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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선생 행장(河演先生行狀)
공(公)의 휘(諱)는 연(演)이요, 자는 연량(淵亮)인데 진주사람이다. 젊었을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가 이십 일세 되던 병자(一三九六년)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병과(丙科 제 사인(第四人)으로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되어 예문수찬 문하주서로써 이조.병조랑에 전직하였다. 그 후 사헌부 장령 집의, 세자 좌우문학(世子左右文學)에 승진하였다.
시를 잘 짓고 읊기를 좋아하여 침식(寢食)을 잊어 버리기도 하고, 또 글씨를 잘 써서 사대부 중에 시를 요구하는 자가 하 문학(河文學)이 지어서 직접 쓴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 정유(一四一九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되었는데 태종 대왕이 공(公)의 손을 잡고 경(卿)이 이 자리에 온 것을 아는가 하였다. 공이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니 태종 대왕이 말하기를「경(卿)이 사헌부에 있을 적에 그 직책을 잘 하였기에 내가 이 때에 경을 알아 보았다」하였다.
세종대왕이 선위(禪位)를 받자 지신사(知申事)를 시켰다. 그 때에 국가에 일이 많았다. 공이 조심하여 그 중간에서 주선하였으므로 두 임금께서 대우가 융숭하여 상품을 내리심이 잇따랐다. 태종 대왕이 세종 대왕을 위해 가례(嘉禮)를 베풀고자 하셨다.(빠진 글이 있음) 상왕(上王)의 뜻을 전하면서 실수된 일이 있어 공이 문을 닫고 죄(罪) 줄 것을 청했으나 태종 대왕이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허락하지 아니 하셨다.
영락 십 팔년 경자(1420년) 정월에 예조 참판이 되었다. 지물을 진상하는 차자(箚子)와 겸해서 금은을 면제하여 주기를 청하기 위해 중국 서울에 가게 되었다. 공이 임금에게 하직하던 날에 중국 조정이 어떤 물품으로 대체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하오리까 하고 청하였다. 태종 대왕이 말씀하시기를「국가에서 선택하여 경을 보내니 경이 대답하기에 달렸다」하셨다. 이십 일년 삼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청주맹(請誅孟)(빠진 글이 있음) 사대부로서 탐심 있고 음란한 자를 배격하고, 또 불교를 미원하여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여 말하기를「간절히 생각하나니 구담이 임금과 아비를 버리며 벼슬도 마다하고 머리를 깍고 산중에 살고 있던 것을 역대로 신앙하여 널리 정사(精舍)를 세워 토지를 시주하고 장획(臧獲)을 주었더니, 우리 태종 대왕에 이르러서는(빠진 글이 있다) 진실로 전고(前古)에 없는 좋은 법이다.
그러나 시험 보이어 벼슬 주는 것과 토지를 시주하는 폐단은 아직 그대로 두어 중앙이나 지방에서 나누어 준 밭이 일만 일천 일백 결(結)이 넘습니다. 우리 동포인 백성들은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데 놀고 있는 중들에게 무엇 때문에 전토를 주어 봉양을 넉넉하게 할 것입니까?
예전 당 고조가 중을 미원하여 서울에는 절을 두 곳에만 두게 하고 지방 고을에는 한 곳씩만 두고 나머지는 다 없애 버렸습니다. 저렇게 큰 천하와 넒은 사해로서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는 면적이 아주 적은데 어찌 절을 많이 지어 토지를 대중없이 주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전하께서 태종 대왕의 뜻을 받들어 이단(異端)의 무리를 배척하시고 서울에는 두 곳만 남겨 두고 다른 도(道)에는 두 세 곳에 지나지 못하게 하시며 이어서 시험보이는 법을 혁파하여 중의 관직에 대한 비지(批旨)를 내려 주지 마옵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감에 의논을 하니 대신들이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임금께서 그 의논을 옳다 하여 조제.화엄 일곱 종파를 합해 선 교 양 종을 만들고, 서울밖에 삼십 육 개소의 사찰만 남겨서 토지를 주고 그 나머지는 다 없애 버렸다. 이 때 세봉께서 정사에 정신을 차리시고 모든 대신들이 임금을 도와서 공의 말대로 다하였으니 어찌 우리 유도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덕 이년 정미(一四二七년) 팔월에 평안도 관찰사로 평양 부윤을 겸직하였다가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고 천안군으로 귀양가셨다. 공이 두 번 군수가 되어 정치가 청렴하고 공평하므로 유애(遺愛)가 다 있었고, 네 번 감사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고 민폐를 제거한 것으로 최선의 힘을 다하였다.
