간 비행기로 전환되었다. 물론 여객이나 우편물을 정해진 항로와 일정에 따라 정기
운송하는 민간 비행기가 이미 전쟁 전에 있기는 하였지만, 종전 뒤에는 각국이 많은 군용 비행기 중에서 폭격기의 동체를
개조하여 수송기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폭격기를 개조한 수송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민간 비행기로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면, 최초의 여객기는 러시아의 볼쇼이 발티스티라는 비행기이다. 이 비행기는 승무원이 2명 승객 7명을 태울 수 있었다. 또 요즘과는 다르게 비행기 앞에 전망을 볼 수 있는 발코니도 설치 하였다. 또 그것을 업그레이드 한 것은 르 그랑이라는 비행기이다. 이 비행기 객실에는 의자, 소파, 화장실, 심지어 난방장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 비행기들의
모양을 보면 열차 한 칸을 떼어다 붙인 것 같고 라이벌인 비행선에 비해 성능은 형편 없었다.
그 후, 본격적인 수송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독일의 융커스 F-13,
네덜란드의 F-2, 프랑스의 파르망 F-60 등을 들 수 있다. F-13은
전금속제이고, F-2는 목재로 된 날개와 강관 골격 구조에 천을 씌운 동체로서, 날개 모양이 종전과 다른 홑날개로 되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겹날개 비행기가 대부분이었던 시대에 더욱
발전된 모양의 비행기였다. 특히 F-13은 그 때로서는 보기 드문, 전체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구조였으므로, 내구성이 좋아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린드버그의 라이안기](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estest.net%2Fpei%2Fproject3%2Fe0ac.jpg)
미국의 린드버그(Lindbergh, Charlres)는 1927년 5월에 라이안 홑날개 비행기로 뉴욕과 파리 사이의 5809 Km를 33시간 30분만에 비행하였는데, 이 기록은 비행기의 장거리 비행에 대한 신뢰성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 후반 최대의 기록적인 비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항공기 개발은 다방면에서 급속한 기술적 진보를 보이게 되었다. 그 주요 특징으로서 기체는 전천후성을 갖춘 금속화 방향으로 발전되어 경금속 알루미늄이 사용되었다. 이들 재료의 진보는 겹날개 구조에서 홑날개식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날개 부착 위치도 높은 날개에서 낮은 날개로 전환되어 항공기 성능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비행기의 속도가 증가되고, 날개 하중이나 날개의 크기에 대한 마력의 증가를 가져와
결국은 큰 마력 기관에 작은 날개 면적의 비행기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고도와 속도의 경쟁을 위해 각국은 과급기의 연구가 성행하는 한편, 고압 비행복이나 객실 여압의 연구가 병행되었다. 대형기에 있어서도 큰 기체에 큰 탑재량을 가지고 장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비행기가
개발되었다. ![DC-3 여객기](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estest.net%2Fpei%2Fproject3%2Fe0ad.jpg)
또, 접개들이식(retractable) 착륙 장치와 고양력 장치인 플랩(flap)이 개발되고 과급기가 부착된 효율이 높은 기관이 개발되었으며, 가변 피치(variable pitch) 프로펠러가 사용됨으로써 고공, 고속 및 경제적인 비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무선
통신 및 항법 장비와 각종 비행 계기의 개발로 인해 야간 및 계기 비행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당시 대표적으로 우수한 상업용 비행기로서 미국의 더글러스 사의 DC-3 비행기를 들 수 있다. 이 비행기는 금속제 홑날개
항공기로서 획기적인 항공기로 평가를 받았으며, 1936년 7월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최초로 비행한 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세계 수송기의 총아가 되었으며, 그 당시 전 세계 항공기로의 거의 90%를 석권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투기의 생산 기술이 상업용 항공기에 적용되어 항공 기술이 급격히 발전되었으며, 1946년 록히드사의 컨스텔레이션 항공기와 더글라스사의 DC-6항공기에 이어
1950년대에 수퍼 컨스텔레이션과 DC-7이 개발되었다. 이 비행기들은 유상 하중을 늘리고 기관의 효율을 높여 고고도 비행에 의한 대륙간의 항공 운송을 담당함으로써 1958년 보잉사의 B707과 1959년 더글라스사의 DC-8의 제트 항공기가 나타날 때까지 항공 운송을 전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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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기관 - 제트엔진을 이용한 항공기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하여 비행기 발달사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제트 기관의 등장이다. 제트 기관이 출현된 이유로는 왕복 기관
항공기의 성능 향상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제트 기관이란 공기를 흡입한 후, 동체 내의 연소 장치에서 연료를 혼합하여
연소시킨 고온, 고압의 가스를 뒤로 분사시켜 그 반작용으로 추진되는 분사 추진 장치의 일종이다.
