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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문화선택 한류
백원담 지음
펜타그램 / 2005년 9월 / 402쪽 / 15,000원
▣ 저자 백원담
연세대 중문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ㆍ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공회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기획집행위원장, 중국 上海大學 해외교수, 《진보평론》《황해문화》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중국문화론』『인문학의 위기』『중국철학산책』(공편)『민중문화운동의 실천론』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살아간다는 것』『색동저고리 입고 꼬까신 신고』가 있다.
▣ Short Summry
이 책은 한류를 21세기 초 동아시아에 두드러진 문화현상으로 파악하며 그것의 여정을 통해 곳곳의 문화현상들을 검토해 간다. 그리고 해당 국가의 사회문화 맥락 속에서 한류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당 국가의 문화현상 속에서 찾아내고자 한다. 이는 한국 문화산업의 발전 전망을 가늠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화의 본원이 교류라는 점에서 볼 때, 또한 강대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도 동아시아는 함께 흐르면서 서로를 껴안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동아시아를 흐르고 있는 한류는 그 활용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한류는 소비 차원의 문화임이 여실하고, 스타시스템에서 부각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이 책은 문화의 산업화로 인한 경제적 효과에 대한 기대감 이면에, 그것으로 인한 문화의 몰락을 우려한다. 예를 들어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급속한 자본화 과정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도기적 대행을 한류가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모방과 자국의 문화적 형질의 혼종교배 형태로 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내재한다. 또한 일본은 일본 색을 거세한 시스템으로 새로운 동아시아 문화지배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즉 ‘보아’라는 한일합작의 일식(日式) 한류와 같은 형태로 한류에 편승하려 한다.
이처럼 문화를 경제논리로만 파악하는 문제는 국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지방정부가 추진하는 고장의 문화판촉 바람 속에서도 얼마든지 확인되는 바다. 이해와 소통의 문화경로를 열어가는 공감과 관계성이야 말로 문화생산과 유통의 가장 중요한 핵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류는 문화적 온기를 내뿜을 수 있는 문화적 본연에 충실한 문화산업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한류가 상생의 샛바람으로 제대로 흐르기 위해서는 대다수 민중의 문화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그것을 찾아가는 방향을 함께 제시한다.
▣ 차례
책머리에
제1부 왜 한류인가
한류, 동아시아에 부는 바람
한류, 문화적 변방살이에서 분출된 역동적 힘
한류, 동아시아의 문화선택
제2부 한류의 동아시아 여정
<지하철 1호선>, 동아시아 문화 형성의 희망열차
2001 도쿄, <지하철 1호선>과 보아
동아시아 문화의 교감ㆍ소통ㆍ생산을 위한 한중 문학ㆍ출판 교류
2003 한류, 사스 퇴치 위문공연과 ‘야만여우’ 선발대회
‘늑대’와 함께 춤을 - 2004 봄, 언론보도 속의 한류
변죽만 울린 ‘2004 한중 우호의 밤’과 길 잃은 한류
동남아의 한복판, 태국 한류 - 문화패권주의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천원 한류’
전장의 기억과 베트남 한류 - 자본주의화 과정에 침입한 주변부 문화
제3부 돈 되는 한류, 돈 안 되는 한류
한류산업을 보는 문화적 시각
한류산업을 보는 전략적 사고
한류의 새로운 의미 - 평(平)을 이루는 화(和)의 미학
제4부 한류 흘러 동아시아 바다로
이병헌 팬사이트 속의 동아시아 문화교통
상업적 민족주의와 팝아시아주의의 변주 - 21세기 동아시아 대중문화 삼국지
동아시아에서 문화지역주의의 가능성
부록
한국과 대만 지식인의 제안 : 천광싱 vs 백원담
한류 현장에서 나눈 대화 : 권기영 vs 백원담
동아시아 한류 연표
한류 더 읽을거리
찾아보기
동아시아의 문화선택 한류
백원담 지음
펜타그램 / 2005년 9월 / 402쪽 / 15,000원
제1부 왜 한류인가
한류, 동아시아에 부는 바람
NRG사진과 Click B, 빨간 머리의 서태지 등 스타들의 신상명세서가 빼곡한, 한류관련 사이트를 통해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한국의 상을 잡아간다. 우리기업 삼성은 중국의 십대들을 겨냥하여 만든 사이트에 안재욱을 광고모델로 내세워 성과를 거두었다. 정보사냥에 혈안이 된 소년소녀들의 호기심을 상품 구매력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핑클의 베이징 공연, 비밀만남, 한류 체험기회 제공 등 온갖 그물망을 필사적으로 쳐놓았다. 이처럼 한류란 결국 이들 거대 자본들에 의해 기획되고 조직되는 자본의 논리에 의한 문화산업 버전에 다름없다.
중국이 한류에 휩쓸리는 현상에 대해 중국 지식인들은 위기감과 우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내비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이 경제적 특혜를 받은 일부 청소년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국한된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에서 이제 더 이상 홍콩스타들을 기억해내지 않듯이 중국에서도 5년 이내에 한국문화가 퇴조할 것이라 낙관한다. 하지만 <박하사탕>이나 <JSA> 등의 한국영화는 상업주의 문화와 조응하면서도 인간적 가치생산이라는 문화적 본연에 충실했음을 인정한다. 또한 제5세대와 사회주의 주선율(主旋律, 영웅찬양영화)을 선양하는 낡은 중국영화계에 이러한 한국영화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중국이 한류에 대해 엄정한 평가와 대응을 고민하는데 비해 우리는 너무 낙관적이다. 하지만 언제 우리가, 우리 문화가, 국경을 넘어 이처럼 무단횡단, 회통(會通)해본 적이 있던가. 국가주의와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면 한류의 진정한 자리매김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민간문화는 지금 동아시아에 조심스럽게 ‘말 걸기’와 ‘서로 되비쳐보기’를 시도하는 중이다. 이 민간의 자발적 연계 고리를 통한 상호이해와 소통, 그것이 동북아 평화공존을 위한 사회지반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류, 동아시아의 문화선택
2002년부터 한류를 진단해왔지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두 가지이다. ‘한류의 실재’와 ‘한류의 지속화 방안’이 그것이다. 최근 동남아와 일본의 한류 열풍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은 엄연한 사실이고,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사회주의 해체 이후 급속한 자본화 과정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도기적 대행을 한류가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본의 경우에는 ‘욘사마’, ‘한류 사천왕’ 하며 난리법석이지만, 정작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 일류(日流) 현상은 이미 깊게 뿌리내려져 있다. 일본의 아이돌시스템이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현실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게 한다.
