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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4. 12. 13
설공찬전(薛公瓚傳) - 고전소설
<설공찬전 필사본>. 중종은 <설공찬전>을 금지하면서도 처벌은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사흘 뒤 이 소설을 불태웠다.
이 소설은 조정 관리들이 돌려 읽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설공찬전(薛公瓚傳)은 1511년(중종 11) 무렵 충북 음성 출신의 채수(蔡壽)가 지은 고전소설로 쾌재정에서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쾌재정(快哉亭)은 상주군 이안면 가장리에 있는 정자이다.
순창에 살던 설공찬(薛公瓚)이 주인공으로 조선《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다.
●줄거리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설공찬 누나의 혼령은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주술사 김석산을 부르자, 혼령은 공찬이를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왕래하기 시작한다.
설충수가 다시 김석산을 부르자 공찬은 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데, 설충수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자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공찬은 사촌동생 설워와 윤자신을 불러오게 하는데, 이들이 저승 소식을 묻자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펴 하는데, 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을 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왕이었더라도 반역해서 집권하였으면 지옥에 떨어지며,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여성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
하루는 성화황제가 사람을 시켜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염라왕에게 요청하는데, 염라왕은 고유 권한의 침해라고 화를 내며 허락하지 않는다. 당황한 성화황제가 친히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1]
●평가
《설공찬전》으로 발표된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각지 각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어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문으로 번역되어 유통된 것은 이러한 인기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작품의 국문 본은 우리 소설 연구에서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의 가치를 적극 평가할 필요성을 강하게 일깨워 준다.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문장가, 중종반정공신으로 인천군(仁川君)에 책봉되었던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중종반정 이후 이조참판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그가 쾌재정에서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은 당시 훈구대신과 신진사류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주인공 설공찬이 당시의 정치적 인물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홍길동전〉보다 100년 앞선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의 산실인 쾌재정은 채수의 삶과 학문이 녹아있는 정자이다.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산정형(山頂形) 정자로서 쾌재정이 보여주는 익공형식과 화반장식, 처마 앙곡 등의 수법은 건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최초의 한글소설인〈설공찬전〉이 이곳에서 지어졌다는 역사성을 인정하여 문화재자료로 지정한다.
이 작품이 지니는 국문학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이 작품은 <금오신화>를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 1553년)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작품이다.
특히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출현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이 장편인 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필시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안락국태자전>·<왕랑반혼전> 등이 모두 소설이 아닌 불경의 번역이라 안타까워했는데,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발견됨으로써 이 가설이 물증으로 증명되었다.[1]
[같이 보기]
《금오신화》
《홍길동전》
주석
1.↑ 이동: 가 나 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설공찬전(薛公瓚傳), 한국사전연구사(1998년)
참고 자료
「조선의 선비 귀신과 통하다」, 《설공찬전》, 장윤선 저, 이숲(2008년, 147~151p)
「조선의 문화공간」, 자천대와 숭정처사 채득기, 이종묵 저, 휴머니스트(2006년, 268~2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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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
설공찬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그 혼이 돌아와 남의 몸을 빌려 수개월간 이승에 머물면서 들려준, 자신의 원한과 저승에서 들은 이야기'를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설공찬전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제목이 여섯 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만 전해 내려오다가 최근 극적으로 소설의 원문이 발견되었다.
1996년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쓴 묵재일기(默齋日記, 총 10책)를 검토하던 중 3책의 이면에 바로 이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문건은 중종, 명종대에 활약한 학자로, 채수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가 귀하여 책의 이면에 다른 내용을 기록한 사례가 많이 보이는데, 잃어버린 소설 설공찬전도, 묵재일기의 안쪽 면에 숨겨져 있다가 무려 500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저녁, 전라도 순창에 사는 설충수네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설충수의 아들 공침이 숟가락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쥐고 밥을 게걸스럽게 퍼먹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 까닭을 묻자, 공침은 갑자기 음산한 표정을 지으면서
"5년 전에 죽은 조카 공찬을 기억하느냐"
면서 저승에서는 다 이렇게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 후로도 공찬의 혼령이 몸에 들어올 때마다 공침은 계속 왼손으로 밥을 먹었고 날로 피골이 상접해졌다.
