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을 소묘하다*
‘원격’은 다양한 분야에서 거론되는 말이다. 특히 ‘원격의료’는 현재 우리사회에서 가장 절절한 용어중의 하나다. 과거에 오지나 벽지에 직접 사람을 보내거나 상주시키는 대신에 의료데이터의 전송 등을 통해 공간적 원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활발한 까닭이다. 원거리 통신과 정보 기술이 발달하면서 멀리 떨어진 거리의 장벽을 넘어 의료혜택을 그리 비듬하지 않게 나눌 수 있지 않겠냐는 공평심도 일조를 하고 있다.
원격의료를 영어로 텔리메디신(telemedicine)이라 한다. ‘먼 거리’를 뜻하는 ‘tele’를 ‘원격’으로 번역한 것이다. 더 쉬운 영어 단어를 써서 아예 ‘distance medicine’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원격의료의 원격이 공간의 간격에 비중이 주어진 채 이해되고 논의되고 있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게다. 그러나 공간적 거리만을 ‘원격’이라 부르는 것은 의료 현실의 실체를 제대로 살피고 난 뒤의 생각일까. 원격을 찾아 나선다.
원격 하나.
무의촌 파견제도가 있던 1979년 가을, 제주도 북제주군 보건소 김녕 동부지소에 파견되었다. 지금은 세계적 관광지로 교통도 편리해지고 인기척도 분주하지만 당시엔 제주시에서 시외버스로 한 시간 더 걸리는 거리였다. 가끔 시내를 다녀올 때면 길옆으로 쉼 없이 펼쳐지는 바다풍경은 왕래의 목적을 잊을 만큼 한적했다.
보건지소 진료 중에 ‘방울약’이 ‘알약’을 의미하며 ‘머리 꽝, 허리 꽝’이 ‘머리와 허리가 무지근하게 아픔’이라는 걸 간호사의 통역(?)으로 알아차린 건 몇 주일 지나서였다. 청진기 하나로 만병을 진단해야 하는 보건지소는 대단한 수준의 의료시설이라는 현실을 깨달은 건 중산간지역에 순회 진료를 나선 날이었다. 전복껍데기처럼 울퉁불퉁한 돌밭 길로 수평선이 멀리 아래로 보일쯤에 고립된 인심을 만났다. 이리 저리 진료를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꾸리고 있을 때 근심 어린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섰다. 아들은 서른 두 살이었다. 그런데 밤마다 오줌을 싼다는 것이었다. 한라산 구석구석 좋은 약초란 약초는 모두 구해 먹였지만 그저 세월만 지났고 동네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덜 떨어진 총각으로 입에 오르내려지며 더해지는 심적 압박에 두문불출, 이상스러워진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당뇨병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모자가 보건지소에 들어섰고 짐작대로 당뇨스틱은 진갈색으로 변했다. 당뇨병이었다. 다 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불치병이 아니란 안도와 진작 검사를 받을 걸 하는 후회의 눈물로 소리 내어 울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원격 둘.
진료실 한 귀퉁이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편지가 있다. 가슴 저린 순간적 곡절 때문에 교도소에 갇힌 채 당뇨병으로 인한 육신과 정신의 외로운 불편함, 그리고 변화를 담고 있는 편지다.
진료실에 도착한 맨 처음 서신은 자신의 소개와 함께 당뇨병에 관한 상담회신에 응할 수 있냐는 내용과 차분한 외로움으로 빼곡했다. 철저히 고립된 한 번도 만난 본 적 없는 환자와의 서면 진료라는 흔치 않음에 적절한 표현을 찾아 며칠을 서성이다가 교신이 가능하다는 격식 차린 짤막한 회신을 보냈다. 5개월여의 뜸을 거쳐 도착한 편지에는 당뇨병 합병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더불어 7년 더 라는 체념이 외려 냉철히 섞여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가운데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저는 징역 1년 6월을 마치고 보호감호 7년을 복역하고자 지난 달 이곳으로 옮겨 왔기에 선생님의 편지를 며칠 전에야 받았습니다. 저는 현재 이곳에서 당뇨약을 먹고 인슐린 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혈당수치는 216~240입니다. 지금도 다리 통증은 계속되고 있으며 “당뇨병성 신경병증”이 제일 우선 의심된다고 하는데 이 병의 종착역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당뇨병성 망막증”이란 진단이 나왔고 오른쪽 눈은 “만성 결막염”까지 있다고 하는데 당뇨병성 망막증이란 병은 결국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 현재는 눈이 어릿어릿하고 좀 이상합니다. 선생님! 혹시 이러다가 실명되는 것은 아닌가 두렵습니다. 바쁘시겠지만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곧 답장을 보냈다. 건강해지는 글에서 변화되어가는 당뇨병 관리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마냥 고마워.
형기를 마치고 교도소와 사회를 가르는 문짝 하나를 나설 때까지 편지는 오갔다.
원격 셋.