한류의 물줄기를 어떻게 하면 강하게 혹은 제대로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진정한 한류의 방향타를 잡는 것을 통해서만 그 올바른 해결을 볼 수 있다. 한류의 진정한 힘. 그것은 다름 아닌 네티즌들의 발랄한 소통으로 정감적 진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 지점에 있다. 한류스타들의 팬 페이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교감과 문화적 체감들, 그것은 소비적 분비물의 성격이 아직은 강하다. 그러나 그 속에 상업주의와 국가주의의 작위와 음모와 조작의 간극을 가르며 흐르는 어떤 기운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것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2부 한류의 동아시아 여정
<지하철 1호선>, 동아시아 문화 형성의 희망열차
김민기는 미술대학을 졸업한 서양화가였지만, 민통선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곳을 떠나게 되었지만 농사꾼의 삶은 그의 노래와 노래 굿의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농한기에는 광산에서 일하기도 했다. 공장에서 체험한 열악한 노동현장경험을 <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 굿으로 공연하기도 했는데, 노동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이유로 수배를 당하기도 했다. 광산에서 일했을 때는 그곳 소녀의 일기를 바탕으로 <아빠 얼굴 예쁘네요>라는 어린이 노래 굿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지하철 1호선>은 원작이 독일 것이다. 김민기는 본격적인 뮤지컬 공부를 위해 <지하철 1호선>을 가져왔다. 그것을 우리 것으로 개작하여 1994년에 시작된 공연이 벌써 1,350회를 넘어섰고, 7년여 동안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개작해나갔다. 그리고 중국까지 연장운행을 하게 되었다. 그 뮤지컬의 내용은 ‘사랑을 찾아온 연변처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창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두 개의 사랑이야기를 뼈대로 한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음악극에서 80년대식 정치성이 거세되었다고 말한다.
김민기가 사랑타령을 무대에 올린 것은 자못 의아스런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상업주의를 깨뜨리고자 하는 의도는 아닐까. <지하철 1호선>의 통속적 멜로는 지순한 인간의 원초적 사랑으로부터 평형성을 형성해내고자 한 의도적 기획의 산물일 수 있다. 예컨대 극중 ‘안경’이라는 캐릭터에는 70~80년대 학생 운동권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먹고살 길이 없어 농민이 되고, 농한기 때 일거리가 없어 광산촌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김민기로서는 지식인 학생들의 목적의식적인 현장 하방운동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민기의 인식적 한계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 생계가 진실이었던 만큼 당시의 하방운동이나 변혁지향의 흐름도 진실이었고, 역사적인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늘 정치나 운동과 무관한 사람임을 강조하는 김민기는 먹고사는 문제의 잣대로 모든 진보지향을 재단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하철 1호선>의 주인공들이 도시빈민, 룸펜들인 점 또한 김민기가 80년대 조직적 민중운동 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김민기는 ‘안경’을 해고된 노동자로 재설정한 바와 같이 박탈당한 삶에 대한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다. 그것이 음악극 <지하철 1호선>의 일관된 미학이다.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의 중국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두 차례나 상연할 극장을 직접 다녀왔다. 중국에서의 무대가 큰 점을 고려할 때 소극장 음악극을 그대로 들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극장 크기와 같은 곳을 골라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적응 공연을 올렸다. 그가 이렇게 치밀하게 공연 준비를 한 반면, 중국 측은 모든 준비를 김민기와 극단 학전에 의존했다. 김민기는 이러한 중국 측 공연관계자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정식 사과를 요구했다. 그가 이처럼 중국 측에 사과를 요구한 이유는 <지하철 1호선>의 중국 공연을 상업적 대중문화식의 침투가 아니라 문화적 소통의 새로운 차원을 열고자 했기 때문이다.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을 중국에 주는 작은 선물이라 했다. 무슨 뜻일까. 그는 애초부터 중국공연을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라는 성격으로 관철했다. <지하철 1호선> 중국 공연은 베이징에서는 대성황이었으나 상하이에서는 실패했다. 상하이에서는 ASEM회의를 한다고 공연장 앞을 봉쇄했다. 더구나 중국 측은 사전 홍보나 설비 등 공연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국 측에서 일일이 설명하고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의 실패와 학습으로 베이징 공연에서는 빛나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과정에 기술 전수와 내용 공유가 중국의 공연예술 수준을 5년은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민기는 경극과 혁명가극의 나라 중국에 자신의 음악극 경력 10년을 전수했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 1호선>을 중국에 주는 작은 선물이라 했던 것이다.
2001 도쿄, <지하철 1호선>과 보아
HOT의 강타가 중국 십대의 일상을 그야말로 강타하고 있는 시점에, 일본은 보아의 노래와 춤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각종 언론들은 보아의 열풍이 일본에서의 한류 징조라며 떠들썩했다. 그 시점에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 도쿄 공연이 있었다. 나는 동아시아의 학자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하는 문화교류를 위해 도쿄에 가게 되었다. <지하철 1호선>은 재팬파운데이션의 초청에 의한 공연으로 무료초대권은 아예 없었다. 중국과 달리, 일본 측은 철저한 공연 준비와 관리를 했다. 6만 원에 달하는 비싼 표 값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내리 만석이었으니, 홍보에도 만전을 기했음에 틀림없었다.
