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두천시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菴),
철원(鐵原) 도피안사(到彼岸寺)를 가다.
글 쓴 이 : 고 학 영
동두천(東豆川)에 이르니, 작열(灼熱)하던 태양도 서산에 기울어져 저녁 노을에 물들어 있고, 수도권 방어의 위성도시임을 암시라도 하는 듯... 여러 곳에서 군부대(軍部隊)가 보인다. 서둘러 소요산(逍遙山,532M) 휴양지로 진입하여 숙소를 정하고, 긴 하루의 여독(旅毒)을 풀어 봅니다.
8월5일, 새벽 공기가 맑고 시원하다.
소요산 계곡은 수목이 울창(鬱蒼)하고 맑은 물이 흐르니... 한 여름 피서객이 모여드는 곳이다. 오래 전부터 와 보고 싶었던 곳이 아니던가?
자재암(自在菴)을 향해 10여 분을 오르니... 산책로에는 조깅으로 체력 단련을 하는 이들이 간혹 보이고, 저만큼에서 숲에 가린 일주문이 나타난다. “소요산자재암(逍遙山自在菴)” 이라는 현판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하며, 천년(千年)의 향기(香氣)를 머금어 위풍(威風)이 당당하다.
일주문을 지나 속리교(俗離橋)를 건느니 왼쪽 벼랑에는 요석폭포(瑤石瀑布,선녀폭포)가 흐르고, 그 옛날 요석공주(瑤石公主)가 머물렀었다는 궁터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다.
폭포 옆 높은 언덕위에는 원효스님이 참선 하시던 좌선대(坐禪臺)가 있고, 의상대(義湘臺)와 백운대(白雲臺)로 가는 갈림길이며, 주위의 경치도 뛰어나서 “경기(京畿)의 소금강(小金剛)”이라는 말이 과연 실감 나는 곳이다.
이른 새벽이라 행인(行人)이 드물어 고요한데... 계곡은 깊어 물이 맑고 시원하며, 나무 수풀은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구나!
세심교(洗心橋)를 지나 왼쪽절벽 아래는 추담대종사(秋潭大宗師)의 부도와 부도비가 모셔져 있고, 10여 미터 언덕위에는 돌담에 가린 백운암(白雲菴)이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빠져 있다.
자재암(自在菴)으로 돌아드는 오솔길은 단풍나무숲으로 겹겹이 싸여있어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계곡도 깊어 흐르는 물소리만 들릴뿐 보이지는 않는다. 2~3분을 더 나아가니 사방이 암벽(岩壁)과 나무숲에 가려, 그 가운데 하늘만 겨우 보이는 곳에 자재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요산은 한북정맥상의 백석이고개 부근에서 북쪽 방향으로 왕방지맥을 타고 칠봉산(506M), 왕방산(737M), 국사봉(754M)을 거쳐 이곳 소요산에 이르니... 공주봉(公主峰), 의상대(義湘臺), 상백운대(上白雲臺), 중백운대, 하백운대의 빼어난 경치와 아름다운 산자락에 자재암을 고즈넉이 품고 있습니다.
이 절은 선덕여왕14년(645)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자재암이라 불렀고, 조선조 고종9년(1872) 원공(元空), 제암(濟庵) 두 선사가 중건하여 영원사(靈源寺)라 하다가 순종3년(1909) 제암, 성파(性波) 두 화상이 재건하여 다시 자재암이라 불렀다 한다.
지세(地勢)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품고있는 형상)이며, 대웅전 맞은편에 10여 미터의 원효폭포(元曉瀑布,청량폭포)가 흘러 좌에서 우로 개울물이 휘감아 흐른다.
폭포 왼쪽에는 원효굴(元曉窟)이 있어 수도했던 곳이며, 굴에서는 천연석간수(天然石間水)가 흘러 약수로 유명 했다는데... 지금은 나한전(羅漢殿)을 모셔 놓아 옛모습은 볼 수 없어 아쉽구려...!
대웅전과 나한전 앞에는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두 기가 서 있는데, 최근에 조성된 것이며 예술성은 크게 느끼지 못하겠다. 천인단애(千仞斷崖)한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도심(道心)이 절로 우러 나겠으며, 수도(修道) 하기에는 더 없는 길지(吉地)입니다.
원효스님(617~686)이 하루는 신라 장안(長安) 거리를 다니면서...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 준다면)”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만들겠다.)”
라고, 크게 외치고 다녔다.
