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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탁돌이와 탁순이 원문보기 글쓴이: 아르스(ARS)
호남 최초의 의병 김천일 (건재 김천일 , 健齋 金千鎰)
지금부터 약 400년 전. 호남의 남해안 해남, 강진, 장흥, 완도, 진도에는 잦은 왜놈들의 노략 질에 겁을 먹은 섬 주민들이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다.
섬 저쪽에서는 왜군이 한발 총부리를 겨누며 육지로 진격하고 있는데 정부와 지방 행정관료들 은 나 몰라라 하며 딴전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위급한 백성을 구원하려는 손길이 요원한 채 시간은 자꾸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구제해줘야 하는 관군은 퇴폐해 있고 관리들은 방어에 허술한 듯하니 더욱 불안하던 차에 드 디어 임진왜란이 터졌다.
섬사람들이 공포에 떨던 때 나주의 한 젊은이는 전쟁을 예감하고 산과 들을 뛰며 군사 훈련을 한다. 매일 저녁 말을 훈련시키고 자식과 제자들에게 학문과 함께 심신단련을 당부한다. 의병 을 지휘할만한 준비를 미리 했던 것이다.
곧 수도가 함락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화급한 선조가 궁을 떠나고 드디어 수도가 함락되었다 는 소식이 전해지던 때 국가존망이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 나주의 한 선비가 칼을 높이 뽑아들 고 외친다.
“나라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어찌 구차히 살려 하리오. 가령 살려 고 한들 혼자만이 온전할 리 없고 다만 빠르고 늦기만 다를 뿐이오. 그러니 도망하여 구렁에서 죽는 것보다는 적과 싸우다 죽는 편이 낫지 않겠소.”
1592년5월16일 향리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 목청 돋워 외친 선비는 호남에서는 가장 먼저 의 병을 일으켜 한성을 지키기 위해 북진하면서 호소한다.
“진실로 죽을 마음을 품으면 살길이 생길 것이다.”
우리에게 행동하는 지식인 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선비 건재 김천일(1537~1593).
- 건재 김천일 영정 -
건재 집안은 대대로 창평 대산리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부터는 나주시 흑룡동에 거주했다.
건재가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이씨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 후에 아버지 김언채도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생후 반 년 만 에 양친을 잃은 고아가 되어 외가에 의탁해 양육된 관계로 17세가 되 도록 학교 교육은 물론 문 밖 출입을 거의 못했다.
13세의 어느 날 창평의 작은아버지 김신채가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제가 외가댁 나주에 살고 있으니 집안에는 부형(父兄)이 계시지 않고 밖으로 사우(師友)가 없으며 외 조모께서는 제가 멀리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고 계시기 때문에 비록 제가 향학에 뜻이 있다 해도 그것 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아직 나이 어린 그의 향학열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더 욱이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귀는 것마저 어려웠던 외가 집 분위기를 시사하고 있으며 특히 외 조모의 걱정은 항상 그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성장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외손주가 멀리 떨어져 수학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덕분에 건재는 무지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18세에 김해 김씨와 혼인한 후 19세 나이가 되어서 야 기초학업을 시작했다. 당시 사정으로 보아 보기 드문 만학이다. 이후 건재는 당시 태인에 은거하던 일재 이항 선생을 찾아 나선다.
이때도 외할머니는 가까운데서 배워도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멀리까지 가서 배워야 하느냐고 채근하지만 건재는 “경서의 스승은 쉽지만 인생에 대한 스승은 더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줄곧 학문에 매진하니 22세 때 하서 김인후를 만났을 때 “실지 공부를 한 선비를 이제야 보겠 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1558년 22세 때 생원 초시에 들고 25세 때 진도에 유배 중이던 소재 노수신에게서 경의를 강 론 받고, 31세 때는 스승 이항과 함께 국가의 난세를 걱정, 5일간 금식하기도 했다.
37세가 돼서야 벼슬길에 오르니 용현 현감 이후 강원도 도사, 경상도 도사를 지내다 이항의 상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분상하다 임실 현감을 거쳐 49세 때 담양 부사에 제수됐다. 이때 그 는 선조에게 애정이 담긴 소를 울린다.
처음에는 오랑캐가 경원부를 피폐케하자 조정에서 6도의 경범자를 사변토록 한데 대한 문제 점 다섯 가지를 들어 아뢰고 마지막에는,
학문을 밝혀 사습(士習)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재상을 중히 여겨 조정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는 것, 수령을 가려 뽑아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 등을 강조해 선조의 칭찬을 듣는다.
“오늘날 선비들은 스스로 닦는 학문은 없고 남이 익혀놓은 것만을 점점 많이 논하고 있습 니다. 순리와 덕은 전혀 없고 모두 오만한 허례만 있을 뿐입니다. 선비라는 것은 후일 에 국가의 관리로 쓰일 터인데 이와 같으니 실로 지식인이 걱정할 일입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오나 늘 이 점을 걱정한지 오래입니다. 조정의 망료(忘料)함과 국가의 불화가 미쳐온 병폐의 근원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난 갑신년에 올린 상소 가운데서 이와 같은 사습을 논한 것은 상감께 전달되었습니다.
