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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은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거죠
예정을 훨씬 넘긴 3시간 40분 동안의 인터뷰에도 봉준호 감독은 조금도 이야기를 서두르거나 조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은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도 될 만큼 정연하다. 본인은 한 번도 수긍하지 않았지만 그는 사려와 배려가 깊다.
그의 영화를 보면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조차 배려가 보인다. 무뢰한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면 보통 인물들은 사람의 도리를 따스하게 지켜간다. 풍자 섞인 약간의 기괴함은 있지만 비정하거나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입체적이다.
우리가 흔히 타인을 편견을 갖고 볼 때 자행하는 ‘색안경’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봉감독 자신이 세상을 보는 법이 그러할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봉준호 감독은 마음의 평화를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때조차 편안한 상태. “진행해야 할 프로젝트도 영화도 없는 상태인데도 오히려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면 되게 좋을 것 같은 꿈같은 상태”라고 말했다. 영화의 천재라고 불리는 그도 영화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그도 말했듯이 그의 영화는 불안과 공포에서 시작한다.
“가끔 불안한 게 없으면 불안하다”고 말하는 그는 “그 불안 때문에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아무것도 표현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는 것을 보면 그는 평화를 얻는 것도 불안한 것 같다.
만약 신이 ‘마음의 평화와 영화,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그는 당연히 영화를 택할 것이다. 그의 팬들도 그가 계속 불안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흥행을 의식할지언정 좌우되지는 않는 그가 불안한 것은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일 게다. 연인을 만나듯,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설렘과 한 단계씩 이루어가는 과정의 긴장감에서 오는 것일 테니 실제로는 그리 괴로운 불안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최고의 경지라고 말한,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안식할 수 있는 평화의 상태는 마음에서 영화를 놓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사랑하면 할수록, 아끼면 아낄수록 더 깊은 진심으로 버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옛 성현의 말에도 있지 않은가.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 끝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용기’라고.
주제를 다루되 ‘이용’하지 않는다 - 영화의 허구와 진실
<살인의 추억> 때는 실제 사건을 다루는 거여서, 실화사건에서 내가 어디까지 윤색을 할 수 있고 어디까지 내 상상력을 뒤섞을 수 있나 도덕적 문제까지 뒤엉키니까 복잡해지더라구요. 그때 고민이 많이 됐죠. 그래서 나중에 스스로를 합리화시켰어요.
왜냐면 진실 내지는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공된 상상력을 좀 동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 그가 영화에서 묘사한 인물을 보노라면 그의 외조부인 소설가 박태원 선생이 떠오른다. 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청계천변의 인간군상을 표현한 <천변풍경>을 보면 소설과 영화의 차이일 뿐, 대물림이 느껴진다.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따스한 마음의 대물림. 세심한 인물 묘사와 사람에 대한 관찰이 창작자들의 가장 큰 두려움이자 고통이면서 동시에 또 즐거움이기도 하죠. 저도 해당 인물형을 많이 만나 보거나 조사나 인터뷰를 하거나, 같이 만나서 술을 마시기도 해요.
하지만 결국 궁극에 가서는 상상력에 의존하게 되더라구요. 상상력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실감나게 어떤 인물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이 직업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게 남용되면 무책임한 게 돼요. 영화 볼 때, 저 사람은 저 소재를, 저 인물을 이용하는구나 느낄 때, 그게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인데, 순식간에 ‘골로 가는 것’ 같아요. <살인의 추억>도 여차하면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선정적이 되죠.
그래서 좀 힘들고 예민했었어요. 사람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줬으니 다행이고, 그 당시엔 ‘두 번 다시 실제 사건 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 했었어요. 그는 최근에 영화 <마더>를 준비하고 있다. 영화 <괴물>에서는 아버지(변희봉 분)와 아들(송강호 분)이 두 세대에 걸쳐 아내가 없는 모성 부재의 상황이었지만 극중 아버지는 여느 엄마 못지않게 아들을 챙기는 따스한 심성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이젠 아예 ‘봉테일’식 현미경을 들이대고 모성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려고 한다. <마더>를 구상한 지는 되게 오래됐어요. 김혜자 선생님 처음 찾아간 게 2004년이었죠. 스토리 말씀 드리니까 좋아하시더라구요. 이건 대놓고 엄마 얘기죠.