이에 설충수는 귀신을 쫓는다는 김석산을 불렀으나 오히려 설공찬이 공침을 괴롭히는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마침내 설충수가 공찬에게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빌자 설공찬은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설공찬은 주변 사람들에게 저승 소식을 종종 전해 주었는데, 잠시 이 소설에 표현된 저승에 대해 살펴보자.
저승은 바닷가이로되 매우 멀어 여기서 가면 40리로되 우리 걸음은 하도 빨라 여기서 술시(戌時, 오후 8시경)에 나서면 자시(子時, 오후 12시경)에 들어가 축시(丑時, 오전 2시경)에 성문이 열리면 들어가노라 하고 또 말하되, 우리나라 이름은 단월국(檀月國)이라 하고 중국과 제국(諸國)의 죽은 사람이라, 이 땅에 모인 사람이 하도 많아 수를 세지 못한다.
또 우리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라.
저승의 위치는 소설의 배경인 순창에서 바닷길로 40리 거리이며, 귀신의 걸음이 매우 빠르다는 것,
저승 나라의 이름은 단월국이라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설공찬이 전하는 저승의 분위기를 보면, 왕에게 충언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지만 생전에 충언을 했다는 이유로 대접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승에서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글을 잘한다는 이유로 대접받는 여성도 나온다.
남녀 차별이 점차 강화되어 가던 시절, 여성의 지위를 저승에서나마 높이려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중국 당나라의 신하였다가 국왕을 배반하고 후량(後梁)을 세운 주전충(朱全忠, 852~912)도 설공찬이 저승에서 만난 사람이다.
설공찬은
"비록 이승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면서,
"이승에서 비록 존귀한 인물이라도 악을 쌓으면 저승에 가서도 불쌍하고 수고롭게 지낸다"
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설공찬전』에 나오는 저승의 인물은 충신·반역자·여인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정치적인 성격을
띤 인물이 많다.
한편 설공찬은 염라왕의 지위가 매우 높음을 강조하였다.
염라왕이 있는 궁궐은 장대하고 위엄이 매우 성(盛)하니, 비록 중국 임금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염라왕이 지시하면 모든 나라 임금과 어진 사람이 나란히 앉고 예악을 썼다.
이어 중국의 황제가 신하 애박을 염라왕에게 보내 자신이
"가장 예뻐하는 아무개를 한 해만 저승에 잡아오지 말라"
는 청탁을 하는데 염라왕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다 내 권한에 속하였는데 어찌 거듭 내게 빌어 청할 수가 있단 말인가"
라면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황제가 청탁했던 사람을 즉시 잡아오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처럼 저승의 염라왕을 현실 정치의 최고 정점에 있던 중국 황제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해석에 따라서는 현실 세계에 대한 강한 비판이라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작자 채수가 설공침의 귀신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고 한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설공찬전』의 작자 채수의 삶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자.
대부분의 고전 소설과 달리 작자가 확실한 『설공찬전』은 조선시대 최대의 필화(筆禍) 사건을 일으킨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책에 대한 금지 조치와 함께 작자 채수에 대한 처벌 논의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마찬가지로 작자가 확실한 -역적으로 몰려 비참하게 사형당한 허균의 『홍길동전』 같은 사회 소설이 실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채수는 세조대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관직에 올라 성종대에는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젊은 언관(言官)으로 명성을 떨쳤다.
간신 임사홍의 전횡을 비판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34세에 언관의 수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지금의 검찰총장)에 오를 정도로 자질을 인정받았다.
학문에도 능력을 보여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연산군대에는 줄곧 지방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며,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봉해졌으나
"관직 생활 40년이니 영화가 이미 다했다"
는 말을 남기고 경북 상주의 향촌으로 내려가 쾌재정(快哉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와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일찍이 사림파의 영수인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저술한 성현(成俔)과는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종실록』에 실린 채수의 졸기(卒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채수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廢妃)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조급하며 허망하여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詩酒)와 음률을 가지고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
반정 뒤에는 관직을 맡지 않고 늙었다 하여 고향에 물러가기를 청해서 5년 동안 한가하게 휴양하다가 졸(卒)하였는데, 뒤에 양정(襄靖)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채수는 학자이면서도 귀신이나 풍수, 복서(卜筮)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에 관한 기록 중에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 지리에 이르기까지 해박하여 다른 나라라도 직접 본 듯이 훤히 알았다"
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가 쓴 글 중에는 귀신과 복서에 관한 「귀신무격복서담명지리풍수책」(鬼神巫覡卜筮談命地理風水策)이 눈길
을 끈다.