그 상소장의 대강을 글로 갖추어 올리니 이 소의 뜻을 살펴주시고 바르지 못한 선비들의 폐단을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곧고 바른 선비의 길을 걷던 그 앞에 붓을 던진 채 말을 타고 칼을 드는 전쟁이 터지니 관리가 아닌 의병 의로서의 말년이 처절하고도 의롭게 펼쳐진다.
특히 인간성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던 건재는 자신을 기른 외조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맛있 는 음식을 구하면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았고 외조모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초 막생활을 하다 병을 얻기도 했다.
이런 그의 인간됨은 자라난 환경으로 보아 누구의 특별한 가르침이 있었던 게 아니고 스스로 의 수양에서 비롯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592년 5월 2일 드디어 한성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김천일은 고경명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 을 촉구한다. 5월 6일 전라관찰사 이광(李洸)이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가서 그 존망을 알 길이 없으니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군사를 전주로 되돌려버리는 사건이 터지자 일어서 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51세의 나이로 임진년 5월에 기병. 이듬해 6월 제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하기까지 14개월 간에 걸친 그의 전적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북상 기병 이후 수원, 강화, 연안 등지에 거점을 두고 경성 탈환을 목표로 활약한 시 기이며, 2단계는 4월부터 남하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6월에 있은 제2차 진주성전투를 주도하 던 시기의 활동이다.
임진년 6월3일 나주, 한 노장이 외친다.
“풀을 뽑는 데는 반드시 그 뿌리를 제거하여야 하며, 적을 치는 데는 반드시 그 우두머리를 잡 아야 하므로 우리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 먼저 북상, 곧바로 경성의 왜적을 토벌하자.”
북상길에 오른 의병군은 연도 주민들의 성원은 물론 군수 물자를 지원 받는가 하면 스스로 의 병에 가담하는 자들까지 있었으나 뜻밖에 근왕군이 용인에서 패하고 말았다는 소식이 전해지 자 일시에 사기가 떨어지고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때 건재가 벌떡 일어나 외친다.
“우리 군은 의병이다. 관군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대들이 만일 날 따르기 싫다면 어찌 강제로 내몰 수 있겠는가. 다만 왜적을 토벌하지 못한다면 비록 어디를 간들 살길은 없다. 하물며 임금이 화를 당 하면 신하들이 죽는 법인데 그대들은 이 나라 1백년 역사가 길러낸 백성들이 아닌가.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면 도리어 살길이 있을 것이다.”
- 건재 김천일 동상 - 이 호소에 의병들이 감동하여 충청도에 이르러서는 1천명이 되었다. 수원에 도착하자 건재가 부사 재직 시 우애가 두터웠던 동료가 많아 군세가 더욱 보강돼 금령전투에서 적병 수 백 명을 포획하고 병기, 군마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강화로 부대를 이동했다.
강화로 향하던 중 인천에 야영할 예정이었으나 건재는 “이곳은 사방에 흩어진 적병이 야심을 타 기회를 엿볼 만 한 곳이다”며 식사를 재촉해 그곳을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아군이 그곳을 떠난 다음날 어두운 틈을 타 왜군이 덮쳤으나 건재의 지혜 덕분에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한다.
강화에 도착한 의병은 전라의병 최원 등과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연안의 방책을 쌓고 군 세를 떨쳤다. 강화에 있을 때 건재의 대표적인 전과는 양화도전투.
대규모의 수군을 동원하여 양화도에 진을 치고 풍신수길의 죄상을 방시하면서 적에게 도전하 였으나 적이 응전태세를 보이지 않자 성내에 은밀히 장사들을 잠입시킴과 동시에 내군을 통한 수인작전을 꾀해 무수한 적병을 사살하였다.
6월 14일 건재가 이끄는 의병은 진주성에 들어가 김해, 창원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적대한다. 이 전투 때의 의병은 1만5천. 적군은 10만으로 난전을 치렀다.
6월 29일. 전세는 기울어 고대하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처음에 동문 쪽의 성벽이 무너지면 서 적은 개미떼처럼 성벽을 넘어왔다. 이어 북문도 무너지고 말았으니 의병의 일부는 후퇴하 였다.
건재의 장자 상걸과 양산수가 건재를 호위하고 있는 자리에서 관군 조인호 등이 울면서 “어찌 하시렵니까?”라고 물었다.
“나의 죽음은 이미 기병한 날 결심한 것이니 오늘까지 이른 것도 늦었다. 다만 그대들은 집을 버리고 나를 따라 산고를 겪은 지 2년 만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들이 가련할 뿐이다.”
