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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득 그리운 생각 원문보기 글쓴이: 대아정
인류역사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이집트왕 메르넵타의 전승비문(BC 13세기 후반)에 메르넵타에게 정복된 한 종족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의 대부분은 서구 유럽의 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허구적으로 만들어지고 날조되어 왔다. 예컨대 흔히 거대한 제국을 연상시키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지금까지 전문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출토되고 확인된 고고학적 흔적이 거의 없다. 소위 "다윗과 솔로몬 왕국"이란, 근대 국가 이스라엘을 철기 시대로 역투사시킨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의 완전한 왜곡이다. 유대문명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수 천 년에 걸쳐 다른 나라의 역사에 거듭 나타나지만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 일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이 지구상에 유대인과 같은 비참한 문명의 기록을 가진 민족은 없다. 그런 족속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이 점지해준 땅, 2천여 년 전 자신들의 조상이 살았던 땅이라는 가공의 소유권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을 처밀고 들어가 서방세계를 등에 업고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인공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2차 세계대전 당시 3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죽은 홀로코스트가 모든 학살을 대표하는 인류의 범죄가 된 것은 생존자들의 치열한 죄상 조사와 기록, 책과 영화, 언론을 통한 반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대족속답게 홀로코스트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쓰고 있다.
1915. 영국 - 맥마흔 선언, 전후 오스만제국을 아랍에게 인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국제연맹은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들 중, 터키를 제외한 지역을 한시적으로 식민지화 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전쟁
중, 영국은 이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기 위하여 현지인들의 협조를 구하면서 아랍인들에
게 이 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하는 맥마흔 선언을 1915년에 발표하였다.
1917. 영국, 벨푸어 선언 - 유대국가건설 약속
국제 시오니즘 운동의 수장 격이었던 로스차일드에게는 외무장관 벨푸어가 국제적 유대인 사회가
영국에 협력할 경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국을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하였다. 팔레스타
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19세기 후반에 동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생긴 <시오니즘운동
>은 제1차세계대전중인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의 향토(국가)건설을 보장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여 영국위임통치령이었던(1923∼48)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이 살게 되었고
아랍 농지를 사들여 살 터전을 마련했다. 특히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주의가 유대인에 대한 박
해를 강화하자 국가 건설이 급속도로 추진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유대인 국가의
실체를 나타낼 만큼 이주가 확대됨으로써 1945∼1946년에는 유대인 이주자가 팔레스타인 인구의
31%, 유대인이 소유한 땅은 팔레스타인의 5.67%가 되었다.
1922년, 팔레스타인 인구 조사는 종교별로 구분하여 약 589,200 명의 무슬림과 83,800명의 유대
인, 71,500여명의 그리스도인이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지역에 점차
유대인의 이민 수가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점차 기존에 있던 아랍인들과의 마찰을 낳는 결과
를 빚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 발생했던 시온 주의자들은 이 지역에 유대인 정부를 건설하기를 희
망하고 있었으며 아랍인들 대다수는 이것이 곧 비(非)유대인들의 추방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1923. 영국의 팔레스타인지역 위임통치령 시작
전후에 이 지역은 영국이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영국은 아랍과 이스라엘 양측
을 모두 배신한 상황이었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이중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 지역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남(南)시리아의 4
개 지역으로 분할한다. 남시리아 지역은 공식적으로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었
고, 윈스턴 처칠은 이 지역을 요르단 강을 경계로 구분하여 동(東)과 서(西)의 두 지역으로 다시
분할하였다. 이리하여 요르단 동안은 트렌스 요르단, 훗날의 요르단 왕국이 되게 되며 요르단 서
안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1947. 11.29 영국통치반납으로 국제연합에서 팔레스타인 분할결의
영국,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를 포기하고 국제연합에 위임할 것을 선언. 국제연합에서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 채 국제연합은 제181결의안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아랍인과 유대인이 분리
하여 독립하는 안건을 제시한다. 전체를 3개로 분할하여 야파 지역을 아랍에게, 베들레헴을 포함
하는 예루살렘 지역은 UN이 관할하는 공동 구역으로 결정된, 대부분의 주류 유대인들은 이 결의
안을 환영하였으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과 주변 아랍 국가는 결의에 반대했다.
아랍측은 전체 인구의 40%에 못 미치는 유대인이 58%의 영역을 할당받은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
였으나 할당된 지역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야파와
요르단 서안 지역, 갈릴래아 지역 중 야파와 요르단이 아랍 지역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에 배정된 지역 절반 정도는 네게브 사막(광야)였기에 아랍의 주장도 부당한 면이 있다.
