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9장
=====9:1
배에 오르사 건너가 - 이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달라는 가다라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며 건너왔던(8:23-27) 게네사렛 호수
를 다시 건너 되돌아 가심을 뜻한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본 사건의 평행기사를 다
루면서 예수께서 되돌아가기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에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그
지역 사람에게 증거할 것을 당부하시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막 5:18-20; 눅 8:38,
39).
본(本) 동네에 - 이는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4:13; 막 2:1),가버나움이 갈
릴리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한편 본절의 문맥을 보
면 뒤이은 2-8절의 내용이 마치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돌아온 후에 발생한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가다라 광인(狂人) 사건을 살펴볼 때 오히려 다음의 중풍 병
자 사건이 가다라 사건 이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막 2:2-12과 막 5:1-20 비
교). 이는 이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일어난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상, 즉 예수는 귀신과 죄 문제같은 영적 차원에서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졌
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보다는 신학적 주제에 따
라 마태가 이를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뒤에 언급될
2-8절의 도입부로서가 아니라 앞의 8:8-34의 사건을 마무리짓는 결론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절은 원문상,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새로운 사건을 소개
할 때 흔히 등장하는 '카이 이두'(* )란 어구로 시작되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 본 사건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평행 기사에 의하면 예수가
계신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자의 친구인 듯한 자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그를 줄에 매달아 예수앞에 데려다 놓았다고 설명되
고 있다(막 2:1-12; 눅 5:17-26). 여기서 침상을 뜻하는 '클리네스'
(* )란 그것을 들고 돌아가라는 6절의 예수의 명령에서도 암시되어 있
다시피 한사람의 힘으로도 들 수 있을 만한 가벼운 메트리스(mattress)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여기서 '저희'란 것은 데리고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병자
자신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Clarke, Plummer). '저희의 믿음'이란 것은 예
수께서 이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칼
빈(Calvin)은 이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만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편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한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것이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예수께 대한
'믿음'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히 11:1, 6). 더욱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단지 동료들의 믿음에 근거하기 보다 근본적으로 중풍병자 자신의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겔 18:1-4).
소자야(* , 테크논) - '테크논'은 연장자가 손 아래 사람을 다정하
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요일 2:1).
안심하라(* , 다르세이) -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 말라'는 뜻으
로 중풍병자가 지니고 있던 철저한 절망의 파도를 일거에 잠재우시는 위로의 메시지이
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 자는 진정 무서움의 그늘을 벗고 용기의 햇살을 맞이하
게 될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엔타이'
(* )는 현재 수동 직설법으로서 진행의 의미보다는 완료의 뜻이 강
하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사죄(赦罪)를 선언하시는 그 순간 이미 그 은총이 실현되었
음을 나타낸다(Burton). 이 말씀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주목할만한것
은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란 다름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서였는
데, 예수께서는 질병 치료에 앞서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했다는 점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그는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있다가, 즉 오랫동안의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이 중풍병에 걸렸으며,
그후 지난 날에 범한 죄악에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주목해 주시지 않을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
께서 지난 날 지은 범죄가 용서받았음을 먼저 선언한 것은 질병의 치유선언과 같은 뜻
인 동시에 나아가 질병의 원인까지도 제거해 주신것이었다. (2) 예수께서는 이 사건
을 자기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이려는 적절한 기회로 삼았다. 만약 그가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말로만 죄 용서함을 선언했다면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제자들까지도 의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 용서함과 아
울러 이적을 행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이런 권능을 부인할 수가 없도록 하고자 하
였다. 그러나 이 두 이유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중풍병자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 것이고 후자는 예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것으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9:3
어떤 서기관들이 - 서기관이란 용어는 바리새나 사두개 등과 같은 종교적 당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중앙 성전 또는 각급회당 등에 속하여 율법 필사 또는
각종 종교 행정을 담당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서(2:4) 공직을 가리키는 직명(職名)
이었다. 이들은 유대 종교의 수구(守舊) 세력으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 2절과 같은
예수의 선언을 듣고는 결정적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 후토스 블라스페메이)
- '참람하다'란 말의 '블라스페메이'는 원래 '남을 욕하다', '부당하게 비난한다'
(shander)는 뜻이며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다',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하다'로 쓰였다. 그후 이 말은 그 개념이 확
대되어 '신성모독'(blasphemy)의 뜻을 가졌다. 즉 어떤 서기관들은 죄사함을 받았다
는 예수의 말을 듣고 그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고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
이시며(사 43:25; 44:22). 그런 이유에서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시 51:4). 이런 점에서 마가는 여기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는 어구를 덧붙이고 있다.