1939년 8월에는 독일의 하인켈사에서 개발한 추력 500kg의 HeS3
B형 제트 기관을 장비한 하인켈 He 178형이 최초의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 제트 기관은 오늘날의 터보제트 기관과 원리가 같은 것이다. 독일의 하인켈사의 연구와 때를 같이하여 영국에서는 제트
기관의 개척자로 유명한 프랭크 휘틀이 1928년부터 가스터빈 기관의 연구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의 WI형 제트 기관을 장착한 글로스터 E28/39형이 첫 비행을
한 것은 독일보다 2년 늦은 1941년 5월이었다.
제트 전투기로서는 1942년에 완성한 영국의 글로스터미디어, 독일의
메사르슈미트 Me-262가 1944년에 실전에 참가하였다. 미국은 제트기에 관한 한 유럽보다 한 발이 늦은 1941년에 비로소 영국으로부터 휘틀식 터보제트를 구입하여 1942년 10월에 미국 최초의 제트기인 벨
XP-59로 시험 비행을 하였으나, 이 비행기는 날개의 면적이 너무 크고, 시속 665km로서 왕복기관 항공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미국에서
제트기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것은 1944년에 시험 비행을 한 F-80이었다. 이어서 F-84, 우리 나라 6.25 전쟁에도 참가한 F-86 등의 신형이 계속 나왔다. 영국에서는 미디어 반파이어로부터 발달된 많은 개량형이 생산되었으며, 소련도 MIG-15를 주축으로 한
제트기의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 1947년에는 로켓 기관을 장착한 벨 X-1이 세계 최초로 초음속을 돌파하였으며, 1953년에는
F-100 전투기가 음속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 후 세계의 전투기는 발달을 거듭하였는데, 그 중 가장 실용화되고 각광을 받는
우수한 항공기로는 미국의 F-4와 F-14, F-15, F-16, FA-18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소련의 미그 및 수호이 계열과 프랑스의 미라주 및 스웨덴의 비겐 계열을 들 수 있다.
군용 비행기의 제트화에서 일보 뒤진 영국은 전후 수송기에 터보
제트 기관을 장착한 제트 여객기를 제작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앞서게 되어, 1954년에 코밋 I호를 런던과 요하네스버그간에 정기
취항시켰으나, 여압 동체의 피로 현상으로 인한 연속적인 공중 폭발 사고로 말미암아 운항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에 최초로 운항된 B707 여객기는 승객을 100명 이상 탑승시키고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대형 여객기로 등장하게 되었다. 더글러스사에서도 1958년에 DC-8을 선보이게 되었으며, 1955년 소련에서
Tu-104가 첫 운항을 함으로써 소련에서도 제트 시대의 막이 올랐다. 이후 세계 각 항공 회사들은 비행기들의 성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하여, 보잉사는 B-727, B-737, B-747, B-757, B-767 및 B-777을, 더글라스사는 DC-9,
DC-10, MD-80, MD-11등을 생산하였고,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이 합작한 에어버스사에서 A-300 시리즈를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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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보다 빠른 항공기
동력을 이용하는 항공기가 세상에 선 보인지 반세기도 안되어 인간은 소리의 속도를 넘는 비행기를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제트기관의 도움이 컸는데 이외에는 기계공학도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들어있다. 비행기가 점점 발전하자 사람들은
욕심을 냈다. 바로 음속을 넘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사람들이 음속을 넘으려다가 죽었다. 그 이유는 비행기가 튼튼하지
못하여 공중 분해 된 것이다. 탈출을 하려해도 너무 속력이 빨라서 나오기도 쉽지 않았고 나온다 해도 살기는 어려웠다. 나온 순간 인간의 몸은
음속의 속도로 날고 있기 때문에 공기저항으로 인해 내출혈이 생겨 죽는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음속으로 나는 것에 성공했다. 첫 비행기는 X-1이였다. 정식 명칭은 Bell X-1 Glamorous
Glennis 이다.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은 1962년 영국과 프랑스가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의 공동 개발에 대한
협정을 맺고, 1971년에 첫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1971년 대서양 횡단 비행과 더불어 여러 차례의
시험비행을 거쳐 1976년 1월 항공사상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를 취항시켰으나, 항속 거리가 짧고 운용 원가가 높아서 항공사들이 외면하게 되어 생산이 중단되었다.