사실 이 영화는 한 명의 독특한 배우 때문에 기획된 건데, 김혜자 선생님은 기념비적인 배우잖아요. TV에서는 늘 비슷한 모습으로 ‘한국의 어머니상이다’라는 식으로 많이 나오지만 저는 다른 면에 주목을 했어요. 극단적인 어머니의 모습이랄까.
엄마가 한 번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여러 가지로 연구 많이 해봤고, 저의 어머니를 통해서도 돌이켜봤는데, 어떻게 될는지 자나 깨나 걱정이에요. 사람들이나 엄마들의 집단적인 무의식을 자극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을는지. 독특한 스토리로 끝날는지.
그 사실적 묘사의 원천은 철저한 계획
그는 영화를 만들 때, 사전 준비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그저 촬영 계획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를 어떻게 마음으로 정리해야 하는가 깊이 고민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살인의 추억>은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마음 정리를 하는 데만도 6개월여가 걸렸다.
저는 원래 시간이 좀 많이 걸려요. 3년에 한 편밖에 개봉을 안 하거든요. 저도 1, 2년에 한 편씩 개봉을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요. 시나리오도 직접 쓰다 보니까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마음 정리도 해야 되고요. <살인의 추억>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무슨 80년대나, 군사독재를 화두로 삼으려고 했던 거는 아니었는데 사건을 조사할 때 국회도서관에 많이 갔었거든요.
왜냐하면 80년대 사건이라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잘 안 나와요. 국회도서관 가면 연도별로 다 모여 있잖아요. 자연스럽게 신문지면 전체를 보게 됐는데 한쪽 귀퉁이에 아주 작게 ‘화성에서 세 번째 변사체’ ‘계속되는, 미궁 속으로’ 그 바로 옆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사진도 있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외국순방길에 나서며 손 흔드는 사진도 있고, 대비가 되는 거예요.
그게 다 하나로 보였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당시 사회 상황과 결부된 맥락이 나오게 된 거예요. 80년대 시야가 확 넓어지더라구요. 그래서 시나리오 쓰는 작업자들한테도 국회도서관 가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해당 검색어만 나오잖아요.
직접 그 당시 신문을 만지면서 자료들을 보게 되면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잘 안 하더라구요. 요즘은 마우스만 쥐고 하려고 하니까요. 그는 <괴물>을 제작할 때도 한강 사진 자료만 5~6천 장을 찍었다. 촬영을 할 때도 애니메틱스 - 플레이트- 애니메이션 - 움직이는 모형과 합성 - 최종 합성의 단계를 거쳐 과학자처럼 오차 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철저한 사전 준비는 의견 충돌 요소를 줄여 촬영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촬영장은 스텝들이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일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제가 막내라서 그런지 일도 저보다 연세 있으신 분들하고 일하는 게 더 편해요. ‘촬영 감독님, 분장 선생님’ 그러면서 내가 약간 조카나 동생 느낌으로 가서 엉기면서, 저는 그쪽이 마음상으로는 더 편해요.
촬영장에선 ‘비굴모드’가 가장 편해요
촬영장에서 조율이라기보다 비굴모드로 가는 거죠. 계속 미안하다고 하고. 죄송하다고 하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한 번만 더 해주세요(웃음) 그런 거죠. 영화를 잘 찍고 싶고,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즐겁고 싶어서 그런 건데, 모르겠어요.
내가 모르는 가운데, 알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상처 준 스텝들도 많을 거예요. 내 앞에서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아마 나도 모르게 상처 받은 사람들 많을 거예요. 영화를 자식이라고 봤을 때, 자식새끼가 내 맘대로 안 되가니까 그때부터 속이 문드러지기도 하죠.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잖아요. 저렇게들 고생하는데. 누구 들으라고 화를 내겠어요. 덕장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극한의 인내력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부여잡고 감추고 가는 거죠.(웃음)
나도 내 영화의 관객
사실 제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따뜻하지 않아요. 어두운 일들이 많이 벌어 져서. <괴물> 마지막 씬은 제가 생각해도 대놓고 따뜻하게 찍은 거 같기도 해요. 둘이 밥 먹는 거. 또 가족들이 애타게 딸내미를 구하려고 발버둥 치는데 정작 딸내미는 자기보다 더 약한 애를 거두잖아요.
