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심청전 #심청 동상5 효의 대명사, 소설속의 주인공 심청. #바다7 최근 그 심청이 실제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파도7 그렇다면 심청이 빠졌다는 인당수와 용궁도 현실로 존재했던 공간이었을까?
------------------------------------------------------------------------------------------ [서브타이틀] 역사추적! 시청의 바닷길 ------------------------------------------------------------------------------------------ [ STUDIO 1 ]
#기본 세트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심청전을 모르는 분이 안계실겁니다. 동화책으로, 혹은 옛날 얘기로 보고 들은 심청전은 눈먼 아버지와 인당수에 던져질 재물로 팔려가는 효심 깊은 딸의 갸륵한 이야기지요.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심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소설속의 심청이 실존인물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심청이 실재로 존재했었다고 주장하는 곳은 전라남도 곡성. 웬지 전혀 의외의 장소란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심청전 하면 떠오르는 인당수니, 용궁이니, 연꽃을 타고 올라왔다느니 하는 내용들 때문에 심청전은 바닷가 주변의 얘기라고 많이들 생각하실텐데요, 아마도 백령도가 심청전의 무대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으실거구요.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에 내륙지방인 곡성에서 심청이 실존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과연 심청이와 같이 효심 깊은 처녀가 우리 역사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요?
#팬 심청마을14 섬진강이 흐르는 강변에 자리잡은 전라남도 곡성의 작은 마을, 송정리. 이곳이 소설의 주인공 심청이 실존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들과 얘기4 마을 사람들은 심청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 #인터뷰1,2 저희가 듣기로는 대대로 내려오면서 조상님들 께서 들었다는 말씀을 해주거든. 심청이가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더라... 언제쯤은 대대로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러더라..상상할수 없지. 나도 들은 말이니까.. 아주 오래돼... ---------------------------------------------
#풀샷 걸어가9 실제로 심청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곳. 마을 뒷편 산자락. #심청 마을터13 지난 79년 취락구조 개선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현재의 송정리로 이주해 와,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우물터 가리켜2 마을 안에는 심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곳이 #낡은 집2 많다.
#팬 우물4 동네 한가운데 있는 우물. 심청이가 마을 아낙네들에게 젖을 얻어먹던 곳이라고 했다.
#우물9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 사람들은 심청의 효심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풀샷4 #도화천11 심청 마을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른다. 이곳 사람들은 도화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옥녀탕12 그 도화천에 심청이가 목욕을 했다는 옥녀탕이 있다. 송정리 사람들은 심청이가 왜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을까?
#송광사 풀샷11 곡성과 그리 멀지 않은 전남 순천에 위치한 송광사. 이곳에 송정리 사람들이 심청이 실존인물 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만한 단서가 있다. #수장고 찾아가8 송광사 박물관의 수장고에, 심청과 같은 효녀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기록이 보관돼 있다. #수장고 안으로18 #사적기 꺼내12 일반인들에게는 처음으로 공개한다며 조심스럽게 내보이는 것은 관음사 사적기.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 #사적기10 관음사사적기는 심청과 같은 한 효심 깊은 처녀와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주지 인터뷰 심청전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아요. 그래서 이것이 심청전의 원조가 아닌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
#사적기 넘겨 관음사적기의 내용은 심청전과 거의 같다.
-대흥땅 다만 주인공이 심청이 아닌 원홍장이라는 처녀다.
-원홍장이 중국으로 가10 공양미 대신 값진 물건을 화주승에게 넘겨준 중국 사람들은 원홍장을 중국으로 데려간다.
-불상 보내와9 인당수에 빠지는 대신, 중국으로 건너간 원홍장은 불상을 만들어 고향으로 보낸다.
-아버지 눈 떠8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기뻐서 눈을 떴다는 것이 효녀 원홍장의 이야기다.
#목판18 관음사적기는 곡성에 있는 관음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다. 1729년 백매선사가 관음사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구전을 기록해, 목판으로 보관해왔는데, 6.25때 모두 소실돼버렸다.
#사적기 넘겨11 처음 사적기를 만들 당시 말사였던 관음사에서 보내온 이 사적기가 유일한 것이다.
#사적기17 사적기는 한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자 역사다. 절의 영험함을 알리기 위해 조금은 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에 바탕을 두고 기록한다. 관음사적기는 유명한 고승을 창건주로 내세우는 여느 사적기와는 다르다.
--------------------------------------------- #인터뷰 사적기는 절의 역사를 쓴 책이 사적기입니다. 관음사적기는 특이하게 고승들의 이름을 열거한 내용이 아니라 서민들의 이야기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과장된 내용보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쓰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
#사재동교수 연구실14 현재 130가지 이상 서로 다른 내용으로 전해지는 심청전의 원형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교수14 오랜동안 심청전을 연구해온 사재동 교수. 그는 일찍부터 심청전의 원형으로 관음사적기를 주목해왔다.
