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의 입당송 첫 구절은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라고 되어 있다.
이 기도는 두 번째 예문인 승계송의 첫 구절에서 또 한 차례 그대로 등장하게 된다. 승계송은 레퀴엠 고유문 중 가장 오래 된 것이
기도 하다. 또한 부속가 ‘진노의 날’은 14세기 경에 성립됐으며 그레고리우스 선법으로 만들어졌고 대단히 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특히 모차르트 이후에 작곡된 베르디 [레퀴엠]의 ‘진노의 날’은 깜짝 놀랄 정도로 극적이다. 그러나 레퀴엠의 작곡에 있어서 반드시
위의 9개 부분이 순서대로 되어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한 개의 예문을 여러 개로 세분하거나, 여러 예문을 하나로 묶는 경우도 왕
왕 찾아볼 수 있다. ‘리베라 메 Libera Me, 자유롭게 하소서’ 같이 전통적 미사 예문과 관련없는 악장이 삽입되기도 한다.
모차르트는 어디까지 작곡했을까? 의뢰인은 누구일까?
다시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이 미완의 작품에서 작곡가 모차르트가 썼던 부분은 어디까지일까. ‘인트로이
투스’ 전체와 ‘키리에’에서 ‘오페르토리움’까지의 노래 성부와 베이스 그리고 관현악 성부의 주요 음형뿐이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미망인인 콘스탄체는 의뢰인에 대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걱정했다. 어떻게든 작품을 완성시켜야 했던 콘스탄체가 이 작품
의 완성을 부탁한 사람은 생전의 모차르트가 높이 평가한 적 있었던 요제프 레오폴트 아이블러라는 사람이었다. 아이블러는 12월
27일 콘스탄체로부터 악보를 넘겨받고 ‘세쿠엔치아’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하며 ‘라크리모사’의 소프라노 성부를 쓰다가 작업을 중단
하고 만다. 결국 이 일을 떠맡은 사람은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였다. 그는 아이블러가 손 댄 악보를 새롭게 필사해 고친 뒤 ‘세
쿠엔치아’ ‘오페르토리움’의 관현악과 ‘라크리모사’의 9마디 이후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를 새롭게 작곡해 넣었다. ‘코무
니오’는 곡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키리에’의 음악을 이용해 마무리했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레퀴엠]은 의뢰자에게 무사히 전달
되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선수금으로 받았던 작곡료의 나머지 절반을 받았다. 1793년 1월 2일, 궁정 도서관장이었던 고트프리
트 판 슈비텐 남작(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모차르트의 지지자로 등장한다)의 도움으로 성사된 콘스탄체를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그녀는 비로소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레퀴엠]을 듣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