한편, 소련은 1965년에 파리에서 열린 항공 전시회에 Tu-134, IL-62와 함께 콩코드와 같은 모양의 수송기를 공개하였다. 이것이 Tu-144인데, 원형의 제1호기가 완성된 것은 1968년 가을이었다. 미국은 1963년에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케네디가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보잉사는 B2707-100에 이어B2707-200을 개발하였으나, 여러 면에서 채산성이 맞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사이에 미국 내 반대여론과 미국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사업이 늦어지고, 환경
보호파의 활동이 더욱 강해져 초음속 여객기의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앞으로 초음속 및 극초음속기의 수요가 증대할 것이
예상됨으로 2000년대에는 그 개발이 촉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옆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인 록히드 마틴사의 SR-71이다. 이 비행기는 마하3이상으로 날 수 있고, 순항속도가 마하2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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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항공기
몇 년 전 걸프전에서 대활약을 했던 '보이지 않는 항공기' F-117 스텔스
전투기를 비롯하여 수 년간의 연구 개발 끝에 채택된 미국의 F-22 차세대 제공 전투기 및 B-2 스텔스 폭격기 등을 보고 있으면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인류의 꿈에 불과했던 하늘로의 비상이 너무도 빨리 현실로 이루어져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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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항공기 발전 양상
지금까지 항공기 발전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럼 앞으로의 항공기 발전사는 어떻게 쓰여질지 알아보기 위하여 항공우주연구동향에 대해 간단히 조사해 보았다.
Aerospace America Review 2000 |
Aerospace Sciences |
- 항공 음향학(Aeroacoustics) |
기계공학 |
- 공기역학 감속기(Aerodynamic decelerators) |
기계공학 |
- 유도, 항법, 제어(Guidance, navigation, and contr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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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역학적 측정 기술(Aerodynamic measurement
technology) |
기계공학 |
- 응용 공기역학(Applied aerodynamics) |
기계공학 |
- 대기비행역학(Atmospheric flight mechanics) |
기계공학 |
- 벌룬(Ballo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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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즈마역학과 레이저(Plasmadynamics and las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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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물리학(Thermophys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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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and Logistics Systems |
- 정보 명령 및 제어(Information and command and
contr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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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항공 전자 공학(Digital avion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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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능 시스템(Intelligent syste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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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트웨어(Softwa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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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서 시스템(Sensor syste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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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ulsion and Energy |
- 액체 추진(liquid proplusion) |
기계공학 |
- 항공우주 동력(Aerospace Power) |
기계공학 |
- 하이브리드 로켓(Hybrid Rockets) |
기계공학 |
- 공기 흡입 추진(Air breathing propulsion) |
기계공학 |
- 고체 로켓(Solid rockets) |
기계공학 |
- 에너지를 내는 구성품(Energetic Components) |
기계공학 |
- 전기 추진(Electric propulsion) |
기계공학 |
- 추진제와 연소(Propellants and combustion) |
기계공학 |
- 핵 그리고 미래비행추진(Nuclear and future flight
propul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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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craft Technology and Operations |
- 항공기 운용(Aircraft oper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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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 시험(Flight test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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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기 수송(Air transport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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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항공(General avi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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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보다 가벼운 시스템(Lighter-than-air syste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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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직 이,착륙기(V/STOL) |