11월의 찬 기운 속에 재일동포들이 마련한 <지하철 1호선> 환영의 자리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에 올라섰다. 지하철에서 만난 일본인들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없었다. 조심스러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한 그들의 어두운 이면만이 보여 졌다. 지하철 밖에 정부의 홍보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삭막함과 일상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자연과 함께 하세요.” 분재를 키우라는 권장 문구였다. 철사에 칭칭 감긴 기형을 미학으로 강제당한 나무. 그들에게 자연은 분재일까.
지하철의 출입문 한가운데는 문을 ‘도아’로 공식 표기하고 있었다. 한 일본친구는 전후 미국의 군정경험과 패전 심리가 일본이 서구를 좇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가면 식민침략을 반성하라고 강요하고 있지만, 대다수 일본인에게 8.15는 곧 패전의 아픔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일본 역시 피해자라는 인식이 참회의식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부대낌이 아니라 남의 삶에 비켜가며 살아가는 저 표정 없는 사람들의 내일은 무엇인가.
‘보아’
1990년대, 일본은 아시아의 미디어산업에 뛰어들었다. 소니와 마쓰시다가 적자를 내고 할리우드에서 철수하는 등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비디오게임 시장에서는 미키마우스를 능가하는 마리오의 위세를 떨쳤다. 일본은 국가 정체성을 재구축하기 위해 아시아에 팽배한 반 일본 정서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가동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의 색채를 거세한 문화상품, 즉 음악 산업에서 범아시아 스타를 주조하고자 했다. 일본의 언어와 문화적 특수성 때문에 일본 문화상품으로는 먹혀들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홍콩과 대만 등지에 현지 자본과의 연계에 의한 현지 아이돌스타를 제조해가는 지속적인 변모를 꾀해왔다.
반일의식이 팽배한 한국에서 일본문화의 소비는 음성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음악 산업면에서는 규제되어 왔다. 한국진출에 대한 일본의 갈망과 한국 기획사의 일본 음악 산업 유입에 대한 갈망이 일치되어 보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 진출에 대한 형식적 규제는 오히려 보아를 일본에 데려다 성공시키는 전략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보아가 일본에서 이룬 성공은 우리 문화산업의 도약을 일러줄 열쇠가 될 것인가. 문화산업의 성장이 국민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환상도 금물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지배가 문화산업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합리화되는 일이다.
동아시아 문화의 교감ㆍ소통ㆍ생산을 위한 한중문학ㆍ출판교류
중국정부는 WTO에 가입한 후 문화시장 개방 대비를 위해 대대적인 시장 정비작업과 콘텐츠 개발 작업에 착수했다. 문화산업 규범화와 정리 업무를 통한 생산유통 질서 구축과 다오반(盜版, 불법 복제된 영상, 음반 등)의 숙정작업과 IT기술력에 기반한 문화상품 개발 등을 관건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네티즌 인구 증가와 온라인 게임의 급성장에 따른 게임 산업 개발도 숙고되고 있다. 개방 20년을 지나온 중국의 향배 또한 그랬듯이 문화산업의 성장 가능성 또한 의심할 수 없는 대목이다. 따라서 한류든 화류든 서로를 경쟁적으로 대상화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와 상생을 위한 샛바람이 불도록 해야 한다.
공생의 샛바람이 불게 하기 위해서는 문학만한 기제가 없다. <가을 동화>라는 TV연속극은 대만에서 소설로 개편되어 중국 대륙에서 50만권이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1만권이 정품이고, 나머지 49만권은 모두 해적판이라는 소문이다. 그보다 기막힌 사실은 우리 문학은 이문열의 작품 몇 개밖에 소개되지 않았고, 그 외의 출판물도 제대로 번역된 것이 없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해마다 열리는 국제도서전에 한국 출판관계자들이 수십 명씩 드나들고, 중국책 번역 출판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역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문학 번역 지원은 대부분이 서구를 향하여 있고, 본격 문학작품이 중국에 소개되더라도, 일개 중개회사의 사업목적에 그치고 마는 현실이다. 따라서 작품 선정부터 번역 출판에 이르기까지 기획력 있는 지원체계 구축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2003 한류, 사스 퇴치 위문공연
2003년 8월, 무더위 속에 베이징에 당도했다. 다음날 아침 숙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기 전에 이창동 문화부장관과 베이징에서 만나자고 했던 터라 약속을 잡아야 했다. 나는 “‘금요일 행사’때 뵙자”고 직원에게 말했다. 그해는 사스가 중국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중국은 한국 의료진을 요청했지만, 한국은 어렵사리 거부해야 했다. 미안함으로 10억을 들여 위문공연을 해주기로 했는데, 그 사스 위문공연이 금요일에 있을 행사였다. 하지만 이는 사후약방문격에다, 위로공연을 빌미로 한류 선전하러 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게 됐다. 어찌되었건 국가 간 예의 차원에서 성의를 보인 것이니 중국 측에서도 그냥 거절할 수만을 없을 터였다.
