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가까워 오는 이즈음
우리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글을 우리 카페가족과 같이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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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으로 떠나는 배 - 미 해군 LST 수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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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배에서 본 부산항 3부두 환송식 장면>
방광암으로 고생을 하던 형님이 시골살이를 작정한 후 몇 개 은행의 불필요한 계좌를 정리하여 농협으로 통일하고 국가유공자 보상금 입금계좌 변경신청을 하고 나니 마침 점심시간이라 부근 식당가의 번잡한 시간을 피하려고 천천히 걸어서 인근에 있는 부산역 광장을 오랜만에 거닐어 보았다 한다.
병치료차 근래에 KTX를 자주 이용하기는 했지만, 매번 열차 시간에 쫓겨 승용차를 선상주차장에 주차한 후 예매한 열차의 플랫폼으로 바로 내려갔기 때문에 여유롭게 광장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광장은 추석을 앞둔 대목이었지만 비교적 한산했다. 넓고 휑했던 광장은 분수를 포함한 여러 조형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역사(驛舍)는 산뜻한 새 옷을 입고 승객들을 기분 좋게 맞이하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대합실에 올라갔다. 최근에 증축하여 서울역보다 더 잘 단장된 곳곳을 둘러보고 앞으로 자주 이용하게 될 청도행 무궁화호 승강장을 찾다가 무엇엔가 이끌리듯 넓은 대합실을 가로질러 항만(港灣) 쪽 창가로 다가가 공사 중인 부두를 내려다보다가....형님은 여기서 어머니를 보았다.
작고 여윈 체구이시고 늘 병약했으나 우리 다섯 남매를 낳아 가슴으로 키워오신 어머니. 어릴 때 형님은 그리 착한 아들이 아니었는데도 늘 용서하고 감싸주셨고, 성인이 된 후에도 굴곡 심한 형님의 인생을 지켜보며 눈물 뿌리며 기도하시던 우리 신앙의 모태(母胎), 그 어머니를 보았던 것이다.
1971년 8월 몹시도 더운 날, 부산항 제3부두에는 파월 맹호부대 환송식이 있었고, 약관(弱冠)의 형님은 미 해군 LST 수송함의 갑판에 있었다.
1965년 2월에 육군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가 베트남 디안에 상륙함으로 시작된 국군 파병은 그 해 7월에 해군 백구부대가 파병되고 청룡부대(해병2사단)가 캄란에 상륙했으며, 10월에 맹호부대(육군수도사단)가 퀴논에 상륙하고, 다음 해 8월에 백마부대(육군9사단)가 나트랑에 도착함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뒤 종전 직전인 1973년 3월 우리 군이 완전히 철군하였는데, 형님이 파병되는 시기는 전쟁의 막바지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교체병력으로 참전하게 되었으니 어머니와 우리가족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고1이었다
수송선 아래 부두에는 떠나는 장병의 가족을 포함한 수많은 환송 인파들이 하나같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고, 높은 갑판 위에는 천 명이 넘는 장병이 같은 제복을 입고 군모를 흔들고 있었으니 서로 가족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형님은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리 살펴봐도 어머니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다. 우선 군중과 함상(艦上)과의 거리가 너무 멀 뿐만 아니라 군중 속에 묻힌 작은 키의 어머니를 찾기 어렵고, 시력이 좋지 않은 어머니도 그렇지만 우리가족 모두도 제복의 무리 가운데서 형님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 통일 위하여 조국을 지키시다 /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환송 행사가 끝나고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군가 '맹호는 간다'가 울려 퍼지면서 배는 앵커를 올리고 선수(船首)를 남으로 돌리고 있었다. 형님은 어머니를 찾지 못한 서운한 눈물을 문지르고 있을 바로 그때,
인파 속에서 도열한 헌병들을 밀치면서 군중 저지선을 넘어 떠나는 배를 향해 무작정 달려나오는 중년의 한 여자를 보았다. 우리 어머니였다. 나도 사실 배 갑판 위를 보느라 어머니의 행동거지를 살펴볼 형편이 못되었다.
"엄마, 그만!" 형님은 위험을 직감하고 온 힘을 다해 어머니를 향해 소리쳤으나 어머니는 형님을 보지는 못하고 그냥 달려가시다가 다행히 접안선 부근에서 뒤따라 온 헌병의 제지로 무사함을 확인하고, 그렇게 부산항 제3부두를 떠났다.
오늘 부산역 2층 대합실에서 부산항만공사(BPA)의 북항재개발사업 현장인 부산항 제3부두를 내려다보면서 칠순(七旬)이 다되어 가는 형님은 꿈같은 세월을 넘어 그때의 어머니를 다시 보았던 것이다.
전장(戰場)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때마다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큰아들을 위해 간구(懇求)하신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 나는 믿고 있다.
형님은 1년 후 이 부두로 다시 돌아왔지만, 귀국하여 적지 않은 연수(年數)를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우리 형제들도 주위에 같이 살면서도 내 살기에 바빠 그 사랑에는 제대로 보답도 못 한 채 2001년 5월 20일 이번에는 형님을 비롯한 우리가 어머니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만 했다.
이제 며칠 후면 추석이다. 우리 형제와 아이들이 모여 어머니 산소를 성묘(省墓)할 것이다. 부산역과 부산항 제3부두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산소에서도 가족 모두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만날 것이다. 특히 올해는 우리 집안 처음으로 형님들보다 내가 먼저 재작년 친손녀 외손녀에 이어 올해 친손자 외손녀까지 보아 어머니께 안겨 드리게 될 것이다. 누구보다도 장남을 귀하게 여기셨던 어머니였는데 한편 미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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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 산소 - 내가 자란 고향 김해에 안장>
첫댓글 어머니 엄마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맹호부대 용사로 월남전에 참전하셨던 큰 오빠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췌장암으로 고생 하시다가 하늘 나라로 가신 지도 십 여년이 지났네요.
나의 어머니는 2남 4녀를 낳으시고, 34세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었고,
...5년전 묘지이장으로 했빛을 보고는, 다시금 어둥속으로 돌아갔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