그 이듬해에 서울로 소환되어 선덕 사년 기유(一四二九년) 사월에 병조참판를 시키고, 육년 신해(一四三一년) 유월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는데, 아버지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가 팔년 계축(一四三三년)에 상제가 끝나자 삼군 도진무로써 금부(禁府)를 맡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공이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 하여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받들고 음식물로써 봉양하는 것과 조석으로 정성하는 예를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이 부모 옆에서 좀 멀다하여 돈의문 밖으로 옮겼다. 그 때 부모 나이가 거의 팔십이었다. 무엇이든지 부모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극진히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구경당을 지어 명절에는 술잔을 들어 헌수하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기어 시를 지어 그 일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심에 상제를 예식대로 다하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하였다. 구경당은 선공이 거처하던 집으로 띠로써 덮어 해마다 수리하여야 했다.
이 때에 이르러 집 이름을 영모당이라 고치자, 아들 조카들이 기와로 갈아 덮기를 청하니 공이 탄식하면서 말씀하기를「선인이 거처하시던 집을 어찌 고치겠는가? 또한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한 덕을 본답게 함이라」하였다.
정통 구년(正統九年) 갑자(1444년) 윤 칠월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정원 도승지를 겸임하고 모든 조를 거쳐 의정부에 들어와 마음을 극진히 하여 봉공(奉公)하며 명기(名器)를 중히 하고, 잡된 비용을 생략하며 큰 정사를 의논함에 생각이 치밀하고 언어가 정당하여 임금의 뜻에 들었기 때문에 임금의 사랑과 기대가 컸었다.
공이 어떤 일이든지 처리할 때는 크로 작은 것 없이 처리하기 전에 계획을 세웠고, 이미 시행한 뒤에는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그대로 두는 것이 없었으니 공은 나라 걱정을 자기 일처럼 하는 분이라 하겠다. 십년 을축(1445년) 정월에 우의정에 오르니 이 해에 공의 나이가 칠십이라 궤장을 하사하였다.
십 이년 정묘(1447년) 정월에 좌의정으로 문과전시 동권관이 되어 이승소(李承召)등 삼십 삼인(三十三人)을 뽑고, 가을에 또 독권관이 되어 과거를 맡아보아 강희맹등 이십오인(二十五人)을 뽑고, 중시(重試) 과거에 집현전 수찬 성삼문등 십 구인(十九人)을 뽑았다.
경태 원년 경오(一四五十년)에 문종 대오아이 즉위하자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하므로 공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으나 대신들의 의논이 같지 못하여 마침내 중지하지 못하였다. 가을에 과거시험을 맡아 권람등 삼십삼인(三十三人)을 뽑았다.
이 해에 영의정이 되어 두 번 이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다 허락하지 않고, 이년 신미(1451년) 여름에 독권관이 되어 홍응등 사십인(四十人)을 뽑고, 또 노병으로 해임하기를 청하여 영의정으로 치사(致仕) 하였다. 문종대왕이 즉위하자 막내아들 우명을 첨지중추를 시킨 것은 공을 존중해서 한 것이다.
이년 동안 집에 계시면서 병환이 점차 심하여 계유(1453년) 팔월 십 오일 신해(辛亥)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칠십 팔세(七十八歲)이다. 부고를 들음에 임금께서는 삼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를 보내며 제사도 내리시고, 관에 명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고, 시호를 문효공이라 하였다. 유언으로써 불사를 하지 않았다.