#이본들10 심청전의 뿌리는 여러가지 설화로 집약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화가 심청전과 한두부분만 일치하는데 반해, 관음사적기는 이야기 전개 대부분이 심청전과 유사하다. 관음사적기를 심청전의 원형으로 보는 이유다.
--------------------------------------------- #인터뷰 심청전승의 형성 전개 과정에서 획기적인 단계를 이루는 그래서 다음 단계 심청전의 원형이 생겼 을 법한 위치를 홍장설화, 관음사 연기 전설이 가지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심청전 전체에 형성 전개 역사상에서 과음사연기설화, 홍장전설 은 재조명 돼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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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적기 앞에서
사적기는 한 절의 역사입니다. 비록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긴 하지만 관음사적기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적기에 등장하는 처녀 원홍장은 실제 인물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설 심청전의 주인공인 심청이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청의 모델이자 실존 인물인 원홍장은 어느 시대 사람일까요?
#기록 나와 / 晉國 永康 丁亥
이것은 중국으로 건너간 원홍장이 불상을 만들어 고향으로 보낸 시기를 나타내는 기록입니다. 진국 영강 정해년. 연대로 환산하면 서기 3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의 얘기가 되는데요, 그렇다면 원홍장 또한 1700년 전의 인물이라는 얘기지요. 1700년 전이라면 삼국시대의 일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관음사는 원홍장이 보내온 불상을 모셔서 창건한 절입니다. 과연 심청이가 1700년 전의 인물인지 관음사로 가보겠습니다.
#트래킹10 관음사는 심청마을이 있는 송정리에서 10km쯤 떨어진 꾀 깊은 골짜기에 있다.
#관음사12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의 한적한 산자락에 위치한 관음사.
관음상을 모신 원통전을 중심으로 십여채의 작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고 평범한 절이다. 6.25 때 소실된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최근에 새로 지어졌다.
--------------------------------------------- #인터뷰 24동 건물 있었는데, 모든 건물 소실됐는데 오직 두 개의 건물만 소실이 안됐거든요.하나는 누각, 금당각이고 하나는 요사채, 오래된 것 같지는 않고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 같아요. ---------------------------------------------
#스님 설명15 가장 오래된 흔적이라고는 소실을 면한 요사체일 뿐이다.
--------------------------------------------- #현장음 그 때 빨치산들이..요사로 사용했던 흔적이 뭐냐면.. 조선민주주의라고 써있죠?.. 교양부라고 써 있어요 이 방에서 뭔가 교육을 시켰던 흔적들이고... ---------------------------------------------
1700년 이라는 오랜 역사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별4 #오중창 기록8 관음사가 1700년 전에 창건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 고려말인 1372년에 이미 오중창을 했다는 것이다 --------------------------------------------- #인터뷰 옛날에 사적기에 의하면 오중창이 됐다고 기록 나오는데 삼국시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누대에 걸쳐 전해져내려오는 형상인 불두가 있는데, 앞에 재직하던 광민스님께서 땅에서 발굴하셨어. ---------------------------------------------
#트래킹/무각사10 취재팀은 관음사 창건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될만한 그 불두를 찾아보기로 했다.
#광민스님 불상 가져와12 광민스님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불두는 흙으로 만든 소조불이었다.
#꺼내12 불상은 온전한 모습이 아닌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보살상9 선대의 주지가 땅에 묻어놓았던 것으로 관음사를 재정비할 당시 발견됐다. 관음사 창건에 관련된 중요한 불상이다.
--------------------------------------------- #인터뷰 파불을 모시거나 부처님이 파불된 것을 부처님 으로 모시지 않고 작품이나 문화재로 모시면 죄스러우니까 안되니까 매불합니다.. 뭍습니다. ---------------------------------------------
#광민스님 설명6 #보살상16 광민스님과 당시 불상을 찾아낸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관음사 창건 이래 대대로 모셔오던 홍장보살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17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에게 보여3 불상의 제작 시기를 알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갔다.
--------------------------------------------- #인터뷰 이 경우는 시대 양식을 잘 대변하는 소조불 입니다. 고려시대 초기 10세기 초에서 중엽 무렵을 잘 대변하는 보살상입니다. 남아있는 불안의 상태로 볼 때 백호봉이 크게 깊이 뚫려 있다거나 얼굴의 길이가 폭에 비해 짧다거나 인중의 길이가 짧고 뺨에 살이 많이 올라있는 모습들은 고려시대 초기 10세기 전반이나 중엽 경에 제작된 보살상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원통전11 그렇다면 왜 이 불상을 중국에서 온 홍장보살상이라고 믿고 있을까? 그것은 불상을 모셔둔 위치 때문이다.
#diss.원통전18 6.25로 소실되기 이전 관음사의 사진을 보면 관음불교의 가장 중요한 불상을 모신 원통전 바로 위에 또 하나의 법당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던 곳이다.