무열왕이 듣고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는 것이니, 나라에 큰 성현이 있으면 그 보다 이로움이 없으리라!” 하고, 사신을 보내 과부공주(寡婦公主)의 요석궁(瑤石宮)에 들게 하였다. 그 뒤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곧 설총(薛聰)이다.
이후, 원효는 파계(破戒) 하였다고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며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고행(苦行)하던 차에, 이 곳 소요산으로 들어 수도하시니... 요석공주도 이 곳으로 찾아들어 머물렀다고 전해온다.
오늘날에 공주봉(公主峰), 요석폭포, 요석궁터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아름다운 전설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몸을 추스린다.
속리교(俗離橋)를 건너 왔으니 속세를 떠나 있고
세심교(洗心橋)를 건넜으니 마음도 깨끗이 씻어서
천년(千年)의 법향기(法香氣)를 심신(心身)에 담아서
아~아~ 억겁(億劫)에 묻은 때를 108배로 씻어보자!
조반후(朝飯後)에 전곡(全谷)을 지나 철원의 도피안사로 달린다. 휴전선이 가까워 질 수 록 방어벽은 더욱 철통 같아서... 검문은 없으나 초소(哨所)에 병사들은 경계근무에 열중이다.
관인면(官仁面)을 지나 철원군(鐵原郡)에 접어드니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이 펼쳐지고, 저만큼 도로연변(道路沿邊) 우측에는 그 옛날 궁예도성(弓裔都城)이 현무암(玄武巖)의 검은 바위돌로 쌓여있어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동송읍(東松邑)과 구(舊) 철원읍(鐵原邑)은 바로 이웃하여 하나로 보이고, 살림살이도 그리 넉넉해 보이지는 않으며 생활은 거의 농사에 의존하는 것 같으다. 민통선(민간인통제선)이 가까워 질 수 록 도로연변의 군데 군데 민가(民家)로 위장한 군부대(軍部隊)가 많아지고 민가는 갈 수 록 드물어 진다.
철원은 강원도에서 가장먼저 기차가 다닌 곳이라 하며, 1914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京元線) 철도가 놓이면서 철원은 경원 남북도와 서울~금강산을 잇는 역(驛)으로 중요한 교차점 이었다.
해방과 함께 철원은 창졸간에 38선 이북으로 넘어 갔다가 한국전쟁(6.25) 이후 일부지역이 회복되긴 했지만, 되찾은 철원은 당초의 4분의 1밖에 안된다. 그 탓에 신철원 읍사무소는 갈말읍(葛末邑) 지포리에 섰고, 구 철원으로 가는 길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지금은 민통선이 북으로 물러났슴) 군사도로가 됐었다.
분단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며, 어느덧 고석정(孤石亭) 국민관광지 앞의 <철의 삼각전적관>에 도착하다.
전적관 마당에는 75mm 포(砲)를 탑재한 탱크와 한국전 당시의 구형 전투기, 80mm 자주포(自走砲) 등이 전시돼 있고, 1989년에 개관한 전적관 내부에는 북한의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안보교육장으로 또는 민통선 안의 문화재 답사 안내 업무도 겸하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서로다른 이념으로 총부리를 맞대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입장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며, 특히 철원은 긴장의 연속으로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닌가? 강대국의 이해관계(利害關係) 속에서 꼭두각시 놀음을 해야하는 한민족의 슬픔을 하늘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천우신조(天佑神助)가 계시기를 바라면서... 고석정(孤石亭)이 있는 한탄강변으로 간다. 한탄강변 벼랑끝에 외로운 정자(孤石亭)가 23m 정도의 고석(孤石) 바위와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漢灘江)을 말없이 바라보고 섰다.
정자위에 오르니 고색어린 옛 정자는 간데 없고, 시멘트 건물에 기와만 얹어놓아 사해명성(四海名聲)에 걸 맞지 않구나!
고석정(孤石亭)은 철원 8경중의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서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돼 있고, 신라때 진평왕이. 고려때는 충숙왕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명종임금때에 문정왕후의 실정(失政)으로 민초(民草)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의적(義賊)으로 불린 임꺽정(林巨正.?~1562)의 활동, 은거지(隱居地)로 알려지면서 더 유명해 졌다.
당쟁으로 조정이 어지럽고 사회기강이 혼란스럽던 명종14년(1559)부터 대적당(大賊黨)을 만들어, 1562년 1월 황해도 서흥에서 부상을입고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에게 체포되기 까지 3년여 를 활동했으며, 민간에서는 이 곳 고석바위굴로 숨어들어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고 전해진다.