공연 날, 베이징박물관 앞은 어린 십대들의 물결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분명 초대권만 발행했다는 공연장에 암표장수들이 즐비했다. 표 한 장에 700위안(우리 돈으로 9만 5,000원 정도)이었는데도 십대들은 표를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암표장수는 느긋하게 흥정에 임하고 있었다. 북새통을 뚫고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맨 앞쪽에 양국의 장관들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앉았고 그 뒷줄에 하얀 가운의 의사와 간호사들 이백여 명이 몇 줄을 채우고 있었다. 사스 퇴치 위문공연이라는 명분이라면 당연히 맨 앞줄이 그들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장관을 찾지 않았다. 인사 정도만 나눌 뿐 더 할 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남녀 사회자 소개로 가수들이 출연했다. 그런데 한국 십대 스타가 등장하면 괴성을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중국의 십대들은 자기나라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그 유명한 보아, 문희준, NRG, 강타의 순서가 이어질수록 그 괴이한 진행은 더욱 두드러졌다. 더욱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중국 가수들은 하나같이 나오면서 감사인사를 했다. “의사와 간호사 여러분,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들은 정중하고도 진실 되게 객석에 앉아있는 의료진들에게 인사를 했다. 반면 한국의 이른바 스타들이 한다는 말은 이랬다. “여러분, 보고 싶으셨죠, 저도 그랬어요, 반가워요” 혹은 “한동안 뜸했었지만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많이 보고 싶으셨죠,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니하오!”
이런 무례가 어디 있나 싶었다. 돈을 10억씩이나 들였다면서 문광부에서는 그 공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행기에서라도 좀 알려줄 일이지…. 더구나 그 뻔한 립싱크는 초원을 넘어가듯 깊은 울림을 표현하는 중국 가수의 노래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출연했던 가수들이 다시 등장하자 중국문화부 장관과 이창동 장관은 보아, 강타 등 가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아니 도대체 이런 자리에 왜 장관들이 나와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격려하며 흐뭇해하는 것일까. 과연 그들은 악수를 건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초대권을 암표로 둔갑시키고 그 실익만을 셈하며 아이들의 법석을 바라보는 중국 정부의 안일한 대응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이지만, 이런 공연에 10억씩이나 쏟아 붓고 성공이라고 자축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자기기만은 참으로 눈뜨고 봐주기 힘든 지경이었다.
‘야만여우’ 선발대회
사스 퇴치 위문 공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문화관광부의 해외지소를 책임지고 있는 한 지인으로부터 희한한 구경거리를 보러가자는 연락이 왔다. 베이징의 제일 유명한 술집에서 한국의 기획사가 연극공연을 위한 사전몰이를 한다는 것이다. 량마허(亮馬河)호텔에 있는 하드록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그 규모와 실내 장식의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최 측의 배려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난타의 요란한 타작소리가 공간을 메우고, 이어서 공중에 걸린 스크린에는 <엽기적인 그녀>가 등장했다. 중국에서 <엽기적인 그녀>는 ‘야만여우’라는 제목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비준이 나지 않아 영화관에서 공식 상영할 수 없었는데도 불법복제판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한국의 한 기획사는 이러한 인기의 여세를 몰아 <야만여우>를 연극으로 올려보겠다는 전략 하에 ‘야만여우 선발대회’를 벌이게 된 것이었다.
선발방식은 이랬다. 먼저 12명의 훤칠한 미녀들이 등장한다. 그때 공중의 스크린에서는 엽기적인 그녀가 상영된다. 그러면 미녀들은 한명씩 좌석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임의로 선택한다. 그리고 공중의 스크린에 주어진 장면과 똑같은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친구의 뺨을 철썩 때리고 우격다짐에 발로 차기까지 장면을 흉내냈고, 객석은 웃음으로 왁자했다. 미인인지 야만녀들인지 장기자랑을 한답시고 모델 흉내를 내고, 춤을 추고, 야만적으로 몸을 흔들어 댔다. 참 보고 있자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음료 한잔 마실 생각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부는 10억 원을 들여서 사스 퇴치 위문공연 한다고 소동을 벌이고, 민간기획사인지 문화사업 자본인지는 그 모양으로 난장을 치고 있으니,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우리가 쌓은 문화적 내공이 겨우 이런 수준이란 말인가? 중국과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미 한류드라마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됐다. 하나같이 신데렐라 유형과 여주인공의 고질적인 불치병 등 천편일률적인 청춘물에 대한 식상감이 비판되고 있다. 거기에 방송사들의 무리한 고가 책정과 오만한 태도 등, 해당국의 문화수요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한류의 파고는 내부적 저항에 직면해 있는 추세다. 그들이 아직은 한류를 대체할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그 과도기적 단계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구려 문제, 한류, 한중관계
한국과 중국은 조공관계 해체 이후 단 한 번도 서로를 올바로 바라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우호적 감정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과의 식민지전쟁의 경험이라는 대비 축 속에서 형성된 감정일 뿐,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비롯한 연대의식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일천하기 그지없다. 게으르다, 더럽다, 비단장수 왕서방,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 중국에 가면 떼돈을 벌 수 있다 등으로만 연상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동북공정의 실상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분출하는 것이고, 중국 역시 한국에서 대두되는 반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 문제의 파급이 중국과 한국의 상승적 우호관계에 균열을 낸 것이 사실이다. 중국 외교부의 의식은 능히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그것이 바로 한국을 혹은 세계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각이라는 판단도 어렵지 않다. 중국인들은 중국을 아시아 속의 한 나라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제국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동북공정을 통해 오히려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대대적인 관광 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지식인들조차 한국 국민들이 좀 시끄러운가보다 하는 정도이지 이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동북공정의 문제를 그저 변강사(邊疆史) 정리문제로 생각한다. 그러한 그들에게 우리는 우선 한반도의 역정을 살아온 우리의 부박한 살림살이의 통한과 그것의 극복의지 등을 제대로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동남아의 한복판, 태국 한류 - 문화패권주의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천 원 한류’
본격적인 태국기행의 첫 기착지는 방콕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무잡잡하고 동그란 눈의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며, “한개 천 원, 빨리 빨리, 기다려, 만원 바꿔줘.”를 외쳐댄다. 선상 시장, 과일가게, 호텔에서의 팁까지 한국과 태국의 만남의 코드는 천원이다. 경제력 성장으로 우리 돈이 세계화되는 추세이니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인가. 그러나 미군들이 뿌리는 깡통초콜릿과 옥수수 빵을 받아먹고 자란 우리, 1달러에 뛰어다닌 슈샤인 보이와 택시 잡이, 1달러에 목숨 건 사연들을 겪은 우리로서는 그런 무책임한 말은 착위(錯位)의 폭력이다.
