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문종은 죽기 전에 김종서ㆍ황보인 등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신들은 단종 보위를 내세우며 권력을 자신들에게 집중시켰고,
안평대군을 내세워 수양대군과 대립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야심이 대단했던 수양대군은
이들이 정치를 주도하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가장 먼저 죽인 후,
한명회의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ㆍ조극관ㆍ이양 등을 살해하였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였다.
결국 1455년(세조 1)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 7대 왕으로 등극하였고,
이 사건에 공이 많다하여 정인지ㆍ한확ㆍ이사철ㆍ박종우 등 37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다.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죽기 전 성삼문ㆍ김종서ㆍ황보인ㆍ박팽년ㆍ신숙주ㆍ이개 등을 불러 어린 세자를 부탁했다.
수양대군의 기대와는 달리 문종은 그를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세자에게 수양대군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왕 단종이 즉위하였지만,
그의 앞에는 혹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하면서 대신들의 세력이 강해졌고,
이로 인해 신하의 권력이 왕의 권력을 앞서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군주제도에서 정치 안정의 축은 왕이었으나,
어린 왕이 등장하면서 왕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진 반면,
의정부 대신들은 전에 없던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단종은 의정부 3대신인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에게
나라의 일을 거의 다 맡기게 되었고,
이들은 왕을 대신하여 모든 국정을 처리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초부터 지속되었던 왕도정치 형태는 깨지게 되었다.
어린 단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을 장악한 세 사람에게 수양대군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수양대군을 조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고자 하였고,
특히 중심인물이었던 김종서는 어린 왕을 지켜줄 사람은
자신뿐이라며 수양대군을 극도로 견제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후원하며 수양대군과 대항하도록 했다.
본래 야심이 많았던 인물인 수양대군으로서는 이런 상황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수양대군이 상대세력에 대한 공격을 망설일 때,
그를 재촉해 행동으로 옮기도록 한 사람은 권람과 한명회였다.
이들은 수양대군과 나이도 비슷했고,
권력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권람은 세 번이나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좋은 벼슬을 얻지 못했고,
그런 경력은 정권을 독점한 삼정승에 대한 반감을 갖게끔 했을 것이다.
한명회는 한직에 있으며 수양대군의 계획에 참여하기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면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빈틈없고 치밀한 성격으로 술수에 능했다.
수양대군의 종인 조득림을 통해 안평대군의 종들과 사귀도록 한 후
상대방의 정보를 얻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의정부 대신들과 안평대군의 동향은 모두 수양대군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무사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키워야 함을 수양대군에게 건의하였고,
이에 수양대군은 내금위의 무사들인 홍달손ㆍ양정ㆍ유수ㆍ유하 등을 포섭하였다.
1453년(단종 1) 9월 25일 저녁, 수양대군은
한명회ㆍ권람ㆍ홍달손ㆍ양정ㆍ유수ㆍ유하 등 자신의 핵심 참모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9월 28일에 측근들과 논의한 결과 거사 날짜를 10월 10일로 결정하였다.
거사일이 되자 수양대군은 한명회ㆍ권람ㆍ홍달손을 집으로 불렀다.
그는 측근들에게 계획한 순서에 따라 김종서를 먼저 칠 것임을 알렸다.
김종서만 제거한다면 그들의 계획은 성공한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김종서를 죽일 뜻임을 알렸다.
세 사람을 돌려보낸 후 수양대군은 미리 포섭해 둔 무사들을 불러들였다.
홍윤성ㆍ강곤ㆍ임자번ㆍ최윤ㆍ안경손 등 수십 명이 모였다.
그는 무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에게 붙어 역모를 도모하려 한다며
이들을 제거하여 종묘사직을 편안히 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러한 수양대군의 계획에 전혀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송석손ㆍ유형ㆍ민발 등은 왕에게 먼저 알리지 않은 채
계획을 실행하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일부 무사들은 도망을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ㆍ홍윤성 등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다 따르다가는 일을 성공으로 이끌기 어렵다며
즉각적인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였고, 결국 수양대군의 계획대로 거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수양대군은 종 임운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임운만 데리고 가는 수양대군이 불안했던 한명회와 권람은 권언ㆍ권경ㆍ한서구ㆍ한명진 등으로 하여금
내성 위에 잠복하게 하고, 양정ㆍ홍순손ㆍ유서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따라가도록 하였다.
수양대군은 미리 권람을 시켜 김종서의 집을 엿보게 한 후 바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였고,
양정은 칼을, 유서는 활과 화살을 준비해서 수양대군을 따랐다.
김종서의 집 앞에 이르니, 그의 아들 김승규가 신사면ㆍ윤광은과 함께 경계를 서고 있었다.
김승규는 수양대군이 왔음을 알렸고, 김종서는 방에서 나와 수양대군에게 가까이 올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권해도 수양대군은 해가 저물었다며 들어가지 않았고,
한 가지 청할 일이 있다며 김종서를 나오도록 하였다.
윤광은과 신사면이 김종서의 곁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자,
수양대군은 김종서에게만 비밀스럽게 드릴 청이 있다며 그들에게 물러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았고,
수양대군은 임운을 시켜 청을 드리는 편지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달빛에 비춰보려는 순간,
수양대군은 임운에게 김종서를 칠 것을 재촉하였고,
김종서는 임운이 휘두르는 철퇴에 맞아 쓰러졌다.
놀란 김승규가 김종서의 위에 엎드렸으나, 양정이 칼을 뽑아 그를 쳤다.
수양대군은 단종이 있는 시좌소로 향했다.
승지 최항을 불러내어 상황을 설명한 후 환관 전균에게
이러한 사정을 단종에게 아뢰도록 당부하였다.
수양대군의 거침없는 행동은 어린 단종에게 있어 두려움 그 자체였다.
형식적인 보고가 있은 후, 미리 작성된 생살부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수양대군은 먼저 봉석주와 홍달손에게 방비를 명하고,
순졸으로 하여금 시좌소 앞뒤 골목을 차단하게 하였다.
그는 친히 순졸 수백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며 사람의 출입을 규제하고,
함귀ㆍ박막동 등에게 문을 지키게 하였다.
그는 궐 안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상들이 들어올 때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도록 명령하였고,
들어오는 사람을 순서대로 죽이기로 결정했다.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 병조판서 조극관 등은
궐 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함귀 등의 철퇴에 맞아 죽었다.
윤처공ㆍ이명민ㆍ조번ㆍ원구ㆍ김연ㆍ민신 등도
수양대군이 보낸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집에 있다가 붙잡혀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겁에 질린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나라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하였고,
군사 140명을 배치하여 수행하도록 하였다.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사실상의 정권과 군권은 수양대군이 모두 다 갖게 되어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6월 11일, 단종은 결국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놓았다.
자신이 어려서 큰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니 국사를 맡아달라는 단종의 부탁에
수양대군은 조카를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으로 즉위하였다.
<차주영 (상명대학교 문화콘텐츠 창작소재연구소 전임연구원)의 글을 옮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