공의 성품이 염담 간결하며, 강직 명찰하고 위의는 단아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간에 어질게 하였으며, 친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를 폐하지 않았으며, 가산을 축적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두지 않아서 집안이 화목하였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대궐을 향해 않으며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 두고 담박하게 지내셨다.
사람이 시를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곧 흔연히 붓을 잡아 써 주는데 시상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더울 절묘하니 이는 하늘에서 받은 재주였다. 공이 옛 도를 좋아하여 무슨 일이든지 고인같기를 기대하였으며, 사대부들은 예로써 맞이하여 문전에 기다리는 손님이 없었다.
그러서 논척하는 자도 있었다. 무룻 임금 앞에 한 말이나 임금이 하신 말은 처자와 더불어 말한 적이 없고 정부에 오래 있으면서 법을 잡아 요통하지 않고 시종으로 근신하였으니 태평세대에 법을 지키는 재상이라 하겠다.
공(公)의 배위 정경부인 이씨는 봉익대부 충근익대 보리공신 중대광(奉翊大夫忠勤翊戴輔理功臣重大匡) 개성부윤(開城府尹) 존성의 따님으로 성산(성주) 사람이다. 아들 셋, 딸 둘을 낳으셨는데, 맏이는 군자부정 효명이요, 다음은 좌랑 제명이요, 막내는 동지중추 우명이다.
맏딸은 부윤 유경생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딸은 감찰 김맹렴에게 출가하였으며, 안팎 손자 증손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선대에 쌓아 온 음덕이 공에게 피어난 것이다. 학문이 정심하고 문장이 전아하여 세상에서 추앙한 바 되었으며, 자손이 만당하여 후손까지 번창하니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저 부윤같은 부귀는 특히 그 여사인 것이라, 근원이 멀고 뿌리가 깊지 않고서야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천순 계미(세조 九년, 1463년) 구월 하순 표재종질 진산군 강희맹(晉山君姜希孟)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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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敬齋河演先生行狀