방콕의 길거리 한복판에 우리 영화 광고판이 내걸려 있었다. 중국에서도 가장 인기 있다는 <엽기적인 그녀>의 새로운 버전의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가 여기에도 등장한 것이다. 한국드라마에 푹 빠져있다는 태국인들은 천 원짜리 몇 장을 위해 들고 뛰었던 하루의 피로를 한국드라마로 푼다고 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정교하고 탄탄한 바구니 하나, 유리와 자기 조각을 모아붙인 탑과 성곽, 금빛 찬란한 왕궁과 그 옆의 민주화 기념탑, 그 문화적 역사의 엄연한 실증들을 천 원짜리로 바꿔치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군부정권, 미국의 반공산주의 요새, 민주화투쟁, 왕조의 현존, 소승불교, 이산인들과 말레이-이슬람에 의한 분리주의 운동, 최대 관광지. 이처럼 복잡하고도 다양한 문화적 현존의 양상을 펼쳐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인 태국을 어느 하나의 시각에 규정해서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서 한류는 미국과 일본이 지나간 자리를 차지한다. 세계적인 지배문화의 대열에 얹혀가는 우리가 꿈꾸는 패권은 천원이 만들어가는 파장의 진실을 안을 수는 없다.
전장의 기억과 베트남 한류 - 자본주의화 과정에 침입한 주변부 문화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에 이어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1945년 일본이 패배하자 말도 안 되는 프랑스의 소유권에 다시 맞서게 된다. 그로 인해 프랑스와 10년 전쟁을 치르고 그 후 미국과 다시 10년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그 승리는 주변국들의 베트남 세력에 대한 부담감으로 적용되어 다시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을 야기했다. 베트남의 근 현대사는 그야말로 전쟁을 떠나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전쟁이 삶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했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1986년 시작된 도이모이 개혁으로, 베트남 역시 자본화 과정에 들어선지 오래다. 베트남 연구를 위해 호치민에 가 있는 한국인 여성 연구자를 만났다. 그녀는 원래 중국 여성문제를 연구했지만, 최근 베트남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베트남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국 주재원 부인들의 사는 방식을 비판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급아파트에서 베트남 여인들을 하녀처럼 부리며 베트남 말이라고는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것 밖에 할 줄 모른다고 했다. 한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죄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귀부인이나 되는 양 고상을 떤다는 것이다. 부인네들이 그렇다면 그 남편들 또한 안하무인일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베트남 여인들은 남편이 일을 해도 거기에 의존하지 않고 억척같이 일을 한다고 한다. 스스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그처럼 투철한 것은 너무도 긴 전쟁의 상처가 깊이 패어 있는 탓이리라. 베트남 여인들은 그 작고 마른 어깨에 오늘도 가인(ganh, 긴 대나무 막대 양 끝에 바구니 같은 것을 매달아 물건을 운반하는 도구)을 균형 있게 맨다. 이는 베트남 지도 모양과 비슷해서 그것은 나라를 짊어진 형상으로 떠오른다.
베트남 사람들은 아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그들은 함께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디서든 모이면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꽃을 나눈다고 한다. 그들에게 아이들 교육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보통 5년 정도의 터울을 두고 자녀를 둘 낳는데, 교육열이 높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 퇴근 후에도 계속 다른 일에 종사한다고 한다.
하노이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하노이대학을 찾았다. 한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학과 4학년 꼬마 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꼬마 장은 이미 한국에 와서 3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운 바 있었는데 통역이 가능할 정도로 우리말을 잘했다. 그는 한국에 가서 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공부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베트남 교수들은 거의 연구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베트남은 공동체사회여서 교수와 학생들이 모든 학교 행사 및 지역사회의 일들에 일일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 연구자들은 영어자료에 의존해서 연구를 하는데, 대개의 번역본은 외국학자가 번역한 것으로 제대로 연구를 하기에는 왜곡된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했다.
꼬마 장은 한국학과 학생들은 취직이 잘 되고 임금이 꽤 센 편이지만, 중국학과나 일본학과의 경우는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취직률도 그리 높지 못하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류라는 것이 결국은 이 맥락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에서도 유행잡지의 문예란은 대부분 한국 드라마 스타들과 십대 댄스가수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할리우드 스타들이나 서구 유명 스타들과 같은 비중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오랜 전쟁을 치렀지만 미국의 금수조치해제에 의해 베트남 경제가 자본주의적으로 활성화되는 역정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문화는 아직 촌락과 전쟁의 자장 속에 있다. 자본주의 문화가 수입되고 소비되는 정황에 있지만, 강고한 문화적 정체성으로 인해 반사와 굴절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과도기적 대체물로서 한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신세대층을 겨냥한 애정물 편중과 천편일률적인 드라마 내용과 전개방식 등에 대한 문제가 베트남 비평계와 언론에서도 자주 지적되고 있다. 사랑타령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삼류 애정물의 뻔한 결말, 그것의 재탕 삼탕 같은 드라마 제작과 편성에 대한 자성과 전환이 요구된다. 또한 대중음악 생산에도 몇몇 기획사와 도매상들에 의한 전근대적 생산과 유통구조, 십대 신화의 재판들은 심각한 문제다. 이미 지나쳐간 미국과 일본의 아류 팝이 알량한 국화빵기획으로 일관되어져서는 곤란하다. 이 나라에서 아직은 화려한 의상과 춤 등의 포장기술에 매혹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 빠른 몰락은 자명한 것이라 하겠다.
