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樞密院 知奏事先生神道碑文
我始祖高麗樞密院知奏事滎陽鄭先生神道碑成國內諸裔師來奉竪于迎日 南城祭壇之下後孫崋植齋沐謹書之曰先生之詩與箋合五首俱載靑丘風雅 及東文選旣已著顯于世壇碑舊有兪相國拓基陰記昭揭事行謹倣特書不一 書之義摭家譜及史傳云而補述之先生諱襲明迎日縣人倜儻奇偉力學能文 睿宗朝以鄕貢登第屬內侍史傳云仁宗甲寅秋遣內侍鄭某發傍郡卒數千鑿 河于洪州蘇大縣乙卯妙淸趙匡等反據西京遣內侍祗候鄭某往西京南海島 會弓手水手以戰船入順化縣南江禦賊船庚申與郞舍崔梓宰臣金富軾任元 凱李仲崔奏等上書言時弊十條丙寅春正月王命太子引禮部侍郞鄭某講書 大禹謨毅宗三年己巳夏四月以鄭某爲翰林學士秋八月引見平章事高兆基 御史大夫文公元中書舍人王軾左承宣鄭某置酒論國事五年辛未春三月壬 辰二十一日樞密院知奏事鄭某卒初毅宗爲元子鄭某侍讀仁宗慮元子不克 負荷任后亦愛次子將立爲太子鄭某盡心調護得不廢鄭某久居諫職有諍臣 風仁宗深加器重擢授承宣使傅東宮及不豫謂毅宗曰治國當用鄭某言鄭某 自以先朝顧託知無不言毅宗憚之七年秋七月王幸歸法寺遂御玄化寺馳馬 至獺嶺茶院從臣皆莫及王獨倚柱謂侍者曰鄭某若在吾豈得至此嗚呼此蓋 先生立朝事行而出於史乘者然也後史臣之論曰知王之終不可與有爲仰藥 而死其先見之明不可及又曰幸而天誘其衷悔心萌而善端己露苟有一二忠 正之臣因其牖而開導之王或稍自省悟不至於終迷不復惜乎王所之無人也 噫凡此數言者皆史家斷例也當殷紂之時比干諫而剖心箕子佯狂爲奴微子抱祭器而逃孔子特稱殷有三仁今毅宗之輕佻愎悍浮於殷紂矣且諫不聽而海邦偏局亦無與國之可適矣則先生之退而仰藥其不從容審處矣乎寔曠古卓然而綽綽有萬夫不可及之操矣但急遽搶攘之際能負戴歸葬於千里故山者是亦神佑之也後因士林議與十世孫圃隱文忠公奉享梓鄕烏川書院晉州玉山書院旅軒張文康公顯光淵泉洪祭酒奭周俱有常享祝其曰正色立朝直方忠純不負顧託社稷之臣又曰立朝謇諤盡忠補闕顧託是効夷險一節於乎此果傳神之恒幹而第念人文雅渙祀典有興廢祠宇有起滅矣今此穹然崇碑永鎭隧門而屹立矣則雖山夷海竭而能可磷幷箸其文章華國儒術飭身八字勵相書紳以爲念祖貽謨之資於後人云爾
檀紀四千三百八年 乙卯 月 日 二十八世孫 崋植 敬撰
三十一世孫 直敎 謹書
篆及前面成均館長
昌寧 成 洛 緖 謹書
추밀원 지주사선생 신도 비문
뜻을 같이하는 국내 여러 후손들이 모두 와서 영일에 있는 남성제단(南城祭壇) 아래에 우리 시조이신 고려 추밀원 지주사(樞密院 知奏事)) 형양(滎陽)鄭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움에 있어서 후손 화식(崋植)은 목욕재계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삼가 비문을 씁니다.
선생의 시문(詩文)과 글 도합 다섯 수가 모두 청구풍아(靑丘風雅)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어 이미 명문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시조의 묘단(墓壇)에는 이미 예로부터 단비(壇碑)가 있어 상국(相國) 유(兪)공 척기(拓基)께서 지으신 글이 비의 후면에 새겨져 있는데 시조할아버지께서 하신 일과 행적을 소상(昭詳)하게 다 드러내어 놓았으므로 또 다시 덧붙일 것이 없지마는 삼가 본받아서 특별히 쓴다고 하더라도 한결같지 못한 글로 의(義)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가보(家譜)나 사승(史乘)등에 전하는 여러 기록을 주워 모아 약간 보충하여 말씀하면 선생의 휘는 습명이시고 영일현에 관적(貫籍)을 두셨는데 그 인품의 활달함이 과인(過人)하시고 학문에 힘쓰시어 문장에 능통하셨다. 예종조에 향공(鄕貢: 향시) 과거에 급제하시어 내시에 임명이 되셨다.