#diss.불상9 이 절에서 가장 중요한 불상이기 때문에 중창 때마다 다시 만들어 모셔두었다는 것이다.
--------------------------------------------- #인터뷰 주로 천불을 만드는데 많이 씁니다. 다량으로 많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는 많이 쓰지만 법당의 주전불로 독전으로 봉안하는 경우는 드물죠. ---------------------------------------------
#트래킹13 취재팀은 불두에 대한 또 다른 단서를 찾아나섰다. 중국 동남부 해안지역에 자리잡은 영파시. 이곳은 일찍이 남방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던 #천동사14 곳으로 관음사 창건 당시인 서기 300년 경에는 중국에서도 관음 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곳이다. #주지와 얘기3 --------------------------------------------- #인터뷰 -이 절 언제 지어졌나? 1700년 전, 서기 300년이다. 서진 영강 원년이다. ---------------------------------------------
공교롭게도 관음사 창건 시기와 일치하는 절이다.
#불상 보여봐13 혹시 홍장보살과 비슷한 양식의 불상을 발견할 가능성은 없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불상 보는 주지15 #없다고2 지금 이 지역에 남아있는 모든 불상은 명.청 시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했다.
#풀샷7 태평천국의 난과 문화 혁명 등의 큰 재해를 겪으면서 오래된 불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 #인터뷰 남아있는 것이 없다. 1700년 동안 전쟁, 화재 등의 재해로 모두 파손됐다. ---------------------------------------------
#트래킹7 결국 불상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팬 주산박물관8 불상 찾기를 중단하고, 많은 문헌을 보유하고 있는 주산 시립 박물관을 찾았다.
#기록 찾아봐4 불상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변종론11 변종론은 중국 진말송초의 한 불교학자가 기록한 중국 황실의 불교 관련 문헌이다.
#기록12 변종론의 내용을 정리해놓은 책에서 불교 전파에 관련된 기록을 찾았다. 원송옥상. 4세기 초에 멀리 불상을 보냈다는 것이다.
--------------------------------------------- #인터뷰 원송은 해외로 스님 파견하거나 불상을 보내는 등 불교를 전파하는 것을 말한다. --------------------------------------------- --------------------------------------------- #인터뷰 여기에서 원송이란 것은 일본이나 한반도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중국은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았다. 불교수용 이후 진대의 황제가 불교 신봉 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불교를 통해 왕래하고 불상을 선물하기도 했다. ---------------------------------------------
#진서17 중국 진서에 남아있는 4세기 초의 이 기록은 적어도 3세기 후반에 이미 한반도에 불상을 보내고 불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관음사15 원홍장이 중국에서 불상을 보내와 창건됐다는 관음사는 17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 [ STUDIO 3 ]
#MC 기본 세트에서
1700년 전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 일대에 관음불교가 성행했다는 사실, 그리고 불상을 해외에 많이 보냈다는 기록. 이것은 관음사 창건에 관한 사적기의 내용이 신빙성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청의 모델이 되는 원홍장이란 처녀는 1700년 전의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남경 상인 그림 들어와/ 그림 가리키며 설명
자, 이 그림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계신 심청전의 한장면입니다. 심청이와 눈먼 아버지가 이별하는 장면이지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처녀가 팔려가는 심청이고 이 사람이 심청이의 아버지, 옆에서 슬퍼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슴 아픈 부녀의 이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 사람은 심청이를 산 상인이겠군요. 소석 속에서는 이 상인을 뱃사람, 혹은 중국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아버지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서 중국 상인에게 팔려가는 어리디 어린 소녀 심청. 이 장면에서 누구나 한 번쯤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실겁니다.
인당수에 빠지는 소설 속의 심청의 운명과는 달리 1700년 전의 실존 인물이었던 원홍장은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갑니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불상을 보내오죠.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자, 이 지도를 보시죠.
#MC 옆으로 절강성과 한반도 지도 나와
원홍장 처녀가 불상을 보낸 중국 절강성과 한반도의 곡성은 보시다시피 엄청난 거리인데요, 관음사적기에는 불상을 배에 실어 보냈다고 돼있습니다. 오늘날처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을 1700년 전에, 과연 불상을 실은 배가 대양을 건너 곡성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주산열도 풀샷12 중국 동남부 절강성 근해에는 2000개가 넘는 섬들이 분포돼 있다. 주산열도라고 불리는 이 곳은 우리나라 서해안과 흡사한 다도해 지역으로 일찍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선박11 또한 중국 내륙과 남방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바다를 터전으로 활동하는 해상 세력들의 중심지였다.
#관음상18 이곳은 또한 중국 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로 들어온 불교의 시발지가 바로 이곳 절강성 보타도.