제3부 돈 되는 한류, 돈 안 되는 한류
한류산업을 보는 문화적 시각
문화란 상호 교류되는 것이며, 하나의 동질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을 통해서 새로운 단계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한류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규명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해방이후 한반도는 식민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문화의 욕망과 폭력이 한국적 삶의 내력들을 대체해 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모방과 중역(重譯), 그리고 변종과 창신(創新)을 통한 혼종교배의 대중문화가 오늘의 한류의 총체라면, 그것이 인접국에 불면서 돌연한 문화적 반향을 일으켜 일종의 조응상태를 이룬 것, 그것이 한류에 대한 간명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기 한류는 중국 사회의 필요성과 한국 기업들의 중국 마케팅 전략이 엉겁결에 들어맞은 우연하고 돌연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한류가 점차 중국을 거대한 문화시장으로 촉성(促成)해가는 상업화 담론이자 문화산업 전략으로 조직되어 왔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 문화의 형질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의 한류는 그곳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즉 자본주의에 편입된 이래 아직 자기 문화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단계에서 미국식 대중문화의 중역을 거친 한국문화가 무리 없이 소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방을 통한 그들의 문화적 형질 가동으로 역풍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대응양상을 예정해놓고 있다.
그렇다면 한류는 과연 상업적 대중문화의 이해관계를 넘어 동아시아의 다원적이고 평등한 문화의 공존을 위한 동력이 될 수 있을까. 70년대 홍콩영화는 한국에서 풍미했고, 일본풍은 오래전부터 대만에 영향력을 형성했다. 그러한 대만풍이 80년대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한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다. 일류와 한류는 대만이라는 문화적 파이프를 거쳐 중국에 유입되게 됨으로써 대중적으로 보편화되었다. 문제는 이와 같이 한류가 중국에 직접 현상한 것이 아니라 대만과 홍콩을 에돌아가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대만은 한국화 된 서구문화를 중국버전으로 만드는 문화적 여과작용을 담당해낸 것이다. 물론 중국대륙에서 한류의 대중화는 일본에 대한 역사적 거부감이 작용한 측면이 크다.
문화제국주의론은 지배의 기획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70년대 영어의 확산은 중고등학교와 기독교회 중심의 평화봉사단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한류는 패션, 미용, 성형, 관광, 전자상품 등 소비적인 대중문화를 선도한다는 점에서 그것과는 다른 측면을 드러내지만, 한류의 자장 속에 들어있는 상대국의 문화적 낙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을 같이한다. 한류의 영향권 안에 있는 국가의 청소년들은 자국의 문화적 낙후성을 체감하게 되고, 이는 무차별 모방의 소비패턴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겨우 문화상품의 생산력을 가지게 된 우리의 행로를 그저 매도할 수만은 없다. 따라서 한류를 지속시키고자 한다면 이른바 자본의 논리가 아닌 문화의 논리에 의한 win-win전략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한류산업을 보는 전략적 사고
세계 문화산업은 연평균 5% 내외의 높은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21세기 세계 경제의 중심이 문화콘텐츠로 전환되고 있다. 우리 역시 문화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리 잡히면서 진흥책을 폈다. 영화산업의 경우, 국고지원을 통한 규모 키우기에 주력했는데 이는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보다는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팅비용 등 제작비 규모의 양산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저예산 영화나 예술영화들의 지반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이는 결국 정부차원의 영화진흥책이 영화산업 부풀리기, 거품 만들기에 불과한 졸속행정의 소산이었음을 입증한다.
우리나라가 문화산업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문화시장질서에 편입되거나, 그것과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문화 산업체들이 몇 개의 거대한 미디어 그룹으로 통폐합해왔다. 그것은 유통 및 배급망을 장악하고 관장하는 형태로 전화되어 왔다. 한국의 문화산업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 하에 육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원차원이고 주도는 문화 산업체들의 몫이어야 한다. 한국에서처럼 정부와 민간기업의 공조체제로 나아가는 점은 스크린쿼터의 문제에서처럼 자국 시장 보호정책으로 규정되어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화관광부는 ‘창의한국’이라는 문화혁신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데, 정부와 민간이 휘몰아치듯 콘텐츠개발을 한다며 야단법석이다. 지방정부들은 무분별한 문화재 개발, 문화공간의 복원과 증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화와 TV드라마 촬영지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은 문제의 심도를 잘 말해준다. 전통의 상업화와 삶의 구경거리화를 위해 국토가 전면수리중인 목불인견의 현실이다. 해외네트워크 구축방법도 문제이다. 각국의 역사적 과정과 사회적 특성에 대한 이해는 없이 엄청난 돈을 들여 대대적으로 불러 모으는 식의 국제회의가 한해에도 수십 번씩 열린다. 지역마다 해외의 도시와 교류협정을 맺느라 혈안이 되어있다.
진정한 문화산업 육성방안이라고 한다면 규모의 육성도 고려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면을 돌아보아야 한다. 창작자의 창작환경 개선, 곧 창작의 원천을 보호하고, 그 환경구조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저예산이라 하더라도 문화산업의 특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상품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상호 발전할 수 있는 생산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독자적인 배급유통망을 확보하는 등 다양한 발현이 마련되어야 한다.