1948. 05.1 이스라엘 건국
1948. 05.16 이스라엘-아랍연합국간 1차 중동전쟁 발발
1차 중동 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 문제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졌다. 5월 16일에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전 아랍이 전쟁 상태에 돌입
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에
이스라엘 민간들이 부족한 무기들로 싸웠고 20일 넘게 일어난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예루살
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냈다
1948. 06.11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상 시작
그 사이 미국의 지원으로 현대적인 전투 군대로 변한 이스라엘군은 모셰 다얀 장군의 지휘 아래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승리.
1949. 02. 이스라엘 승리선언 및 평화 조약 조인
제1차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을 '이스라엘 독립 전쟁' 이라고도 불
린다.
1950.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 요르단, 요르단 강 서안 합병. 아랍집단안전보장조약에 조인
1952. 07. 이집트 나세르의 쿠데타 승리로 집권
1956. 10. 2차 중동전쟁 발발 - 시나이 전쟁
이집트 나세르는 소련과 친선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과 영국이 아스완 댐 건설 지원 요청을 거절
하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며 수에즈 운하를 점령해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해 공군을 동원해 수에즈를 폭격했고 이스라엘도 동맹을 맺고 이집트 시나이 반도
를 침공했다. 하지만 전쟁이 자칫 세계대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어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가해 UN
의 총회로 3국 군대가 철수하면서 끝이 났다. 아랍권에서는 "삼국 침략"이라고도 부른다.
1958.
이집트, 시리아 합방 선언
이라크 공화제혁명 발발. 미국군 레바논에 상륙. 영국군 요르단에 진주
1964. 01.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결성
1967. 06.05 3차 중동전쟁발발, 이집트-이스라엘 6일 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 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
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 긴급
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 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스라엘은 6월 5일에 이스라
엘 공군기를 전 출동해 이집트 공군기지를 맹폭격하여 170분에 걸친 폭격 끝에 이집트 전투기
300을 파괴했고 6월 6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전투기 416대를 파괴해 아랍측 공군력을 괴
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 강 서
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1967. 06.09 이집트-이스라엘간 정전협정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는 정전 결의로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 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1968. PLO, 요르단 칼라메에서 이스라엘군 격퇴
1969. Y.아라파트 PLO 의장취임, 이집트 M.M.카다피 집권
1970. 미국, <초승달 정전안>제안, 요르단 검은9월단 내전
중동평화 제안으로 미국 국무장관 W.P. 로저스의 신제안인 <초승달정전안>이 나옴. 이집트, 미
국의 중동평화 제안 수락. 요르단 정부군, 암만게릴라를 일제히 공격, 내전상태 돌입(검은 9월단
사건). 나세르 사망
1972. 10. 뭰헨올림픽에서 PLO 게릴라의 이스라엘 숙소 습격
팔레스타인게릴라, 뮌헨올림픽대회에서 이스라엘 선수 숙소를 습격하고 게릴라 석방 요구
1973. 10. 제4차 중동전쟁 - 욤키푸르 전쟁
이집트의 기습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이날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
죄의 날) 이었다. 이집트군의 병력은 75만, 무기들은 탱크 32,000대, 소련제 미사일(SA-6) 까지
총동원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3분의 1도 안됐고 무기들
도 이집트군의 절반도 안됐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되었다. 이때 미국
이 이스라엘에게 대대적 지원을 해주었다. 이 욤키푸르 전쟁에선 소련이 35억 달러를 아랍국에
그리고 미국은 22억 달러를 이스라엘에 쏟아 부었다. 또한 미국은 30일간정도 포위됐던 이스라엘
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 작전을 펼쳤다. 미국의 지원을 등업은
이스라엘은 반격에 나섰고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집중 포격했다. 골란 고원 전투
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군 탱크 867대, 차량 3,000대 이상을 파괴했다. 욤키푸르에 일어난 전쟁
이라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1981. 사우디아라비아, 8항목 평화안 제안
1982.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 및 PLO난민캠프 대량학살 자행
이스라엘, 시나이반도를 전면 반환. 이스라엘군, 레바논 침공 시작. PLO무장부대, 레바논에서 퇴
각. 서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대량학살 자행. 레바논 내전극화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으로 4차중동전쟁 종결
1985. 베이루트 교외에서 PLO 난민-시아파 민병간 무력 충돌
1987. 이스라엘, 가자지구 PLO 이스라엘 봉기 강경진압
이스라엘군, 가자지구에서 촉발된 팔레스타인인들의 반이스라엘 봉기, 강경 진압
1991. 10. 미국-소련 주제, 중동평화교섭 시작
미국과 구소련의 공동주최로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중동평화회담을 시작으로 평화교섭이 이어졌다
이 회담에는 이스라엘과 주변의 여러 아랍 국가들이 협상당사자로, 이집트·걸프협력회의(GCC)
마그레브 3국·국제연합·EC 등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다. 회담은 전체회의·쌍무회의다.