=====9:4
그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 동료들의 믿음을 직시하셨던(2절)
것처럼 서기관들의 마음의 심연(深淵)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저희
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막
2:8).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을 알고 또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
실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대상 28:9; 렘 17:10; 요 2:25; 롬 8:27; 계
2:23). 따라서 이 같은 일은 예수께서 전지(omniscience)하심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증거인 것이다.
악한 생각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하신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이적을 베푸심과 동시에 이 이적과 함께 주어진 '죄 사함'의 진의를 성실하게
알아 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예수를 불신(不信)하며,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예수를 파멸시킬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9:5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는 죄 사함과 병고침 중에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질
문하셨는데, 후자의 것, 즉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것이 분명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
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지만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여러 선지자나 사도들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능력이 없는 사이비 메시야의 경우에는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가시화(可視
化)할 수 없는 죄 사함의 명령을 남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의 생각에는
죄 사함보다는 병고치는 능력이 더 쉬울것이었지만, 이 둘은 모두 권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둘 다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모두 균일하게 가능한 일
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여기서 이 두 가지 신적 일을 동시에 행하신 것은 대부분의
예수의 이적이 그렇듯이 자신의 메시야직의 진정(眞正)성과 그에 따른 권능을 보임과
아울러 자신의 메시야직의 궁극적 목적, 곧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더나아가 자신이 메시야로서 죄 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9:6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 여기서 '권세'(* , 여수시아)란 '능
력'과 '권위의 위임받은 권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성부 하
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아 행하시는 신적 권능을 가리킨다. 또한 본문의 '세상에서'란
말은 미래에 도래할 신천신지(新天新地)나 하나님의 처소로 여겨졌던 하늘과는 상대적
인 개념으로서 '바로 이 지구상에서'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은 죄와 죽음이 현존하
는 곳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인류의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해 하나님
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한다
(1:21). 실로 죄를 사하는 것은 '인자'된 자의 특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속죄의 영원한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다.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앞절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사죄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
르치기 위해 병자에게 '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는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려는 방편
으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어나 가라'는 명령과 함께 기적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 중풍 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곧 예수의 사죄권에 대한 증
거인 셈이다. 성경에 이적이 기록된 이유는 저자들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신적 목
적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 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병고친 이적의 목적은 예수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문맥을 "이제 사람의 아
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어"라고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일어나...가라 - 이 명령은 부정 과거 능동,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지체치 말고 일
어난 즉시 네 침상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매우 생동감 넘치는 3중의 명령법으로 제시
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1) 그 중풍병자의 병세를 완전히 치유하셨다는 사실과
(2) 그의 죄악을 완전히 도말하셨다는 사실및 (3)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셨음을 나타낸다. 실로 그는 사죄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
리스도이신 것이다.
=====9:7
그가...돌아가거늘 - 병고침 받기 위해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는 의심없는 절대
적 순종을 통해(2절) 병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1:21) 하기위해 보내심을 받은 임마누엘(Immanuel)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죄 사함까지
도 받은 것이다. 즉 그는 건강한 육체 뿐만 아니라 건강한 영혼도 선사받았다. 영육
의 동시 축복,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성경은 영혼을
우선하지만 우리의 육체도 무시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때 우리는
새육체도 가지게 될 것이다.