#바다 팬12 보타도를 비롯한 주산열도 곳곳에 일찍부터 한반도와 교류했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신라초13 보타도 앞바다에는 신라초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신라 상인들이 관음상을 싣고 가려다가 바위에 부딪혀 좌초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이 바위를 신라초라고 부르고 있다.
#관음도3 신라 상인과 관련된 지명이 붙여질만큼 #항해하는 배10 중국 동남부 절강성과 한반도는 일찍부터 바다를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영파박물관9 이 지역에서는 한반도와 관련된 많은 자료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긍9 중국 송나라의 사신으로 1123년 고려를 다녀간 서긍의 출발지가 바로 절강성이었다.
#의천13 고려의 천태종을 창종한 고승, 대각국사 의천은 1085년 절강성으로 불교 유학길에 올랐다.
#고려 객사9 고려 사신들이 묶는 객사가 따로 있을 정도로 사신이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상평통보8 조선에서 통용되던 화폐 상평통보가 이 지역에서 상당량 출토됐다.
--------------------------------------------- #인터뷰 송대에 이미 고려는 이곳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당시에 무역, 문화교류,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
#송대선박유물8 고려와 송의 빈번한 왕래는 바다를 건널 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송대무역선10 이것은 당시에 두 나라가 대양을 항해할만한 선박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박물관내 지도14 배가 기본적인 교통 수단이었던 주산 열도는 일찍부터 항해 기술이 발달했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 배를 이용한 대양 항해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하모도 신석기 유적16 주산열도에 속하는 섬 하모도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다. 신석기 시대의 인골과 함께 7천년 전의 배에 사용됐던 노가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 항해의 역사를 짐작케한다.
--------------------------------------------- #인터뷰 신석기시대부터 표류나 기타 방법으로 일본이나 한반도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증명할 자료나 기록은 현재 없다. ---------------------------------------------
#윤명철 교수 작업19 고대 항로를 종합 정리하는 논문을 준비중인 동국대 윤명철 교수. 지난 97년, 중국 남부와 한반도를 잇는 고대 항로를 입증하기 위해 직접 뗏목을 타고 주산열도를 출발했다.
--------------------------------------------- #인터뷰 중국에 강남지방과 한반도는 상당시 거리 먼 곳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선사시대부터 고대에 이르기까지 교섭 활발한 것 같습니다.특히 고대 에는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 고려 이 세력들은 대부분 강남지방과 교섭했거든. 워낙 거리가 멀기 때문에 교섭 가능성을 의심하는 견해들 있었어요. 자연조건상으로 실증을 해보이면 교섭 가능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 것이죠. 그래서 저희가 97년도에 고대인들이 출발하든 절강성 주산군도 앞을 출발했거든, 17일만에 항해한 끝에 흑산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틀 머물고 고군산군도 앞을 지나서 인천만까지 들어왔죠. 이 항해를 통해서 저희는 선사시대부터 역시 인간은 자연조건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교섭이 가능했었구나.. 이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입증한 것입니다. ---------------------------------------------
#해류 C.G.11 황해에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는 중국 똥쪽 해안을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움직인다.
#항해로 C.G.8 남중국을 출발해서 이 해류를 이용해서 남동풍을 받아 항해하면 한반도 남서해안에 쉽게 도착 할 수 있다.
#해남 앞바다11 배가 닿게 되는 곳은 주로 흑산도와 해남 일대.
#군곡리 패총 유적19 지난 83년 해남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패총 유적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조개무덤은 규모가 2만평에 이르는 것으로 이 지역에 중국과 교류했던 대규모 해상 세력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유물11 군곡리 패총에서는 중국과의 교류를 알려주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됐다.
#복골5 그 중 주술에 사용하는 복골은 중국산으로 밝혀졌다.
#화천5 또한 중국 신나라의 화폐, 화천은 교류의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 #인터뷰 일단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요건, 문화 루트로서의 지정학적 위치, 이렇게 해서 당시에는 여기가 땅 끝이 아니라 땅 시작, 문화적으로 봐서는 여기서 해양문화가 들어와서 위로 올라가는... ---------------------------------------------
#섬진강가 트래킹11 일단 해남 일대에 도착한 배가 곡성까지 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섬진강이 있기 때문이다.
