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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5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의 3요소는 통치권, 백성, 영토라고 했다. 이 중에서 통치권에 해당하는 하늘이 정복되었어도 땅을 확보해야 전쟁은 끝이 난다.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곳의 실제는 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월등한 제공권으로 하늘을 정복했어도, 땅을 확보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늘의 다툼도 땅을 확보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던 것이다.
최근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를 몰아내기 위해 반정부군(시민군)이 나서서, 연합군의 도움으로 하늘은 정복했지만, 연합군이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는 바람에 시민군이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밀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연합군이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는 것은 지상전은 많은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만일 끝끝내 시민군이 땅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간의 하늘을 정복했던 일도 허사가 될 것이다.
영적인 일도 같은 이치이다. 하늘을 정복하는 일은 사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해 주신 것이다. ‘샤마임’이라는 히브리어의 하늘이라는 단어 속에는 ‘진리의 인식(연마)’라는 의미가 있다. 쌍수라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었던 혼돈의 상태에서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만이 참 하나님인 것을 인식하는 것은 진리의 영(성령)이 내게 임하는 일이다. 주님이 바리새인들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밝히셨기에, 참과 거짓이 분리되었고 주님은 진리의 영으로 내게 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정복하는 것은 인식의 차원이다. 사람의 영인 양심 안에서의 분별되는 일들이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는 것은 인식(깨달은)한 대로 실제 삶을 행함으로 옮겨놓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주님이 나서서 하신 일이라면 땅을 차지하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땅은 마음의 비유로서, 마음의 요소인 의지, 생각, 감정의 영역을 여하히 새사람으로 바꾸어 가느냐가 관건이다. 주님을 총 사령관으로 삼고 땅을 주님의 발등상 되도록 정복하는 일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이다. 여태까지는 리허설에 불과했다. 연습게임과 실전은 엄연히 다르지 않겠는가? 실전은 목숨이 달린 문제이듯, 땅에서의 전쟁은 막바로 이해관계가 도입된다. 이스라엘 군대가 광야에서 모세의 인도로 아말렉을 쳐부순 것은 연습이었다. 가나안에 들어와 각 지파에게 할당된 가나안 족속과 싸우는 문제는 실전인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엄청난 물리적인 손실, 혹은 명예나 자존심이 뭉개져야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목회자의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훌륭한 목사님이 되어 성도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것 인줄 알고, 신자들이 영이신 하나님을 직접 대접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대신 대접하는 것을 피차 당연한 것 인줄 알았었는데, 이제 진리를 깨닫고 보니까, 성직자 행세를 하는 자체가 우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로채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 자가 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이 목사 입장에서는 어쩌면 자신 전부를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온 평생을 들여 목사의 직임을 수호해온 자신 아닌가?
아예 처음부터 목사가 안 되어 본 사람은 그 아픔에 대해 조금은 느낄지는 몰라도, 그 허망함의 전부를 알 수 없다. 세상에서 목사라는 칭호가 주는 매력이 어떠한데, 이를 슆사리 버리는 것이 어찌 미련과 이해타산이 없겠는가? 비록 성도 수는 몇 명 안 되어도,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오던 삶이 아니던가? 이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이것이 가나안 전쟁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이러한 전쟁이 연속된다.
성도의 예를 들면, 기독교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육이 재미가 있었다. 찬양대회, 성가대 모임, 남녀 전도회, 바자회, 구역모임, 야유회, 체육대회, 고아원 방문, 그리고 문제에 대한 공동 기도회, 새벽기도, 작정기도회 등등 많은 기도제목의 나눔과 중보, 갖가지 교회 프로그램 참여, 절기 예배(성탄절, 추수 감사절, 부활절),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헤아릴 수 없는 행사와 모임이 때로는 정신없기도 하지만,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들인가? 욱신거리는 일들의 홍수 속에서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진리 모임에는 어디 그러한가? 모든 것은 지우개로 다 없애버리고 오직 말씀과 찬양 외에는 없다. 다른 활동은 다 생략이다. 그러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회의가 생긴다... 이것이 과연 맞는가?...육적활동이 멈추고 사람과의 관계성이 단조로워 지니까 사랑이 메마른 곳인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리 성경은 파네는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남들처럼 대충 믿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냥 목회자만 깊이 알고, 성도는 참석하고 활동만하면 안되는가?
갈수록 흥미는 떨어지고, 슬그머니 친정(기독교)으로 돌아가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친정에 가보니 도저히 젖비린내 나서 예배당에 못나가고 집에서 나 홀로 칩거하는 자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영적전쟁의 부분들이다. 아는 것과 믿는(실행)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더 실제적인 땅에서의 전쟁은 물질관이다. 하늘이 혼돈한 상태에서는 물질관이 명확해지지 않아서 참으로 어정쩡한 태도로 살아왔다. 아니, 하늘이 헷갈리니 땅도 갈지자로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목사들은 ‘돈 많이 벌어 하나님께 드리세요, 주의 일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육과 영이 갈라지지 않고 가르치는 자를 성경에서는 두 무덤(세상과 종교) 사이에서 소리치는(설교) 귀신들린 자라 한다.