=====9:8
두려워하며(* , 에포베데산) - 초기 사본들(알렉산드리아
사본, 가이사랴 사본등)에는 하나같이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등의 뜻을 지닌 본문
의 원어를 사용했지만 후기 필사자들(copyists)은 이를 그저 '이상히 여겼다', '놀랐
다'는 뜻의 '에다우마산'(* )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약화시키고 있다. 실로 죄악에 물든 인간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신 절대적 존재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직면할 때
마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17:6; 28:5, 10). 한편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은 항상 경배와 찬양을 수반한다.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 공관복음서 3기자 중 유일하게 마태만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기, 즉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의도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편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1) 찬양을 돌린 주체 : 이 구절은 복
음서 기자의 생각, 즉 예수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부활을 목격하며 성령 세례를 받
았던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에서 나온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즉각적인 반
응이며 찬양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2) 사람의 정체 : '사람에게'
(* ,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란 말은 복수로 기록되어 있
는데, 여기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지 좀 애매하다. 문맥상 '이런 권세', 즉
중풍병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신 분은 분명히 예수이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Benoit, Held, Hill, Hummen) '사람에게'란 이 말은 교회를 가리킨 것이며,
교회가 이러한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16:19과 18:18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종말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앞
에서 지적했다시피 이 말은 마태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무리들은 인자이신 예수의 권세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본것이 아니라 한 특수 그룹의 자연인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이해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
라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 일부 율법주의자들을 제외
하고서, 예수라는 한 개인의 사죄권에 대해 크게 놀라서 찬양을 드리긴 하였지만 예수
의 참 정체,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사실을 이해하는 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율법학자들은 에수의 죄사함 선포를 신성 모독으로 보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이 문제
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원래 단순하고
겸허한 자들의 심령에는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키지만 자신의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이들
에게는 혼돈과 불평거리만 될 뿐이다.
=====9:9
예수께서...지나가시다가 - 본문의 평행구인 막 2:13, 14에는 예수께서 바닷가를
지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 이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
두리였을 것이다(D.A. Carson).
마태라 하는 사람이 - 마태라는 이름은 '신실한 자'란 뜻의 히브리어 '에메트'
(*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가와 누
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아마도 레위 소명받
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하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두
개의 이름('사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권위로서 자칭할 경우에는 소명 이후의
호칭인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하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한
편 이 마태는 12제자들중 한 사람이요 본서의 기록자이기도 하다(Gundry, 본서 서론
참조)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이
다. 당시 이곳 세관은 그 당시 유대를 속국(屬國)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
다. 한편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
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
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
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
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
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리하고 긴 막대로 곡식 자루 등을 찔러보아 그 속에 불법
상품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Van Lennep).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
로 평가되기도 했다(5:46; Edersheim).
나를 좇으라 - 여기서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
(* )는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
라는 뜻이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
미와 상통한다(4:19; 19:21).
일어나 좇으니라 -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
타낸다. 이 제 2의 세관 자리는 새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영
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
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고 있다(눅 5:28). 이는 마태의 겸손한 면모
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즉 그는 본서의 저자로서, 타인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
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9:10
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에게네토'
(* , and it came to pass, 그리고 다음과 같이되었다)란 말
로 시작되고 있다(7:28, 29). 이는 마태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어투로서 어떤 사건이
나 내용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device)한 문장이다.
마태의 집에서(* , 엔 테 오이키아) - 원문에는 단순히 '그
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이 집을 분명하게 '마태의 집'으
로 규정하고 있다.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 누가는 이 부분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신의 집
을 그냥 '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
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자화 자찬(自畵自讚)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성도는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
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
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
적이어야 하겠다. 한 알의 밀알 같이 '나'란 자아는 완전히 썩어질 때 비로소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
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 - 마태가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리는 앞에서 설명되었다시피 비애국적이고 또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다.
특별히 본문에서 '죄인들'이란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
(prisoner)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구전(口傳) 율법인 할라카
(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
상의 죄인(sinner)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함께 앉았더니 -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
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
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
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
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공동 식사에서 얻는 교훈은 (1)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다.
(2)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
의 악을 선으로 정화시키셨다. (3) 주님께서는 의인인 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준
다.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
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
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
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잔치를 끝
까지 지켜보며 예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
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同類)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
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
들이었다.
함께 잡수시느냐 - 이 말은 예수가 종교적.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한편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 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 거래를 해야
할 경우만은 에외였던 것 같다.
=====9:12
의원이...병든 자에게라야 -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는 그 당시 흔히 통
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복잡한 대답이 아니었으며 또한 바리새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정
확하고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즉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
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
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
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롬 3:10) 예수
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
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
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간
과치 말아야 할 사실은 죄인들이 예수를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던 것이다.
=====9:13
너희는 가서...배우라 - 이는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
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叱咤)하신 것이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 이 말은 구약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구절이다(호 6:6). '긍
휼'(mercy, 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 )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
약에 준한 사랑을 뜻한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
교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
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
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
인데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단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
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선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
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
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언컨대, 제사
와 같은 모든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 예수께서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
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
문인 것이다. 실로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하다(시 14:3; 롬 1:18-32; 3:10-18).
