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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비유의 말씀
누가복음 8장4-15절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하실 때 열두제자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따랐고 그들 중에 예수님께 은혜 받은 여인들이 따르며 그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필요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로 복음을 전하십니다.
1.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8: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4절). 누가는 현재의 시점과 장소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지 않으나 마13:1-23; 막 4:1-20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제, 자매, 모친이 누구인가에 대한 교훈을 하고 난 후 가버나움의 어느 해변에서 배를 타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 동네에서 모여 들었는데, 이들은 아마 예수님의 교훈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든 무리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었습니다. ‘디아 파라볼레스’는 '비유의 방법으로'라는 뜻으로 비유로 말하는 데에는 무언가 의도가 있음을 강하게 암시합니다(10절). 여기서 비유는 헬라어 '파라볼레'에 해당하는데, 이 말은 '곁으로'를 뜻하는 '파라'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의 합성어로 한 물건을 다른 물건 곁에 두고 비교함으로써 그 실체(實體)를 정확히 아는 방법을 뜻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어려운 이치를 다른 것에 빗대어 쉽게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복음의 심오한 내용을 모든 세대에 걸쳐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존해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비유는 그 단순성으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며 또한 복음의 의미를 학술적이기 보다는 일상적으로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는 복음의 원뜻을 너무 과도하게 노출(exposure)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위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실수를 막아주는 보호막 구실을 합니다.
2. 네 종류의 밭에 떨어진 씨
(1) 길가에 떨어진 씨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8:5)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다”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5절). 원문상으로는 씨를 뿌리는 자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있다. 이는 씨를 뿌리는 전체를 대표하거나 또는 예수님께서 본 비유를 베푸실 당시 주위에 씨를 뿌리는 특정한 사람이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대다수의 청중들은 농경문화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 말씀의 표면적인 의미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5-8절은 씨뿌리는 비유에 관한 말씀으로서, 씨뿌리는 자나 씨앗 자체보다도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토질(土質) 곧 성도들의 마음밭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밀이나 보리 등을 사람이 손으로 뿌리는 일은 통상적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의 토지는 보통 가늘고 길게 분할되어 있고 분할된 밭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씨를 뿌릴 때는 이 좁은 길에도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곳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가 없으며 농부들이 지나다닐 때 그 발에 밟히거나 새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게 마련이었습니다.
(2) 바위에 떨어진 씨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8:6)
씨 중에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습니다(6절). 마태(마 13:5)나 마가(막 4:5)는 '돌밭'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돌로만 이루어진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밭에 간혹 바위가 있어 그 바위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땅에서는 씨에서 싹이 나서 조금 자라기는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가 뜨면(마 13:6) 곧 말라 죽게 됩니다.
(3)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습니다(7절).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랍니다. 헥커(Hacker)와 같은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 식물을 의미하는 용어가 22종류나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들 지닌 가시떨기에 자양분(滋養分)을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합니다(8절). 충분한 습기와 자양분을 구비하고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성장하여 백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마태나 마가의 경우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3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나(마 13:8;막 4:8), 누가는 나머지 두개는 생략한 채 백배의 결실만을 언급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려 준 이야기의 표면적 의미 외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으로, 이러한 표현은 종종 예수께서 중요한 교훈의 종결 어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14:35;마 13:9, 43 등).
3. 비유의 뜻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8:9-10)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9절). 유감스럽게도 제자들 중에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한 청중도 없었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물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톤'은 '심문하다'의 뜻을 가진 '에페로타오'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집요한 질문을 하였음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알려고 하는 열정적인(passionate)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한다”고 말씀하십니다(10절).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아'는 '가둔다'의 뜻을 지닌 '뮈오'에서 온 말로 숨겨겨 있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참다운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부여받을 때 뿐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선택적(選擇的)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열 한 제자들과 그밖의 제자들(막 4:10)에게는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 즉 군중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닫혀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비유로 한 것은 저희로 들어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본문은 사 6:9,10의 내용을 축약적으로 인용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던 목적을 설명해 줍니다. 한편 마태는 사 6:9,10을 보다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는데(마 13:13-15),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한 이유를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본서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이 두 복음서들의 기록은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마태의 문장은 '호티'절로 되어 있어 '왜냐하면...'의 구문으로 이해되는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완악(wicked)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마 13:15). 사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원하지만(마 28:19,20; 요 3:16; 딤전 2:4; 벧후 3:9)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5:21,30; 6:2,7,11; 7:30; 마 23:37) 증거합니다. 한편 누가의 문장은 '히나' 구문으로 되어 있어 '...하기 위하여'로 이해되는데 이는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을 말해줍니다. 즉 하나님의 은사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1) 씨의 의미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8:11)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11절).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어귀로 본서에 네번(11,21절;5:1;8:11,21; 11:28)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12회나 사용되고 있으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한 차례씩만 사용되고(막 7:13; 요 10:35), 마태복음에는 한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9절) 예수님의 답변은 '씨를 뿌리는 자'보다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일 것입니다. 씨가 하나님의 말씀 또는 천국 말씀(마 13:19)이라면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고(요 1:14) 복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길가에 있다는 의미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8: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로부터 마귀가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은 것입니다(12절). 계속되는 설명은 씨가 뿌려진 밭(5-8절)이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 자신임을 말해준다. 좁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전인격적인 인간을 말한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길가와 같은 상태의 인간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 말씀에 대해 냉담(冷談)하거나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마귀에 대해서, 마태는 '악한 자'(포네로스)로, 마가는 '사단'(사타나스)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누가는 '마귀'(디아볼로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길가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데 그치고 받아들이기를 보류(保留)하고 있을 때 그 말씀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5절과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씨앗은 밟히기도 하고 새에게 먹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훼방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훼방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뿐입니다(엡 6:13-17).
(3) 바위 위에 있다는 의미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 배반하는 자입니다(13절). 바위 위에 얇게 흙이 덮혀있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감정적 흥분과 피상적 열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감정의 상태를 넘어 말씀이 심령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뿌리없는 믿음이라고 규정하는바 이들의 믿음은 일시적이며 잠정적입니다. 믿음의 진정성 여부는 시험에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검증(檢證)되어 집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말씀을 듣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입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믿음이 참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시험'이 필연적임을 암시합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마치 뿌리없는 식물과 같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며 따라서 그 과실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어낸 믿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약 1:12).
(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의미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입니다(14절).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 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됩니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입니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입니다. 이 염려는 신앙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습니다(12:22-34; 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입니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입니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입니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 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입니다.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합니다.
(5) 좋은 땅에 있다는 의미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15절).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킵니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카코스'의 반대어입니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 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입니다.
적용 : 좋은 땅이 되려면
예수님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열매를 맺듯이 좋은 마음에 말씀을 받아들일 때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직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가 아직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 까요?
첫째,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에스겔서 36장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마음을 갖기 전에 먼저 굳은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회개할 때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새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새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하여 회개를 할 때 우리의 굳은 마음이 제거 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를 힘써야합니다. 에스겔서 36장 27절에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행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실패하고 위선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갈 5:16).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매순간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5:25). 매 순간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따라가며 살아갈 때 성령으로 행하고 그 결과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