삶에 찌들은 민초(民草)들의 이상향인 유토피아(Utopia)의 세계를 임꺽정을 통해서 그들의 대리만족을 느끼며,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선계(仙界)를 염원해 왔던 것은 아닐런지요?
전적관 옆 마당에 진평왕이나 충숙왕의 동상은 없으나 임꺽정의 동상을 세워 기념하고 있슴은, 그 당시 민초들의 염원이 오늘날 서민들의 염원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고석정 주변 용암 평원에는 고석성(孤石城)터가 있는데 임꺽정이 관군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던 성터라고 전해지며... 누천년(累千年)을 쉬임없이 흐르는 저 한탄강은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으려니... 알려줄 수 는 없는지요?
계곡으로 더 내려가 고석암(孤石巖)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경관이 참으로 빼어나다.
한탄강(漢灘江)은 강원도 추가령(楸哥嶺,952m)에서 발원해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이라 불리는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원산을 거쳐 전곡(全谷) 부근에서 임진강(臨津江)에 합류된다.
강변의 돌들은 현무암(玄武巖)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고 주로 검은색을 띄고 있으며, 화산폭발로 인해 용암이 흘러내린 협곡(峽谷)을 따라 강이 되어 흐른다.
한탄강의 유래는 많아, 태봉국을 세운 궁예(弓裔)가 후백제 견훤과 전쟁을 치르고 돌아와 이 강가에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여있는 검은 돌들을 보고는 “아하, 내운명이 다했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하여 이로부터 한탄강이라 불렸다 하며...
한국전쟁(6.25)때 수 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 간 곳이라 해서 민족의 아픔과 한을 끌어안고 있는 한탄(恨歎)강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연천군지(漣川郡誌)>에는 한탄강의 내력을 밝히고 있는데, 한탄강은 본래 한여울. 곧 큰여울(大灘)이라 불렀다는 기록이고, 지금도 이 고장 노인들은 한여울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 은 본래 은하수(漢)를 뜻하는 말이며 크다, 맑다,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한탄강은 ‘한여울’의 한자표기에서 왔슴을 알 수 있으며, 현대에 민족의 아픔이 이강에 이입(移入)되었슴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한탄강변에는 미인폭포를 비롯하여 전곡(全谷)유원지, 재인폭포, 순담계곡, 직탕폭포 등 등 명성지가 많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학(鶴)저수지가 있는 방향으로 20여 분을 달리니... 왼쪽 방향으로 저만큼 금학산(947M)이 우람하고 그 산기슭에 동송읍(東松邑)과 구(舊) 철원읍(鐵原邑)이 연이어져 보이며, 갈림길에서 대위리 방향으로 돌아드니 우측으로 나지막한 화개산(花開山)자락에 도피안사가 진좌(鎭坐)하고 있다.
도피안사(到彼岸寺), 속세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저 피안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 극락의 세계에 도달하는 절집이 아니던가? 피안(彼岸)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오 뉴월 폭염(暴炎)의 날씨를 무릅쓰고 대구에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왔지 않은가?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극락교(極樂橋)를 지나 천왕문 앞에 이르니, 안내판에 도피안사의 가람(伽藍)배치도와 창건유래가 적혀있다.
도피안사는 신라 경덕왕5년(86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15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철불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창건 하였다. 이 지방 호족(豪族)들은 물론이고, 많은 민중들이 동참하여 당초 철원 안양사(安養寺)에 모실 철불을 조성 했는데... 운반도중 없어져서 어찌된 일인지 지금의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다.
도선국사는 불상의 뜻을 짐작하고 불상이 앉았던 자리에 절을 창건해 철불을 모셨으며, 전국의 800여 비보사찰(裨褓寺刹) 중 하나로 삼았다.
화개산은 물위에 떠 있는 연약한 연꽃의 모습이어서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의 허(虛)함을 보충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했다고 한다. 그후 여러차례 부침(浮沈)을 거듭해 오다 한국전쟁(6.25)때 또다시 불타 완전 폐허가 된다.
1959년 어느날, 제15사단장 이명재(李明載) 장군은 난데없는 꿈을 꾸었는데, 땅속에 묻힌 불상이 답답하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전방 시찰을 나갔던 장군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부근의 한 민가에 들어 갔다가 간밤 꿈에서 땅속에 묻힌 불상과 함께 보였던 안주인을 만나고는 깜짝 놀랐다.