따라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죄인
이긴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
면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
기 때문이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
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다는
말의 원어 '칼레사이'(* )는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
수는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무
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사역인 것이며, 또한 그는 바로 이런 무리
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다.
=====9:14
그 때에(* , 토테) -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서 마태가 독특
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 여기서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눅 5:33). 아마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
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한편 이 당시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
된 상태였는데(4:12),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
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
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
수했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
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 아마 이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인 요
한이 메시야의 선구자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
들 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
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
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 금
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눅 18:12).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
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
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다.
당신의 제자들은...아니하나이까 - 이 질문은 아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으로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
단히 슬퍼하는 중에 있으면서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이란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
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9:15
혼인집 손님들이(* , 호이 휘오이 투 뉨포
노스) - 이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
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
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
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
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
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사 54:5, 6; 62:4, 5; 호 2:16-20),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에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
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
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신랑을 빼앗길 날 -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
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
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
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
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
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
다.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왜 금식하지 않는가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눅
5:36).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 )는 한 번도 세탁
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
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
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
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
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
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번째 예화는 두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
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
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
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
약 이를 어리석게도 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
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
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여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 네
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
고 둘째번의 '새'(* ,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
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
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
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
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16:18; 18:17).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
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
인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
=====9:1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
(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
으로 기록하고 있다(막 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
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
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 , 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
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다(synagogue)에는 몇 사람
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
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막 5:22; 눅 8:41 참조).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
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
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
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
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
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
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셔서...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
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출 29:1-37 강해, '안수에 대하여'
참조).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
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
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 이나 훌륭한 것
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9:19
일어나 따라 가시매 -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
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
도 무릎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 )는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
(* )라는 감탄사가 본절의 앞 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
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
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레 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
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
하였졌던 차에"(막 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
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
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
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런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
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여기서 '겉옷 가'(* , 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술'(tassel)로서,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
(* )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
킨다(민 15:37; 신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민 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술'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9:21
그 겉옷만 만져도 -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에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
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녀가 반드시 실제적으로 접촉을 해야만이 나을 수 있다는, 다소 미신적
인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을 받겠다 -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받는 것이다. 이 여인
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
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 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
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
한 애칭이다.
안심하라(* , 다르세이)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행 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
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왼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주술
적 방법)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
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
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
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 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받았다
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
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막 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
해야 한다.
=====9:23
피리 부는 자들 -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계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
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일지라
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
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
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
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렘 48:36). 그리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그리이
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훤화하는 무리 - 여기서 '훤화하는'(* , 도뤼부메논)이
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
는 점을 암시한다(행 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故
人)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 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흔재(痕在)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9:24
물러가라 -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
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
문이다.
죽은것이 아니라 잔다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
(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
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썬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
고 하셨던 것이다(요 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
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
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
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단 12:2; 요 11:11; 고전 15:6, 18).
저들이 비웃더라 -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불며 곡하기 위
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비
웃더라'(* , 카테겔론)는 말은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한 번의 조
소(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
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
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9: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들었다기 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
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
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붙이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
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막
5:40).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
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
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일어나는지라 -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
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
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
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으
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
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9:26
그 소문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
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
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
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
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
다.