국간 회의로 나뉘어 진행, 쌍무회의에서는 이스라엘의 점령지문제를, 다국간 회의에서는 군축·
수자원·환경·경제협력 등 중동지역의 현안을 논의하였다. 모스크바와 워싱턴으로 장소를 바꿔
가며 계속 진행된 중동평화회담은 1992년 여름까지는 진전이 없었다. 그 뒤 이스라엘의 점령지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해서 제1단계로 5년의 잠정기간을 두어 자치
를 하고 최종적인 지위는 잠정기간 동안 교섭하기로 하는 안이 제기되었는데 이 안은 1993년에
들어와 가시화되었다.
1993. 09.03 팔레스타인 자치안서명 - 5년간
1967년 중동전 때 이스라엘이 강점한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에 이후 5년 간 한시적
인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 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보건·교육·복지·관
광 및 문화 등 5개 행정 분야에서만 자치권을 가지며 지역 내 치안을 담당한다. 외교 및 포괄적
인 국방 권은 계속 이스라엘이 행사한다. 또 견해가 다른 예루살렘 문제, 시리아·요르단 등 인
접 국가들과의 협상문제는 1995년 12월 이후로 미루었다. 팔레스타인자치안 서명 후 일정은 ①
1994년 4월까지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및 예리코시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행정기구에 권
한을 이양한다. ② 1994년 7월까지 팔레스타인은 총선을 실시하고 이스라엘 시민행정기구는 해체
한다. ③ 1995년 12월까지 점령지의 항구적인 지위를 규정할 협상을 시작하고 동(東)예루살렘의
지위와 유대인 정착촌의 안전보장을 논의한다. ④ 1998년 12월 13일까지 자치기간을 만료하고,
점령지의 항구적 지위를 확정한다 등의 4단계였다.
1993. 11. 오슬로 평화협정
1994. 0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탄생
1995. 11. 라빈 총리 암살
2000. 09.13 팔레스타인 독립국 선포
1998년 10월 23일 마침내 미국 백악관에서 역사적인 <영토-평화 교환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
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약속 불이행으로 평화과정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1999년 11월
부터 회담이 재 개최되었으나 2000년 2월 정상회담이 결렬되었고 팔레스타인은 9월 13일 독립국
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불씨는 그대로 남아있어 항상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2000. 09. 샤론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 동예루살렘 방문, 2차 인티파다
2003. 06.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동평화 로드맵 합의
2004. 11. 아라파트 PA 수반 사망
2005. 08. 이스라엘, 가자/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절수
2006. 01. 샤론 이스라엘 총리 뇌출혈,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 집권 성공
2006. 06.25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이스라엘 군인 1명 납치
2006. 06.27 이스라엘, 가자지구 공격 개시
2006. 07.13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육군이 탱크를 이용하여
레바논의 도시를 공격한 사건이다. 헤즈볼라 측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며 다수의 아랍 세계 국
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이스라엘은 연일 레바논 주요거점에 대해 폭격을 개
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레바논 피난민들이 타고 있던 민간인 버스를 폭파시키는 등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난민 무단 폭격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2006. 08.12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휴전결의안 채택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의 휴전 결의안이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의해 채택되었으나 이스라
엘은 남부 레바논에서 공격을 계속했다. 같은 날 이스라엘은 24명의 군인을 잃었다. 24명의 5군
인들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의 헬리콥터를 쏘았을 때 죽었다고 한다.
2008. 06.19 6개월간의 휴전협정체결
2008. 12.19 하마스, 휴전연장거부 및 로켓포 공격개시
2008. 12.30 이스라엘, 하마스에 전면전 선언
이스라엘 군은 이번 작전이 끝나면 가자지구에는 단 하나의 하마스 관련 건물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상적인 공습이 계속되면서 하마스의 정신적 상징인 이슬람 대학과 총리
집무실 등 가자지구 주요 시설물들은 불바다가 됐다. 폭격으로 300개 이상의 목표물이 파괴되면
서 350명 이상이 숨졌고 1,700명 이상이 다쳤다. 하마스는 자살폭탄 공격 등 결사항전을 선언하
고 이스라엘 남부에 로켓포 수십 발을 발사하는 등 저항을 이어갔다. 이스라엘 지상군이 투입되
면 하마스는 무장병력 만 5,000명이 전면전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최대 규모이다.
2009. 01.07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12일째,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6백 명을 넘어서고 부상자가 3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백 명에 가까운 어린이를 포함해 6백60명
부상자는 2천9백5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군이 피난민들이 대피해 있는
가자지구 내 유엔 학교 세 곳에 포격을 가해 적어도 35명이 숨지고 55명이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총으로 세운 국가는 총으로 망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이스라엘은 범죄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