사서(史書)에 전하기를 인종 갑인년(1134) 가을에 임금이 내시 정 모(시조 형양공을 지칭함)를 파견하여 방읍인 수천 명을 동원하여 홍주소대현(洪州蘇大縣 : 충남 태안반도)에 있는 강바닥을 파서 수운(水運)의 편리를 도모하게 하였다.
을묘년(1135)에 묘청(妙淸) 조광(趙匡)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킴에 임금이 또 내시지후(內侍祗候) 정 모를 파견하여 서경에서 남서쪽에 있는 해도(海島)에 가서 궁수(弓手)와 수병을 모아가지고 전함을 편성하여 순화현(順化縣 :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의 남강(南江)에 들어가 반란적선(叛亂賊船)을 방어(防禦)하게 하였다.
경신년(1140)에 문하부(門下府)의 관원인 낭사 최자(崔梓), 재상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凱), 이중(李仲), 최주(崔奏)등과 함께 임금에게 시폐10조(時弊十條)를 상소하였다.
병인년(1146) 봄 정월 임금이 태자에게 명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정 모에게 인도 되어 대우모(大禹謨 : 사서오경의 하나인 서경의 편명)를 배우게 하였다.
의종 3년 기사년(1149) 4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시고 추 8월(秋八月) 임금이 평장사(平章事) 고조기(高兆基), 어사대부(御使大夫) 문공사인(文公舍人) 왕식(王軾), 좌승선 정모(左承宣 鄭 某)를 불러모아 주안상을 마련하고 국사를 논의하였다.
의종 5년 신미년(1151) 봄 3월 임진(21일) 추밀원(樞密院) 지주사 정모(知奏事 鄭 某)가 돌아가셨다.
의종이 원자(세자)로 있을 때 정 모께서 세자의 시독(侍讀)으로 계셨는데 인종이 원자가 사람됨이 강열(康劣)하여 장차 왕위에 올라 그 치국안민의 막중임무를 다 잘 감당할는지 심히 우려하셨고 왕후 또한 차자를 총애(寵愛) 하시어 장차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 정 모께서 온 정성을 다하여 원자를 가르치고 그 학행을 돌보아 도리를 지키도록 인도하고 보호하여 세자를 폐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정 모께서 오랫동안 간직(諫職)에 있으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는 절개 곧은 신(臣)의 풍도(風道)를 보이셨다.
인종은 鄭 모의 그 사람됨이 큰 그릇임을 깊이 사랑하여 더욱 애중히 여기어 특별히 발탁하여 승선(承宣)에 제수하였고 또 동궁시독(東宮侍讀)을 겸하게 하였다.
임금이 의종에게 말하기를 “내가 세상을 떠난 뒤라도 너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마땅히 鄭 모의 말씀을 따라야 하느니라.” 하고 또 정 모에 특별히 뒷일을 부탁하였다.
선조(先朝 : 인종)로부터 뒷날을 부탁받은 고탁지신(顧托之臣)으로서 의종을 보좌하심에 아는 것은 아는대로 말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의종은 이것을 심히 꺼려하였는데 7년 가을 7월 임금이 귀법사(歸法寺)에 행행(幸行 :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일)하였다가 현화사(玄化寺 :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었던 사찰)에 까지 어가(御駕)가 이르게 되었을 때 임금은 단신으로 말을 달려간 곳이 달영다원(獺嶺茶院)이라는 곳이었다. 모시던 신하들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임금은 혼자 기둥에 의지하고 서서 거기 있던 시자(侍者)에게 말하기를 “鄭 모가 만약 아직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참으로 이것은 선생께서 조정에 서시어 하신 일들로 여러 사승(史乘)에 기록된 것을 간추린 것이다.