일본의 문화산업은 미국의 허용과 세계적인 시장개척의 의도 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포켓몬스터>는 미국의 배급망(디즈니)을 통해 세계에 전달되었고, 음반 산업과 영상산업 등도 미국의 인수합병 프로그램에 순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다만 벤처성에 주목하여 그 육성방안에 주력하고 있다. 그보다는 음반유통의 편법과 관행들, 밀어내기와 무자료거래, 선급금 등의 문제부터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비슷한 판박이 제품들을 양산하는 제작 행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 수요층을 향한 다원적인 음악과 공연문화가 요구된다. 또 다른 보아를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음원으로서의 승부가 요구된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정신적 산물이고 서비스이다. 우리가 문화 산업 시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수용자 혹은 소비자층에 어떻게 향수되는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한류문화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원칙과 대안들
우리 문화산업의 발전상을 잡아가고 그것을 한류문화시스템으로 구축해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문화산업이 전반적으로 초기단계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기반구축을 해야 하는 사업과 당장 중점 지원해서 육성할 사업, 주변 분야 지원 사업 등에 대한 장단기 기획과 전망을 수립하고 정책지도를 그려 그에 따른 프로그램들을 시행해나가야 한다. 문화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 나름의 저작권법이나 인터넷 관리규정을 구축해갈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수용자들의 입장에서 세계 문화시장의 새로운 질서를 주도해갈 필요가 있다. 후발 문화산업 국가인 우리는 지역 문화시장에 대해서 상호존중과 상호보호의 원칙을 주도적으로 관철해가야 한다.
IT산업 발전에 따른 장점도 최대한 확보해나가야 한다. DMB 등 새로운 디지털콘텐츠산업 개발은 그런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를 위해서는 출판-만화-음반 등의 문화교육 재정이 확충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을 생동하는 문화진지로 각인될 수 있는 상을 잡아나가기 위해서는 기초콘텐츠 생산을 위한 순수예술 분야와 인문학 그리고 문화산업분야 간의 유기적인 연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과 이를 수행할 전문 인력의 육성체계 등, 지속적인 연구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문화관광부 내의 지휘체계도 재정비 되어야 한다. 영화진흥위나 게임산업개발원, 아시아문화산업개발원 등, 갈래별 지역별 지원체계들로 기본-중심-주변의 구도 속에서 역량안배와 상호발전체계를 구축해가야 할 것이다.
제4부 한류 흘러 동아시아 바다로
이병헌 팬사이트 속의 동아시아 문화교통
한류의 돌풍은 국가마다 다른 문화적 양상을 드러낸다. 사회주의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우선은 모방에 그치고 있지만, 다음 단계에서는 자신들의 문화적 형질을 가동시키면서 혼종문화로서의 역풍을 만들고자 할 것이다. 이는 첨예한 대응양상 혹은 상승효과를 예고한다. 자본의 논리가 주도하고 있지만 거기엔 지역 차원의 대안적 정향성(定向性)이 작동되는 것이다. 때문에 한류는 문화가치 생산이라는 본연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그 지속화 방안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한류스타 이병헌의 팬사이트에 주목한 것은 그러한 가능성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미디어 산업의 약진 속에서 한류스타들 역시 할리우드 스타시스템과 결코 다르지 않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병헌의 경우는 스타성의 조작에 의한 생산의 관점이나 소비의 관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측면이 포착된다. 그것은 팬과의 관계성이다. 평균 조회 수 1,000회에 달하는 이병헌 팬사이트에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병헌이 스타로 발돋움 하게 된 것은 연기자로서의 자질, 역량, 직업의식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할리우드 스타와 마찬가지로 감정적 친화, 자기동일시, 모방, 투사의 측면도 반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팬과의 적극적 상호작용이 그의 성공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게시판을 보면 이라크 파병반대 집회에서 발언자로 나섰던 이병헌의 포퓰라 아티스트적 면모도 보이지만, 팬들의 자기 정위와 관여행위가 여실히 드러난다. 퍼나르기와 댓글달기에서 확인되듯이 이병헌과 팬들의 관계는 문화소비가 아닌 문화의 생산적 의미를 최소한 확보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문화의 소비자였던 팬들이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공유라는 새로운 인권의 의미를 발현한다. 이병헌은 최근 ‘가치관을 확립해가는 과정’이라며 자신의 근황을 언급했다. 그의 말처럼 최근 박찬욱 감독의 <쓰리, 몬스터>에 출연료 없이 응한 것을 보면, 문화생산자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조금씩이라도 회복해가리라는 기대가 된다.
1990년대, 대만에 일본의 TV드라마가 급속하게 확산된 것은 문화적 친근감에 의한 흡수가 아니었다. 당시, 대만 미디어산업의 급속한 발달과, 80년대 후반부터의 민주화 흐름의 영향, 그리고 친일적인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출현이라는 정치적 조류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 대만인들은 일본 드라마를 선택했다. 대만의 사례를 든 것은 한류의 형질 역시 아시아적 문화적 본질로 규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동아시아인들은 왜 한류를 선택한 것일까. 한류의 문화형질은 우선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비롯된다. 한반도는 외세를 비롯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ㆍ정치의 발전과 함께 사회 민주화를 이룬 역동적인 시민의 모습을 세계적으로 각인시켜 왔다. 민중의 높은 의식적 각성과 시민사회의 활력이 다른 나라들에게 높이 평가된 것이다. 그것이 한류에 잠재한다.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한국과 한류는 미래에 대한 선험적 희망으로 부유한다. 따라서 한국이 역경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맺어놓은 그 성과들을 동아시아에 부지런히 옮겨 놓는다면 역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더불어 사는 상생과 평화의 형태라면.
