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천도 결정과 추진 여몽간의 화의 타결로 국면은 수습 단계를 맞이했다. 그러나 곧 고려정부 내에서는 천도(遷都)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1232년(고종19) 2월 20일 전목사(典牧司)의 재추회의에서 이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된 이래 회의를 거쳐 같은 해 6월 16일 전격적으로 강화 천도(遷都)가 결정되었으며 17일부터 천도(遷都)작업이 추진되었다. 몽골군의 고려 재침 사르타크(살례탑, 撒禮塔, Sartag)가 고려 재침의 명을 받은 것은 그해 8월의 일이다. 몽골군은 1332년 12월까지 대략 4개월 동안 고려에 체재(滯在)해 정복전쟁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 기간동안에 있었던 몽골군의 구체적인 동태와 그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몽골군의 일부는 고려의 내륙 깊숙이 내려와 구략(寇掠)을 서슴지 않았다. 이 사실은 “현종(顯宗) 때의 판본(板本)이 임진 몽병(壬辰蒙兵)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高麗史 24,<고종세가> <고종세가> 38년 9월 壬午).”고 한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현종조(顯宗朝) 거란과의 전쟁기에 제작된 소위 부인사(符仁寺) 소장 대장경판이 고종19년(壬辰)에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적장 사르타크(살례탑)의 사살 경상도 일대에서 횡행(橫行)하던 선발대에 뒤이어 적장 사르타크(살례탑)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남하한 시기는 1232년(고종19) 10월경의 일이었던 것 같다. 남진 도상(途上)의 사르타크(살례탑)군이 11월 광주(廣州)에서 고려군과 접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漢陽山城)을 공취(攻取)한 후 광주성(廣州城)을 포위, 공격했다가 부사(副使) 이세화(李世華)가 지휘하는 광주민(廣州民)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다. 그리고 이어 처인성(處仁城, 용인시 남사면)에 이르러 김윤후(金允侯)와 처인 부곡민들에 의해 사르타크(살례탑)가 사살되고 만다. 이것이 같은 해 12월 16일의 일이다. 처인성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결정적 타격을 받은 몽골군은 부장(副將) 테게(철가, 鐵哥, Tege)의 지휘로 같은 해 말에 철군하게 된다.
2.
몽골의 3차침입 | 제2년 |
본문 |
3차침입의 제 2년 몽골 3차 침략 제2년인 1236년(고종23) 6월에 이르러 몽병은 다시 고려에 대거 내침했다. 이들의 작전상황을 볼 때 몽골은 전년의 경우보다 훨씬 증원된 대규모였음이 확실하다. 몽골군은 6월 한 달 사이 북계(北界) 여러 지역을 점거하면서 서해도 지역까지 내침해 왔다. 7~8월 몽골군은 저항하는 북계(北界)의 여러 성을 공략(攻略)하는 한편 동계 지역에 동진군을 동원해 공격하고 있으며 8월 말에는 경기, 충남지방까지 진출하고 있다. 9월에는 충남, 경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다음 10월 몽병은 전라도에까지 이른다.
3. |
송문주 |
본문 |
시 대 : 고려
생몰년 : 미상
관련전투 : 죽주전투(竹州戰鬪)
관련성곽 : 죽주산성(竹州山城)
제2차 몽고 침입 때 죽주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려 후기 장군. 1231년(고종 18) 귀주성에서 몽고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낭장이 되었다. 1235년 몽고군이 재차 침입하자 죽주방호별감이던 송문주는 몽고의 1차 침입 당시 귀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경험을 통해 몽고군의 공성술과 공격 수단을 미리 예측하고, 방어전술과 기습작전으로 대응하였다. 9월 8일부터 15일간의 죽주전투에서 몽고군은 죽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송문주가 지휘하는 고려군에 밀려 결국 전력 손실만 입고 퇴각하였다. 이 때 송문주가 몽고군의 작전과 장비를 잘 알아 적절히 대응하였으므로 성 안의 사람들이 신명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이 되었다. | | 4. |
배중손[裵仲孫] |
본문 |
시 대 : 고려
생몰년 : ?~1271년(원종 12)
관련전투 : 진도전투(珍島戰鬪)
관련성곽 : 용장산성(龍藏山城)
고려 후기 삼별초의 난을 주도한 장군. 1270년(원종 11) 원종은 몽고와의 화평교섭에 따라 개성으로의 환도를 결정하고 삼별초도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조정에서는 해산을 명령하는 한편, 삼별초의 명단을 압수하였다. 이에 삼별초 장군 배중손은 1270년 6월 야별초 노영희(盧永禧)와 함께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3일 뒤 배중손 등의 지휘하에 삼별초는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본거지를 진도(珍島)로 옮겼다.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해 전략상 우위를 확보하려는 작전이었다. 장기 항전에 들어간 삼별초는 조정에서 보낸 토벌군과 여몽연합군을 막아냈으나,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이끄는 몽고군과 김방경(金方慶)·흔도(欣都)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진도도 함락되었다. 결국 삼별초의 새 정부 군왕인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한 듯 그 뒤의 소식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삼별초의 여당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의 지휘하에 2년간이나 항전을 계속하였다 | | 5.