기계공학 |
- 다학제적 설계최적화(Multidisciplinary Design
Optimization) |
기계공학 |
Structure, Design and Test |
- 적응 구조물(Adaptive Structures) |
기계공학 |
- 설계(Dsign engineering) |
기계공학 |
- 구조물(Structures) |
기계공학 |
- 지상 실험(Ground testing) |
기계공학 |
- 캐드/캠(CAD/CAM) |
기계공학 |
- 모델링과 시뮬레이션(Modeling and simulation) |
기계공학 |
- 구조 동역학(STructural dynamics) |
기계공학 |
- 상호 작용하는 컴퓨터 그래픽(interactive computer
graph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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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료(Materials) |
기계공학 |
- 생존성(Survivabil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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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innering and Technology Management |
- 사회와 항공우주 기술(Society and aerospace
technolog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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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 엔지니어링(System engineer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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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적인 정보(Technical inform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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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Managem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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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and Missile Systems |
- 미사일 시스템(Missile syste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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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 시스템 효율성(Weapon system effectiven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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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 수송(Space transport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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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로중력과 우주 프로세스(Microgravity and space
proces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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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 시스템(Space syste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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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 활동과 지원(Space operations and suppo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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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자료는 [항공우주동향 2000년 - 미국]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보면 위의 분류표중에 기계공학의 비중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총 50개의 분류중 기계공학과 관련분류가 23개로
항공우주산업에 있어서 기계공학인의 역할을 실로 실감할 수 있다. |
☞ 참고 - 우리나라의 항공기 발전사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로 비행에 성공했을 당시, 우리의 국내 사정은 국가가 흥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고, 이 때에는 근대 과학 문명에 어두운 시대였다. 우리 나라 상공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나타난 것은 1913년인데, 일본 해군 중위인 나라하라가 50마력의 기관을 갖춘 비행기를 타고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공개 비행을 한 것이 처음이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으로 알려져 있으며 안창남은 1922년 12월 10일에 일본에서 분해하여 운반해 온 비행기
금강호를 여의도에서 조립한 후, 서울 및 인천에서 고국 방문 비행을 공개하여 일제하에 있던 한국인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한국인의 기량을 과시하였다. 1920년대에는 안창남을 비롯하여 여러 비행사들이 배출되었고 여류 비행사로는 1925년 중국 운남 육군 항공 학교를 졸업한 권기옥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민간 항공을 개설한 것은 이기연 비행사이며, 1926년 서울에
경성 항공연구소를 창설하였다. 설립자 자신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말미암아 불과 1년의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이 땅에 항공 사업을 일으킨 우리 민항의 창시자이다. 1930년 5월, 신용욱에 의해 여의도에 처음으로 비행 학교가 설립된 이후, 1945년에는 대한
국제 항공사가 설립되었고,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전에 미국에서 스틴슨(Stinson)기 3대를 도입하여 대한 국민 항공사(Korean National Airlines, KNA)로 개칭하고, 정기 여객 노선으로 서울과 부산 간을 취항하였다. 1960년 8월 15일, 또 하나의 항공회사인 한국 항공(Air Korea)이 설립되었는데 당시의 혼란스런 국내 사정상 5개월만에 부득이 휴항을 하게 되었다.
1961년 5. 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후, 대한 국민 항공사는 경영난 등의 원인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정부는 1962년 6월 정부 출자로써 국영 항공 공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으나 계속되는 경영 적자로 1969년 국영 기업으로서는 종말을 짓고, 같은 해 3월에 민영화되어 오늘날이 대한항공(Korean Airlines, KAL)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988년에는 제2의 민항인 아시아나 항공이
발족하였고, 이후 우리 나라 항공 산업의 규모는 해가 갈수록 거듭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현재 신공항 건설 사업이 인천 영종도에 추진되고 있으며, 이 공항은 앞으로 동북 아시아 지역의 중심 공항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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