그 이중의 구출 내지는 구조가 저를 되게 흥분하게 했어요. 그게 좀 슬픈 거죠. 약간 자조가 섞인 슬픔 내지는 안타까움. 물론 약한 자들끼리 돕는 게 아름다운 거긴 한데, 꼭 이게 전부여야 될까, 시스템이나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뭘 하고 있나 어디서? <괴물>에서 보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 방해하잖아요.
그건 관념적으로 이야기를 맞추려고 끌어넣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한 거구요. 실제 그런 일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내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은 나죠.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기 이전에 저 또한 영화 팬이고 관객이니까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 거죠. 그런데 저는 왠만한 평균치의 또 대한민국 사람이기도 하니까 저 자신한테 충실하면 관객들도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착각 속에서 하는 거죠.
저 자신한테는 충실했는데 관객에게는 외면당하는 일도 많이 있을 거라고 예상되요. <괴물> 같은 영화는 왜 인구의 4분의 1이 보고, <플란다스의 개>는 9만8천 명이 봤을까? 모르겠어요. 양극단을 다 체험해 봤다는 건 좋은 일인 거 같아요. 어느 쪽이건 다 적응할 수 있으니까요.
영원한 현역으로 영화를 찍고 싶다
처음 할 때부터 좀 영화를 계속 찍고 싶다는, 임권택 감독님처럼 영원히 현역으로 영화를 찍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대부분의 감독들이 어느 시점에 영화를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못 찍게 되거든요. 제작자들이 더 이상 불러주지 않게 되거나 관객들이 외면을 하거나.
계속 생존해서 끝까지 영화를 찍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거든요. 첫발을 내디디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거 같애요. 아, 첫 영화를 찍게 되는구나 드디어. 좋다, 너무 좋다. 영화를 찍고 싶었고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으니까.
20대의 대부분을. 데뷔작이 유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계속 찍고 싶다. 감독들이 흥행되고 싶어하는 건 누구한테 뽐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속마음 속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그리고 다다음 영화를 계속 찍고 싶은 그 꿈이 있는 거거든요.
이게 가장 원초적인 감독들의 불안이기도 하면서 꿈이기도 하죠. 그렇게 평생 영화를 찍는 가운데 단 한 편이라도 걸작이, 우연에 의해서라도 걸작이 나온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인생이겠죠. 걸작을 하나 남기면 정말. 아직은 전혀 아니지만요.
<괴물>이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을 때 그에겐 30여 회 이상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래도 그는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아주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말실수가 없다. 조금도 과대포장하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화에 대해 박하다 싶을 정도로 객관적이다.
솔직하고 충분히 대화를 나눈다 싶으면서도 아낄 말은 표 나지 않게 아낄 줄 아는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한계에 대해 서슴없이 내놓는 그가 자신의 바람처럼 부족함 없는 마음의 평화를 가졌으면 좋겠다.
봉준호 1969년 9월 14일 서울 출생. 잠실고,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1993년 6㎜ 단편 <백색인>으로 데뷔. 두 번째 단편 <지리멸렬>로 큰 화제를 일으켰으며, 이후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인플루엔자> <괴물> <도쿄> 등을 연출했다.
<플란다스의 개>로 2001년 제25회 홍콩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 <살인의 추억>으로 대종상영화제 감독상을 비롯, 산세바스찬영화제 신인감독상 등 4개의 상을 수상했고, <괴물>로 2007년 한해에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오포르토 국제영화제 감독상 등 3개의 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대한민국영화대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오는 9월에 촬영에 들어가는 영화 <마더>를 2004년부터 준비해오고 있다.
마음이 좋아라하는 잡지
월간 마음수련 9월호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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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봉준호 감독 헤어스타일 약간 만중오라버니 닮으셨다 ㅌㅋ
정말~ 만중 오빠 닮긴 닮았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