이때는 여하히 돈을 벌어 십일조 혹은 십이조를 바쳐서, 하나님의 사업에 도움이 될까하고 힘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돈벌이에 여념이 없다. 그래도 떳떳한 것은 하나님께서 돈이 필요하시기 때문이다. 6일 내내 세상에 파 묻혀 살다가 일요일에 한번 성경 위의 먼지 털어 예배 보러 온다. 그들의 6일은 그야말로 肉일 이요, 그들의 일요일은 그야말로 주일이다. 그날만은 해방의 날이요, 자유의 날이다, 육일은 육이 초죽음 되도록 일했으니, 주일이 그들의 쉬는 안식일이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진리 안에서는 매일이 주일 이지만, 종교인들은 세상일을 쉬는 날로나 알까?
예전에 음식점(감자탕집)을 하는 어느 장로의 가게를 방문 한 적이 있었는데, 홀에서 써빙하는라 온종일 정신없이 일하는데 퇴근해서 집에 오면 11시라 한다. 잠자리에 들면 12시 경이 될 테이고, 내일의 장사를 위해 새벽부터 기상해야 한단다. 돈은 많이 벌어서 헌금 때문에 장로 되었는지는 몰라도 성경적 장로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아무리 급여를 많이 주는 직장이라 할지라도 매일 밤늦게까지 종사해야하는 곳이라면, 거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영적인 싸움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복이요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잊게 하는 정도로 여유가 없는 곳은 나쁜 직장이다. 개인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일하는 시간에 비례하여 수입이 생기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에 일과를 중단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나, 성령께서는 이것을 요구하신다. 어느 선을 알아야한다. 그 선 안에서는 복이나, 그 선을 넘으면 죄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절제가 요구된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명심할 일이다(약4:4). 행여나 곤핍한 경제사정으로 라면을 먹고, 죽을 먹어야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기 분수가 라면인데 쌀밥에 고기를 넘본다면 과욕이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24시간이 전부 나를 위해 써야할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생활을 위해서 얼만큼, 주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얼만큼, 이렇게 안배해야 한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이 한 손에는 일을(생계) 하고, 한손에는 병기(말씀추구)을 들고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했다. 이것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땅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하는 의지, 생각, 감정이라고 했다. 위에서 열거한 목사의 직분과 목사의 칭호, 직업과 돈의 문제 등은 의지와 생각에 대한 부분들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명예에 목을 매고, 성도들은 생활에 목을 매고 있기에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 밖에도 무수한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가장 두드러진 일이다. 이것이 세상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실제다. 옛 사람 자아의 의지와 생각은 얼마나 완고한지 , 하나님의 말씀이 명명백백하게 보이고 들려도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이익을 포기 못한다.
마지막이 감정적인 처리 부분이다. 대부분이 부부간에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이 원인이 된다. 남들이야 안보면 그만이지만 백년해로의 맹세로 맺어진 부부의 인연이기에 도망가지 못하여 여전히 찔림과 찌름이 계속된다. 상대에게 기대를 하기에 피차 찌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기대치가 달성되지 못했을 때는 미움으로 바뀌는 것도 사랑의 일면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받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본을 보이시지 않았는가?
지금까지의 사람을 의지하고, 상대를 믿던 수준을 탈피해야한다. 오로지 믿을 이는 주님 한 분 뿐이다. 나머지는 연약한 인생들이다. 행여 내가 줄 것이 있다면 다행으로서 나누어 줄 일이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지체간의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구속 받은 형제나 자매들일지라도 육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원칙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언제든 밑바닥을 보일 때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 때는 정죄가 아니라 불쌍히 여김의 기회이다. 내가 손실을 감당할 때가 나의 성숙을 시험하는 때이다.
감정과 의지, 생각을 다스린다는 것은 많은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억울한 누명, 명예의 손상, 오해, 편견 등에 대해 일일이 변명하지 말아야 하는 때도 있고, 물질의 손실을 알면서 택하기도 하며 소득의 기회손실도 감내해야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의 가치관이 아니라, 초월된 구도자의 자세가 요구되는 삶이다. 그런 자를 육체와 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라 한다.
모든 관심은 주가 나를 온전히 통치하시는 여부를 살피는 것이다.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서는 자다. 모든 법에서 해방된 자유자이지만 이 자유를 포기하고 주권을 주님께 다시 내드린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主’라 부르는 자이다. 그는 제 멋대로 살지 않는다. 아니 더 이상 제 맘대로 살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행적으로 족하다. 이제 진정으로 주님이 필요하고, 주 없이는 의미가 없음을 알기에 주를 떠나지 않는다. 주는 자신의 생명이요 길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지경에 도달한 자를 주의 사도라고 하고, 주의 사자라고도 한다. 땅을 정복한 자의 모습을 미리 그려 보았다. 이때의 영적인 상태를 일컬어 천년을 다스린다고 한다. ‘천년’이란 마귀적 본성이 탈바꿈 되어 주님의 신성한 본성으로 닮아진 자를 말한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것이다. 말씀의 열쇠로 본성을 무저갱에 잠그고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한다. 평강의 실존자, 그가 바로 안식일이다. 주님은 그 사람 안에서 안식하신다. 안식일은 물리적인 특정한 날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하여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을 지칭한다. * 천: 알레프(본성)/ 년: 샤나흐(탈바꿈)
이렇게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지고, 땅에서도 뜻이 이루어진 자를 하나님의 통치권이 형성된 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라 한다. 영원 전에 주님이 소원하시는 바로 그 사람을 주님은 미리 보시고 기대하신다.

첫댓글 하나님에 뜻이 무궁 심오하네요.도무지 알수가 업네요.....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