#줌인 곡성읍10 물이 마르는 갈수기에는 어렵지만 섬진강을 따라 곡성까지 배가 드나드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강가/ 얘기6 심청마을로 흐르는 섬진강 주변의 옛 지명이 그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 #인터뷰 옛날에는 여기를 보고 두포라고 했어요. 내륙 깊숙이 들어와있는 곳에 강에 포구가 있다는 얘기는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이죠. -강에는 포자를 쓰지 않죠? 그게 없죠. 거의 없어요. 강계같은 데.. 옛날엔 강계포구 라고 하기도 했어. 근데 그것은 금강 하구에서 아주 짧은 거리밖에 안돼. 근데 여기는 3백리가 넘어요. 그런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두포리라고.. 두포를 만들었다는 것은 여기에 대단한 선단이 정박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무역의 중간지점이다.. 무역 항구라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죠. ---------------------------------------------
#해로 C.G.11 중국 동남부를 출발한 배가 바다를 건너고 강을 따라 전라도 내륙에 있는 곡성까지 들어오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 동남부의 절강성과 곡성은 뱃길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 문화는 육지보다 오히려 바다를 통해서 많이 전해졌고 그 전파 속도로 상당히 빨랐다고 합니다. 해남을 비롯한 서남부 해안 일대에서 중국 화폐가 발견됐는데요, 기원 직후에 활발히 통용되던 이 화폐가 말해주듯이 한반도 서남부 해안지역과 중국 동남부 절강성과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왕래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홍장이 살았던 서기 300년 경인 1700년 전 쯤에는 이미 상당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국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홍장처녀가 중국으로 팔려갔다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DISS. 남경상인 이미지의 기본세트
그렇다면 중국 상인들이 그 많은 지역 중에서 하필이면 내륙 깊숙한 곡성까지 들어와서 처녀를 데려갔을까요? 홍장 처녀의 빼어난 미모 때문이었을까요? 중국 상인들이 곡성에 들어왔던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공방산12 심청마을 주변에는 중국 상인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마을의 뒷산은 공방산으로 불린다. 옛날 공씨 성의 중국 상인이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인터뷰 이 주변을 살펴보면 요 앞에 배정 마을이 있습니 다. 배가 정박해 있는 곳이고, 산너머 배 고지가 있습니다.옛날에 배를 고리로 메놨다고 해서 이 주변에는 중국 상인과 많이 교역이 있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구전으로 그렇게 알고 있고 전설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
#담장 앞7 심청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온통 검붉은 담벼락.
#산화된 돌7 담을 쌓아둔 돌은 모두 검거나 붉은 녹빛을 띄고 있다. @비가 오면 녹물이 흘러내려요.. 여기서 쇠녹이.. 계속 흘러내리거든요..
#돌 가리키며 얘기17 비만 오면 녹물이 흘러내린다는 돌담. 심청 마을에 담을 쌓아둔 돌은 모두 철 성분이 다량으로 함유된 것들이다.
#붉은 돌8 중국 상인들이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곡성까지 온 이유는 바로 철이었다.
#칠지도22 칠지도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칠지도는 서기 369년 백제에서 제작해 일본 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칼이다. 그런데 칠지도를 만든 철의 산지가 바로 곡성이라는 것이다.
#일본서기18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칠지도의 재료가 되는 철 산지가 어디인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서쪽에 물이 있는 곳, 이곳을 곡나라고 한다. 이 곡나를 지금의 곡성으로 보고 있다.
--------------------------------------------- #인터뷰 통일신라때 전라남도 곡성을 지금처럼 곡성군 이라고 불렀습니다. 곡성이라고 하는 지명은 그냥 떨어진 지명이 아니고 앞선 백제떄의 지명 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백제때 곡나라고 부르던 그 지명하고 곡성은 연결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땅이나 토지를 가리킨다든지, 또는 일정한 영역의 성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바로 곡성, 곡나 같은 지명을 가진다고 봐야만 되겠구요, 또 하나는 일본 서기에 보면은 곡나 철산의 지형을 묘사해 놨는데 서쪽으로 강이 흘러가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이것은 곡성지역의 지리적 형세와 대략 부합되고 있습니다. ---------------------------------------------
#강 건너가14 그렇다면 실제로 곡성 일대에 중국 상인들이 찾아 와서 철을 가져갈만한 대규모 철광이 존재했을까?
#걸어와10 지금도 섬진강 주변에는 노천 광산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다. #광산10 불과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질 좋은 철이며 옥, 금 등을 활발하게 채굴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질 좋은 철이 났던 만큼, 철과 관련된 지명 또한 적지 않다.
--------------------------------------------- #인터뷰 여기서 가면 살포리라는 곳이 있습니다만 살포리 바로 위에 풍곡골, 이 근방이 전부가 야철지, 말하자면 주물을 만들었던 곳이라고 하는... -이 일대 전체가요? 예. ---------------------------------------------
#철관련 지명17 이 지역에 전해지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곡성에는 섬진강과 두포를 중심으로 수 많은 철광이 존재했고, 그 철을 재련하는 야철지들이 밀집해 있었다.
--------------------------------------------- #인터뷰 쇠, -실제로 보셨나? 봤지요. 쇠덩어리가.. 파 보면 군데군데 이만큼씩 군데군데 뭉쳐서 썪어서.. 뻘건 것이 나왓지요. 뻘건 흙이.. 그게 말하자면 독을 용광로에 넣어서 썪은 것 같애요... ---------------------------------------------
#석아살 풀샷8 심청 마을 인근에는 석아살이라는 지명이 있다. 과거 이 지역에 대규모 대장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땅 파봐5 #숯 발견18 석아살 부근의 야산을 파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숯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시기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철을 녹이느데 쓰였던 참나무 숯이 분명했다.