公諱演。字淵亮。晉州人也。自少聰明好學。年二十一丙子。俱中生進試。仍登丙科第四人及第。屢遷藝文修撰,門下注書。轉吏,兵曹郞。陞司憲掌令,執義。世子左右文學。善詩律好吟詠。至忘寢食。又善書。搢紳之求詩者。非河文學作而書之。不可也。丁酉。擢拜同副代言。太宗執公手曰。卿知所以在兹乎。公對以未知。太宗曰。曩卿在臺獨奏。克揚憲職。予於此時乃知卿也。世宗受內禪。拜知申事。時國家多事。公小心謹愼。周旋其間。兩上際遇交隆。賞賜稠重。太宗欲爲世宗設嘉禮。 有闕文 傳上王旨失禮。公杜門待罪。遂坐罷。太宗知其無他。不許。永樂十八年庚子正月日。拜禮曹參判。公以進紙箚兼請免。金銀赴京師。公陛辭請曰。朝廷若問代以何物。對之如何。太宗曰。國家選擇而使卿。在卿專對。二十一年三月日。拜大司憲。請誅孟 有闕文。彈擊士大夫貪淫者。又惡浮屠。與同僚上疏。略曰。竊惟瞿曇棄君父辭爵位。斷髮居山。歷代酷信。廣立精舍。施土田納臧獲。至我太宗有闕文。誠曠古所未有之盛典也。獨試選爵秩土田奉養之弊。尙循古習。中外分屬田一萬一千一百餘結。竊謂同胞赤子未免餓莩。遊手緇流。又何給田以優其養乎。昔唐高祖惡沙門。京師只留寺二所。諸州各留一所。餘皆罷之。以天下之大。四海之富。尙且如此。況我國壤地褊少。豈宜多置寺宇。濫屬土田乎。伏望殿下善繼太宗之志。排斥異端之事。於京師只留二所。各道各不過二三所。仍罷試選之法。勿下僧職之批。疏上。下其議。時大臣亦以爲革之宜。上是其議。幷曹溪,華嚴七宗。合爲禪,敎兩宗。京外只留三十六寺。量給田土。餘悉罷之。宣德二年丁未八月日。拜平安道觀察使兼平壤府尹。以事罷。謫守天安郡。公再受郡寄。爲政廉平。皆有遺愛。四秉節鉞。以愛民除弊爲先。翌年。召還于京。宣德四年己酉四月日。拜兵曹參判。六年辛亥六月日。拜藝文館大提學。丁外憂居廬。八年癸丑。服闋。拜三軍都鎭撫。掌禁府。同年十二月日。復除爲大司憲。未久丁內艱。公事父母甚孝。自少色養。滫瀡甘旨之奉。朝夕定省之禮。未嘗少廢。以所居室稍遠於親側。就居敦義門外。二親年俱八十。凡所以悅親心者。靡所不至。作具慶堂。歲時佳節。必奉觴稱壽搢紳榮之。至爲歌詠其事。親歿。居喪盡禮。出入必告祠堂。具慶。先公所處之堂。蓋以茅茨。歲加修葺。改額永慕。子姪請易以瓦。公嘆曰。先人舊居。豈可改也。亦足以使吾後世法先人之儉也。正統九年甲子閏七月日。拜左贊成兼承政院都承旨。歷仕諸曹。入贊巖廊。盡心奉公。重惜名器。務省宂費。謀議大政計慮深密。言語精當。輒稱旨。由是眷倚俱隆。公凡處事。無大小計之於未爲之前。慮之於已行之後。未嘗少置。公可謂憂國如家者矣。十年乙丑正月日。拜右議政。是年公年七十。賜几杖。十二年丁卯正月日。拜左議政。爲文科殿試讀卷官。取李承召等三十三人。秋又拜讀卷官者再。典貢擧取姜希孟等二十五人。重試取集賢殿修撰成三問等十九人。景泰元年庚午。文宗卽位。欲重修大慈庵。公固執不可。以大臣議不同。竟未之果。秋。掌試取權擥等三十三人。是年拜領議政府事。公老疾乞退者再。皆不許。二年辛未夏。拜讀卷官。取洪應等四十人。又以老疾乞解機務。以領議政仍令致仕。今上卽阼。特拜公季子友明僉知中樞。重公也。家居二年。疾轉甚。癸酉八月十五日辛亥。卒于正寢。享年七十八。訃聞。上輟朝三日。致賻賜祭。命官庀葬事。贈諡文孝公。以遺命不作佛事。公恬簡剛明。風儀端雅。事親以孝。睦族以仁。故舊不遺。慶弔不廢。不務家產。不畜聲色。閨門之內雍雍如也。鷄鳴而起。正衣冠向闕而坐。左右圖書淡如也。人有求詩。欣然輒援筆書之。詩思筆法。老而尤絶。蓋其天才也。公性好古事。皆以古人自期。禮接士大未。門無停客。然久掌銓選。不喜私謁。至有論斥之者。凡言於上前及上所言。未嘗與妻子言。久在政府。執法不撓。終始謹愼。可謂昇平守文之相也。公配貞敬夫人李氏。奉翊大夫忠勤翊戴輔理功臣重大匡開城尹存性之女。星山人也。生三男二女。長軍資副正孝明。次佐郞悌明。末子同知中樞友明。女長適府尹柳京生。次適察訪金孟廉。孫曾內外百餘人。不可盡記。先世積累之德。大發於公。學問精深。文章典雅。爲世推宗。蘭玉滿庭。垂裕後昆。誠今古罕聞。浮雲當貴。特其餘事。自非源遠根深者。其能若是乎。天順癸未九月下澣。表再從姪晉山姜希孟謹狀。<끝>
敬齋先生文集卷之五 / 附錄 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