왕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된 이 책문의 주요 내용은 귀신·복서·지리는 원래 음양의 위치에 따라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나 후세에 와서 사설(邪說)로 흘러 그 폐단이 심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귀신이나 음양·풍수·복서 등에 해박했던 채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귀신이나 복서에 대한 그의 관심이 『설공찬전』의 저술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사림파 학자였지만 불교나 무속, 귀신, 지리 등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던 채수였기에 『설공찬전』의 저술이 가능했던 것이다.
1511년(중종 6), 채수는 조정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그가 저술한 『설공찬전』이 가져온 파문 때문이었다. 실록에는 채수가 『설공찬전』을 저술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았다가 겨우 사면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해 9월 2일 사헌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채수의 처벌을 요청한다.
채수가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중외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로 옮기거나 언어(諺語, 한글)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백성들을 현혹합니다.
사헌부에서 마땅히 공문을 발송하여 거두어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러한 건의에 대해 중종은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는 답을 내린다. 이어 『설공찬전』의 배포를 금지하고 동시에 채수의 파직을 명한다. "그가 지은 『설공찬전』이 괴이하고 허탄(虛誕, 허망)한 말을 꾸며 사람들을 혹하게 하기 때문에, 부정한 도(道)로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선동하여 미혹케 한 죄로 사헌부가 교수(絞首)할 것을 청했으나 파직만을 명한 것이다"라는 실록의 기록에서 『설공찬전』이 민심을 현혹했다는 것이 당시 조정의 주된 인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중추부사 김수동 같은 사람은 "만약 채수가 죽어야 한다면 『태평광기』나 『전등신화』 같은 글을 지은 사람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습니까?"라며 귀신을 소재로 한 글을 저술했다고 하여 중죄로 다스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설공찬전』은 중종대의 뜨거운 감자였다. 도대체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에 어떤 문제가 있어 금서라는 딱지가 붙은 것일까?
『설공찬전』에 등장하는 인물은 설씨 집안의 사람들로 모두 다섯이다. 설공찬의 증조부인 설위, 공찬의 아버지인 설충란, 숙부인 설충수, 공
찬이 몸을 빌린 사촌 동생 설공침,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설공찬이다.
그런데 순창 설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설위는 대사성을 지낸 실존 인물이며 그의 아들인 설충란과 설충수도 족보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설공찬이나 공침은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이 적절히 배치돼 있는 것인데, 이처럼 실존 인물을 소설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을 좀 더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한 것은 『전우치전』이나 『홍길동전』, 『임경업전』 등과 유사하다.
일반적인 저승 경험담의 경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거나 혹은 마지막에 모든 것을 꿈속의 일로 돌리는데, 『설공찬전』에서는 죽은 자의 혼이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저승의 모습을 진술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귀신 소설 『장화홍련전』에서 장화와 홍련의 귀신이 직접 고을 수령에게 나타나는 것과도 차이가 있는데, 『설공찬전』은 무속에서 혼령이 무당의 몸에 실려 나타나는 것에 더 가깝다.
『설공찬전』이 금서가 된 첫 번째 이유는 귀신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백성을 현혹했다는 데 있었다.
특히
"적선(積善)을 많이 한 사람이면 이승에서 비록 천하게 다니다가도 가장 품계가 높이 다닌다"
는 등의 글을 통해 불교의 윤회화복 사상을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윤회화복이나 사후 세계를 다룬 소설은 『설공찬전』이 처음은 아니다.
조선시대 한문 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또한 사후 세계를 다룬 작품이며, 『금오신화』에 영향을 준 중국의 『전등신화』에도 사후 세계를 다룬 작품이 21편이나 실려 있다.