그 후 사신(史臣)이 鄭 모에 대하여 논하기를 임금이 끝내 혼미(昏迷)하여 보필할 수 없음을 알고 약으로써 자결하셨으니 그 선견지명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다행히 하늘이 임금의 속마음을 유도하여 회개하는 마음의 싹이 터서 (달영다원의 기둥에 기대어 鄭 모를 추념(追念)하는 말로써 그 선단을 나타냈을 때) 진실로 한 두 사람의 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선단(善端)의 싹을 돌보아 피어나게 인도하였더라면 임금은 혹 반성하고 깨달아 끝내 혼미한 채로 회복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임금은 혼미로 끝지었으니 임금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가(史家)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은(殷)나라의 폭군 주(紂) 왕 당시에 비간(比干)은 임금을 간하다가 할복 자결하였고 기자(箕子)는 미치광이인 체하여 남의 종노릇을 하였으며 미자(微子)는 제기를 싸가지고 도망하였는데 나중에 공자께서 은나라에 이 세 사람을 삼인(三仁)이라 하시고 특별히 칭송하셨다.
이제 의종 임금이 경조퍅한(輕佻愎悍 : 성질이 몹시 좁고 경솔하여 성질을 잘 냄)하기가 은의 주왕보다 더한데다가 또 간하여도 듣지 아니한다면 저 은나라의 삼인처럼 행세할 밖에 도리가 없었으나 우리 해방(海邦)의 땅이 편소(偏小)하여 또한 나라 안에서 간다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니 선생께서 가실데가 없으니 마음이 편안한 신도(臣道)라고 생각하시고 결행하신 일이 아니랴.
참으로 밝고 크신 충절은 만고에 뛰어나시고 침착하고 조용하심은 만인들이 가히 미칠 수 없는 지조(志操)이시다.
이렇게 돌아가시니 그때의 상황이야말로 황망하여 경황이 없었을 터인데도 능히 천리고산(千里故山)에 운구되어 장례를 지내게 된 것도 천우신조(天佑神助)의 덕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사림(士林)이 의논하여 그 10세손 문충공(文忠公)과 함께 오천서원(烏川書院)과 진주(晉州)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봉향하여 모시었다.
여헌 장문강공 현광(如軒 張文康公 顯光), 연천 홍좨주 석주(淵泉 洪祭酒 奭周) 제공(諸公)이 상향(常享)에 봉독(奉讀)할 축문을 지어 갖추어 놓았는데 그 축문에 이르기를
『엄숙한 얼굴빛으로 조정에 서시어 임금을 보좌하는데는 직간(直諫)으로 하시고 광국(匡國 : 잘못된 나라를 바로 잡음)은 오직 충의(忠義)로써 하셨네, 선왕의 부탁을 저버리지 못하여 나라의 안위(安危)를 맡은 신하가 되셨네』
또 이르기를,
『바른 말씀으로 임금을 섬기시고 충성을 다하여 보좌하셨네, 선왕께 부탁 받은 중책이 있으니 어려운 일이나 쉬운 일을 오직 절의로써 하셨도다』하였으니,
아! 이것이 과연 전해지는 정신의 그 영원한 근본이라면 다만 생각하건대 인륜의 질서가 잡혀 찬란한 향사(享祀)가 장려(獎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우(祠宇)는 흥폐(興廢)의 변화가 있고 새로 중건(重建)하였다가도 퇴락(頹落)됨이 있는 것이지만 오늘 이렇게 크고 높은 비석을 묘단 아래 우뚝하게 높이 세워 놓았으니 비록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마르는 한이 있어도 이 비석은 능히 돌의 문채(文彩)와 함께 그 문장(文章), 그 화국(華國), 그 유술(儒術), 그 칙신(飭身)의 8자는 길이 남을 것이며 우리들이 서로 힘써 시조할아버지께서 후세에 끼쳐주신 그 높은 뜻을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명심불망(銘心不忘)하여야 할 것이다.
단기4308년(서기1975년) 을묘 월 일
이십팔세손 화식 경찬
삼십일세손 직교 근서
전급전면성균관장
창녕 성 낙 서 근서※ 화식은 迎日鄭氏 2파로 호는 東陵, 梅山公의 8세손. 한학자.
첫댓글 내용 오류 蘇大縣을 蘇文縣, 順化縣을 化順顯으로 수정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