영등포 쪽방 촌에 다녀왔다. 끊임없이 차들이 오가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계적 대도시의 한 가운데, 삶의 모든 정체와 퇴행이 서로 비집고 간신히 생존하는 귀퉁이가 있었다. 바로 대도시 한 가운데에. 방금 건너온 길 맞은 편 대형 백화점과 크고 작은 병의원들의 간판들이 지척에 번화했다. 그 번화함 바로 길 하나를 건너엔 얼키설키 실골목마다 오늘을 견뎌야할 오늘만이 꽉 차있었다. 입에 칠할 풀을 구하러 쉼 없이 다녀야 하는 하루의 틈새엔 어떤 선진 의료 혜택도 제도도 파고들 틈이 없었다. 도시가 대부분 쉬는 휴일에야 가까스로 생기는 그 틈을 찾아 진료가 시작되었다. 개원하고 있는 어느 선배의 깊은 봉사 정신에 동감하는 자원자들의 지극한 참이 최첨단 의료기기와 치료제를 대신하여 진단하고 치료하는 단출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살아온 그대로 병력이었고, 병력 청취는 그대로 퍽 효험 있는 처방이었다. 몇 개월 복용할 사흘치 혈압약은 분명히 보조 처방일 뿐이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멀리 떨어졌다고 오래전의 진료 광경이었다고 느꼈던 거리와 상황은 4차선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였고 시간이었다.
지금도 책상 위에서 서류 속에서 완벽하게 꾸며진 평균 이상의 도시와 평균 이상의 시민을 의식한 의료서비스를 청진하는 청진기의 가슴을 버겁게 누른다.
원격 넷.
외래 진료 중에 급한 전화가 왔다. 병원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빌라주택에 사는 부유한 노인 환자 보호자의 전화다. 당장 이름만 대도 알만한 자식들을 농사하고 지금은 내외 둘이 산다. 전화 내용은 이렇다. ‘진료 예약 시각에 맞추어 서두르다 거실에서 미끄러 넘어져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다. 응급 상황은 아닌 거 같아 안정을 취하고 있다. 오늘 아침 약부터 먹을 게 없어 반드시 약을 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순간 위약 효과의 세계적 학자인 파브리지오 베네데티(Fabrizio Benedetti) 교수가 떠올랐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건강한 이가 환자가 되면서 다음의 네 단계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이 아픔을 경험하여,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 의사를 만나고, 치료를 받는다.’ 의사는 대개 세 번째 단계의 환자를 만난다. 이때에 환자는 신뢰와 희망이, 의사는 공감과 동정이 발동하여 작용한다고 한다.
수십 년 째 알고 지내는 세 번째 단계 환자의 신뢰와 희망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할 용기보다 분주하게 쫓겨 건조해져가는 동정에 공감할 직업정신이 아직은 더 많이 남아 있다. 이어지는 진찰의 사이사이에 동정 공감은 병록 번호를 찾아 처방을 내고, 환자 보호자에게 진행 사항을 전화로 알려 준다. 이 서두름은 예약 환자 딱 4명을 진찰하는 간간이 지나갔다. 담장 두께만큼의 원격이다.
원격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의료의 똑같은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큰 일 나는- 공간과 시간의 양적 배분이 아니다. 원격의 곡절을 찬찬히 담아내는 스마트한 형평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원격을 이야기 하는 모든 이들이 원격의 본질적 형편을 알아야 한다. 원격의 본디 뜻을 넉넉히 깨우쳐야 한다. 그래야 원격을 챙기려는 그들 사이에 가로 쌓여 있는 원격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내가 나와 멀어진, 우리와 우리가 멀어진 이 원격을 챙겨줄 지혜는 결국 원격이 가르쳐 준다. 원격이 원격 그대로 남게 될까 여전히 두렵다.
*소묘하다. (사람이 대상을)형태와 명암을 주로 하여 한 가지 색깔로 그리다.
유형준 한림의대 강남성심병원 내분비내과 교수, 한림의대 내과학교실, 의료인문학 교수
서울의대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한당뇨병학회 회장, 대한노인병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문학청춘작가회 회장, 의료와 예술 연구회 회장, 함춘문예회 회장, 쉼표문학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가라앉지 못한 말들', '두근거리는 지금'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시인 필명은 유담이다.
'병원(Hospital Line)' 2016년 7/8월호 ( 대한 병원 협회)
첫댓글 원격진료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네요.
‘distance medicine’ 란 말도 재미있고, 따뜻한 시선으로 맛깔나게 조명한 글 잘 보았습니다.
저도 원격진료에 대해 쓴 글 한편 올려 봅니다
미셀푸코가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일렀듯이 '의사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자의적 경험에 근거하여 시작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고맙습니다.
평균 이상의 도시와 평균 이상의 시민을 의식한 의료....그렇죠...
평균: (수나 양의) 크고 작음이나 많고 적음의 차이가 나지 않게 한 것. 또는 그러한 차이가 없이 고르게 한 것. 사전적 의미입니다. 박원장님, 평균보다 훨씬 고맙습니다.
원격을 '소묘하다'
원격도 예술이네요 ^^
원격이 더 멀어졌다가 때론 바짝 닿는 일은 분명 에술적 마술이 분명합니다. 서화 회원님, 바로 곁에서 대화하듯 댓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