그뿐 아니라 16세기의 사상가 서경덕은 「귀신론」(鬼神論) 같은 논설을 써서 학문적으로 귀신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글들은 전혀 금서가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귀신에 대한 소재 선택이 자유로웠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왜 유독 『설공찬전』만 금서로 지목되었을까?
『설공찬전』이 금서로 규정된 데는 무엇보다 당시 조선의 시대적·사상적 분위기, 그리고 채수의 사회적 지위와 관계가 깊다.
채수가 『설공찬전』을 쓴 16세기는 조선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이 중앙 정계뿐만 아니라 지방 사회 곳곳에까지 침투한 시기
였다.
따라서 15세기까지 어느 정도 용인되었던 불교 사상은 완전히 배척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불교의 윤회화복 사상을 주요 소재로 한 『설공찬전』은 매우 위험스러운 소설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채수가 귀신 이야기로 은근히 시국을 비판한 것 또한 문제가 되었다.
채수는 성종의 총애를 받아 34세의 젊은 나이에 대사헌에 오를 정도로 자질이 뛰어났으며, 당시 정치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성리학의 보급과 전파에 전념해야 할 유능한 인물이 오히려 불교 사상에 심취하여 그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특히 『설공찬전』에서 채수는 은근히 국왕을 비판하고, 성리학적 사회 질서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의 지위 향상에 관한 내용도 거침없이 서술하고 있다.
"비록 이승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는 대목이 그것인데, 주전충은 당나라의 신하였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후량을 세우고 국왕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이 대목은 채수의 행적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석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중종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채수가 중종반정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만취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위에게 이끌려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중종을 비판한 것이라면 비록 중국의 사례에 비유했다 할지라도 최고 권력자인 국왕에 대해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고 표현한 것은 엄청난 불충(不忠)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설공찬전』에는 이승에서 충언을 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관리가 저승에서는 귀인 대접을 받는 장면도 나온다. 곧은 말을 생명으로 하는 채수와 같은 언관의 모습을 상정한 것이 아닐까?
"여자라도 글만 잘하면 세상의 아무런 소임이나 맡을 수 있다"
고 표현한 대목 또한 당시의 사회 질서 속에서 쉽게 수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승의 염라왕을 중국 황제보다 높은 최고의 지위로 파악한 점은 국왕 중심의 현실 정치, 나아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비판한 것일 수 있었다. 『설공찬전』의 배경이 되는 중종대는 사림파를 중심으로 성리학 이념이 주요 사상으로 대두된 시기였다.
이것은 『설공찬전』의 파문이 가라앉은 후에 중종이 기호 사림의 영도자 조광조(趙光祖)를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성리학 중심의 국가를 지향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 도교의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昭格署)가 폐지되고 성리학 이념을 담은 『소학』(小學)과 향약이 보급되면서 철저하게 성리학 중심으로 사회 체제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채수 같은 사회 지도급 인사가 귀신과 저승에 관한 허황한 이야기를 쓰고, 여기에 국왕과 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았으니 조정에서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이것이 백성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급속히 전파되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이를 강력히 차단했던 것이다.
지장시왕도>중 제8 평등대왕사람은 죽으면 저승에서 10명의 명부 왕에게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그림의 제8 평등대왕은 죽은지 100일째 되는날 심판을 담당하는 왕이다. <고성 옥천사 소장>.
▲설공찬전
채수의 『설공찬전(薛公瓚傳)』이 『묵재일기(默齋日記)』의 안쪽 면에 기록된 것은 당시 종이가 귀했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금서인 이 작품을 몰래 보기 위해 일부러 숨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조광조 적려유허지 조광조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유배 당시 거처했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중종대는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을 중심으로 성리학이 주요 사상으로 대두된 시기였기 때문에 귀신과 저승을 다룬 『설공찬전』은 금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남 화순군 소재.ⓒ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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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의 이름에 관하여
소설 설공찬전에서 나오는 주인공 설공찬(薛公瓚)은 과연 설공양(薛公讓) 이란 실제 인물이라고 볼수 있는가?