#섬진강11 곡성 지역은 고대부터 대규모 철산지였다. 그리고 섬진강은 그 철을 실어나르는 길이 되었다.
#마한 지도 C.G.14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 곡성은 마한의 땅이었다. 영산강 지역의 나주, 해남 일대와 함께 독립된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진서 기록15 마한에 속해있던 세력과 함께 중국과 교류했다는 진서의 기록은, 곡성지역과 중국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 #인터뷰 고대사에서 철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의 잠재적 능력의 척도가 되는 것이죠. 그러한 중요한 물적 자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갑옷을 만든다든지 농기구를 만든다든지 화폐 대용으로도 철이 사용 되고 있었던 것이죠. 철종이란 것이 예가 되겠습 니다. 얼마나 많은 철장을 확보하고 있는냐 하는 것이 사회의 발전의 잠재력을 측정할 수 있는 요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상인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면서 여기에 와서 철을 구입 하게 됐고 그것을 다른 물자와 교환하는 관계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두포11 원홍장이 살았을 당시인 1700년 전, 이 포구는 철을 얻기 위해 정박한 국제 무역선들로 붐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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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 머리에 서 있는 심청 & 용궁이미지 배경 세트
여러분은 심청전..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인당수, 용궁 얘기를 가장 먼저 생각하실텐데요, 그런데 정작 심청전의 원형이라고 하는 관음사적기에는 인당수나 용궁 등의 얘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원홍장이 중국 사신들을 따라 바다를 건너 간 것만 얘기되고 있죠. 소설과는 달리 관음사적기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일 텐데요,
소설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당수와 용궁. 이것은 그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한 누군가의 상상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당수와 용궁은 실제로 현실 속에 존재하던 공간이었을까요?
#파도/배/물결19 인당수는 과거 바다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발달하지 못한 항해술로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항로상의 위험 지역. 그렇다면 인당수는 어디였을까?
#인당수 추정지역9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이 많은 서남 연근해 곳곳에 인당수가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임수도22 위도가 바라다 보이는 변산반도 격포 앞바다의 임수도. 바다 밑이 항아리 모양이어서 물살이 돈다는 이 곳도 인당수로 추정되는 지역 중의 하나다. 임수도란 이름 또한 워낙 위험한 지역이어서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비로소 안전하게 바다길에 접어든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 #인터뷰 이 지역은 아주 위험한데고요, 만조시에는 상관 없는데 갈조시에는 아주 위험한 뎁니다. 이 쪽에 가까이 접안하면 배가 걸려버려요. ---------------------------------------------
#임수도8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들어온 중국 배가 다시 남중국으로 갈 때 이 지역은 피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 #인터뷰 왔다가 같은 길을 갈수는 없어요. 자연조건이 올 때는 이런 길을 통하게 되는데 돌아갈 때는 오히려 계절적으로 늦습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주로 북풍 계열의 바람을 쏘여야 되는데,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가면 북서풍을 받아서 갈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 출발해서 위로 어느정도 올라갑니다. ---------------------------------------------
#해로 설명17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로서는 자연의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했다. 지금과 같은 직항로는 있을 수 없었다.
--------------------------------------------- #인터뷰 그러니까 바로 이런 지역이라든가 군산 앞에 죽막동이라든가 위도라든가.. 또 위에 지역, 이런 지역에 보게되면 항해상에서도 반드시 거쳐야 되는 경유지가 되고 또 물목 상으로도 위험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
#팬 죽막동14 임수도가 바로 보이는 변산반도의 죽막동. 이곳은 고대 한반도 서해안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항해의 출발지였다. 이 죽막동에 대규모 제사터가 있었다.
#유물6 이곳에서 실물을 축소해서 만든 각종 모제품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곡옥6 유물은 대부분 바다신에게 바치기 위한 용도로, #동경5 옥이나 철로 만들어진 제품이 많았는데,
#목 잘린 말8 특이한 것은 목이 잘린 말 모양의 토제품이 다량 발굴됐다는 것이다.
--------------------------------------------- #인터뷰 말 머리가 제대로 붙어서 나온건 없거든요. 그게 실제적으로 제사지낼 때 말머리를 쳐서 버렸다든 가 하는 것은 밝힐수가 없지만 고구려 산성이라 든가 그런걸 보면 말 머리가 부러져서 나온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걸 보면 제사 지내는 의식속에서 그런게 행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위도 풀샷12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최대의 표현, 인신공희. 그렇다면 인당수와 제사 유적이 있는 이 주변 어디에서 실제로 인신 공희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노인 따라가11 임수도를 사이에 두고 죽막동 제사유적의 반대쪽에 위치한 위도. 최근 위도에서 인신공희와 관련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찾아갔다.