이명재 장군은 그 여인의 안내를 받아 불타 없어진 도피안사터를 찾아가 뒤지기 시작했고, 땅속에 묻혀있던 철불을 발견했다. 꿈에서 본 그 불상(佛像) 이었다.
천년전에 도선국사는 이지역 신도 1500여 명의 힘을모아 철불을 조성했고, 다시 천년뒤에 땅속에 묻혀 있던 철불은 이명재 장군에게 현몽(現夢)해 모습을 드러냈으며, 수많은 장병들의 노력과 땀으로 도피안사가 재건되었으니... 거기에는 뭔가 말할 수 없는, 범상치 않은 인연의 법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후 군에서 맡아 관리해오던 도피안사는 1985년 민간인(대한불교조계종) 관리로 넘어와 오늘에 이르고, 발견된 철조비로자나좌불상(鐵造毘盧遮那坐佛像)은 국보제63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도 영험있는 불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왕문(天王門)을 지나 대적광전(大寂光殿)앞에 이르니, 스님 한분과 보살님 한분이 제(祭)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문밖에서 예(禮)를 올리고 법당내부를 들여다보니, 화제(話題)의 철조비로자나좌불상이 염화(拈華)의 미소(微笑)로 맞아 주신다. 높이 91cm, 장흥보림사철불(국보제117호)과 함께 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철불이라 하신다.
육계의 표현이 분명치 않으며, 양손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계시며, 양어깨를 감싼 통견의 법의는 수수하게 흘러내려 선명하지는 못하다. 그저 편안하고 위엄이 없어 보여 친근한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최근에 금도금(金鍍金)을 어찌나 많이 입혔는지 빤짝 빤짝하여 눈이 다 부시고, 수수한 미(美)가 많이 반감 되었다.
조심조심! 뜰아래로 내려서니, 연화좌대(蓮花坐臺)위에 3층석탑이 단정하게 모셔져 있다. 8각 이중 기단위에 3층탑신부를 올려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석탑이다. 높이 4.1m, 보물제223호로 지정돼 있으며, 건립년대는 철불조성 연대와 비슷한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도량(道場)내는 조용하며, 울산에서 왔다는 불자 두분이 보이신다. 대웅전, 삼성각, 종각, 요사 등 전각의 수도 많지 않으며, 화개산의 산세도 순하고 왼편 언덕너머 학저수지에서 보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국)으로 길지(吉地)다.
삼성각(三聖閣)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뒷산에 오르니 고즈넉한 월하리(月下里) 마을이 보이고, 휴전선을 지나 저 너머 아득히 우측으로는 오성산(1062M)이 우뚝솟아 암봉들이 백색으로 빛나는데... 그 왼쪽으로 이름모를 연봉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상서(祥瑞)로운 흰빛을 뿜어내고 있으며, 안내도(案內圖)에는 낙타봉, 백마고지, 김일성고지 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어디가 어딘지 구분을 할 수 가 없구나!
다만 아이스크림고지(삽술봉)는 짐작이 가며, 이름에 걸맞게 한국전쟁(6.25)때 폭격을 하도 많이 맞아 삽술봉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렸다고 한다.
동두천시를 떠나 철원까지 오는 도중에 병사들의 경계근무에서 느끼던 살벌함을, 지금 이 화개산(花開山) 둔덕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 하겠다.
월하리 너머로 보이는 아득한 철원평야는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휴전선도, 철책도, 눈을 부릅뜬 병사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 평화스러움을 언제쯤 진정으로 누릴 수 있을까? 북으로 3배(三拜)를 드리고 물러나다. 참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십사! 하면서...
단기4339년(서기2006년) 8월 5일
동두천시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菴),
철원 고석정(孤石亭), 도피안사(到彼岸寺)를 답사하다.
첫댓글 지포리에서 병역 의무를 했습죠. 공무중 틈을내여 둘러본적있습니다.젊음의 한때를 회상해보게되는구료.
지포리라면, 갈말(신철원)에서 근무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전방근무에 정말 수고가 많았겄슴니다. 옛 추억을 더듬어 보는 계기가 되셨다니 기쁨니다. 여러가지로 공부 많이하고 왔으며, 앞으로도 답사의 기회를 더 가졌으면 합니다.
두분의 군복입은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아~~그떄가 언제였던고......
정정합니다.지포리가 아니고 갈말면 문혜리 북쪽 1 km지점 000부대입니다. 고석정 까지 도보로 약 30분정도며 고석정에서20여분 서쪽으로차량으로 관인에 도착하면 함흥식비빔냉면이 유명합니다. 그때그맛 아이 좋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