이복규는 저서 <설공찬전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최근 들어 설씨 문중 설명환님의 제보로 <문화류씨세보>와 <씨족원류>에서 <설공찬전>의 주요 등장인물인 설공침(薛公諶)이 실존 인물이었음을 확인하고, 설공찬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한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설공찬전 연구 – 서문]
그리고 설공찬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수록되어 있는 설공양 이라고 밝히고 있다. 과연 설공양을 설공찬으로 보아도 좋은 것일까? 如水는 오래 동안 족보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견해를 밝히자면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형제간에 돌림자가 사용된 것은 매우 오래되어 최소한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문중전체가 같은 돌림자를 사용하는 이른바 항렬자(行列字)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전주최씨 가문의 경우에는 시조(始祖)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아들 4형제는 최용생(崔龍生), 최용각(崔龍角), 최용갑(崔龍甲) 최용봉(崔龍鳳)으로 “용(龍)”자를 돌림자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분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태어나 고려시대에 돌아가신 분들이다.
하지만 전주최씨 문성공계 가문에서 발견된 항렬자와 관련된 문헌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동치중랑장공파보(同治中郞將公派譜)>로 1864년(고종 1) 8월에 간행되었는데, 문성공 23세손에서부터 항렬자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전주최씨 문성공계 가문의 경우에엔 이미 고려시대부터 돌림자를 사용하여 형제들의 이름을 질서 있게 지었지만 돌림자를 항렬자로 적용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1850년경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공찬이 살았던 1500년경에는 아직 항렬자가 없었고 돌림자가 점차 발전해 나가고 있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무렵에는 그 이전 고려 시대나 조선 초기와도 다르고 항렬 시스템이 적용된 조선 후기와도 다른 특이한 점 한 가지가 더 발견되는데 돌림자의 변천 과정에 나타난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돌림자를 적용한 이름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항렬자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대개 사람들은 이름 두 글자 중에서 한 글자만을 돌림자나 항렬자를 적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1500년경에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니 나머지 한 글자마저도 부수(部首)를 통일하는 것이다.
사례를 살펴보면 전주최씨 가문에서는 도사공(都事公) 최윤조(崔潤祖)와 동생 감찰공(監察公) 최엄조(崔渰祖)는 뒤에 오는 “조(祖)”자를 돌림자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 오는 나머지 한 글자도 부수로 “삼수 변(氵)”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설공찬의 외가 전주이씨 가문에서도 평성군(枰城君) 이위(李偉)의 장남은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이고, 차남은 예성군(芮城君) 이준원(李濬源)이며, 삼남은 벽계군(碧溪君) 이혼원(李混源)이고, 사남은 선곡부정(善谷副正) 이윤원(李潤源)이며, 오남은 의신군(義新君) 이징원(李澄源)으로 모두 뒤에 오는 “원(源)”자를 돌림자로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앞에 오는 글자도 역시 부수로 “삼수 변(氵)”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설공찬의 매부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수(李洙 : 再思堂 李黿의 아들)의 아들들도 장남은 이개윤(李愷胤)이고, 차남은 이제윤(李悌胤)이며, 삼남은 이종윤(李悰胤)이고, 사남은 이핍윤(李愊胤)이어서 역시 뒤에 오는 돌림자는 “윤(胤)”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앞에 오는 글자도 부수로 “마음심 변(氵)”을 사용하고 있다.
이상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은 돌림자 외의 다른 글자도 부수를 통일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설공찬과 사촌 형제들의 이름에 적용하여 검토해 보면, <씨족원류>와 <가정보(嘉靖譜, 문화유씨세보)>에 수록된 설공찬의 형제 및 사촌 형제들은 모두 앞에 오는 글자에
“공(公)”
자를 돌림자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글자의 부수(部首)를
“말씀언(言) 변”
으로 통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설충회(薛忠誨)의 아들은 설공성(薛公誠)이고, 설충란(薛忠蘭)의 아들은 설공양(薛公讓), 설공포(薛公誧), 설공순(薛公諄)이며, 설충수(薛忠壽)의 아들은 설공심(薛公諶)으로 모두 뒤에 오는 글자의 부수(部首)에
“말씀언(言) 변”
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성공포와 설공순의 형인 설공찬만 뒤에 오는 글자의 부수에
“말씀언(言) 변”
이 아닌
“구슬옥(王) 변”
을 사용하는 이변이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