@사람 대신으로 여기다가 떨어뜨렸는가, 몰라요...
#집으로 들어가14 #문인석 보여9 해안가에서 발견됐다는 유물이 마당 한켠에 세워져 있었다.
@아, 이겁니까? 유물은 무덤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상의 모습과 비슷했다.
#문인석 T.U.10 위도 주변에서 모두 네구가 발견됐다는 문인석 모양의 석상.
#모자/얼굴8 이 석상은 오랜 시간 파도와 모래에 휩쓸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닳아 있었다.
#감정12 또 다른 석상. 전형적인 송나라 복식을 하고 있어다. 주민들은 석상을 중국 선원들이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서 빠뜨린 고사용으로 알고 있었다.
--------------------------------------------- #인터뷰 고사용으로 왔지만은.. -고사지내는 거요? 고사 지내는거여서 배들이 여기 온다치면 소를 잡아서 소 머리를 쓰거든요, 그 대신으로 비석 이라도 놓고갔는가,, -아 여기 정박하다가... 중국 배들이요? 네. 그렇게 생각해요.. ---------------------------------------------
#속일본기16 그렇다면 사람을 재물로 삼았던 일이 실제로도 있었을까? 8세기의 사실을 담고 있는 속일본기의 기록은 적어도 8세기 이전까지는 실제로 인신공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인터뷰 살아있는 사람을 인신공희하던 사례가 과거에 있었는데 후기로 내려오면서 이것이 국법에 묶여서 불가능하게 되자 사람의 형상을 빚어서 이것을 인신공희 대신으로 썼던걸로.. 그래서 이 목적은 일단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용도로 썼던 걸로 추정됩니다. ---------------------------------------------
#바다/문인석9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위도와 죽막동 일대에서 발견된 인신 공희의 흔적.
#문인석5 무덤의 토용이 순장의 대용품이었다면 이 석상은 인신공희의 흔적임이 분명하다.
#사진 찍어5 위도에서 송대의 중국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는 유물이 발견됐다.
#숭녕통보11 중국 송대의 숭녕통보다. 위도가 중국으로 가는 거점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팬 걸어가는 사람들18 고려 사신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했던 위도. 죽막동과 더불어 위도는 먼 항해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집결지였다.
#수성당 도착8 위도에는 옛부터 당제를 지내던 수성당이 남아있다. 바다의 신에게 풍어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문열고 들어가11 제사를 올리던 수성당. 요즘도 매년 음력 정월 초이틀이면 이곳에서 당제가 벌어진다. #그림6 주변의 터로 보아 과거에는 규모가 지금보다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걸어가7 당집 주변에는 지금도 당을 새로 개축할 때 버린 기와가 널려 있다.
#기와 발견17 8가지의 서로 다른 형태와 문양의 기와가 발견되고, 땅 속 1m까지 이런 기와가 뭍혀있는 것으로 보아, 당집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인터뷰 구전에 의하면 쓸만한 기와는 그대로 두고 파손된 기와만 보수한 것으로... ---------------------------------------------
그런데 우리는 버려져 있는 그 기와에서 용궁을 볼 수 있었다.
#용궁무늬 기와28 바다의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과 삼층 누각집, 그리고 버드나무. 전형적인 용궁의 모습이다. 용궁은 무사 항해를 기원하던 상징문양이었다.
--------------------------------------------- #인터뷰 수성당의 제사터 유물, 위도 당집에서 발견된 용궁무늬 기와, 항구에서 발견된 문인석 이런 다양한 유물, 유적을 정리해볼 때 이곳은 항해와 관련된 곳이고 그 목적은 무사 항해를 기원하던 해민들의 염원이 담겨있던 신성시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
#바다 Z.O.15 먼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기원의 상징. 그것은 인당수와 용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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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세트
심청전을 보면서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생각했던 인당수며 용궁도 사실은 고대 바다 사람들이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 소설 심청전 이본 들춰보며
소설 심청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향전이나 흥부전, 홍길동전 등의 고대 소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소설은 대부분 앞머리에 얘기의 시대와 장소를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 보통인데요, 춘향전의 경우 전라도 남원땅이라는 배경 설명은 어떤 책이든 모두 일치합니다. 흥부전이나 홍길동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 홍길동의 고향을 두고 잠시 논란이 있었던 것도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은 일정한데, 다만 실제 지역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해석상의 차이가 조금 있었던 것 뿐이지요.
그런데 심청전은 다릅니다. 책마다 유리국 오류촌이니, 남군땅이니, 황주 도화동이니 해서 배경이 모두 다르게 표현돼 있습니다. 이것이 소설 심청전이 다른 고대 소설과 다른 특징인데요,
그렇다면 어째서 유독 심청전에만 이렇게 다양한 공간적 무대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유리국이니 남군땅이니 하는 곳마다 실제로 심청이가 존재했던 것일까요? 심청전에 다양한 공간 배경이 등장하게된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팬 심청각8 일찍부터 소설 심청전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백령도. 백령도에는 심청을 기념하기 위한 심청각이 #심청각 내부2 세워져 있다.