=====9:27
거기서 떠나 가실새 -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후 그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 절(28절)에 언급된 '집'이란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거처가 아니면 다시 마태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소경이 - 복음서에는 소경이 치유함을 받고 눈을 뜨는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요 9장). 그런데 마태복음 후반부(20:29-34)
에 등장하는 소경 치유 기적은 바디메오라는 소경에게 발생한 것으로서 막 10:46-52과
눅 18:35-4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문의 소경 치유 사건과 요한 9장
의 실로암 사건과는 각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팔레스틴 지방에는 동
쪽으로부터의 극심한 모래 바람과 거기에다 지면에 수분이 늘 부족한 관계로 일어나는
석회석의 먼지 등으로 인해 소경 및 안질환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다윗의 자손이여 - 유대인들은 이 말을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1:1 주석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호칭으로 불리워진 것은 이번이 처
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그 때에 소
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이하)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진정 메시야라면 이사야의 예언과도 같이 자기들의 눈을 밝게 해줄 것이라
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두 가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1) 이 당시 유대인
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것이라는 견해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으며(요 7:42),
(2) 예수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윗의 줄기에서 나온 분임을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2:23)라고 하는 점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이 두 소경이 자기들에게는 메시야의 은혜를 입어 구원
함을 받을만한 공적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 표현으로서 우리는 이 말을 통해 그들이 비
록 육신의 눈은 멀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은 메시야를 식별하고 있었으며,
또 이렇기 때문에 이미 하늘의 빛을 어느정도나마 감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9:28
집에 - 이 곳은 마태의 집이거나 아니면 가버나움의 거처 또는 베드로의 집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 두 소경들은 그동안 계속 예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던 것 같
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참된 메시야임을 믿고 끝까지 자비를 구하며 열심
히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아마 이때 예수께서 끈질긴 그들의 호소에도 침묵하고 집
안까지 들어오신 것은 일반인들에게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내가...할 줄을 믿느냐 - 소경들이 더듬거리며 또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지
만 예수께서는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집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인들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억누
르기 위한 조치(措置)이기도 했거니와 소경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특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소
경들에게 자신의 능력, 인격, 권위를 모두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암시적 질문을 하
신 것이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 이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임을
진실로 믿었던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이 같은 소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는 (1)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은혜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과 (2) 이 은혜
를 받아 누리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부르짖음 (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
된 구원에 대한 확고한 인식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9:29
저희 눈을 만지시며 - 이 같은 행동은 병을 치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
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든 행위였던 것 같다(8:3).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치료
는 예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믿음대로(* , 카타 테 피스틴 휘몬)
- 문자적으로 '너희 믿음에 따라' 인데, 소경들의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서'란 의미
보다는 '믿고 바라는 바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8:13).
=====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에 의해 그들이 가장 소망하던 바 눈
이 밝아졌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은 그들이 눈을 뜰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의 분량
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믿고 바라는 바대로 그들에게 눈
을 뜰 수 있도록 허락하신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예수를 영.육의
온전한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인식하는 자에게 그의 도래로 인해 실현된 축복의 약속
(사 35:5, 6)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엄히 경계하시되(* , 에네브리메데 아우토이
스) - 이는 다소 격렬한 감정적 요소가 있는 자에게 대한 경고의 말을 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단 11:30; 막 1:43; 요 11:33, 38).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
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 조국을 독립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릇된 메시야관을 가진 대중들을
부추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메시야 이적을 발설치 못하도록 밝은 세계를 이제 막
봄으로써 환희에 들떠 있던 소경들에게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군중들로부터 메시야 추대(推戴)를 받는 것이 그가 이 땅에 온 진정한 사명을 완수하
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9:31
나가서...전파하니라 -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다(삼상 15:22). 따라서 눈
을 뜬 이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묵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그
들은 아마 이 놀라운 사건을 당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
수를 선전하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발설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지혜란 것은 이렇게
어리석기 마련인 것이다(Calvin).
=====9:32
저희가 나갈 때에 - 이 장면은 앞절과 연결된 것으로 소경을 고치셨던 바로 그 집
에서 막 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귀신 들려 - 성경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중풍병자나 소경 또는 벙어리가 된 사람들
이 자주 등장한다. 즉 사단의 무리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질병이나 불구를
이용하여 침투하고는 교묘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감추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
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사람의 벙어리 병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종종 기록하는 신약
성경의 언급들이 조잡하고 원시적인 미신에 근거한 성경 기자들의 우매성을 드러낸것
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 발병과 귀신에 의한 병증을 구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반증해주는 것이다(막 9:14-29,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벙어리 된 자(* , 코포스) - 이 말의 원어는 '귀머거리'(deaf), '벙어
리'(dumb), '귀 먹고 말 못하는 자'(deaf-mute)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
서 이를 종합해보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귀가 먹어 듣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말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영적
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자들 역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벙어리인 것이다.
=====9:33
귀신이 쫓겨나고 - 벙어리 된 자의 질병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태
어날 때부터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벙어리의 원인이 귀신들린 데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이 사람의 벙어리를 고치신 것이다.
벙어리가 말하거늘 -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벙
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 6)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벙어리가 말하게 된
이적은 메시야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냄과 동시에 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은 일반 백
성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에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의 반
응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부자와 학자들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더 쉽게 하나님
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된다.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 바리새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의 사역과 이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보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9:3, 11, 24) 급기야
여기에 와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 이적에 대해 예수께서 귀신의
왕의 힘을 빌었다고 극단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후의 예수의 가르
침, 그중에서도 특히 10:16-28의 배경이 된다.
