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 08. 03. 14:20
서전서숙(瑞甸書塾) - 북간도의 독립운동 거점
글 : 안재세/배달의 소리
4239년(서1906) 8월에 이 상설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사재를 털어서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던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창설했다.
서전서숙을 운영하는 모든 운영자금은 이상설이 맡았는데, 처음에는 학생 22명을 모아서 문을 열고 교재에서부터 교원들의 봉급까지 감당하느라고 대단히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 일지기 서양학문을 익혔던 이상설이 직접 산술교육을 맡는 등, 학교의 평판이 널리 퍼지자 나중에는 학생이 7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 상설은 학생들에게 무엇보다도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정신을 심어주기에 열중하였으니, 서전서숙은 실로 독립군양성소나 다를 바가 없었다.
원래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별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던 이상설이 힘겹게나마 서전서숙을 서둘러서 설립하고 운영해 갈 수 있었던 것은, 동포들의 후원금을 비롯하여 광무황제가 밀사의 임무를 맡기면서 하사한 내탕금 등 은밀한 자금지원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상설이 용정에서 동포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면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4240년(서1907)초에, 일제는 뜻밖에도 을사늑약에 의거해서 4239년(서1906) 2월 1일에 설치했던 통감부의 산하에 북간도파출소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갑자기 북간도 파출소설치를 결정하게 된 동기는, 을사늑약 후 1년여가 지난 4239년(서1906) 11월에 이르러 의정부대신 박제순이4327년(서1904)에 간도관리사가 철수한 이후 간도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마적들과 불한당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던 간도거주 대한인들의 신변을 우려하며 이등에게 거주민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음흉한 일제로서는 저들의 관할지역이 늘어남을 뜻했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즉시 간도의 현황파악 등 필요한 조치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파출소를 건립할 마땅한 후보지를 물색하려고 재등(齋藤 : 사이또)중좌와 어용학자인 조전(條田 : 시노다)을 밀파했다.
저들은 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전서숙의 실정을 탐지하려고 찾아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었으므로 저들은 더운 물과 식사할 장소를 빌려달라고 청하였으나, 그 때 문을 나서던 이상설은 대꾸도 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가버렸다.
그는 일본인만 보면 분노가 솟구쳐서 저들을 문자 그대로 문전박대해버린 것이었는데, 저들은 별 수 없이 개울가에서 식사하고 돌아가서는 '이상설의 태도가 교만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일제가 간도까지 점거하려는 교활한 공작을 서두르는 것을 목격하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예의 주시하며 어떻게 해서든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사기성을 폭로하여 국제여론에 의거하여 국권회복을 앞당기고자 기회를 노리던 이상설은, 마침내 회의날짜가 임박해 오자 '훈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러 간다'고 소문내면서 해삼위로 돌아가서, 이 역시 황제의 밀명을 받고 동생 이상익의 길안내로 찾아 온 이준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또 다른 밀사인 이위종(이 범진의 아들)과 만나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4월(양력)에 모스크바를 향해 떠났다.
이미 간도에서 서전서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번져가고 있는 것을 탐지한 일제가 4240년(서1907) 8월에 마침내 서둘러서 파출소를 개설하자, 그에 놀란 청국에서는 일제의 조치에 대하여 크게 항의하여 간도지방의 분위기는 날로 험악해져 갔고, 그리하여 마침내 2년후에는 두 나라간에 엄연히 대한국의 영토인 간도를 둘러 싼 협잡(소위 '간도협약')을 적당히 체결해 버림으로써 간도는 당분간 우리 민족의 판도에서는 없어져 버린 땅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서전서숙 자체는 이상설이 황제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를 향해 떠난 4월 초순이후 경영난에 봉착하였고, 거기에다가 파출소가 설치된 이후로는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져서 도저히 운영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어 4240년(서1907) 10월에 마침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곧이어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받은 명동학교 등 여러 민족학교들이 망명애국지사들에 의하여 연이어 설립됨으로써 간도는 국권회복투쟁의 큰 중심지의 하나로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