상업적 민족주의와 팝아시아주의의 변주 - 21세기 동아시아 대중문화 삼국지
최근 중국도 문화산업을 기치로 들었다. 엄청난 콘텐츠를 바탕으로 문화산업 대국을 꿈꾸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만들어진 총 58부작 TV드라마 <한무대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제작비(3년간) 약 60억 원이 투입된 대작이다. 문화산업대국의 몽상 앞에 중국 정부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해외 자본에 의한 블록버스터 영화는 거대한 자본의 돌풍에 휘말리게 했고, 그것은 독립영화 발전의 소중한 계기들을 박탈해 버렸다. 그러나 이는 중국 정부가 문화산업 부문에 과감한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과 궤를 같이 한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은 21세기 문화민족주의의 화려한 등극을 표징해낼 것이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이 거침없이 국가주의를 드러내는 동안 일본 없는 일본을 전현해내는 식으로 노회하게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돌시스템의 성공작 보아는 일식(日式) 한류다. 한국이 이제 가지게 된 대중문화 생산력을 일본은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에 아시아로의 문화공조라는 명분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센과 히치로’, ‘포켓몬’ 등은 모두가 미국의 세계적인 유통배급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그들은 한류에 편승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손짓에 꼬리를 흔든다. 아시아를 제패했던 일본의 새로운 초국가적 지역화 기획은 문화적 제패 수준이 아닐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문화지역주의의 가능성
서방세계는 미국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한 대응 축으로 EU를 형성시켰다. 아시아에서는 재편된 ASEAN+3국 등, 자구적 지역주의가 대두하고 있다. 거기에 동아시아와 북미간의 축인 APEC이 경제협력에 주안점을 두면서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있고, ASEM이 아시아 유럽 간 협력강화를 도모하며 APEC에 대응하고 있다. 결국 세계화로 인한 통합의 이면에는 지역 블록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다자간, 국가 간 투자협정 등이 형성되고 있다. 한반도 역시 그 새로운 세계질서와 지역질서의 재편 와중에 얹혀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화 추세는 한반도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미국은 북핵문제로 한반도를 끊임없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고자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어떤 나라나 국가체제도 이를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중국의 경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동북아 평화정세는 필수적이다. ASEAN(아세안, 동남아국가 연합) 각국의 입지는 조금 다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 상호관계성이 높아지면서,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상황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시아에서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즉 자국의 이해를 위한 담합수준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동상이몽 속에 아시아 주도권을 놓고 각축하고 있고, 미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은 아시아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다른 형세를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세계화의 구호인 ‘경쟁’보다는 ‘호혜’협력으로 공동 대응구도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공조체제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이해관계의 결집이 필요하다.
한반도 자체 내에서의 동력 형성 없이는 힘을 가질 수 없다. 곧 남북관계의 주체적 전환을 통한 해결과정 없이는 그것이 무의미하다. 남북한의 관계형성은 남북경협 등이 그것인데 이것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입각해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계를 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호인정, 곧 체제와 상식 등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심도를 만들어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간사회로부터의 정서적 차원 그리고 새로운 가치지향까지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남북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공존 문제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주체적 해결의 경로들 : 남북경협과 한류
남북경협의 문제는 안팎의 조건에 의해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차원에서도 민족통일의 기반을 다져가야 한다. 유럽사회와 달리 남북한의 통일문제는 이데올로기적 차이가 아닌 경제적 격차로 현상한다. 따라서 외자나 합자의 방식으로 추진될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종속, 시장으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그와 같이 북한이 분배중심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경쟁사회로 변화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분화를 촉진시키고 변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급격한 사태진전의 충격을 완충시키는 장치가 요구된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운동이다.
우리가 일구어야 할 미래사회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려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상에 대한 다양한 펼침 속에서 걸맞은 찾아감의 과정이 필요하다. 한반도 긴장 완화와 동북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민족적 결속력을 높이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부수반에 의한 협의가 아닌 민간 사회에서의 사회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연계프로그램을 말한다. 남북한은 식민지적 경험과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획득한 민족정체성을 공유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민족분단이라는 피해양상에 의해 다른 양상으로 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른 체제 속에서 변질되면서 굳혀진 것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 밑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응결지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류의 수신은 각국의 사회문화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띤다. 예컨대 일본에서의 한류는 향수(鄕愁, 노스탤지어)의 소비이다. 한국 드라마는 가족관계 등 사회관계 속에 애정관계가 배치된다. 그 적정선에 일본의 허무한 인생들이 접속하는 것이다. 일본은 그들이 소비한 만큼 한국도 일본에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한류와 손을 잡고 가고자 한다. 외면상으로는 문화산업 공조체계로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불균형한 서열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한류는 초기에 홍콩과 대만의 여과와 정제를 거쳤다. 중국은 전 역사를 통해 문화적으로 언제든 열려있었다. 거부의 순간은 그것을 이미 받아들인 뒤였다. 외래문화에 대한 그 엄청난 흡인력은 다종 다기한 중국식 변종을 낳았다. 그 다양한 소비패턴과 양상이 새로운 문화적 지역주의의 가능성을 현시한다. 이를테면 태국과 베트남에서의 한류가 그렇다. 베트남의 경우, 시(詩)와 촌락공동체는 한류와 동행하면서도 호치민의 사회주의적 잣대를 가지고 새로운 문화구성을 추동해 간다. 즉 우리와 대면되는 지점들 속에 적응원리를 관철해간다. 동아시아로 간 한류는 이렇게 다른 접점들 속에서 부유, 혹은 접합되고 있다.
문화의 세계화란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세계적 교통의 문화적 전개이면서도, 기본적으로 패권적이고, 비대칭적 지배구도로 현상된다. 그러나 문화의 본질이 교류라는 점을 상기할 때, 다원적이고 평등한 새로운 문명지향의 문제를 사고하고 준비하게 한다. 동아시아는 지금까지 문화산업의 공략대상으로만 산정되어 왔다. 미국과 세계자본의 패권적 지배 속에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까지도 상품화 되어 왔다. 이 거대한 소비문화의 파고를 휘어잡기 위해서는 문화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다른 여타 국가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 다원성의 공존, 평화와 상생이라는 지향을 분명히 하는 문화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