귀신의 왕 - 귀신들의 괴수, 곧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서(4:1-11, 사단과 귀신)이는
바알세불을 가리킨 것이다(10:25; 12:24 참조).
빙자하여(* , 엔) - 이는 귀신의 왕을 '통하여' 라는 뜻도 있고 귀신의 왕
'안에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단을 방편삼았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치유했다고 하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낸다 - 이와 같은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사단에게로 돌리는 더
할 나위 없는 악의에 찬 비난이었다. 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대표
자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목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기
와 질투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 신비로운 메시야의 광채를 인정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와같이
악한 사단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비록 이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도의
악한 시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이상 이들보
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하겠다.
=====9:35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이는 예수께서 한 곳에 정체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전도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 싸인 비교적
큰 성읍을, '촌'은 성곽이 없거나 '성'에 영향을 받는 모든 촌락들을 지칭한다. 그런
데 '모든'이란 수식어에는 단지 '성'에만 제한된다. 따라서 예수는 이때 모든 촌을
샅샅이 다니신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두루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태는 잠
시 분위기를 바꾸어 예수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 특
히 35-38절은, 4:23-25이 첫번째 강론(5-7장)을 위한 전제였듯이, 두번째 강론
(10:5-42)의 전제가 된다.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
한 것은 주제별 기사 배열을 자주 사용했던 마태의 기술 방식에 따른 갈릴리 사역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본문은 사도 파송(派送)이라는 새로운 사
건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다.
가르치시며...고치시니라 - 이는 마태가 예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한 것을 돌이켜
보고 난 다음 그것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한 부분이다. 예수는 자기를
환영하는 무리로부터 얼마든지 좋은 안식처와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한 시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계
속하였다.
천국 복음 -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임과 동시에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스리라는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실로 예수 자신은 곧 천국 복음의 실체였으며, 그
분의 메시지는 그 복음의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병과 모든 약한 것 - 그리스도가 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예수는 오직 유익하고 생명을 주는 기적만을 행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
도는 그 당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분의 원래 목적은
이적을 행하는 초능력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
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9:36
민망히 여기시니(* , 에스플랑크니스데) - 이 말은 창
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 )에서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창자
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
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는 말의 뜻
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
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인 것이다.
목자 없는 양 -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주 목자로 비유되어
졌다(겔 34장).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눈에는 이
들이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떼로 보였던 것이다.
고생하며(* , 에크레뤼메노이) - 이 말의 원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로서 극심한 고통이나 걱정, 약탈 또는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정황을 묘사한 것으로(A.T. Robertson) 백성을 올바로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심지어 천국 입성을 방해하곤
했던(23:13)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의 종교 의식이나 교리 등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유리함이라(* , 엘림메노이) - 술에 만취하거나 극심한 고
통으로 인해 곤두박질한 상황을 일컫는다. 이는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의 회복 불가능
한 정도의 절망적 상태를 나타낸다.
=====9:37
추수할 것은 많되 - 이는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뜻이
다. 여기서는 추수가 영혼 구원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13:49) 추수
할 시기 곧 세상 끝과 그때 있을 심판으로 해석된다.
일군은 적으니 - 여기서 일꾼이란 예수 자신, 세례 요한, 예수의 치유 이적을 경험
한 산 증인들 정도의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로 유대 지방에는 수많
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곁에서 방관하는
신사들이었지 직접 나서서 추수하는 일꾼들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백성을
구원하는 참 목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에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다.
=====9:38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 여기서 '청하여'(* , 데에데테)란 공
적 간구라기 보다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간청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인은 예수 그리스
도를 뜻하기도 하나 문맥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실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하늘 일꾼을 보내달라고 친밀히 기도하
는 것이야말로 천국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한편 여
기서 '천국 일꾼'이란 10:1 이하에 제시되는 12제자에 국한시키는 것은 어색하다. 오
히려 12제자에 구애됨 없이 많은 하늘 일꾼들로 보는 것이 좋다.
보내어 주소서(* , 호포스 에크발레) - 이는 강제력이 동원
된 상태로 밀어내 달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급박한 상태에서의 절대적 요청을
나타낸다. 실로 그때나 지금이나 천국 일꾼이 시급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
나님의 섭리에 의해 택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