그는 곧 일어서서 북향재배 한 후 먼저 병기를 강물에 던진 다음 장자 상걸을 안고 몸을 던져 순절했다. 이 소식을 듣고 차남 상곤이 진주로 달려와 10여일 간 그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 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성이 함락되자 피하기를 권했지만 순결의 길을 택한 건재 김천일.
국난극복을 위해 봉기한 그의 의병활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관군처럼 군사적인 활동 에만 머물지 않고 질서회복, 민심안정에도 힘을 쏟았다고 하니 의병의 활동 폭이 얼마나 컸는 지 짐작이 간다.
항상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튼튼함으로써 나라가 태평하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교 훈이니 나라가 다스려짐과 혼란함은 곧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삶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며 치민(治民)을 부르짖은 호남사람 김천일.
처음 관직에 입사한 것은 37세인 선조 6년 때. 애초 관직에 뜻이 없었고 과거에 응시한 예도 없었다. 그러나 학덕이 높아 미암 유희춘의 천거 에 의해 강원도 도사. 임실현감. 순창군수 등을 역임하게 된다.
건재가 수원부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수원은 수도 한성이 가까운 관계로 중앙의 사대부나 왕족들의 소유 전답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 특권층은 마땅히 과세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난에 시달리는 일반 민중만이 세금을 내는 폐단이 자행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천일은 자신이 특권계층을 위한 관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관리임을 분명히 하 고 고통에 시달리는 억울한 시민을 위해 이를 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원칙을 그대로 과 감히 시행했다. 이를 기화로 파직 당하는 사태를 맞는다.
건재는 국가의 안정이 치민의 성패에 달렸다고 보았다. 참다못해 ‘請安固邦本疏’(청안고방본 소)를 선조께 올리니 내용인즉 <기축옥사>가 빚은 민심의 혼란과 함께 억울하게 연루된 민중 을 보호 해달라는 것이었다.
선조의 넓은 도량으로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들의 심정을 헤아려 이산된 민심을 포용하는 것 만이 위급한 현실 타계책임을 간곡히 호소했다.
특히 국가의 현실이 위급함에 처하여 관료층 인사들이 국사를 걱정하지 않는 것을 크게 우려 하면서 관리자는 이해와 득실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위급한 국사부터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함 을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관직에 있는 자가 오직 맡은바 직무에 충실해야 하며 인사 관리자는 인재를 구하 는 일에 힘쓰며 군사관리자는 이의 없이 군사훈련 시키는 일에 힘쓰며 재정 관리자는 그것을 조달하고 헤아리는 일에만 진력한다면 자연히 그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율곡 이이가 대사헌에서 사직하고 귀향 하려 할 때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시세가 급급한 때를 당하여 결코 그만 둘 때가 아니오. 공이 지금 가려는 것은 지극히 급박한 형 세를 보지 못한 까닭이오. 만일 극악한 것을 알고 있다면 어찌 차마 버리고 갈 수 있겠소. 오직 묵묵히 관직에 있으면서 인재를 수습하고 동심 합력하여 계책을 힘쓸 때 이오.”
사헌부 지평 재임 시 ‘인재육성이 치도의 근본임’을 주장하며 장장 2시간 동안을 간곡히 간했 으나 선조는 한마디 답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박순이 경연에서 물러나와 말하기를 ‘김모의 초야 선비가 어전에 들어가 아뢰는데 그 태도가 엄숙하고 언론이 강직하여 그 심중에 있는 바를 말하는 것이 과연 속임이 없더라’고 탄복하였다.
선조 20년 관직에서 물러나 나주에 있을 때 당시 호남지방의 흥양에 왜침이 있었는데 그는 이 사건에 임한 장사들의 대응태세가 심히 어긋나 있음을 지적한 동시에 조정의 상벌제도를 통탄 하여 소를 올린 일도 있었다.
이것은 당시 李大元(이대원)의 패사를 눈앞에 두고 일신의 안보만을 꾀한 전라좌수사 심엄의 비행을 지탄한 것이었지만 국가의 위급에 처하여 책임을 가진 관리가 방관함을 용납치 못한 건재의 성품을 잘 나타낸 것이다.
할 말을 다하고 마는 그의 직언이 여기에서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도상의 문제점이 나 시류문제에 그치는 것도 아니었으며 때로는 왕까지 거침없이 비난하는 과단성을 엿보이기 도 했다.
훗날 선비에서 장군이 되는 그의 좌우명은 이렇다.
“ 남의 잘못 논하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음화가 미치고, 남의 악함 들추기를 즐겨하면 액이 이른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로운 말인 것 같다.
☞ 참고 장소 및 문헌 0 <출생지> - 전남 나주시 흑룡동 0 <사 당> - 전남 나주 <정렬사>
0 <제 향> - 진주 창렬사(彰烈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0 <작 품> - <건재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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