평정건을 쓴 안향 |
본문 |
경북 풍기군 소수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111호, 고려시대 문신 안향의 초상화는 홍색 직령포를 착용하고 평정건을 쓴 안향의 모습을 담고있다. 안향이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5년)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안향은 주자학 도입과 보급에 공이 큰 인물로서 원종 때에 직한림원으로서 내시를 겸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남성이 제거된 환관과는 구분되어, 오히려 대개가 귀족 자제로서 용모가 단정하거나 유학적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선발된 인재에 속한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의 창시자인 최충의 손자 최사추, 고려 중기 최고의 지식인인 김부식의 아들 김동중, 최초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등 모두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내시는 여러 시종들과 함께 왕의 행차에 동행한 것은 물론 왕명의 초안을 작성하거나 국가 기무를 관장하고 때로는 유교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내시가 언제 어떠한 직급으로 설치되었는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단, 918년(태조1년)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를 내시서기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당시 내시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시의 선발기준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기준은 문종 때에야 확인할 수 있는데, 문종은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용모가 수려한 사람 20명 정도를 내시로 뽑아 자신을 시종하게 하였으며 그 수고의 대가로 별사미(別賜米)를 주었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인종때까지 준수되다가 의종 때에 이르러 귀족 자제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儒臣)으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초상화 내에서 착용하고 있는 옷은 몽고의 영향을 받은 남자 평상복에 해당한다. 홍색의 포 형태에 깃은 원나라 복식과 같이 깃중심선이 한 줄 더 있고, 여밈은 겨드랑이 밑까지 깊게 겹쳐져 있다. 보이지는 않으나 깃 끝에 매듭 단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띠도 홍색으로 띠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포의 양 옆에 트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6. |
심의를 입은 이제현 |
본문 |
귀곡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성리학의 기초 확립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 영정은 주자학과 함께 원에서 들어온 유학자들의 법복, 즉 심의 착용 모습을 보여준다.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심의의 모습은 흰색의 깃 위에 검은색의 연(緣)을 둘러 깃이 조금 노출되었고 상(裳) 오른쪽에는 여밈 자락이 보인다. 대를 묶은 허리 부분은 소매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지만 매듭을 묶은 양 귀와 늘어뜨린 신(紳)에는 검은색 연(緣)이 둘러져 있고 세조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현은 호가 익재(益齎,實齎) 역옹으로, 고려 충렬왕13년(1287년)에 태어나 공민왕16년(1367)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공민왕때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에까지 오른 문신이면서, 정주학을 정립한 한학자, 문장가, 시인, 서화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저서로서 <효행록>, <익재집>, <역옹패설>, <익재난고>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있어 유학은 불교와 함께 고려인의 정신세계를 이끌고 간 쌍두마차였다. 불교가 다른 신앙과 사상을 끌어안아 통합하고 서로의 차이를 없애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면, 유학은 다른 사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분리하고 차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애초에 유학은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근본이고 유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라 하여 불교와 공존하기 위해 차이를 강조했었으나, 불교와 유학이 기득권층의 사상으로 공존이 어려워지자 이 한계를 벗어나고자 새로운 철학적 유학인 성리학이 대두되었다.
성리학은 반종교적 합리주의인 유학의 본성을 끝까지 밀어 붙여 불교와의 차이를 선명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불교를 없애버리려는 시도로 나아갔다. 즉, 이제현의 성리학은 사회 개혁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후 정도전에 의해 성리학적 불교배척론이 체계화되었다. | | 7.
이종무 |
본문 |
시 대 : 조선
생몰년 : 1360년(공민왕 9)~1425년(세종 7)
시 호 : 양후(良厚)
본 관 : 장수
조선 초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운 무신.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고,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있을 때 왜구가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여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에 봉해졌다가 1406년 장천군에 다시 봉해졌다. 이후 안주도병마사,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가 되었으며, 1419년(세종 1)에는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해 5월 5일 왜선 39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지금의 서천군 동면 도둔리)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하고, 이어 황해도 해주를 공격하는 등 서해안을 소란스럽게 하자 조정에서는 차제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삼군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 다음날 10여척의 선단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하여 대마도주 소우 사다모리(宗貞盛)에게 글을 보내 항복을 권하였다. 그러나 답이 없으므로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대소 선박 129척과 민가 1,940여호를 소각하였으며, 적 114급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7월 3일 거제도로 귀환하였다. 귀국한 뒤 찬성사에 승진하였으나, 불충한 김훈·노이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상원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복관되어 142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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