#모형10 이곳에는 소설 심청전의 내용을 형상화한 모형물과, 심청과 관련된 영화, 오페라, 판소리 등에 관한 자료가 진열돼 있다.
#심청상10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 뱃머리에 서있는 모습의 심청 동상은 이곳이 심청의 고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봉이라고 합니다.. #연꽃바위11 백령도 서남쪽 바다에는 이 지역 사람이면 누구나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연꽃을 타고 떠올랐다고 말하는 연꽃 바위가 있고,
#인당수14 북한 지역인 장산곶 좌측 대간바위 앞이 바로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는 심청이 뛰어들었다는 인당수의 위치다.
--------------------------------------------- #인터뷰 1,2 바로 넘어가서 몽금포가 있고, 거기에서 동북쪽 으로 황해도 황주 도화동이란 데, 심청전의 고향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거기하고 이쪽 인당수하고 백령도하고 연꽃바위하고 이것은 한 세트가 돼있는 거죠. 심청전의 이본 약 85개 가운데 고유 명사 지명이 이 백령도와 딱 드러맞아요. ---------------------------------------------
#도로표지판9 심청전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은 백령도 뿐만 아니다. 전북 부안에도 심청 마을이라고 부르는 도화동이 있다.
#팬 도화동14 이 지역은 과거에 마을 입구까지 바다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배엎어진 산이라는 특이한 지명과 대규모 고인돌이 남아있다.
이곳에 해상교역을 기반으로 하는 대규모 세력이 #고인돌7 존재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인터뷰 아주 오래된 얘기로 구전으로 쭉 내려왔던 거예요. 마을 이름도 도화동이구요. 마을 어르신 들이 구전으로 내려오기를 여기가 혹시 심청이가 살았던 도화동이 아닌가 이렇게들 생각을 했죠.. ---------------------------------------------
#심청 관련 지역 지도12 백령도와 부안 외에도 심청 관련 설화나 지명이 전해지는 곳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 지역들에서 몇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백령도지역 C.G.8 바다와 통하는 곳에 오래된 마을과 절이 있고 해상 교통이 가능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부안지역 C.G.8 내륙 역시 과거 바다였거나 강을 통해 바다와 교통이 이어지는 곳이다.
#주산군도10 고대부터 한반도 남서지역과 밀접하게 교류했던 중국 절강성의 주산군도. 놀랍게도 이 곳에도 심청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여럿 있다.
#도화동12 그중의 한 곳, 불교가 들어오기 전 중국 최대의 도교 성지였던 도화도. 양 쪽에 산이 있고 바다를 바라보는 지형. 도교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명당, 도화촌이다.
#백작사13 도교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불교 사찰이 들어서 있다. 심청전에 등장하는 도화동도 도교에서 비롯됐다.
#선박11 주산열도의 모든 섬을 연결해주는 항구.
그런데 이곳에 눈에 띄는 지명이 있다.
#심가문 항14 심가문. 주산 열도의 가장 큰 항구 이름이다. 이 지역의 세력가였던 심씨 일가의 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심가문과 소설 속의 심청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 #인터뷰 심씨는 돈 많은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이 지역의 세력가로 유명했습니다. 일본이나 조선을 대상 으로 장사를 했던 국제 무역상인이었습니다. 이곳의 항구는 위치가 좋아서 배가 드나들기에 편리했습니다. 이 지역의 세력가인 그의 이름을 근거로 이 지역이 심가문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
#심씨마을17 심가문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 이곳에 지금도 심씨 마을이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항구였던 이곳은 조선을 오가던 심씨 세력의 중심지였다.
#심씨4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심씨 가문의 후손들이 몇 가구 살고 있다.
#이름 보여줘20 이곳에 있는 심씨 가문에서 심청의 단서를 찾을 수는 없는 걸까?
--------------------------------------------- #인터뷰 -혹시 족보나 비문 같은 것 없나? 그런 것 없다. 문화혁명 겪으면서 다 없어졌다. ---------------------------------------------
#트래킹12 심가문과 심청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더이상 추적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이곳의 심씨가 수많은 조선인들과 접촉했을 것이다.
#심가문항6 분명한 사실은 심씨가 조선을 드나든 만큼 수많은 조선 상인들도 이 심씨 항구를 오갔을 것이다. #심수로9 심수로를 통해 교류를 이어왔던 심가문과 조선 상인. 심청전의 탄생과 심가문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것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는다.
#물살10 #관음사적기16 심청전은 뱃길로 이어진 한국과 중국 간의 교류의 역사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